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통건축 갤러리 ■/경 주

전통건축-10411. 경주 선덕여왕릉 — 도리천에 잠든 신라 최초의 여왕 (2027.07.24.)

728x90
반응형
SMALL

 

 

 

 

 

 

 

 

경주 선덕여왕릉 

 

경주 낭산(狼山) 남쪽 봉우리 정상,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자리에 신라 제27대 국왕이자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 있다.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된 이 무덤은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번지에 자리하며, 지정 면적은 1,559㎡다. 본래 명칭은 '신라선덕여왕릉'이었으나 2011년 7월 28일 고시를 통해 '경주 선덕여왕릉'으로 변경되었다. 이 능은 단순한 왕의 무덤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사후 세계를 스스로 설계하고 그것을 후대가 실현한, 신라사에서 가장 독특한 서사를 품은 유적이다.

 

 

 

 

 

 

 

1. 낭산이라는 신성한 공간

 

경주 시내 동남쪽, 누에고치 모양으로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나지막한 구릉이 있다. 해발 100여m 남짓한 이 낮은 산의 이름은 낭산(狼山)이다. 1968년 12월 13일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 고시를 통해 '경주낭산'에서 '경주 낭산 일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높이만 놓고 보면 평범한 야산에 지나지 않지만, 이 산은 신라가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왕실의 신성한 땅으로 여겨져 왔다. 앞서 다룬 선덕여왕릉과 천전리 각석이 각각 하나의 유적이었다면, 낭산은 그 유적들을 품고 있는 '땅' 그 자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낭산 일대에는 이 성역의 격에 걸맞은 유적들이 촘촘히 남아 있다.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조성된 여왕의 능을 비롯해, 신라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지,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다수의 신라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산의 남쪽 끝에 있는 사천왕사터와 망덕사터, 동북쪽에 자리한 황복사터, 서쪽 가운데의 능지탑, 그리고 남쪽 봉우리 아래의 선덕여왕릉이 대표적인 유적으로 꼽힌다.

 

낭산은 하나의 뛰어난 유물이 아니라, 한 사회가 특정한 땅을 신성하게 여겨온 천 년의 관성 그 자체를 보여주는 사적이다. 실성왕이 나무 한 그루조차 베지 말라 명한 5세기의 신유림에서, 불교 왕실의 원찰들이 들어선 7세기의 성지로, 그리고 선덕여왕이 스스로 안식처로 지목한 도리천으로—낭산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지만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땅'이라는 본질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늘날 낮은 소나무 숲 사이로 흩어진 탑재와 귀부, 이름 없는 절터들을 걷다 보면, 이 산이 왜 신라인들에게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으로 여겨졌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2. 무덤의 형태와 규모

선덕여왕릉은 무덤의 지름 23.6m, 높이 6.8m 규모다.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2~3단의 둘레돌을 쌓았으며, 현재의 둘레돌은 1949년에 보수한 것이다. 봉분 앞에 상석이 놓여 있기는 하나 이는 후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통일 이전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석물은 두지 않았다. 통일신라 이후 조성된 왕릉들이 십이지신상이나 무인석 같은 화려한 석조물을 갖춘 것과 비교하면, 선덕여왕릉의 소박함은 오히려 삼국시대 왕릉 양식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3. "나를 도리천에 묻어달라" — 예언과 실현

이 능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덤 조성 이전에 이미 완결되어 있던 이야기 구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죽거든 도리천(忉利天)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는데, 신하들은 도리천이 하늘 위에 있는 산인 줄로만 알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왕은 도리천이 다름 아닌 낭산의 산정이라고 스스로 알려주었다고 전한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신하들은 실제로 낭산 양지에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문무왕 19년(679),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가 건립되었다. 불경에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절이 세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선덕여왕이 남긴 말의 신령하고 성스러운 뜻을 신라 사람들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왕의 무덤이 '사천왕이 사는 하늘' 바로 위, 즉 도리천의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사후에 증명된 셈이다. 일연은 이 일화 말미에서, 왕이 스스로 죽을 날을 예언했을 뿐 아니라 훗날 그 자리에 사천왕사가 세워질 것까지 내다본 것이니 참으로 신령스러운 능력이라 평했다.

 

이 이야기는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설화의 일부로 전해진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 권1 「기이편」에 실려 있으며,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려 그 이면에 숨은 뜻을 파악했다는 내용으로, 왕의 지혜와 위기 대처 능력을 칭송하는 맥락에서 서술되었다. 같은 이야기가 『삼국사절요』, 『해동잡록』 등에도 전하는데, 이들 모두 출처를 「수이전」으로 기록하고 있어 흔히 그 일문으로 분류된다. 첨성대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이 설화의 말미에 함께 덧붙여져, 선덕여왕의 예지 능력을 한층 더 부각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4. 여왕의 시대 — 문화와 위기의 공존

선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德曼)이며, 제26대 진평왕의 맏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쳤고, 분황사를 창건했으며, 특히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썼다. 김유신·김춘추 등의 보필을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분황사에는 당에서 귀국해 신라 승려들의 계율을 정비한 자장율사가 주석했고, 원효 또한 이곳에서 『금강삼매경론』 등을 저술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본래 9층 석탑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으며,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1층 몸돌 네 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여왕의 치세는 화려한 불사(佛事)만큼이나 고단한 시대이기도 했다. 641년 백제 의자왕의 맹공으로 낙동강 서안의 모든 지역을 상실하는 등, 대야성을 포함해 최소 44개에서 최대 52개에 이르는 성을 잃고도 단 한 곳도 되찾지 못하는 전례 없는 위기에 봉착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에 비용을 쏟아부었고, 각 층마다 신라가 정복할 대상국의 이름을 붙였다. 여왕 통치라는 정치적 취약성을 종교적·상징적 권위로 보완하려 한 것으로, 여왕은 통치의 허약성을 극복하고 외침을 방어할 수 있다는 예언적 신념을 백성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분황사를 창건했다는 평가도 있다. 즉위 직후에는 홀아비·과부·고아·무의탁 노인 등 스스로 살아가기 어려운 이들을 위문하고 구제하는 정책도 폈다.

 

 

 

 

 

 

5. 나를 도리천에 묻어달라

선덕여왕릉은 화려한 부장품이나 웅장한 석물로 기억되는 무덤이 아니다. 그 진짜 의미는 죽음을 앞둔 왕이 스스로 남긴 한마디의 말—"나를 도리천에 묻어달라"—이 3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사천왕사의 건립으로 실현되었다는, 예언과 사후 증명의 서사 구조에 있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으면서도 전례 없는 군사적 위기를 견뎌야 했던 여왕의 시대는, 낭산이라는 작은 산 하나에 무덤과 사찰, 왕실의 원찰이 겹겹이 들어서는 방식으로 그 기억을 남겼다.

 

소박한 원형 봉토분 앞에 서면, 첨성대와 분황사를 세운 여왕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안식처가 왜 하필 이 자리였는지를 곱씹게 된다.

 

 

 

 

 

 

고두반 : 054 - 748 - 7489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