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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50. 「흉노열전(匈奴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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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열전 제 50편 ㅡ「흉노열전(匈奴列傳)」

 

서론

『사기(史記)』 열전 제50편은 「흉노열전(匈奴列傳)」으로, 『사기』 열전 가운데서도 그 분량과 내용의 방대함에서 손꼽히는 편이다. 이 편은 앞선 제49편 「이장군열전」에서 이광이 평생을 바쳐 대적하였던 흉노(匈奴)라는 이민족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두 편이 서로 짝을 이루며 한대(漢代) 북방 정책의 전모를 완성시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 열전에서 흉노의 기원과 풍속, 국가 체제를 상세히 서술한 뒤, 하(夏)·은(殷)·주(周) 이래로 중원 왕조와 북방 유목민족 사이에 이어져 온 갈등의 역사를 개관하고, 나아가 한 고조(高祖)의 백등산(白登山) 포위부터 문제·경제의 화친 정책, 그리고 무제 시기 본격화된 대규모 정벌 전쟁에 이르기까지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 전반을 통시적으로 서술한다.

 

이 열전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사마천이 흉노를 단순히 정벌해야 할 오랑캐로 폄하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합리적인 생활 방식과 사회 질서를 지닌 하나의 독자적인 문명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화 중심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던 당대의 통념과는 사뭇 다른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마천의 역사 서술이 지닌 객관성과 폭넓은 안목을 잘 보여준다. 이 서론에 이어 본론에서는 흉노의 기원과 풍속에 대한 사마천의 서술, 중원과 흉노 사이의 오랜 갈등사, 그리고 한 초 이래의 화친과 정벌 정책의 변화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보고, 결론에서는 이 열전이 지닌 사학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본론

사마천은 먼저 흉노의 기원을 하후씨(夏后氏)의 후예인 순유(淳維)에게서 찾으며, 이들이 당(唐)·우(虞) 이전부터 산융(山戎)·험윤(獫狁)·훈육(葷粥)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북방의 초원 지대에서 가축을 기르며 살아온 유목민족임을 설명한다. 이어 그는 흉노의 생활 방식을 상세히 기록하는데, 이들은 일정한 성곽이나 농경지 없이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며 말과 소, 양을 기르고,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익혀 평상시에는 사냥을 하고 유사시에는 그대로 전투에 나선다고 서술한다. 특히 사마천은 흉노의 사회 윤리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 논리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는데, 이들은 강건한 자를 귀히 여기고 노약자를 천시하며, 아버지가 죽으면 그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兄死取嫂)와 유사한 풍속을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풍속을 도덕적으로 재단하기보다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부족의 생존과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 적응의 결과로 담담하게 서술하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이민족의 문화를 그 나름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사마천의 열린 시각을 잘 드러낸다.

 

중원과 흉노의 갈등은 이미 주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주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살해되고 주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하게 된 사건이나, 이후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며 연(燕)·조(趙)·진(秦) 등 북방에 인접한 나라들이 각기 장성(長城)을 쌓아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했던 역사가 이 대목에서 서술된다. 특히 조나라의 명장 이목(李牧)이 흉노를 상대로 거둔 대승은 훗날 한나라가 흉노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선례로 언급된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蒙恬)을 시켜 흉노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만리장성을 축조한 사건 역시 이 갈등사의 중요한 국면으로 다루어지는데, 사마천은 이 무렵 흉노의 걸출한 지도자 묵특선우(冒頓單于)의 등장을 상세히 서술한다. 묵특은 아버지 두만선우(頭曼單于)를 시해하고 스스로 선우에 오른 뒤, 명적(鳴鏑, 소리 나는 화살)으로 부하들을 훈련시켜 절대적인 복종 체계를 구축하고, 동호(東胡)와 월지(月氏)를 차례로 정벌하여 북방 초원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다. 사마천은 묵특의 권모술수와 냉혹함을 가감 없이 서술하면서도, 그가 흉노를 강력한 통일 세력으로 조직해낸 탁월한 지도력만큼은 인정하는 균형 잡힌 서술 태도를 견지한다.

 

한 고조가 즉위한 직후, 묵특선우가 이끄는 흉노의 세력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고조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백등산에서 칠 일간 포위당하는 위기를 겪는데, 이는 한나라 건국 초기 국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포위에서 벗어난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 대한 무력 대응 대신 화친(和親)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데, 종실의 여인을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일정량의 비단과 술, 곡식을 보내는 대가로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문제와 경제 시기에도 이러한 화친 정책은 기본적으로 유지되었으나, 흉노는 화친 조약에도 불구하고 종종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한나라는 국력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이 시기 화친 정책의 이면에 있는 한나라의 굴욕과 인내를 담담하게 서술하면서도, 이것이 훗날 국력을 기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암시한다.

 

무제가 즉위한 이후 상황은 근본적으로 전환된다. 문경지치(文景之治)를 거치며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무제는 화친 정책을 폐기하고 본격적인 흉노 정벌에 나서게 되는데, 앞서 「이장군열전」에서 다루어진 이광을 비롯하여 위청, 곽거병(霍去病) 등의 장수들이 이 전쟁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사마천은 이 대규모 정벌 전쟁의 여러 국면을 상세히 기록하면서도, 그 이면에 있는 막대한 국력 소모와 백성들의 고통을 은연중에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특히 이 열전의 말미에서 사마천은 한나라 조정 내에서도 흉노에 대한 정책을 두고 화친론과 정벌론이 계속하여 대립하였음을 서술하며, 어느 한쪽의 절대적 정당성을 옹호하기보다는 각 시기의 국력과 정세에 따라 정책이 유동적으로 변화해 온 과정 자체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데 주력한다.

 

결론

「흉노열전」은 단순히 한 이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편이 아니라, 중원 문명과 북방 유목 문명이 수백 년에 걸쳐 대립하고 교섭해 온 거대한 문명사적 흐름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사마천은 흉노를 야만적 오랑캐로 일방적으로 폄하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생활 논리와 사회 질서를 지닌 독자적 문명으로 서술함으로써, 화이(華夷)를 엄격히 구분하던 당대의 통념을 넘어서는 폭넓은 역사적 안목을 보여준다. 이는 사마천이 『사기』 전체를 통해 견지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서술 태도가 이민족을 다루는 데에서도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또한 이 열전은 한나라의 대흉노 정책이 화친에서 정벌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 국가의 대외 정책이란 것이 절대적 명분이 아니라 그 시대의 국력과 정세에 따라 유동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적 통찰을 담고 있다. 백등산의 굴욕에서 무제 시기의 대대적 정벌에 이르는 흐름을 통해, 사마천은 국력의 축적과 소모가 국가의 대외 정책을 근본적으로 좌우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앞선 「이장군열전」에서 이광 개인의 비극적 운명으로 그려졌던 흉노와의 전쟁이, 이 열전에 이르러서는 그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문명사적 대립의 한 국면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두 편은 개인사와 거시사가 서로를 비추는 절묘한 구조로 완성된다. 이러한 점에서 「흉노열전」은 『사기』 열전 가운데서도 사마천의 역사적 통찰과 서술의 폭이 가장 웅대하게 펼쳐진 편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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