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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주

전통건축-10415. 경주 경덕왕릉 ㅡ 통일신라의 절정과 쇠퇴의 경계에 서 있는 능묘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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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경덕왕릉 (慶州 景德王陵)

 

1. 능의 현황과 위치

 

경주 경덕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8번지 일원에 자리한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의 능묘로,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면적은 32,132㎡에 이른다. 외형은 지름 약 22m, 높이 약 6m의 원형봉토분으로, 경주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벗어난 내남면의 낮은 구릉지에 홀로 자리 잡고 있어 왕경 중심부의 화려한 능원들과는 사뭇 다른 소박한 인상을 준다.

능의 조영 방식부터 남다른 점이 있다. 구릉 경사면의 흙을 편평하게 깎아 축조한 뒤 그 위에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는 평지에 봉분을 쌓던 이전 시기와 달리 자연 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8세기 중후반 신라 왕릉 조영 기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2. 호석과 십이지신상의 구조

 

경덕왕릉의 핵심적인 조형적 특징은 봉분 하부를 둘러싼 호석(護石) 체계에 있다. 둘레돌은 목조건축물의 석조 기단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어, 가장 아래에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높이 89㎝, 너비 120㎝의 면석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면석 사이사이에는 뿌리가 봉분 안쪽으로 길게 뻗어 면석과 흙더미를 지탱하는 탱석이 세워졌는데, 탱석의 앞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이 탱석에 새겨진 조각이 바로 신라 왕릉 특유의 십이지신상이다. 탱석 두 칸을 건너 하나씩 무인복을 입고 무기를 든 십이지신상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이전의 선덕여왕릉이나 김유신 장군묘와 마찬가지로, 이 십이지신상은 능묘를 열두 방위의 수호신으로 에워싸는 신라 후기 왕릉 조영의 정형화된 도상 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진덕여왕릉의 십이지신상이 다른 왕릉에 비해 크기가 작고 조각이 얕아 신라 왕릉 십이지신상 가운데서도 늦은 시기의 것으로 평가받는 것과 비교하면, 경덕왕릉의 조각은 8세기 중반 신라 조각 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의 산물로서 한층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3. 능의 이장 기록 — 두 사료의 어긋남

경덕왕릉에서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사료마다 매장지에 대한 기록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경덕왕조에는 "모지사 서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 반면, 『삼국유사』 왕력에는 "처음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으나 뒤에 양장골 가운데로 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정사(正史)·유사(遺事)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는 현재의 능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한 차례 이장을 거쳤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오늘날까지도 현 능지가 실제 경덕왕의 원래 매장지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성덕왕릉을 비롯한 여러 통일신라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피장자 비정 문제의 불확실성과도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4. 경덕왕의 치세 — 전성기의 그늘

 

능묘 자체의 조형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운 것이 경덕왕이라는 인물이 놓인 역사적 위치다. 그의 시대는 흔히 신라 전성기의 마지막 시대이자 쇠망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대로 평가되며, 황금기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훗날 조선의 정조와 비슷한 위치에 놓인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아버지 성덕왕이 이룩한 전제왕권의 절정기를 이어받은 경덕왕은, 국호와 관제를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통해 왕권 강화를 시도했다.

 

불교문화 면에서는 그의 치세가 신라 예술의 정점을 이루었다. 석굴암의 축조를 비롯하여 불국사·굴불사 등을 창건하였으며 각 사찰의 수축과 탑·불상의 제작에 힘써 불교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불국사의 경우 진골귀족으로서 경덕왕대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김대성이 자신과 일족의 사재를 들여 창건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불사(佛事)가 왕실과 진골 귀족 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국가적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었음을 보여준다. 불국사는 23년간 지어졌으나 김대성이 죽을 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해 그의 사후 왕실에서 완성시켰는데, 이는 그의 불국사 조영이 개인의 추복보다는 중대(中代) 왕권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성덕대왕신종 역시 경덕왕 대에 건립이 시작되었으나 계속 실패를 거듭하다가 그의 아들 혜공왕 때인 771년에야 완성되었으며, 전제 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성덕왕을 기리는 종의 주조는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균열의 조짐이 뚜렷했다. 그가 녹읍을 부활시켜 귀족 세력에 대한 견제에 실패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반박설도 다수 제기되어 재고의 여지가 있다. 녹읍 부활을 단순히 왕권의 패배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군제 개편 등 다른 정책들과 함께 통치 전략의 일환으로 재해석해야 할 것인지는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다. 실제로 그가 단행한 전면적인 군제 개편은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에게 밀리던 신라의 방어력을 뒷받침하여 서라벌의 함락을 무려 7년이나 늦추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있어, 그의 치세를 단선적인 쇠퇴의 시작으로만 읽어내기는 어렵다.

 

 

 

 

 

 

5. 소박한 능묘가 증언하는 절정과 균열

경덕왕릉은 화려한 불국사나 석굴암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형식도 단출하다. 그러나 두 칸마다 하나씩 배치된 무장(武裝)의 십이지신상은, 왕이 죽어서도 열두 방위의 수호신에게 에워싸여야 한다는 신라 후기 왕권 관념의 정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관념의 이면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불교문화의 절정을 이룩하면서도 녹읍 부활과 귀족 세력의 발호라는 정치적 균열을 함께 안고 있던 한 시대의 초상이 겹쳐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서로 다른 매장지를 전하는 사료상의 균열조차, 어쩌면 신라 중대(中代)에서 하대(下代)로 넘어가는 전환기 자체가 지닌 불확실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덕왕릉은 그러한 절정과 쇠퇴의 경계에 조용히 서 있는 능묘라 할 수 있다.

 

 

 

 



 

 

 

 

* 신라 능묘의 발달과 변천사

서론

경주 벌판에 흩어진 수많은 고분은 그 자체로 신라 천년의 역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료다. 경주의 신라고분은 신라 최고 지배자의 칭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다시 왕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묘제도 함께 변화하였는데, 이는 무덤의 형식이 단순한 매장 관습의 변화가 아니라 왕권의 성격과 국가 체제의 성숙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지표였음을 말해준다.

사로국 시기의 소박한 덧널무덤에서 시작하여 황남대총과 같은 거대한 적석목곽분의 절정기를 거치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십이지신상이라는 독자적 조형 체계를 완성해낸 통일신라 왕릉에 이르기까지, 신라 능묘의 변천 과정은 곧 신라라는 국가가 걸어온 정치적·종교적·문화적 궤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경덕왕릉이나 진덕여왕릉, 선덕여왕릉 등 개별 능묘가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각기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 능묘 제도 전체의 발달사를 통시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본론

1. 초기 묘제 — 덧널무덤에서 적석목곽분으로

신라 묘제의 출발점은 사로국이 국가 체제를 갖추어가던 시기의 덧널무덤(목곽묘)이다. 신라식 덧널무덤은 덧널 위에 야트막한 봉토를 쌓은 형태로, 사로국이 신라국가로 탈바꿈하는 시기의 것에 해당한다. 이 소박한 형식은 이후 국가의 성장과 함께 극적인 변모를 겪는데, 4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은 금관과 금제 허리띠 등 각종 금제품을 다량 부장한 경주 시내 평지의 대형분들로, 마립간기 신라 왕권의 급격한 성장을 물질적으로 증언한다.

 

돌무지 덧널 무덤은 적석목곽분·목곽적석총·적석봉토분이라고도 불리며 규모가 거대하여 고총이라 불리기도 하는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이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매장 주체 시설이 구덩식 덧널이라는 점과 그 위에 돌무지와 봉토를 덮는다는 이중 구조에 있다. 이러한 신라의 돌무지 덧널 무덤이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구별되는 결정적 지점은 바로 봉토의 존재이며, 외형상으로는 원형의 홑무덤을 기본으로 하되 합장의 의도에 따라 두 개 이상의 원분을 연결한 표형분·쌍원분 형태도 다수 확인된다. 이 유형은 지상식·반지하식·지하식으로 세분되지만 대부분이 지하식이며, 추가장이 불가능한 홑무덤이라는 점이 뚜렷한 특색이다. 무엇보다 적석목곽분은 구조적 특성상 도굴이 극히 어려워, 경주 시가지 주변에 분포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의 무덤들이 대부분 도굴된 적이 없어 부장품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황남대총과 천마총에서 쏟아져 나온 금관과 유리제품들이 이를 실증한다. 다만 이 시기 왕릉 가운데 피장자를 확정할 수 있는 사례는 극히 드물어,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을 두고도 내물왕설·실성왕설·눌지왕설이 여전히 병존하는 형편이며, 이는 신라 왕릉 연구 전반에 걸쳐 되풀이되는 근본적 난제이기도 하다.

2. 전환기 — 굴식돌방무덤의 도입과 불교의 영향

6세기 이후 신라 묘제는 근본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서악동고분군은 경주분지의 돌무지덧널무덤을 벗어나 최초로 정착한 고분군으로 추측되며, 내부 매장주체 시설도 초기의 돌방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새로운 형식, 즉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은 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굴식으로 드나들 수 있는 돌방을 조성한 구조로, 그 계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한(東漢)시대 중국의 돌방무덤이 고구려의 압록강·대동강·한강 유역을 거쳐 남하하여 경주에 정착한 것으로 파악된다.

 

굴식돌방무덤이 적석목곽분을 대체하게 된 데에는 구조적 필요성도 있었다. 돌방무덤은 입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나들 수 있어 추가장이 가능했으며, 이는 부부 합장 등 매장 관습의 변화와 맞물려 채택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르며 이 형식도 점차 정교해져 충효동돌방무덤군에서는 분구가 작아지고 내부 돌방의 면적도 좁아지며 평면이 방형을 이루고 천정은 궁륭상의 돔식으로 바뀌었으며, 굴식 통로도 한층 길어져 당나라 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종교적 변화 또한 묘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불교의 보급으로 화장이 유행하였고, 왕릉 가운데도 화장돌방무덤이 상당수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불교적 세계관이 왕실의 상장례(喪葬禮)에까지 깊숙이 침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 통일신라 왕릉의 정형화 — 호석과 십이지신상 체계의 완성

삼국통일 이후 신라 왕릉은 입지와 형식 양면에서 결정적 변화를 겪는다. 신라 고분문화 후기가 되면 왕릉들의 입지도 시내 평지에 밀집 분포하던 전기와 달리 산지로 옮겨가 개별적으로 독립 배치되는데, 이는 달라진 왕권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왕경 중심부에 서로 인접해 조영되던 마립간기 왕릉들과 달리, 통일신라 왕릉이 각기 외따로 떨어진 구릉이나 산기슭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왕이 살아있는 진골 귀족 집단과 구별되는 초월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려 한 통치 이념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왕릉의 표준적 외형도 확립되었다. 왕릉의 특징은 분구가 작아지고 분구자락에 병풍석이 돌려지며, 그 위에 십이지신상을 양각하고, 능 앞에는 상석·석인상·석수상 등과 비석이 설치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경덕왕릉·진덕여왕릉·선덕여왕릉 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지대석-면석-탱석의 호석 구조 및 무장한 십이지신상 조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8세기를 전후하여 신라 왕릉의 표준 형식이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십이지신상 체계는 당나라 능묘 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신라가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조형 어법이었다. 원성왕릉(괘릉)에 대한 평가에서도 능묘 제도 자체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한 것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으로 분명히 지적되며, 십이지신상을 장식하거나 봉분 둘레에 난간석과 돌담을 두르는 장식들이 신라 고유의 요소로 꼽히는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4. 절정과 쇠퇴 — 괘릉에서 흥덕왕릉으로

통일신라 왕릉 제도가 도달한 최고의 완성도는 제38대 원성왕의 능, 이른바 괘릉에서 확인된다. 봉분과 돌사자·문인석·무인석·화표석 등 석조물로 이루어진 이 능은, 무인석이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국제적 교류의 흔적을 뚜렷이 담고 있다. 무인상은 앞으로 칼을 짚고 갑옷을 외투 안쪽에 입었으며 뒤쪽에는 계산 용도의 산낭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찼는데, 흥덕왕릉에도 비교적 밋밋하지만 유사하게 서역인 형상의 무인석상이 확인된다. 이 문·무인상들은 통일신라시대 절정기의 사실적 조각으로 평가받는 성덕대왕릉 석인상을 계승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었으며, 흥덕대왕릉의 석상들보다도 앞선 생동감과 역동적 사실성을 나타내는 대표작으로 신라 조각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능역의 공간 구성에서도 신라적 독자성과 대륙적 영향이 공존했다. 원성왕릉 입구에는 남쪽에서부터 화표석·무인석·문인석 각 한 쌍과 돌사자 네 마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후대 조선시대 왕릉이 석물을 봉분 바로 앞에 두는 것과 달리 괘릉의 석물은 봉분에서 떨어진 능역 입구에 위치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처럼 절정에 달했던 능묘 제도는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괘릉보다 이전 시대의 왕릉은 봉분 자체는 거대하되 능원 구성이 간략한 편이었고, 괘릉 이후 시대는 왕권이 약화되며 다시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과 왕권 약화가 능묘의 규모와 정교함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결론

신라 능묘의 변천사는 결국 왕권의 형성과 절정, 그리고 쇠퇴라는 국가사의 큰 흐름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사로국 시기 소박한 덧널무덤은 마립간기 적석목곽분의 압도적 규모로 팽창하며 신라 왕권의 급속한 성장을 증언했고, 통일 전후 도입된 굴식돌방무덤과 불교적 화장 풍습은 사상적 전환을 반영했으며, 통일신라기에 완성된 호석-십이지신상 체계는 당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신라만의 독자적 조형 언어로 재창조해낸 성숙한 문화적 자신감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괘릉의 서역인 무인상에서 정점에 달했던 이 예술적 완성도가 흥덕왕릉 이후 다시 단순해져 간 과정은, 곧 신라 하대 왕권의 쇠락을 돌 위에 새겨놓은 침묵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경주 벌판에 점점이 흩어진 능묘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읽어나가는 일은, 문헌 사료가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신라 천년의 흥망을 흙과 돌이라는 물질을 통해 되짚어보는 또 하나의 역사 독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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