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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56.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ㅡ 서역 교통로 개척이라는 실리적 동기로 점진적으로 한 제국으로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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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56편 ㅡ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서론

『사기』 열전 55편인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은 오늘날의 쓰촨(四川) 서남부와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일대에 흩어져 있던 여러 이민족 부락들, 즉 서남이(西南夷)에 대한 한 왕조의 경략(經略) 과정을 다룬 편이다. 앞서 다룬 남월, 동월, 조선열전이 각기 독립된 왕국 체제를 갖춘 정권을 대상으로 한 데 비해, 서남이열전이 다루는 대상은 야랑(夜郞), 전(滇), 공(邛), 작(筰), 염(冉), 방(駹), 사(斯), 유(楡) 등 크고 작은 부락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어 통일된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 각기 우두머리를 세우고 흩어져 살던 이민족 사회였다는 점에서 성격을 달리한다.

사마천은 이 편에서 진(秦)이 일찍이 이 지역에 길을 열고 관리를 두었으나 진의 멸망과 함께 그 통제가 느슨해진 상황에서, 한이 처음에는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다가 남월 정벌과 서역(西域) 통로 개척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통해 점차 이 지역을 군현으로 편입시켜 나가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이는 한 제국의 서남방 개척사이자, 동시에 장건(張騫)의 서역 사행(使行)이 뜻밖에도 서남이 경략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흥미로운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본론

서남이 지역의 부락들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것은 야랑과 전이었다. 야랑은 지금의 구이저우 서부에 자리하여 스스로 강대한 세력이라 자부하였고, 전 역시 윈난 일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찍이 초(楚)나라 위왕(威王) 때 장수 장교(莊蹻)를 보내 이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는데, 장교는 전 지역까지 이르러 그곳을 평정한 뒤 돌아가려 하였으나 마침 진(秦)이 초의 파촉(巴蜀) 및 검중(黔中) 지역을 공격하여 귀로가 끊기자 부득이 그 무리와 함께 전에 눌러앉아 스스로 전왕(滇王)이 되었다고 전한다. 진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상알(常頞)을 시켜 오척도(五尺道)라는 좁은 길을 개통하고 이들 지역에 관리를 두었으나, 진이 멸망하자 이러한 통제는 곧 유명무실해졌다.

 

한이 건국된 뒤에는 이 지역과의 관계를 끊고 촉(蜀)의 옛 경계를 그대로 국경으로 삼았을 뿐, 별다른 경략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무제 건원(建元) 연간에 파촉의 상인 당몽(唐蒙)이 남월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촉 지역의 특산물인 구장(枸醬)이 야랑을 거쳐 남월까지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몽은 이를 통해 야랑으로 통하는 길이 존재하며 이 길을 이용하면 은밀히 군대를 남월의 배후로 보낼 수 있으리라는 전략적 판단을 하여 한무제에게 이를 건의하였다. 한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당몽을 사신으로 보내 야랑후(夜郞侯) 다동(多同)을 회유하게 하였고, 다동은 한의 후한 예물에 이끌려 신하로 복속할 것을 약속하였다. 한은 이 지역에 건위군(犍爲郡)을 설치하고 촉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길을 뚫는 대공사에 착수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문학가 사마상여(司馬相如) 역시 서이(西夷)의 공(邛)과 작(筰) 지역에도 개통 가능성이 있음을 아뢰어, 한은 이 지역에도 도위(都尉)를 두고 열 개 남짓한 현을 설치하여 촉군(蜀郡)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는 파촉 백성들에게 막대한 부역의 부담을 지웠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길이 뚫리지 않은 채 사졸들만 기아와 풍토병으로 죽어나가자 서남이 지역의 여러 부락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한은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였으나 재정 소모가 막대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마침 남월과의 관계가 안정되자 한무제는 서남이 경략을 잠시 중단하고 그 도위만을 남겨 관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후 장건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그곳에서 촉의 베와 공(邛)의 대나무 지팡이가 유통되고 있음을 목격하고, 이는 필시 촉에서 서남쪽의 신독(身毒, 인도)을 거쳐 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고하였다. 한무제는 이를 통해 서역으로 통하는 새로운 교통로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 여겨 서남이 경략을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왕연우(王然于) 등을 보내 전왕(滇王)에게 길을 물었다. 전왕은 한의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며 한과 자신의 나라 중 어느 쪽이 더 큰지를 묻는 등 스스로의 세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었으나, 결국 신독으로 가는 길은 곤명(昆明) 부락의 방해로 끝내 뚫리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한무제는 남월 정벌에 서남이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고자 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하였고, 마침내 원봉 연간에 이르러 저항하던 부락들을 평정하고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전왕이 스스로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한무제는 그에게 여전히 전왕의 왕호를 하사하여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으니, 이는 서남이 지역 전체가 마침내 한의 군현 체제 안으로 편입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결론

서남이열전은 통일된 국가 체제조차 갖추지 못했던 서남방 여러 부락들이 상인의 우연한 정보 제공과 서역 교통로 개척이라는 실리적 동기에 이끌려 점진적으로 한 제국의 판도 안으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당몽의 구장 일화와 장건의 촉포(蜀布) 목격담은 사마천이 거대한 역사적 전환이 때로는 지극히 우연하고 사소한 발견에서 비롯됨을 예리하게 포착한 대목으로, 역사 서술의 묘미를 잘 보여준다.

아울러 전왕이 한의 사신에게 자국과 한의 크기를 견주어 물었다는 일화는, 중원의 관점에서는 보잘것없는 변방의 소국조차 스스로는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는 인식의 간극을 통렬하게 드러내는 명장면으로 후대에 회자되었다. 서남이열전은 남월, 동월, 조선열전과 함께 한무제 시기 사방으로 뻗어나간 팽창 정책의 한 축을 이루는 동시에, 정복이 반드시 군사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역로와 정보,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친 경략의 축적을 통해서도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료로서 값진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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