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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72. 하본기(夏本紀) ㅡ 권력의 정당성이 덕치의 실현 여부에 달려 있다는 사마천의 역사관을 재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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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본기의 두 번째 편 ㅡ「하본기(夏本紀)」

 

서론

《사기》 본기의 두 번째 편인 「하본기(夏本紀)」는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로 일컬어지는 하(夏)나라의 흥망을 기록한다. 앞선 「오제본기」가 선양(禪讓)을 통한 이상적 권력 계승을 그려냈다면, 「하본기」는 그 선양의 전통이 어떻게 끝나고 혈연에 의한 세습 왕조 체제로 전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전환점에 해당한다. 이 편의 중심인물은 치수(治水)의 위업으로 천하를 구한 우(禹)이며, 그의 사적으로부터 시작해 마지막 폭군 걸(桀)에 이르는 왕조 전체의 흥망성쇠가 서술된다.

 

하나라는 갑골문이나 금석문 등 동시대 문자 자료로 직접 입증되지 않아 그 역사적 실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오제본기」와 마찬가지로 여러 문헌과 구전을 종합하여 하나라의 계보와 사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 글에서는 「하본기」에 담긴 우의 치수 사업과 건국 과정, 왕위 세습으로의 전환, 그리고 걸에 이르는 왕조의 쇠퇴와 멸망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사마천이 이 편에서 구현하고자 한 역사적 교훈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론

1. 우(禹)의 치수와 건국의 기초

「하본기」는 요(堯)임금 시대에 발생한 대홍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는 곤(鯀)에게 치수의 임무를 맡겼으나, 곤은 둑을 쌓아 물을 막는 방식으로 9년을 씨름했음에도 끝내 홍수를 다스리지 못했다. 순(舜)이 섭정을 맡은 뒤 곤을 우산(羽山)에서 처형하고, 그 아들인 우에게 다시 치수의 중책을 맡겼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 막는 방식이 아닌 물길을 터서 흐르게 하는 소통의 방식을 택했다.

「하본기」는 우가 치수에 쏟은 헌신을 상세히 기록한다. 그는 13년 동안 각지를 돌아다니며 하천을 정비했는데, 그 사이 자신의 집 앞을 세 번 지나면서도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는 '삼과기문불입(三過其門不入)'의 일화는 후대까지 지극한 공적 헌신의 상징으로 전해진다. 우는 육로는 수레로, 물길은 배로, 진흙땅은 썰매로, 산길은 바닥에 못을 박은 신발로 이동하며 구주(九州)의 산천을 직접 답사하고 물길을 튼 것으로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국의 토양과 산물의 등급을 매겨 공물의 기준을 정하고, 구주의 경계를 확정함으로써 이후 중국 지리 인식의 원형이 되는 구주 체계를 확립했다.

치수 사업의 성공으로 우는 순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순은 하늘에 그를 후계자로 천거했다. 이는 앞선 「오제본기」에서 확립된 선양의 전통을 그대로 잇는 것으로, 우 역시 순이 죽은 뒤 순의 아들 상균(商均)에게 제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천하의 제후들이 상균이 아닌 우에게 귀의함으로써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2. 세습 왕조로의 전환

「하본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우의 사후에 벌어진 권력 계승의 변화다. 우 역시 선왕들의 전통에 따라 현자인 익(益)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우가 죽은 뒤, 제후들은 익이 아니라 우의 아들인 계(啓)에게 조회하러 갔다. 사마천은 이에 대해 "익이 우를 보좌한 기간이 짧아 천하가 그에게 아직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결국 계가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고 기록한다.

 

이 사건은 오제 시대 이래 이어져 온 선양 제도가 사실상 종식되고, 부자 세습에 의한 왕조 체제가 성립하는 결정적 전환점이다. 「하본기」는 이 변화를 특별히 비판하거나 정당화하는 논조 없이 담담하게 서술하지만, 이는 이후 은(殷)·주(周)를 거쳐 진(秦)·한(漢)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세습 왕조 체제의 기원을 밝히는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계의 즉위 이후에도 유호씨(有扈氏)가 이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계가 감(甘)땅에서 이를 정벌함으로써 세습 체제는 무력으로도 뒷받침되었다.

3. 왕조의 계보와 쇠퇴, 그리고 걸(桀)의 폭정

계 이후 하나라는 태강(太康)·중강(仲康)·상(相)·소강(少康)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시기에는 예(羿)와 한착(寒浞)의 찬탈로 왕조가 한때 단절되었다가 소강이 다시 나라를 되찾는 이른바 '소강중흥(少康中興)'의 사적이 전해진다. 이후로도 여러 왕이 대를 이었으나, 「하본기」의 서술은 개별 왕들의 치적보다는 계보의 나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해당 시기에 관한 구체적 사료가 부족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은 폭군으로 이름난 걸(桀)이다. 사마천은 걸에 대해 무력과 용맹은 뛰어났으나 덕을 닦지 않고 백성을 학대했으며, 제후들을 함부로 정벌하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특히 걸이 은나라의 제후였던 탕(湯)을 하대(夏臺)에 가두었다가 풀어주는 일화는 하나라의 권위가 이미 실추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탕은 이윤(伊尹) 등의 보좌를 받아 제후들의 신망을 얻은 끝에 걸을 명조(鳴條)에서 정벌했고, 걸은 도망친 끝에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하나라는 멸망하고 은나라가 그 뒤를 이었다.

 

「하본기」는 이러한 왕조 교체의 과정을 통해 천명(天命)이 덕을 잃은 자로부터 떠나간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앞선 오제 시대의 선양 논리와는 형식이 다르지만, 결국 통치의 정당성이 혈통이 아니라 덕에 근거한다는 근본 원리에서는 궤를 같이한다.

4. 사료적 한계와 사마천의 서술 태도

「하본기」 말미의 태사공왈에서 사마천은 하나라의 우가 사성(姒姓)이며 그 후손들이 여러 갈래로 분봉되어 유호씨·유남씨·짐심씨 등 여러 씨족으로 갈라졌음을 밝힌다. 동시에 그는 공자(孔子)가 하나라의 예(禮)에 대해 논하면서도 그 후예국인 기(杞)나라의 문헌이 부족하여 충분히 고증하기 어렵다고 한탄했던 사실을 인용한다. 이는 사마천 스스로도 하나라에 관한 사료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사마천이 하나라의 역사를 본기의 한 편으로 당당히 편입시킨 것은, 비록 직접적 문자 사료가 부족하더라도 여러 문헌과 전승을 종합하여 신뢰할 수 있는 역사상을 구축하고자 한 그의 역사 서술 원칙을 반영한다. 이러한 태도는 근래의 고고학적 발굴, 특히 얼리터우(二里頭) 문화 유적의 발견과 관련하여 하나라의 실재 여부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종종 재조명되고 있다.

 

결론

「하본기」는 우의 치수라는 위대한 공적 사업으로부터 시작하여, 선양에서 세습으로의 전환, 그리고 걸의 폭정으로 인한 왕조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하나라 470여 년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이 편은 단순한 왕조사의 기록을 넘어, 권력의 정당성이 결국 덕치의 실현 여부에 달려 있다는 사마천의 일관된 역사관을 재확인시켜 준다. 우의 헌신과 걸의 방종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서사 구조는 이후 은본기·주본기에서도 반복되는 흥망의 패턴, 즉 창업 군주의 덕과 말대 군주의 실덕(失德)이 왕조의 성쇠를 가른다는 순환적 역사 인식의 원형을 이룬다.

 

또한 「하본기」는 문자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고사를 다루면서도 사마천이 나름의 사료 비판 의식을 견지하며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오늘날 하나라의 역사적 실재를 둘러싼 고고학적 논쟁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하본기」가 제시하는 우의 치수 정신과 걸의 폭정에 대한 경계는 이후 동아시아 정치사상사에서 거듭 환기되는 교훈으로 자리 잡아 왔다. 결국 「하본기」는 하나라라는 구체적 왕조사의 복원을 넘어, 《사기》 전체를 관통하는 흥망성쇠의 원리를 최초의 세습 왕조를 통해 예증하는 편이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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