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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주

전통건축-10416. 경주 문무왕수중릉과 이견대 & 문무대왕 해양역사관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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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수중릉과 이견대 ㅡ 용이 된 왕이 지키는 바다

 

1. 동해구, 세 개의 점으로 이어진 이야기

경주에서 동쪽으로 감포 방향의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봉길리 바닷가 200여 미터 앞바다에 낮게 엎드린 바위섬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파도가 잔잔한 날에도 물살이 유독 소용돌이치는 이 바위섬이 바로 대왕암, 즉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그리고 그 바위섬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정자 하나가 서 있으니, 이견대다. 조금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두 개의 삼층석탑이 하늘을 향해 솟은 감은사지가 나온다. 대왕암과 이견대와 감은사, 이 세 유적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되는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느 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그저 바위섬이고, 낡은 정자이고, 주춧돌만 남은 절터일 뿐이지만 셋을 함께 놓고 보면 7세기 신라가 완성한 삼국통일과 그 이후를 지키려 한 한 왕의 서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리라  문무왕의 유언

신라 제30대 왕 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의 맏아들로, 661년부터 681년까지 재위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마침내 당의 세력까지 한반도에서 밀어내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인물이다. 시호에 담긴 문()과 무() 두 글자는 통일 전쟁을 이끈 무공과 더불어 전후의 체제 정비에 힘쓴 그의 치세를 함께 가리킨다. 그러나 오랜 전쟁 끝에 나라를 안정시킨 뒤에도 문무왕의 근심은 끝나지 않았다. 동해를 건너오는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함께 전하는 바에 따르면, 문무왕은 자신이 죽은 뒤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살아서 다하지 못한 호국의 뜻을 죽어서는 용이 되어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뜻에 따라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 곧 대왕암에 장사 지냈다. 이 이야기는 흔히 '문무왕 설화' 혹은 '호국룡 설화'라 불리며, 용신 신앙을 바탕에 둔 호국사상을 핵심 주제로 삼아 경주 일대에 폭넓게 전승되어 왔다. 왕이 스스로 용이 되어 나라와 백성을 지킨다는 발상은 불교적 호국 관념과 토착 용신 신앙이 겹쳐진 결과로 해석되며, 통일 직후 신라 왕실이 마주한 대외적 불안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상징적 의지를 동시에 보여 준다.

 

 

 

 

 

 

3. 바위섬은 어떻게 왕릉이 되었는가  대왕암의 구조와 학술조사

대왕암은 오랫동안 '댕바우' 혹은 '대왕바위'라는 이름으로 어촌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어 왔을 뿐, 근대적 학술조사의 대상이 된 것은 비교적 뒤늦은 일이다. 1964년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이 구성되어 이곳에 대한 본격적인 현지 조사에 나섰다. 조사단은 『삼국사기』 등 문헌 기록과 대조한 결과, 대왕암이 문무왕의 능임이 거의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근거로는 우선 감은사와 이견대 등 문무왕과 직접 관련된 주변 유적들과의 위치 관계가 지목되었고, 다음으로는 바위 자체의 인공적인 흔적이 제시되었다. 암초의 중앙부를 파낸 뒤 육지에서 옮겨 온 거대한 돌을 그 안에 안치하였으며, 중앙에 물이 고이는 못을 이루도록 동서 방향으로 인공 물길을 내었다는 것이다. 이 조사 결과에 따라 대왕암은 1967 7월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다만 대왕암 내부에 실제로 유골함이나 부장품이 온전히 남아 있는 수중릉인지, 아니면 화장한 유골을 뿌린 산골처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신라 당대부터 이곳이 용이 된 문무왕이 머무는 상징적 장소로 여겨져 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사실상 왕릉으로서의 위상을 지녀 왔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바다 한가운데 조성된 왕릉이라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형식이어서, 대왕암은 그 자체로 신라인의 사생관과 해양 인식을 함께 드러내는 독특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4. 신문왕이 마주한 용  이견대와 만파식적 설화

이견대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삼국유사』 권2 기이편의 만파식적조다. 이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은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바다의 용이 되었고, 왕위를 이은 신문왕이 공사를 이어받아 682년에 절을 완성하였다. 신문왕은 금당의 섬돌 아래 동해를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된 부왕이 밀물을 타고 절 안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뒤에 그 용이 실제로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라 불렀다는 것이다.

 

설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느 날 신문왕은 동해에 작은 산 모양의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온다는 보고를 받고 몸소 동해구의 이견대로 나아가 이를 살폈다. 바다 가운데 거북 모양의 섬이 있었고, 그 위에는 낮에는 둘로 나뉘었다가 밤이 되면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왕이 그 까닭을 묻자 용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대나무 역시 합쳐질 때 소리를 낸다고 답하며,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평안해질 것이라 일러 주었다. 왕은 그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내리며 바람과 물결이 잠잠해졌다는 만파식적이다. 신문왕은 이때 용으로부터 옥대(玉帶)도 함께 얻었다고 전하며, 만파식적과 옥대는 훗날 신라의 국보로 다루어졌다.

 

이견대라는 명칭 자체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엇갈린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기쁨을 기려 대를 쌓고 '이견대가'라는 노래까지 지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실제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왕암을 조망하기 위한 전망대로 세워진 건물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다만 '이견대'라는 이름 그 자체는 『주역』 건괘 제1의 구절, 곧 하늘을 나는 용을 보면 크게 이롭다는 뜻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본 신문왕에게 그것이 나라에 큰 이로움을 가져다주었다는 함의를 담은 이름인 셈이다. 현재의 이견대 건물은 옛 건물터가 확인된 자리에 옛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1979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이 자리가 실제 이견대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5. 감은사·이견대·대왕암  하나의 서사로 엮인 세 유적

대왕암, 이견대, 감은사는 지리적으로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감은사에서 이견대까지는 600미터 남짓, 이견대에서는 대왕암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짧은 거리다. 이 근접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세 유적이 애초부터 하나의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해 배치되었음을 시사한다. 감은사가 1959년과 1979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거치며 쌍탑일금당의 가람 배치와 금당 기단을 관통하는 작은 구멍의 흔적까지 확인한 것은, 문헌 속 설화가 상당 부분 실제 건축적 장치로 구현되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용이 된 왕이 바닷물을 타고 절 안까지 드나들도록 설계했다는 기록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 공간 구성의 원리였던 셈이다.

 

이처럼 세 유적을 한데 놓고 보면, 통일 직후 신라 왕실이 마주한 대외적 위협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종교적·정치적 상상력이 하나의 완결된 서사 구조로 짜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은 죽어 용이 되고, 아들은 그 뜻을 이어 절을 짓고, 용이 나타난 자리에는 대를 세워 이를 기린다. 그리고 그 만남의 결과로 나라를 평안케 하는 신물, 만파식적을 얻는다. 유언과 건축과 설화가 순서대로 이어지며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이루는 구조는, 신라인들이 통일 이후의 불안을 얼마나 절실하게 상징의 언어로 다스리려 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6. 오늘의 대왕암  성역화 사업과 남은 과제

 

대왕암은 오랜 세월 무속 신앙의 기도처로도 활용되어 왔다. 지금도 대왕암 맞은편 해변에서는 크고 작은 기도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관행에 대해서는 무속인들 사이에서조차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경주시는 2020 6월 문무대왕릉 일원을 정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후 기본계획 변경과 해안 침식 정비, 주차장 조성 등을 단계적으로 진행해 왔다. 2017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문무대왕릉 성역화 사업'은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총 350억 원 규모로 추진되어 왔으며, 2024년 경역 정비 설계가 마무리되면서 2026년 본격적인 공원 조성 공사에 착수하였다. 사업에는 역사문화공원과 탐방로 조성, 편의시설 확충, 무속 행위를 위한 별도 공간 마련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미 폐교된 대본초등학교 부지를 활용해 문무대왕 해양역사관도 개관하여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이견대를 잇는 하나의 관광 동선을 구축하려는 구상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성역화 사업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단순한 경관 정비를 넘어, 흩어져 있던 세 유적의 이야기를 다시 하나로 이어 붙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대왕암은 여전히 파도 속에 잠겨 있고, 이견대는 여전히 그 바위섬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천삼백여 년 전 한 왕이 남긴 유언과 그 뜻을 지키려 한 아들의 정성이 지금도 동해구의 풍경 속에 남아, 찾는 이로 하여금 통일 신라가 마주했던 불안과 그것을 다스리려 한 상상력의 깊이를 함께 떠올리게 한다.

 

 

 

 

 

 

 

7. 문무대왕 해양역사관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지를 잇는 동해구 답사길 한켠, 경주 감포읍 대본리 옛 대본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문무대왕 해양역사관이 들어섰다. 이 학교는 오랫동안 지역 아이들을 가르치다 문을 닫은 뒤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신라 해양문화를 알리는 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폐교 부지 9089제곱미터에 연면적 약 1700제곱미터, 지상 2층 규모로 조성된 이 역사관은 2015년 기본계획 수립 이후 10여 년의 준비 끝에 2026 3 16일 준공식을 열었고, 전시물과 콘텐츠 보강을 거쳐 같은 해 5 15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총사업비 153억 원이 투입된 이 시설은 2017년부터 추진되어 온 문무대왕릉 일대 성역화 사업의 핵심 거점으로 조성된 것이며, 준공식에는 지역 국회의원과 시장, ·시의원, 주민 등 약 300여 명이 참석해 자리를 함께했다.

 

건물 1층에는 기획전시실과 다목적실, 카페테리아, 기념품숍이 자리하고, 2층에는 문무대왕 역사 전시실과 신라 해양 실크로드 전시실이 마련되어 실감 영상과 체험형 콘텐츠로 관람객을 맞는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동해를 무대로 펼쳐진 신라 해양문화의 역사가 이곳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인다. 경주시는 전시 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국립해양과학관과도 협력해, 개관 초기부터 수준 있는 전시·교육 운영 노하우를 접목하고자 했다. 인근 감포항 일대의 어촌 재생 사업, 동해안 산책로 조성 사업 등과 맞물려, 해양역사관은 단순한 전시 시설을 넘어 동경주 해양관광 권역 전체를 아우르는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경주시는 이 역사관을 통해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이견대로 흩어져 있던 동해안의 유적들을 하나의 관람 동선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청소년해양학교와 같은 체험교육 프로그램도 이곳을 거점 삼아 운영될 예정이다. 바다에 잠긴 왕릉과 용을 지켜본 정자, 그리고 주춧돌만 남은 절터만으로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던 문무대왕의 호국정신과 해양 개척의 서사가, 이제는 실내 전시 공간 안에서도 구체적인 형상을 얻게 된 셈이다.

야외 유적이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는 빈 자리였다면, 해양역사관은 그 빈 자리에 영상과 자료로 살을 붙이는 역할을 맡는다. 답사객은 대왕암 앞바다의 파도 소리를 뒤로하고 이곳에 들러, 화면 속에서 되살아난 문무왕의 유언과 신문왕의 발걸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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