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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주

전통건축-10413. 경주 효소왕릉 ㅡ 통일신라 초기 왕릉군의 배치 관계에 대한 종합적 재검토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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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효소왕릉(慶州 孝昭王陵)

 

경주시 조양동, 형제산의 남쪽 산기슭에는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의 능으로 전해지는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이 능은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84호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 '경주 효소왕릉'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왕릉은 신라 왕릉 비정(比定) 문제에 있어 가장 논쟁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통일 직후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제 무덤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이견이 분분하다.

이는 신라 왕릉 연구가 단순히 봉분의 외형이나 규모를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물증, 그리고 조선 후기 이래의 후대 비정 관행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복합적 학문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 효소왕의 생애와 치세

효소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理供)으로, 제31대 신문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목왕후(神穆王后)였다. 692년에 즉위하여 702년에 승하할 때까지 10년간 재위하면서 모든 제도를 정비하고 당나라·일본 등과 수교하였다. 삼국통일 이후 국가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에 왕위에 올랐던 그는, 서시전과 남시전 등 시장을 열어 물품의 유통을 원활히 하는 등 통일신라 경제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이는 문무왕대의 전쟁과 통합의 시기를 지나 신문왕·효소왕대에 이르러 비로소 내치(內治)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된 신라 조정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2. 왕릉의 외형과 구조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효소왕릉은 일대 면적 1만 5,385㎡ 규모이며, 형제산의 남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왕릉 동쪽에는 제33대 성덕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높이 4.3m, 지름 10.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한 둘레석을 돌렸으나 현재는 몇 개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십이지신상이나 화려한 조각 장식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혼령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만이 무덤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소박한 형태는 통일 직후 신라 왕릉 양식이 아직 성덕왕릉이나 이후 흥덕왕릉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호석(護石)과 십이지신상 체계로 발전하기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었음을 시사한다.

 

 

 

 

3. 능 비정을 둘러싼 논쟁

이 왕릉의 가장 큰 학술적 쟁점은 현재의 위치가 실제 효소왕의 능이 맞는가 하는 문제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02년 왕이 죽자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서쪽에 위치한 이 무덤은 망덕사지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약 8㎞나 떨어져 있어 문헌 기록과 실제 위치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 이 때문에 오히려 망덕사지 동쪽에 있는 신문왕릉이야말로 효소왕릉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더 나아가 신문왕릉은 경주 남산의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동쪽으로 약 250m 거리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능의 위치나 둘레돌의 축조 상태로 볼 때 부합한다는 것이 그 근거이며, 특히 둘레돌이 자연석을 다듬은 소형 석재로 바뀌고 갑석과 지대석이 처음으로 갖추어지며 기단식으로 이행하는 단계에 있고, 삼각형에 가까운 구형 버팀석이 처음 출현한다는 양식적 특징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효소왕릉은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비정되었을까. 1730년(영조 6) 김씨 일족이 인접한 성덕왕릉과 형제 능이라는 이유로 이곳을 효소왕릉으로 비정한 이래 오늘날까지 그 전승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신라 왕릉 비정 작업이 상당 부분 후손 문중의 계보 인식과 지리적 인접성이라는 정황적 근거에 의존하여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실제로 신라 하대 이전 초기 왕릉들의 경우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특정 위치로 비정된 경우가 많아, 오늘날 학계에서는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조사 결과 사이의 정합성을 재검토하는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4. 통일신라 초기 왕릉군의 배치 관계에 대한 종합적 재검토가 필요

경주 효소왕릉은 통일신라 초기의 소박한 왕릉 양식을 보여주는 유적임과 동시에, 신라 왕릉 비정 문제가 지니는 근본적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문헌 기록상의 위치와 실제 전승되어 온 능의 위치 사이에 뚜렷한 간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이래 형성된 전승과 관습적 비정이 오늘날까지 공식적인 사적 지정의 근거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유산의 '진정성'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 여부만으로 판단될 수 없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전승과 신앙, 기억의 층위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 문제임을 새삼 일깨워 준다.

 

앞으로 이 왕릉을 둘러싼 논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망덕사지 및 황복사지 인근에 대한 보다 정밀한 고고학적 조사와, 신문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으로 이어지는 통일신라 초기 왕릉군의 배치 관계에 대한 종합적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효소왕이 다스렸던 시대가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비로소 내적 안정을 이루어 가던 전환기였던 것처럼, 그의 능을 둘러싼 오늘날의 학술적 논쟁 역시 신라사 연구가 문헌 중심의 실증사학에서 고고학적 물증을 아우르는 통합적 접근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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