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Gyeongju Geumunsa East and West Pagodas)
1. 전설과 역사
경주 감은사지는 통일신라시대 가장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삼국통일 후 동해로 빈번하게 쳐들어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려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이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즉위 이듬해인 682년(신문왕 2년)에 완공하였다.
절 이름인 '감은사(感恩寺)'는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문무왕이 바다의 용(해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중앙 건물인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해 바다를 향한 구멍을 두어, 사후 해룡이 되어 머물도록 하였다고 한다.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발굴조사에서 금당 아래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 유구가 조사되었으며, 이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된다.







2. 가람의 배치
감은사지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강당·금당·중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금당 앞에는 동·서쪽에 두 탑을 대칭적으로 세웠음을 밝혔다. 이 건물들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은사지는 옛 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석탑으로 조성된 쌍탑 가람으로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 불교건축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데, 이후 건립된 사천왕사 배치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주 감은사지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이며 금당과 양측 동서 회랑 사이로 익랑을 두어, 이후 건립된 사천왕사 배치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는 문무왕 사후 해룡이 되어 외적을 막고자 바다에 조성된 대왕암과 물줄기가 연결되는 곳이라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이 배수구를 통해 감은사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신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다.





3. 건축적 특성
1) 삼층석탑의 규모와 특징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은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높이는 13.4m로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 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두 탑은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며,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다. 두 탑은 조립한 방식이나 사용된 석재의 수는 같지만, 동탑이 서탑에 비해 부재들이 조금씩 크다.
2) 조립식 구조의 독창성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 석탑의 가장 큰 혁신으로,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다.
구체적으로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다듬어 12장의 석재로 구성하였으며 갑석 또한 12장이다. 기단 양쪽에 우주(모서리 기둥)가 있고 탱주(버팀 기둥)이 3주씩 있다. 상층기단 면석 역시 12장에 갑석은 8장으로 구성되었으며 2주의 탱주가 있다.
3) 목조건축 양식의 모방
이 석탑은 상하 기단과 탑신부의 각면에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낙수면이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전각에서 추녀가 위로 들려지는 등 목조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수평을 이루고 있는 추녀 밑 부분과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 등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식)을 모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석탑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으로 정립되었다.
탑신부의 1층 옥신(몸돌)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 몸돌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조각한 판석 4장으로, 3층 몸돌은 1석으로 구성하였다. 두 탑 모두 3층만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여러 돌을 짜 맞춘 방식이다.
돌과 돌을 고정하기 위해 쇠로 만든 은장(나비 모양의 나무쪽)을 곳곳에 사용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과 함께 장식의 중심을 뚫어 세운 쇠기둥인 찰주가 남아 있다.
4) 호국사상의 건축적 표현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금동 사리기(보물 제366-1호)와 금동 사리외함(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이후 1996년에 진행된 동탑의 해체, 수리 때에도 3층 탑신에서 서탑과 비슷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으며, 2002년 보물 제1359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을 정립했다고 평가받으며,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다.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호국사상의 상징으로서,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위엄과 동해안 방어사상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특출한 작품이다
감은사지는 언제 절이 무너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 유적은 통일신라 불교건축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문무왕의 호국발원이 구현된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









4. 감은사와 문무왕 수중릉인 대왕암의 지리적 연관성
● 지리적 위치와 거리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과 감은사지는 동해안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대왕암은 동해안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길이 20m의 바위섬으로, 바다 속에 있는 수중릉이다. 감은사지는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 자락에 건설되었으며, 대왕암과 감은사지는 차로 5분 이내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koya-culture]
● 지리적 연관성의 상징적 의미
1. 문무왕의 호국 발원과 직접적인 연결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 자락에 감은사를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blog.naver]
이는 문무왕이 생전에 자신의 장사터(대왕암)와 호국사찰(감은사)의 지리적 위치를 직접 설계했다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감은사는 동해 바닷가인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바로 문무왕의 호국발명과 직결된 것이다.[blog.naver]
2. 배수시설을 통한 물리적 연결
감은사지 금당(법당) 마루 밑에는 동해를 향한 배수통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통로는 동쪽에서 바닷물이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으며,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닷물을 타고 감은사 금당까지 들어오게 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발굴조사에서 금당 아래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 유구가 조사되었으며, 이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된다. 금당의 지하 배수시설은 대왕암을 향하고 있으며, 대왕암의 배수는 감은사를 향한다.[youtube][digital.khs.go]
3. 이견대의 중간적 위치
이견대(利見臺)는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감은사지와 대왕암 사이 중간 위치에 있다.[wiki.onul]
이견대는 문무대왕릉에서 몇백미터 떨어진 대종천과 동해바다가 만나는 장소에 위치하며, 용이 된 문무왕이 나타나 신문왕에게 만파식적을 줬다는 설화의 현장이다.[popyihy.tistory]
● 건축적·지리적 설계의 일체성
감은사의 건축적 설계는 대왕암과 지리적으로 일체성을 이루고 있다:
- 금당의 방향성: 금당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된 문무왕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 방향이 정확히 대왕암을 향한다.[kydong77.tistory][youtube]
- 배수구조의 상호연결: 대왕암은 동서방향의 수로가 배수를 고려하여 서쪽의 높이가 동쪽보다 15cm 낮게 형성되어 바닷물이 항상 흘러들어오며, 이 배수가 감은사를 향한다.[adtimes.co][youtube]
- 상징적 공간 구성:
- 대왕암: 호국룡이 된 문무왕의 처소[youtube]
- 감은사지: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드는 호국사찰[koya-culture]
- 이견대: 용이 나타났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중간 관찰지[wiki.onul]
이러한 공간 구성은 문무왕의 호국발원이 건축적으로·지리적으로 완전히 구현된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youtube]
결론적으로, 대왕암과 감은사지는 지리적으로 1.5km 이내의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며, 문무왕 생전에 직접 설계된 호국시스템의 핵심 요소로서 건축적·지리적·상징적으로 완전히 일체성을 이루고 있다.[kydong77.tistory][youtube]










*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밝혀진 내부 구조
1. 해체 보수 시기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두 차례의 해체 보수를 통해 내부 구조가 밝혀졌습니다.
| 첫 번째 해체 | 1959년 12월 [blog.naver] | - |
| 두 번째 해체 | - | 1996년 [wssjmm.tistory] |
| 사리장엄구 발견 | 3층 탑신 사리공에서 [blog.naver] | 3층 지붕돌 상면 사리공에서 [wssjmm.tistory] |
2. 조립식 구조의 확인
1) 수십 개의 부분 석재로 조립된 독창적 구조
해체 보수를 통해 밝혀진 가장 중요한 내부 구조는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이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라 석탑의 가장 큰 혁신으로 평가됩니다.[blog.naver]
2) 기단부의 상세 구조
| 하층기단 |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다듬어 12장의 석재로 구성, 갑석 또한 12장 | 기단 양쪽에 우주(모서리 기둥)가 있고 탱주(버팀 기둥)가 3주씩 [blog.naver] |
| 상층기단 | 면석 12장, 갑석 8장으로 구성 | 2주의 탱주가 세워져 있음 [blog.naver] |
3) 탑신부의 내부 구성
| 1층 옥신 |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음 | 따로 세운 방식 [blog.naver] |
| 2층 몸돌 | 각면이 한 돌, 각면에 우주를 하나씩 조각한 판석 4장 | 판석 4장으로 구성 [blog.naver] |
| 3층 몸돌 | 전체가 한 돌로 구성 | 1석으로 되어 있음 [blog.naver] |
즉, 3층만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여러 돌을 짜 맞춘 방식입니다.[digital.khs.go]
3. 사리장엄구의 발견
1)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1959년)
1959년 12월 서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 사리공에서 창건 당시에 넣어 둔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었습니다.[m.khs.go]
2) 사리장엄구의 구조
| 외함 | 청동제사각함, 사방 벽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 좌우에는 귀신의 얼굴 모양을 새기고 고리 달려 [blog.naver] |
| 내함 | 청동으로 만든 정사각형 기단과 사리병을 모셔 둔 몸체, 수정 보주 3부분으로 구성 [blog.naver] |
| 사리병 | 다리가 달린 화염보주형 청동호 안에 안치, 은제 투조 뚜껑 [m.khs.go] |
| 부속품 | 사리를 집을 때 사용한 작은 숟가락 및 집게 함께 발견 [m.khs.go] |
외함의 사방 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사천왕상의 주변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좌우에는 귀신의 얼굴 모양을 새기고 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사리기의 기단에는 안상을 새기고 신장상 및 공양보살상을 배치하였으며, 기단의 맨 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중앙에 안치된 사리병을 중심으로 4구 주악상을 배치했고, 그 사이마다 4개 동자상을 따로 끼워 놓았습니다.[blog.naver]
3)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1996년)
1996년 동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 지붕돌의 상면 사리공에서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서탑과 비슷한 사리장엄구였습니다. 이후 2000년에 보물 제1359호로 지정되었습니다.[wssjmm.tistory]
4. 상륜부의 구조
1) 노반석과 찰주
3층 지붕돌 위부터 시작되는 탑의 상륜부에는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었으나, 현재 약 3.9m높이의 쇠로 된 찰주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습니다.[blog.naver]
2) 찰주의 상징성
찰주(쇠기둥)는 탑의 중심을 뚫어 세운 것으로, 대왕암의 배수가 감은사를 향하는 것과 같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youtube][digital.khs.go]
5. 고정 방식의 특징
돌과 돌을 고정하기 위해 쇠로 만든 은장(나비 모양의 나무쪽)을 곳곳에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여러 개의 석재를 조립식으로 세울 때 안정적인 고정 방식을 제공했습니다.[digital.khs.go]
6. 보존과학처리
탑신을 해체할 때 드러난 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3년에 걸쳐 보존과학처리를 하고 나서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2000)이 발간되었습니다.[blog.naver]
7. 내부 구조의 역사적 의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해체 보수로 밝혀진 내부 구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습니다:
- 신라 석탑의 혁신: 조립식 구조는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으로 정립되었습니다[digital.khs.go]
- 사리장엄구의 가치: 오랜 세월에 많이 부식되어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각 부분에 나타난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m.khs.go]
- 창건 당시의 상태: 1960년 및 1996년 해체 보수 시 창건 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습니다[ko.wikipedia]
- 목조건축 양식의 모방: 우주와 탱주 모각, 낙수면 경사, 추녀 위로 들려짐 등 목조건축양식을 보여줍니다[blog.naver]
이러한 내부 구조는 통일신라시대 호국사상의 상징으로서,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위엄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걸출한 작품임을 확인시켜 줍니다.[digital.khs.go]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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