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통건축 갤러리 ■/경 주

전통건축-10412. 경주 성덕왕릉 ㅡ 통일신라 왕릉 제도의 완성을 보여주는 유산 (2026.07.24.)

728x90
반응형
SMALL

 

 

 

 

 



 

 

경주 성덕왕릉, 통일신라 왕릉 제도의 완성을 보여주는 유산

 

1. 신라 전성기를 이끈 왕의 무덤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에 자리한 성덕왕릉은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으로,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28호로 지정됐다. 경주에서 불국사로 향하는 길목, 동남쪽 구릉의 소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방문객들에게는 조용하고 정갈한 인상을 남기는 왕릉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김융기였으며, 당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위 기간은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왕권을 안정시키고 대외 관계를 정비하며 문물을 꽃피우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737년 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는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남아 있어 문헌 기록과 현장 유적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드문 사례로 꼽힌다. 참고로 성덕왕릉 동쪽에는 그의 이복형인 효소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도 자리하고 있어, 이 일대가 통일신라 초기 왕실의 매장 공간으로 조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신라 능묘 제도의 전환점

성덕왕릉이 미술사·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통일신라 왕릉 제도가 완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무덤 아래에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둘레돌(호석)이 정교하게 둘러져 있는데, 둘레돌의 형식이 이 시기에 크게 발전해 능의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그 전방에는 석인을 배치하고 전방 좌측에는 능비를 세우는 구성이 자리 잡았다. 둘레돌은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갑석을 덮었으며, 판석은 탱주로 고정하고 탱주 바깥에는 다시 삼각형 석주를 세워 보강하는 방식으로 축조되어, 이전 시기보다 훨씬 견고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갖췄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십이지신상의 배치 방식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라 왕릉 하면 떠올리는, 호석의 탱석 면에 방위신을 부조로 새기는 방식은 사실 성덕왕릉 이후에 정착된 양식이다.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하는 것 자체는 신라인들의 독창적인 발상이었지만, 성덕왕릉에서는 십이지신상을 따로 조각해 호석 앞에 별도의 상으로 세우는 방식을 취했고, 이것이 이후 탱석에 직접 조각해 넣는 형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즉 성덕왕릉은 십이지신상이 독립된 조각상에서 호석과 일체화된 부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인 셈이다.

 

이러한 별도 배치 방식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해석도 존재한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인 제35대 경덕왕이 754년 성덕왕릉에 능비를 추가로 세우면서 능역을 보강하는 과정에서 십이지신상을 추가로 배설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현재 남아 있는 성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은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채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며 파손이 심한 상태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이 왕릉 주변에서 옮겨온 십이지신상 가운데 비교적 온전한 형태가 전시되어 있는데, 완전한 형태를 갖춘 신상 중 하나는 갑옷을 입은 신신(申神), 즉 원숭이 신이 검으로 땅을 짚고 정면을 응시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수호신으로서의 힘과 권위가 잘 드러난다. 반면 지금도 왕릉 현장에는 얼굴이 남아 있는 유상(酉像, 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이 사라진 십이지신상들이 봉분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후 조성된 경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원성왕릉(괘릉) 등에서도 십이지신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성덕왕릉과 달리 이들 왕릉의 십이지신상은 모두 부조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성덕왕릉이 신라 왕릉 조각 양식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3. 남아 있는 석물들과 조각 양식의 가치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 있고 무덤 주위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배치되어 있으며, 석상 앞 양옆으로는 원래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 한 쌍씩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무인석 한 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 한 개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 오랜 세월 도굴과 훼손의 위협 속에서도 왕릉의 핵심적인 조형 요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원위치를 지키고 있다는 점은, 이 유산이 지닌 학술적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

 

무엇보다 성덕왕릉에서 나타나는 석물들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는 것으로, 이 왕릉이 통일신라시대 왕릉으로서 완비된 형식을 갖춘 대표적 사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이후 조성되는 원성왕릉(괘릉) 등에서 볼 수 있는, 서역인의 얼굴을 한 무인석이나 십이지신상이 탱석에 직접 새겨지는 완성형 양식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참고로 원성왕릉의 조각 수법이 이 계열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것을 감안하면, 성덕왕릉은 그 정점으로 가는 길목에서 양식의 변화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4. 통일신라 왕릉 연구의 살아있는 자료

성덕왕릉은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위엄을 지닌 무덤이다.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고요한 봉분과, 세월의 풍파에 깎여나간 채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십이지신상들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예술적 역량과 더불어, 그 이후 세대가 조상의 무덤을 어떻게 보강하고 완성해 나갔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능묘 제도가 당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십이지신상 배치라는 신라 고유의 창안을 더해 독자적인 왕릉 문화를 완성해 가는 과정, 그 한가운데에 성덕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 왕의 안식처를 넘어, 신라인들이 남긴 조각 예술과 사상 체계가 시대를 거치며 어떻게 정교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성덕왕릉 귀부, 비신을 잃고도 남은 통일신라 조각의 정수

1. 왕릉을 지키던 비석의 마지막 흔적

성덕왕릉 앞에는 한때 웅장한 능비가 세워져 있었다. 돌사자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석비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와 몸체인 비신을 모두 잃고 오직 거대한 귀부만이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문이 새겨졌을 비신이 사라졌다는 것은 성덕왕에 관한 직접적인 문자 기록 하나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해서, 남아 있는 귀부는 그 자체로 아쉬움과 무게감을 함께 지닌 유물이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 귀부는 통일신라 성덕왕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의 받침으로, 비몸과 머릿돌은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받침돌만 남아 있는 상태다.

2. 하나의 돌에 새긴 정교한 조형

귀부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각형의 지대석과 거북 모양의 몸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아쉽게도 거북의 머리 부분은 깨져나가 사라졌지만 몸통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어, 전체적인 조형과 세부 표현을 살피기에는 충분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발가락 표현이다. <cite name="32">앞발가락은 다섯 개, 뒷발가락은 네 개로 각각 다르게 조각되어 있는데,</cite> 이는 단순한 사실 묘사를 넘어 신령스러운 존재로서의 거북을 형상화하려 한 신라 장인의 섬세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거북의 목은 부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앞발과 뒷발에는 발톱까지 세세하게 새겨져 있다.

거북의 등 부분 역시 정교하다. 등에는 나지막한 직사각형의 비좌가 마련되어 있어 비신을 꽂아 세울 수 있도록 했으며, 비좌를 제외한 등껍질 표면에는 육각형 무늬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중앙에는 비몸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뚜렷하게 파여 있어, 원래 이곳에 우뚝 세워졌을 비석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귀갑의 육각 무늬 사이사이로는 덩굴무늬도 함께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등무늬와 덩굴무늬 표현 방식을 근거로 이 귀부는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성덕왕이 737년 세상을 떠난 시점, 혹은 그 직후 능역을 정비하던 시기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연대다.

이러한 세부 표현들을 종합해 볼 때 이 귀부는 전체적으로 조각이 섬세하면서도 힘차서, 성덕왕대를 전후한 시기 신라 조각술의 수준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몸체 하나만 남았음에도 그 조각의 밀도와 생동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3. 잃어버린 비문, 남겨진 조각의 증언

신라의 능묘용 귀부는 성덕왕릉 귀부 외에도 여러 사례가 전한다. 대표적으로 태종무열왕릉의 귀부는 귀부와 이수를 함께 온전히 갖추고 있어, 거북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발을 힘차게 뻗어 전진하는 듯한 역동적인 자세와 명랑한 표정으로 유명하다. 이에 비해 성덕왕릉 귀부는 머리 부분이 소실된 탓에 전체적인 역동성을 온전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몸통과 등무늬의 조각 수법만으로도 통일신라 초·중기 조각 양식의 흐름을 잇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신라 말기로 갈수록 귀부와 이수의 조각 양식이 점차 격동적이고 율동적으로 변모해 가는데, 8세기 전반에 조성된 성덕왕릉 귀부는 바로 그 변화의 초입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덕왕릉은 당나라의 능원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8세기 이후 신라 왕릉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꼽히며, 화표석과 석사자상, 석인상이 순차적으로 배치되는 구조 속에서 능비와 귀부 역시 그 체계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비록 비문을 통해 성덕왕릉의 주인을 문헌적으로 확정할 결정적 근거는 사라졌지만, 주변 정황과 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성덕왕릉은 그 피장자가 반쯤 확실히 밝혀진 왕릉으로 분류된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