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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주

전통건축-10415. 경주 원성왕릉(괘릉) ㅡ 통일신라 능묘 미술의 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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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성왕릉(괘릉)

 

1. 소나무숲으로 들어가는 길

 

경주에서 울산 방면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외동읍에 이르면, 토함산 자락이 완만하게 들판으로 흘러내리는 지점에 낮은 구릉 하나가 솟아 있다. 구릉을 감싸듯 늘어선 노송의 숲을 지나면,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봉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 능을 괘릉(掛陵)이라 불러왔다. 무열왕릉처럼 비석에 새겨진 이름으로 주인을 확언할 수 있는 능이 아니면서도, 신라 왕릉 가운데 능묘 조각이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어 통일신라 능묘 미술의 정점으로 꼽히는 곳이다.

 

괘릉으로 향하는 길은 다른 신라 왕릉들과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대개의 왕릉이 시가지 한복판이나 마을 어귀에 봉분만 덩그러니 놓인 것과 달리, 괘릉은 소나무숲 진입로부터 이미 하나의 장엄한 의례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에 화표석과 무인상, 문인상, 돌사자가 좌우로 도열하듯 서 있고, 그 사이를 걸어 들어가야 비로소 봉분과 마주하게 되는 구조다. 조선시대 왕릉이 봉분 바로 앞에 석물을 배치한 것과 달리, 괘릉의 석물들은 봉분에서 상당히 떨어진 능역의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어, 참배객이 석물의 대열을 통과하며 점차 왕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공간적 서사를 경험하게 한다. 이는 소나무숲이라는 자연의 장치와 인공의 석조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신라인 특유의 조경 감각이라 할 만하다.

 

계절에 따라 능역의 인상은 사뭇 달라진다. 여름이면 짙은 솔향과 매미 소리가 능역 전체를 감싸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 사이로 스며든 볕이 봉분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관람 시간의 제약도, 관람료도 없이 사시사철 열려 있는 이 능은, 화려한 관광지라기보다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이웃한 숲처럼 조용히 존재해 왔다. 그런 까닭에 처음 이곳을 찾는 이들은 종종 능의 규모보다 먼저 그 고요함에 놀라게 된다.

 

 

 

 

 

 

 

2. 원성왕이라는 인물

괘릉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원성왕(재위 785~798)은 이름을 경신이라 하며,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전해진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780년 혜공왕 16년에 일어난 김지정의 난은 신라 하대 정치사의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반란군이 궁궐을 포위하는 위기 속에서, 당시 상대등이었던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난을 진압하였으나 혜공왕은 이미 목숨을 잃은 뒤였다. 이 공으로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선덕왕이 되었고, 김경신은 곧 상대등에 임명되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였다.

문제는 선덕왕이 후사 없이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불거졌다. 신하들은 처음에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고, 왕위 계승 서열로 보아도 김주원이 상재, 김경신이 이재로 앞선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경신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면서, 김주원은 화를 피해 명주로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은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니, 원성왕의 즉위는 신라 하대 정치를 뒤흔든 사건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즉위 이후 원성왕은 자신의 직계 자손을 요직에 앉혀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손자인 김준옹과 김언승이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시중과 병부령에 임명되는 등 핵심 요직을 장악하였고, 이로써 이후 120여 년에 걸쳐 신라의 왕위가 원성왕의 후손들 사이에서 계승되는 이른바 원성왕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실질적인 개창자로 평가받는다. 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제정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상품, 중품, 하품으로 인재를 나누어 등용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는 궁술로 사람을 뽑던 이전의 관행에서 벗어나 국학의 기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으며, 훗날 학자들은 이를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과거제적 성격을 지닌 제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3. 괘릉이라는 이름의 유래

정작 이 능이 원성왕의 무덤이라는 확증은 능 자체에서 나오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쪽 동곡사에 있으며, 동곡사가 훗날 숭복사로 바뀌었고 최치원이 그 비문을 썼다고 전한다. 오늘날 괘릉에는 비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인근에서 숭복사 터가 확인되었고 최치원의 비문 필사본과 발굴된 비편을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였음이 확증되면서, 자연히 그 서쪽 가까이에 자리한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게 되었다. 다만 무열왕릉이나 흥덕왕릉처럼 능의 주인을 직접 알려주는 유물이 나온 것은 아니어서,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괘릉이라는 이름 자체는 조선시대 이래로 전해 내려온 민간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능을 조성하기 이전 이 자리에는 본래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형태를 굳이 바꾸지 않은 채 왕의 유해를 관에 넣어 수면 위에 걸어놓듯 안장하였다는 속설이다. '걸 괘()' 자를 쓴 것도 이 때문이니, 풀어 말하면 '걸어놓은 능'이라는 뜻이 된다. 실제로 왕릉을 조성하며 연못을 메웠던 사례는 다른 곳에서도 확인되는 만큼, 전설 속에는 토목공사의 실제 기억이 설화의 형태로 응축되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점은 2011년 문화재청이 능의 공식 명칭을 '경주괘릉'에서 '경주 원성왕릉'으로 변경하여 고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구전되어 온 별칭 대신 문헌 고증에 기반한 왕명이 공식 명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인데,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은 여전히 이 능을 괘릉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4. 봉분과 호석, 십이지신상

괘릉은 지름 약 23미터, 높이 약 6미터에 이르는 원형 봉토분이다. 흙으로 둥글게 쌓아 올린 봉분의 가장자리에는 면석과 탱석으로 이루어진 둘레돌을 세워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고, 그 바깥으로는 잘 다듬은 화강석 난간을 둘러 격식을 갖추었다. 이 호석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탱석마다 하나씩 조각된 십이지신상이다. 무장을 갖춘 채 각기 다른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열두 신상은 쥐, , , 토끼로 시작하여 열두 방위를 대표하는 동물의 얼굴을 사람의 몸에 결합한 형상으로, 무덤을 사방에서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능묘의 전체적인 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은 방식은 신라의 독창적 고안으로 평가된다. 중국이나 이후의 조선 왕릉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 표현 방식은, 통일신라가 대륙의 능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봉분 정면에는 서구의 신전 제단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사각의 상석이 놓여 있어, 이곳에서 제의가 치러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십이지신상과 상석의 조합은, 신라 왕릉 조각이 도달한 하나의 완성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미술사적으로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5. 후대 왕릉으로 이어진 전범

괘릉이 지닌 미술사적 가치는 이 능이 이후 조성된 신라 왕릉들의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봉분 둘레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두르고, 능역 입구에 화표석과 문인상, 무인상, 돌사자를 배치하는 구성은 괘릉 이후 흥덕왕릉을 비롯한 여러 신라 하대 왕릉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후대로 갈수록 조각의 기세는 점차 형식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괘릉의 석조물들이 지닌 생동감과 사실성이 얼마나 예외적인 성취였는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훗날 조선시대 왕릉에 이르면 호석의 십이지신상 대신 봉분 앞에 석호와 석양을 세우는 방식으로 수호 개념이 대체되고, 석물들도 봉분 바로 앞으로 이동하여 배치되니, 능역 입구에서부터 석물의 행렬을 두어 참배객을 서서히 왕의 영역으로 이끄는 괘릉 특유의 공간 구성은 조선 왕릉에서는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6. 서역인의 얼굴을 한 무인상

괘릉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역시 능역 입구에 도열한 석조물들이다. 무덤을 알리는 돌기둥인 화표석 한 쌍을 필두로, 문인상과 무인상, 그리고 몸은 정면을 향한 채 고개만 각기 동서남북을 향해 돌린 돌사자 두 쌍이 좌우로 마주 보며 늘어서 있다. 이 열 점의 석조물은 보물 제1427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로 지정되어 있다. 문인상이 관복을 갖춰 입은 단정한 신라인의 풍모를 보여주는 데 비해, 그 옆에 선 무인상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움푹 들어간 깊은 눈, 넓게 벌어진 코, 숱 많은 곱슬 수염을 지닌 무인상의 얼굴은 신라인이라기보다 서역인의 모습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이 석상이 페르시아 계통의 무인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를 거점으로 한 국제 교역망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고, 서역과 중앙아시아를 오가던 상인들이 바닷길과 육로를 통해 신라에까지 들어와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무인상의 모델이 이처럼 무역을 위해 신라를 찾았다가 눌러앉게 된 서역 출신 인물이었으리라는 추정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위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경주 월성 해자에서는 터번을 쓴 서역인의 얼굴을 새긴 5, 6세기의 토우가 출토된 바 있고, 구정동 방형무덤에서도 폴로스틱을 든 서역인 무인상과 사자상이 확인되어, 신라와 서역의 접촉이 결코 우연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한다. 조선시대 왕릉의 무인석이 대체로 정형화된 형식미에 그친 것과 달리, 괘릉의 무인상은 실존 인물을 눈앞에서 관찰하여 새긴 듯한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평가를 받는다. 높이 257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무인상은 부리부리한 눈과 다부진 체구로 위압감을 자아내면서도, 표정 어딘가에는 이국의 낯선 땅에 뿌리내린 자의 복잡한 심정이 스며 있는 듯하여,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7. 통일신라 능묘 미술의 정점

괘릉의 석조물들은 그 조각 수법이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같은 유형의 신라 조각품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능묘 제도의 큰 틀은 당나라와의 문물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으되, 십이지신상의 독창적 배치와 서역인의 얼굴을 한 무인상이라는 이채로운 조합은 통일신라가 국제적 감각과 고유한 미의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음을 웅변한다. 소나무숲을 지나 능역에 들어서서 화표석과 무인상, 문인상, 돌사자의 대열을 마주하고, 다시 십이지신상이 둘러선 봉분 앞에 서면, 8세기 신라가 그려낸 사후 세계의 질서와 그 질서를 지키는 다양한 얼굴의 수호자들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조용한 능이 오늘날까지도 관람 시간의 제약 없이, 관람료조차 받지 않은 채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점이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정쟁 속에서 즉위한 원성왕이 마지막으로 누운 자리는, 역설적으로 신라 능묘 미술이 가장 평온하고 완성된 형태로 남아, 천이백 년이 지난 지금도 소나무숲의 바람 소리와 함께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름조차 전설 속의 물웅덩이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를 이 능이, 정작 신라 능묘 예술사에서는 가장 확고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남기는 기록과 예술이 남기는 기록이 반드시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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