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포 이견대(利見臺)
1. 이견대의 창건
이견대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제31대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실린 감은사 사중기(寺中記)의 기록이 이견대 창건의 전말을 전한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다 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해인 682년에 공사를 마쳤고,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으니 용이 된 문무왕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
즉 이견대는 건물보다 사건이 먼저였다. 신문왕이 이 언덕에서 동해 용을 실제로 만난 뒤, 그 만남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대(臺)를 세운 것이다. 건물을 짓고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경험이 깃든 땅에 사후적으로 이름과 건축을 부여한 셈이다.








2. 만파식적 설화 : 이견대에서 일어난 일
이견대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만파식적 설화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극적이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대왕암에 장사지낸 뒤,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동해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신문왕이 일관에게 점을 치게 하니, 일관은 "돌아가신 문무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수호하고 있으며, 김유신도 33천의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보배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견대로 행차했다. 그 뒤 신문왕은 동해의 용으로부터 검은 옥대를 선사받았고, 용의 계시대로 섬 위에 솟아 있던 대나무를 베어다 만파식적이라는 신비한 피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말 그대로 만 개의 파도를 가라앉히는 피리였다.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멈추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정치적 불안이나 국난이 진정되고 태평성대가 오기를 염원하는 피리이며, 훌륭한 통치를 비유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통일 직후 신라 사회는 아직 불안정했다. 삼국 유민의 통합, 대당 외교의 안정, 귀족 세력의 견제 등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만파식적은 그 모든 파란(波瀾)을 잠재울 왕권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神物)이었다. 이견대는 그 신물이 탄생한 장소다.




3. 이견대의 위치의 오랜 논란
이견대는 그 역사적 의미만큼이나 위치를 둘러싼 논란도 길었다.
1969년 한국 문화재관리국은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번지에서 이견대의 옛 터를 찾아냈고, 그 앞의 바다에 떠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의 해중릉임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 발굴조사 때 건물지가 확인되어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1979년에 지금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런데 당시 발굴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황수영 박사가 2002년 스스로 문제를 제기했다. 황수영 박사는 "『삼국유사』 등 문헌에 이견대는 축성(築成)의 자취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의 위치는 축성의 흔적이 없고, 이곳에서 가까운 대본초등학교 뒷산에 축성의 흔적이 있는 것을 1995년에 발견했다"고 밝혔다. 한눈에 동해구가 조망되는 데다가 서쪽으로 감은사로 통하는 옛길의 존재도 짐작된다고 했다.
황수영은 자신의 비정이 틀렸음을 시인하며, 알려진 이견대 자리는 신라 시대의 이견대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였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이견대가 조선 시대에 세워진 여관의 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견대는 그 위치를 찾지 못하다가 1970년 건물지를 확인하여 다시 복원하여 건물을 세웠다. 오늘날 복원된 이견대 건물의 위치가 신라 원래의 이견대 자리인지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정밀한 재조사가 학계의 과제로 제기되어 있지만, 현재까지 추가적인 발굴 결과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4. 이견대와 조선, 그리고 고려의 기억
이견대는 신라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이 장소는 살아있었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홍양호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견대는 조선 후기에도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용이 된 문무왕은 신라를 지키는 것과 동시에 용으로서 구름과 비를 통제하는 능력까지 부여받은 것이다. 이를 통해 문무왕의 호국 이미지는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조에는 이견대가 경주부 동쪽 50리 해안에 있었다고 적혀 있으며, 이견대 아래로 70보 거리의 바다에 네 귀퉁이가 마치 네 개의 문이 우뚝 솟은 모양과 같은 돌이 신라 시대에 문무왕을 장사지낸 곳이며 당시까지도 사람들이 대왕암이라 부르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 초까지도 대왕암과 이견대에 대한 기억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5. 오늘의 이견대 : 풍경과 유적 사이
오늘날 이견대는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번지에 자리한다. 문무대왕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은 정자로, 1967년 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신라 당대의 것이 아니라 1970년 발굴로 건물지를 확인한 후 안압지 등에서 확인한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해서 197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견대에 올라 감포 앞바다를 내려다보면 청량한 바람 한 줄기와 함께 봉길 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로 문무대왕릉이 눈앞에 보인다.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이 하나의 선 위에 놓이는 풍경이다. 대종천 하구를 따라 바다로 나가면 대왕암이 파도 속에 잠겨 있고, 그 장면이 고스란히 이견대 위에서 펼쳐진다.
이견대는 감은사지의 명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찾는 이가 많지 않다. 그러나 어쩌면 그 고요함이 이 유적의 본래 성격에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신문왕이 홀로 또는 소수의 신하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아버지를 그리고 용을 기다렸을 언덕. 거대한 역사의 서사가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움의 형식으로 남아 있는 곳.






6. 대왕암 · 감은사 · 이견대 : 삼각형의 완성
이견대의 의미는 단독으로는 반만 읽힌다. 대왕암, 감은사, 이견대 세 곳을 함께 볼 때 비로소 완전한 그림이 드러난다.
문무왕은 대왕암에 잠들어 용이 되었다. 감은사는 그 용이 뭍으로 올라와 쉬는 처소였다. 이견대는 살아있는 왕이 죽은 왕을 알현하는 장소였다. 죽음과 삶이, 바다와 육지가, 부자(父子)가, 그리고 인간과 신성이 만나는 세 점이 삼각형을 이루며 통일신라 호국 신앙의 공간 체계를 완성한다.
세 곳을 잇는 것은 거리가 아니라 이야기다. 파도 소리와 함께 천삼백 년을 이어온 그 이야기가, 지금도 감포 앞바다의 바람 속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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