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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53. 남월열전(南越列傳) : 중원과 이민족 사이의 관계를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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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제 53편 ㅡ 남월열전(南越列傳) 

 

서론

 

사마천의 『사기』 열전 가운데 남월열전(南越列傳)은 중원의 변방, 오늘날의 광둥(廣東)과 광시(廣西), 베트남 북부에 걸쳐 존재했던 남월국(南越國)의 흥망을 다룬 편이다. 남월은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뒤 남쪽 변경에 설치한 군현이 진의 멸망과 함께 독자적인 왕국으로 전화(轉化)한 특이한 사례로, 중원 왕조의 힘이 미치지 못하던 시기에 한족 출신 관리가 이민족의 땅에서 스스로 왕을 칭하며 독립 왕조를 세운 역사적 전형을 보여준다. 그 개창자인 조타(趙佗)는 원래 진나라의 하급 관리에 불과했으나, 진의 붕괴와 초한(楚漢)의 혼란을 틈타 남해(南海) 지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남월무왕(南越武王)을 칭하였다.

이후 한(漢)이 천하를 재통일하자 조타는 한때 신하로 칭하며 조공하다가도 상황에 따라 다시 황제를 자칭하는 등, 중원 왕조와의 관계에서 실리적이고 유연한 처세를 보였다. 사마천이 이 편을 열전에 편입시킨 것은 단순히 변방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목적을 넘어, 한 제국의 통일 질서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주변 이민족 정권이 어떻게 흡수되고 소멸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론

조타는 본래 하북(河北) 진정(眞定) 출신으로, 진시황이 남방을 정벌할 때 남해군(南海郡)의 용천현령(龍川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진이 이세황제(二世皇帝) 대에 이르러 급격히 쇠퇴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당시 남해군위(南海郡尉)였던 임효(任囂)는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조타를 불러 후사를 부탁하였다. 임효는 중원이 대란에 빠졌음을 지적하며, 남해군이 산과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녔음을 강조하고, 조타에게 군사를 동원해 요충지를 봉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것을 권하였다. 임효가 죽은 뒤 조타는 그 유언에 따라 격문을 돌려 진나라가 임명한 관리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심복으로 대체하였으며, 마침내 계림(桂林)과 상군(象郡)까지 병합하여 스스로 남월무왕(南越武王)이라 칭하였다.

 

한고조(漢高祖)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뒤, 중원이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남월을 무력으로 정벌하기보다 회유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이에 육가(陸賈)를 사신으로 보내 조타를 남월왕(南越王)에 봉하고 부절(符節)을 나누어 통교(通交)하게 하였다. 육가가 남월에 이르렀을 때 조타는 오랑캐의 방식대로 다리를 뻗고 앉아 그를 맞이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으나, 육가는 조타가 본디 중원 출신임을 상기시키며 중원의 강대함과 한 황실의 위엄을 논리적으로 설파하였다. 이에 조타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예의를 갖추어 신하로서 한에 복속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여후(呂后) 집권기에 이르러 한이 남월과의 철기(鐵器) 및 농기구 무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자, 조타는 이를 장사왕(長沙王)의 참소로 여기고 격분하여 스스로 남월무제(南越武帝)를 칭하고 장사국의 변경을 공격하는 등 한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여후가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 하였으나 남방의 풍토병으로 인해 군사가 전진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한문제(漢文帝)가 즉위한 뒤에는 다시 회유책으로 전환하여 조타의 고향에 있는 조씨 종족의 무덤을 수리하고 그 형제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내렸으며, 다시 육가를 파견해 화친을 도모하였다. 이에 조타는 마침내 황제 칭호를 버리고 다시 신하로서 한에 조공하였으니, 이는 표면적으로는 복속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남월 내부에서 여전히 황제의 예를 사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유지한 것이었다. 조타가 죽은 뒤 그 손자 조호(趙胡), 증손 조영제(趙嬰齊)를 거치며 남월은 한과 조공-책봉 관계를 이어갔으나, 조영제의 아들 조흥(趙興) 대에 이르러 내부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다. 특히 조흥의 모후이자 한족 출신인 태후가 한에 내속(內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남월의 승상 여가(呂嘉)를 비롯한 토착 세력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여가는 한에 복속하는 것이 곧 남월 고유의 독립성을 상실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과 태후, 그리고 한나라 사신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한무제(漢武帝)는 대군을 파견하여 남월을 정벌하였고, 마침내 원정 4년(기원전 111년) 남월은 멸망하여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결론

남월열전은 진한(秦漢) 교체기라는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한 지방관이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고, 이후 중원 통일 왕조와의 관계 속에서 신하와 황제라는 두 지위 사이를 오가며 생존을 도모한 파란만장한 역사를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조타라는 인물은 힘의 우위를 냉철하게 판단하여 때로는 굴복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실용적 처세술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강대한 중원과 변방 세력 사이에 존재했던 미묘한 역학 관계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조타 이후의 후계자들에 이르러서는 한족 혈통의 왕실과 토착 세력 간의 내부 균열이 심화되었고, 결국 이 균열이 외부의 개입을 불러들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마천은 이 열전을 통해 변방 정권이 아무리 오랜 기간 독자성을 유지하더라도 결국은 천하 통일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암시하는 한편, 여가의 저항에서 보이듯 독립을 지키려는 토착 세력의 의지 역시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이러한 균형 잡힌 서술 태도는 남월열전을 단순한 변방사(邊方史)의 기록을 넘어, 중원과 이민족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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