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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60. 급정열전(汲鄭列傳) ㅡ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적인 도리와 의리를 앞세운 삶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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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제 60편 ㅡ 급정열전(汲鄭列傳)

 

서론

 

『사기』 열전 59편인 급정열전(汲鄭列傳)은 한무제(漢武帝) 시대의 두 강직한 신하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의 사적을 함께 엮은 편이다. 사마천이 이 두 인물을 하나의 열전으로 묶은 것은 이들이 각기 다른 개성과 처세를 지녔음에도 공통적으로 청렴하고 의로우며, 권세와 재물에 아부하지 않고 빈객을 아끼며 인재를 천거하는 데 힘썼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급암은 황로(黃老)의 무위(無爲) 사상을 신봉하여 대신답게 대체(大體)를 지키고 시비를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 강직함이 지나쳐 한무제 앞에서조차 거리낌 없이 직간하다가 결국 중용되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나는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정당시 역시 의리를 중시하고 빈객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이름났으나 만년에는 재물의 궁핍함을 면치 못하였다. 사마천은 이 열전 말미에 붙인 논평을 통해 권세가 있을 때는 빈객이 몰려들고 권세가 사라지면 문전이 썰렁해지는 세태의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통렬하게 비판하였으니, 이는 이 열전이 단순한 인물전을 넘어 한대 관료 사회의 인심세태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론

급암은 자가 장유(長孺)로 복양(濮陽) 사람이며, 대대로 경(卿)과 대부(大夫)의 벼슬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는 성품이 엄격하고 절개가 굳세며 예를 좋아하되 남에게 굽히지 않았고, 특히 황로의 학설을 좋아하여 관리로서도 청정(淸淨)한 다스림을 숭상하였다. 경제(景帝) 때 태자세마(太子洗馬)로 있다가 무제 즉위 후 하남(河南)의 수해를 시찰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급암은 현지의 참상을 보고 황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한 뒤 돌아와 그 죄를 청하였다. 무제는 그의 현명함을 인정하여 죄를 묻지 않았다.

 

이후 급암은 중대부(中大夫)를 거쳐 동해태수(東海太守)로 나갔는데, 그곳에서도 아랫사람에게 실무를 맡기고 자신은 큰 줄기만을 다스리는 무위의 정치를 펼쳐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무제가 이를 듣고 그를 불러들여 구경(九卿)의 하나인 주작도위(主爵都尉)에 임명하였다. 조정에서 급암은 늘 대신의 예로써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데, 무제가 유생들을 불러 인의(仁義)를 논하는 자리에서 급암은 폐하께서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를 베푸는 척한다고 면전에서 직언하여 무제를 크게 노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제는 물러난 뒤 좌우에 급암의 우직함이 이와 같다고 인정하였으니, 이는 급암의 강직함이 결국 무제로부터도 일정한 경외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급암은 대장군 위청(衛靑)을 대할 때도 읍(揖)만 할 뿐 절을 하지 않았고, 승상 공손홍(公孫弘)의 이면적인 술수를 겉으로 충후한 척한다고 직접 비판하는 등, 권세가 앞에서도 몸을 낮추지 않는 강직함을 시종 견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품 탓에 그는 끝내 구경의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회양태수(淮陽太守)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당시는 자가 장(莊)으로 진(陳) 땅 사람이며, 젊어서부터 의협심이 강하여 곤란에 처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빈객을 대접함에 있어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공경하였으며, 특히 자신이 알고 지내는 천하의 인재들을 끊임없이 조정에 천거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가 태사(太史)의 자리에 있을 때는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 혹시라도 마당 문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늘 노심초사하였다고 전한다. 정당시 역시 급암과 마찬가지로 황로의 학설을 좋아하였으며, 벼슬이 구경에 이르렀으나 청렴하여 집안에 재물을 모으지 않았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빈객으로 인한 빚을 갚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관직에서도 다른 사건에 연좌되어 여러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결국 벼슬 없이 가난하게 생을 마쳤다.

 

결론

사마천은 이 열전의 말미에서 급암과 정당시 두 사람의 사적을 마무리하며, 그들이 한때 구경의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빈객이 문전에 넘쳐났으나 벼슬을 잃자 그 많던 빈객들이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는 사실을 특기하며 깊은 탄식을 남겼다. 사마천은 이를 통해 급암과 정당시처럼 어질고 의로운 인물조차 세력을 잃으면 이러한 염량세태를 피할 수 없거늘,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하며 당시 관료 사회와 인심의 각박함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급암의 강직한 직언과 정당시의 후덕한 빈객 접대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적인 도리와 의리를 앞세운 삶의 태도였다는 점에서 상통하며, 이는 순리열전에서 다룬 인물들의 정신과도 맥을 같이한다. 급정열전은 단순히 두 충신의 사적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권세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세태 인심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깊은 감회와 비판 의식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편으로서, 『사기』 열전 전체에서도 사가(史家)의 개인적 목소리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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