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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4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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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열전 제 49편 ㅡ「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서론

『사기(史記)』 열전 제49편은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으로, 한 문제(文帝)·경제(景帝)·무제(武帝) 삼대에 걸쳐 흉노와의 전선에서 평생을 바친 명장 이광(李廣)의 생애를 다룬 편이다. 이 열전은 『사기』 전체 백삼십 편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애송되고 후대에 문학적으로 재생산된 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당(唐)의 시인들이 이광의 고사를 소재로 수많은 변새시(邊塞詩)를 지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열전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동아시아 문학사 전체에 깊은 영향을 남긴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광은 활쏘기에 신묘한 재주를 지녔고 병사들을 아끼는 어진 장수로서 병사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으나, 정작 평생을 두고 봉후(封侯)의 영예를 얻지 못한 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이 열전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인품을 지녔음에도 불운하게 마감한 한 인간의 일생을 그려내며, 능력과 보상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세상의 부조리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 이는 궁형(宮刑)의 치욕을 겪으며 『사기』를 완성해야 했던 사마천 자신의 처지와도 은밀히 공명하는 지점이 있어, 이 열전이 지닌 정서적 밀도는 다른 어떤 열전보다도 짙다고 할 수 있다.

 

이광의 일생은 문제 시기 흉노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시작되어, 경제 시기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진압에 참여하고, 무제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흉노 정벌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의 무공은 늘 인정받으면서도 정작 논공행상에서는 소외되기 일쑤였고, 말년에는 대장군 위청(衛靑)의 흉노 원정에 참여했다가 길을 잃은 죄로 문책을 당하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이 서론에 이어 본론에서는 이광의 가문과 초기 무용담, 흉노와의 여러 전투에서 보여준 활약과 인간적 면모, 논공행상에서의 소외와 그 원인에 대한 사마천의 성찰, 그리고 마지막 원정에서의 비극적 죽음과 그 파장을 순서대로 상세히 살펴보고, 결론에서는 이 열전이 지닌 문학적·사학적 의의를 정리한다.

 

본론

이광은 농서(隴西) 성기(成紀) 출신으로, 대대로 활쏘기에 능한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진(秦)나라의 명장 이신(李信)으로, 연(燕)나라 태자 단(丹)을 추격하여 사로잡은 공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 이광 역시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익혀 그 재주가 남달랐는데, 문제 14년 흉노가 소관(蕭關)을 침입했을 때 양가(良家)의 자제로서 종군하여 활쏘기와 용맹으로 적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워 중랑(中郞)에 임명되었다. 이때 문제는 이광의 무용을 직접 보고 감탄하며 "만약 그대가 고조(高祖)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라며 그 재능을 아까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는 이광의 뛰어난 자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시대를 잘못 만나 그 재능에 걸맞은 보상을 받지 못하는 비운의 인물상을 열전의 첫머리에서부터 암시하는 복선의 구실을 한다.

 

경제 시기에 이르러 이광은 농서도위(隴西都尉)를 거쳐 기랑장(騎郞將)에 임명되었고,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태위 주아부(周亞夫)를 따라 종군하여 창읍(昌邑) 아래에서 적의 깃발을 빼앗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그는 조정의 허락 없이 양효왕(梁孝王)이 내린 장군의 인수(印綬)를 사사로이 받았다가 이 일로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겪게 되는데, 사마천은 이 사건을 통해 이광이 정치적 처신에는 그다지 능하지 못한 인물이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이후 그는 상곡(上谷)·상군(上郡)·농서·북지(北地)·안문(雁門)·운중(雲中) 등 흉노와 접경한 변경 지역의 태수를 두루 역임하며 흉노와의 전투를 이어갔는데,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흉노가 감히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그 명성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이광의 인간적 면모를 그리는 데 특히 공을 들인다. 이광은 청렴하여 상으로 받은 재물을 그때그때 부하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고, 사십여 년간 봉록을 받으면서도 집안에 남는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행군 중에는 물과 식량이 부족하면 병사들이 먼저 마시고 먹기 전까지는 자신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병사들에게는 관대하고 너그러워 군령을 번거롭게 세우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이끄는 병사들은 진영을 마음대로 풀고 자유롭게 지내면서도 오히려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사마천은 이러한 이광의 통솔 방식을 정불식(程不識)이라는 다른 장수의 엄격한 군율 통치와 대비시켜 서술하는데, 정불식의 군대는 부서와 행오(行伍)를 엄정히 하여 적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으나 병사들은 그 번거로움을 고달파하였던 반면, 이광의 군대는 병사들이 매우 편안해하며 즐거이 그를 따랐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사마천은 엄격한 법제만이 능사가 아니라 인간적 신뢰와 관용 역시 훌륭한 통솔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을 은연중에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이광의 무용을 보여주는 일화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그가 사냥을 나갔다가 어둠 속에서 풀숲의 바위를 호랑이로 착각하여 활을 쏘았는데, 화살촉이 바위 속 깊숙이 박혔다는 이야기이다. 나중에 그것이 바위임을 알고 다시 쏘아보았으나 두 번 다시 화살이 박히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정신을 집중한 극한의 상태에서 발휘되는 초인적인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서 후대에까지 널리 회자되며 무수한 시문의 소재가 되었다. 또한 이광이 소수의 기병 백여 명을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가 흉노의 수천 대군과 마주쳤을 때의 일화도 그의 담대함을 잘 보여준다. 부하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려 하자 이광은 오히려 "우리가 지금 도망친다면 흉노가 뒤쫓아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나, 우리가 태연히 있으면 흉노는 우리를 유인병으로 여겨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판단하여, 도리어 흉노 진영 가까이 다가가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고 병사들을 눕혀 쉬게 하였다. 이에 흉노는 과연 매복이 있을 것이라 의심하여 끝내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는데, 이 일화는 이광의 담대한 심리전과 임기응변의 재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무용과 인품에도 불구하고 이광은 평생 봉후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다른 장수들, 심지어 그의 부하나 사병(士兵)이었던 이들조차 흉노 정벌의 공으로 후(侯)에 봉해지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광만은 유독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무제 시기 대규모 흉노 정벌이 시작된 이후에도 이광은 여러 차례 종군하였으나 번번이 공을 세우지 못하거나, 혹은 병력의 열세 속에서 분전하다가 오히려 패군의 책임을 지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특히 원삭(元朔) 6년의 원정에서는 위청이 이끄는 본대와 어긋나 홀로 흉노의 대군에 포위되었다가,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죽은 척하며 흉노의 어린 병사가 타고 있던 말을 빼앗아 극적으로 탈출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분전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그의 공과 과를 서로 상쇄시켜 포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병력을 잃은 죄를 물어 처벌하려 하자 이광은 재물을 바쳐 속죄하고 서인의 신분으로 물러나야 했다.

 

사마천은 이에 대해 이광 스스로 관상가 왕삭(王朔)에게 그 까닭을 물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이광이 "내가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칠십여 차례나 치렀거늘 어찌하여 끝내 봉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인가. 혹시 내 관상이 후에 봉해질 상이 아닌 것인가, 아니면 본디 그러한 운명을 타고나지 못한 것인가"라고 묻자, 왕삭은 오히려 "장군 스스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었는지 돌이켜 보라"고 되묻는다. 이에 이광은 일찍이 농서태수로 있을 때 강(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하자, 이미 항복한 자들 팔백여 명을 속여 하루 만에 모두 죽인 일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왕삭은 이를 두고 "화(禍)로는 이미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장군이 봉후에 오르지 못하는 까닭이다"라고 답한다. 이 일화는 사마천이 이광의 불운을 단순히 시대의 운이나 조정의 불공정으로만 돌리지 않고, 그 자신의 행적에도 일말의 원인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균형 잡힌 서술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인과응보라는 도덕적 관념이 사마천의 역사 서술 저변에 깔려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광 생애의 마지막은 무제의 대규모 흉노 원정, 즉 막북(漠北) 결전에 마지막으로 종군했을 때 벌어진다. 이때 이광은 이미 노년에 이르러 있었으나 종군을 거듭 자원하였고, 무제는 처음에는 그가 늙었다는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다가 결국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전장군(前將軍)으로 삼아 대장군 위청의 휘하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위청은 은밀히 무제로부터 이광이 운이 나쁜 사람이니 선우(單于)와 정면으로 맞서게 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은 터라, 이광에게 정면 공격이 아닌 동쪽의 우회로를 맡기고 자신은 공손오(公孫敖)와 함께 정면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이광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이 젊어서부터 흉노와 싸워온 전장군인데 우회로를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하였으나, 위청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광의 부대는 길 안내를 맡을 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막의 우회로를 행군하다가 길을 잃고 마는데, 이 때문에 예정된 시일에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여 선우를 놓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위청이 군리(軍吏)를 보내어 길을 잃은 경위를 문서로 작성해 올리라고 다그치자, 이광은 "여러 교위(校尉)들에게는 죄가 없으니 내 스스로 길을 잃었다. 내가 직접 문서를 작성하여 올리겠다"고 말한 뒤, 부하들에게 "나는 젊어서부터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칠십여 차례나 치렀거늘, 이제 다행히 대장군을 따라 선우의 군대와 맞서게 되었으나 대장군이 나의 부대를 옮겨 멀리 우회하게 하였고, 게다가 길까지 잃었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내 나이 이미 예순이 넘었으니, 결코 다시 도필리(刀筆吏)의 심문을 받을 수는 없다"는 비통한 말을 남기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휘하 장병들은 모두 통곡하였고, 이 소문이 전해지자 그를 알든 모르든 전군의 사대부(士大夫)와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사마천은 기록하는데, 이는 이광이 얻었던 세간의 신망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결론

「이장군열전」은 뛰어난 재능과 인품을 지닌 인물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세속적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마천이 『사기』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가장 절절하게 형상화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이광은 문무를 겸비하고 병사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음에도, 평생 봉후의 영예를 얻지 못한 채 노년에 이르러 관료 조직의 형식적 문책 앞에서 자결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마천은 이 비극적 결말을 통해 개인의 능력과 덕성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운명의 불공평함을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한편, 왕삭과의 문답을 통해 이광 자신의 과거 행적에도 그 불운의 씨앗이 있었음을 냉정하게 짚어냄으로써 일방적인 동정에 매몰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한다.

 

동시에 이 열전은 사마천 자신의 처지와도 은밀히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궁형이라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역사서 저술이라는 소명을 완수해야 했던 사마천에게, 세상의 인정과 개인의 실제 가치 사이의 괴리를 온몸으로 겪은 이광의 생애는 각별한 감정 이입의 대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불식과의 대비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적 통솔의 미덕, 바위에 화살이 박히는 일화가 상징하는 정신의 집중력,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토로한 "다시는 도필리의 심문을 받을 수 없다"는 절규는 모두 한 인간의 존엄이 관료제의 형식 앞에서 얼마나 쉽게 훼손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마천은 이 열전의 말미에서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절로 길이 난다(桃李不言, 下自成蹊)"는 비유로 이광에 대한 논찬을 마무리하는데, 이는 말없이 행동과 인품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인물에 대한 사마천의 최고의 찬사라 할 수 있다. 문학성과 역사성이 가장 높은 차원에서 결합된 이 열전은, 능력과 보상의 어긋남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전하며, 이후 왕유(王維)·고적(高適)을 비롯한 수많은 후대 문인들에게 "이광난봉(李廣難封)"이라는 고사성어와 함께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기』 열전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문학적 잔향을 남긴 편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절로 길이 생긴다" — 인품과 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히 따르고 신뢰하게 됨을 비유합니다.

유래: 사마천이 「이장군열전」의 논찬(論贊) 말미에서 이광을 평하며 남긴 구절입니다. 이광이 말이 어눌하고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았음에도 병사들과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것을 두고 이 비유를 든 것으로, 오늘날에도 인격의 감화력을 표현할 때 널리 인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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