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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7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ㅡ 고통을 뚫고 나온 저자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증언하는 최후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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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제70편 :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서론

태사공자서는 『사기』 130편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종편이자, 사마천 자신이 자신의 가문 내력과 저술 동기, 그리고 『사기』 전체의 구성 원리를 스스로 밝힌 자전적 서문이다. 이는 단순한 후기(後記)나 부록이 아니라, 『사기』라는 방대한 역사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참조해야 할 핵심 열쇠와도 같은 문헌이다. 사마천은 이 편에서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사관(史官)의 직책을 세습해 왔음을 밝히고,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 시 남긴 유언, 자신이 겪은 이릉(李陵)의 화로 인한 궁형(宮刑)의 참담한 경험,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저술을 완성해야만 했던 절박한 사명감을 절절히 토로한다.

 

태사공자서가 지니는 사상사적 의의는 실로 막대하다.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역사가가 자신의 저술 동기와 방법론, 그리고 130편에 이르는 전체 편목의 구성 취지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문헌이며, 후대 모든 정사(正史) 편찬의 범례가 되었다. 특히 이 편에는 사마천이 호수(壺遂)와의 대화를 통해 『춘추(春秋)』와 자신의 저술이 지니는 관계를 논한 대목, 그리고 "발분저서(發憤著書)"—곧 마음속에 맺힌 울분을 풀어내기 위해 저술한다는 문학사상사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명제가 담겨 있다. 사마천은 자신을 포함하여 주(周) 문왕(文王), 공자(孔子), 굴원(屈原), 좌구명(左丘明), 손빈(孫臏), 여불위(呂不韋), 한비(韓非) 등 역사상 위대한 저작을 남긴 인물들이 하나같이 곤경과 좌절 속에서 오히려 불후의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열거하며, 자신의 궁형이라는 극한의 치욕조차 저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처절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자기 고백적 서술은 단순한 개인사의 기록을 넘어, 고통과 창작의 관계에 대한 보편적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준다.

 

본론

1. 사마씨 가문의 내력과 사관의 전통

태사공자서는 먼저 사마씨 가문이 아주 먼 옛날부터 천문과 역법을 관장하는 사관의 직책을 대대로 맡아왔음을 서술하는 데서 시작한다. 사마천은 자신의 선조가 전욱(顓頊) 시대에 천지(天地)를 관장하는 남정(南正)과 화정(火正)의 직책을 맡았던 중려(重黎)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밝히며, 주나라에 이르러 사마씨(司馬氏)라는 성을 얻게 된 내력을 소상히 기록한다. 이후 가문은 여러 나라를 거치며 부침을 겪었으나, 진한(秦漢) 교체기를 지나 아버지 사마담에 이르러 다시 태사령(太史令)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가문사의 상세한 서술은 사마천이 자신의 역사 저술을 단순한 개인적 학문 활동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 온 사관의 소명을 계승하는 신성한 책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2. 사마담의 학문과 육가요지(六家要指)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은 태사령으로 있으면서 당시 유행하던 여섯 학파—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의 요지를 논한 「논육가요지(論六家要指)」라는 글을 남겼는데, 태사공자서는 이 글의 전문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사마담은 이 글에서 각 학파의 장단점을 예리하게 분석하되, 결국 도가야말로 다른 여러 학설의 장점을 포괄하면서도 그 폐단을 피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학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한 초기 지식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황로학(黃老學) 존숭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사마천 자신의 사상적 배경이 순수한 유가 일변도가 아니라 제자백가를 폭넓게 아우르는 절충적 성격을 띠었음을 시사한다.

3. 아버지의 유언과 저술의 사명

태사공자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 중 하나는 사마담이 임종을 앞두고 사마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남긴 유언이다. 사마담은 자신이 태사령으로서 마땅히 완수해야 할 역사 저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게 됨을 통탄하며, 아들 사마천에게 반드시 이를 이어받아 완성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그는 주공(周公) 이후 오백 년 만에 공자가 나와 『춘추』를 지었고, 공자 이후 다시 오백 년이 흘렀으니 이제 마땅히 성세(盛世)의 자취를 밝혀 기록할 자가 나와야 할 때라고 역설하며, 이 막중한 사명이 바로 아들에게 있음을 일깨운다. 사마천은 이때 눈물을 흘리며 감히 아버지의 유업을 소홀히 하지 않겠노라 맹세하였다고 기록하니, 이 장면은 『사기』 저술이라는 대사업이 얼마나 깊은 부자간의 정신적 계승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절절하게 증언한다.

4. 사마천의 초년 생활과 천하 유력(遊歷)

태사공자서는 이어 사마천 자신의 젊은 시절 학문 수학 과정과 천하를 두루 유력한 경험을 서술한다. 그는 열 살에 이미 고문(古文)을 암송할 정도로 조숙하였으며, 스무 살이 되던 해에는 남으로 강회(江淮) 지역을 유람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우임금의 동굴을 살폈으며, 구의산(九疑山)을 탐방하고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배로 건넜다. 북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齊)와 노(魯) 지역에서 공자의 유풍을 살피고 향사(鄕射)의 예를 참관하였으며, 파(鄱), 설(薛), 팽성(彭城) 등지를 거쳐 양(梁)과 초(楚)를 지나 돌아왔다. 이러한 광범위한 실지 답사 경험은 후일 『사기』가 단순한 문헌 편찬에 그치지 않고 생생한 현장감과 구체성을 지니게 된 근본 원천이 되었으니, 이는 사마천 사학의 방법론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5. 태사령 취임과 태초력(太初曆) 개정 참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삼 년 후,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이때부터 궁중에 소장된 사관의 기록과 석실금궤(石室金匱)에 보관된 서적들을 두루 열람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사기』 저술의 문헌적 토대를 이루었다. 태사공자서는 또한 사마천이 무제(武帝) 태초(太初) 원년에 당도(唐都), 낙하굉(落下閎) 등과 함께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을 제정하는 사업에 참여하였음을 기록하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문사(文士)가 아니라 천문과 역법에도 정통한 전문 사관으로서의 소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 호수와의 문답 : 『춘추』와 『사기』의 관계

태사공자서 중 사상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사마천과 상대부(上大夫) 호수 사이에 오간 문답이다. 호수는 사마천에게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은 주 왕실이 쇠미해지고 왕도가 무너진 것을 근심하여 시비(是非)를 밝히고 포폄(褒貶)을 가하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성세를 살고 있는 그대가 어찌 스스로를 『춘추』를 지은 공자에 견주려 하는가 하고 힐문한다. 이에 사마천은 공자가 『춘추』를 지은 근본 뜻은 단순히 잘잘못을 따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의(禮義)의 큰 근본을 세우고 인사(人事)의 기강을 밝혀 후대에 경계를 전하고자 함이었다고 반박한다. 그는 『역(易)』, 『서(書)』, 『시(詩)』, 『예(禮)』, 『악(樂)』이 각기 천지음양과 정사, 인정, 절도와 화합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춘추』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여 시비를 분별하는 궁극의 경전이라 설명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는 감히 『춘추』에 견주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인들의 이룩한 사업을 정리하여 논술하고자 함일 뿐 새로운 저작을 지으려는 것이 아니라고 겸손히 답한다. 그러나 이 문답의 이면에는 사마천이 실은 자신의 저술을 공자의 『춘추』에 버금가는 위대한 사업으로 은근히 자부하고 있었음이 행간에 뚜렷이 드러난다.

7. 이릉의 화와 궁형의 치욕

태사공자서에서 가장 처절한 대목은 단연 사마천 자신이 겪은 이릉의 화에 대한 서술이다. 이릉이 흉노와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다투어 그를 성토할 때, 사마천은 홀로 이릉의 평소 지조와 그가 처했던 절박한 전황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고, 마침내 궁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졌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서술하며 자신이 당한 치욕이 얼마나 참담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어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남았는지를 절절히 토로한다. 그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어떤 이는 태산보다 무겁게 여기고 어떤 이는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기니, 이는 오로지 그 죽음을 쓰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구차히 목숨을 부지한 것은 결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다하지 못한 바가 있어 이대로 죽는다면 문채(文采)가 후세에 드러나지 못할 것을 통탄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8. 발분저서(發憤著書)의 문학사상

이러한 개인적 고통의 토로는 곧이어 저 유명한 발분저서론으로 이어진다. 사마천은 주 문왕이 유리(羑里)에 갇혀 『주역』을 부연하였고, 공자는 진채(陳蔡)에서 곤액을 당하고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난 후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은 실명한 후 『국어(國語)』를 남겼으며, 손빈은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서 병법을 논하였고,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되어 『여람(呂覽)』을 세상에 전하였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지었다는 사실을 열거한다. 이 모든 저작이 "대저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그것을 풀어낼 곳이 없었기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자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기를 생각한 것이다(此人皆意有所鬱結, 不得通其道也, 故述往事, 思來者)"라는 사마천의 통찰은, 위대한 저작이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극한의 곤경과 좌절 속에서 잉태된다는 보편적 창작론을 제시한 것으로, 후대 중국 문학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9. 『사기』 130편의 구성과 편찬 원칙

태사공자서의 후반부는 『사기』 전체 130편—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의 구성 체계와 각 편을 저술한 취지를 간략히 요약하여 제시한다. 사마천은 각 편의 서두에서 그 편을 지은 핵심적 이유와 주제 의식을 한두 문장으로 압축하여 밝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기』 전체의 구조와 사마천의 편찬 의도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귀중한 안내 역할을 한다. 그는 이 방대한 저술을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학설을 이루고자 하였다(欲以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는 유명한 명제로 압축하여 표명하니, 이는 『사기』 전체를 관통하는 최고의 저술 목표이자 중국 역사학사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결론

태사공자서는 사마천이 자신의 삶과 사상, 그리고 저술의 전 과정을 스스로 정리한 문헌으로서, 『사기』 130편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열쇠와 같은 존재이다. 이 편을 통해 우리는 사마천의 역사 저술이 단순한 학술적 호기심이나 관료적 직무 수행의 산물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 온 가문의 사명, 아버지의 절절한 유언, 그리고 자신이 겪은 극한의 치욕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처절한 의지가 총체적으로 응결된 결과물이었음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특히 발분저서론은 사마천 개인의 고백을 넘어 인류 보편의 창작 심리에 대한 통찰로 확장되며, 고통과 좌절이야말로 때로는 위대한 정신적 성취의 토양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 진리를 웅변한다. 사마천은 자신을 주 문왕, 공자, 굴원 등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계보에 은근히 위치시킴으로써, 궁형이라는 씻을 수 없는 치욕조차 불후의 저작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었으며, 그 결과 실제로 『사기』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역사 서술의 전범으로 남아 있다.

 

나아가 태사공자서가 『사기』의 최종편으로 배치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니는 구조적 의미 또한 각별하다. 이는 마치 한 편의 거대한 서사시가 마지막에 이르러 그 저자 스스로의 목소리로 전체를 회고하고 매듭짓는 것과 같아서, 독자로 하여금 앞서 읽어온 본기와 세가, 열전의 수많은 인물 군상들이 결국 한 사람의 고독하고도 치열한 정신적 투쟁 속에서 빚어져 나온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태사공자서는 그러므로 단순한 자서전적 부록이 아니라, 『사기』라는 불후의 역사서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저자 자신의 육성이자, 고통을 뚫고 나온 인간 정신의 위대한 승리를 증언하는 최후의 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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