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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5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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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열전 제51편 ㅡ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서론

『사기(史記)』 열전 제51편은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으로, 무제(武帝) 시기 흉노 정벌 전쟁을 실질적으로 승리로 이끈 두 명장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의 생애와 공적을 함께 다룬 편이다. 앞선 제50편 「흉노열전」이 한나라와 흉노 사이의 거시적 갈등사를 조망했다면, 이 편은 그 갈등사의 정점이었던 무제 시기 정벌 전쟁을 실제로 수행한 두 야전 사령관의 활약을 구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앞 편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생생한 인물적 육체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이 편은 제49편 「이장군열전」의 이광과도 은밀히 대비되는 구조를 이루는데, 평생 봉후에 오르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광과 달리, 위청과 곽거병은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대장군과 표기장군(驃騎將軍)의 지위에까지 오르고 막대한 봉읍을 하사받는 인물들이다.

 

위청은 본래 천한 노비의 신분에서 태어나 그 누이 위자부(衛子夫)가 무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에 오르면서 일약 발탁된 인물이며, 곽거병은 위청의 누이의 아들, 즉 위청의 생질로서 젊은 나이에 종군하여 눈부신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사마천은 이 열전에서 두 사람의 미천한 출신에서 시작하여 외척의 인연으로 발탁되는 과정, 그리고 실제 전장에서 보여준 용병술과 전공을 상세히 기록하는 한편, 그 이면에 자리한 인간적 한계와 그늘 역시 은근히 함께 짚어낸다. 이 서론에 이어 본론에서는 위청의 발탁 과정과 여러 차례에 걸친 흉노 정벌의 전공, 곽거병의 혜성과도 같은 등장과 하서(河西) 원정의 성과, 그리고 두 사람의 성품과 처세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를 순서대로 살펴보고, 결론에서는 이 열전이 지닌 사학적 의의를 정리한다.

 

본론

위청은 평양후(平陽侯) 집안의 노비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한 신분으로 자랐다. 그러나 그의 누이 위자부가 무제의 눈에 들어 궁에 들어가고 이후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르면서, 위청 역시 그 인연으로 궁중에 발탁되어 무제의 측근으로 자리 잡게 된다. 사마천은 위청이 처음 건장궁(建章宮)의 하급 관리로 있을 때 죽을 위기를 겪었던 일화를 소개하는데, 이는 위청의 초기 입지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위자부가 황후로 책봉된 이후 위청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하였고, 마침내 그는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어 흉노 정벌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위청의 첫 출정은 용성(龍城)을 급습한 전투였는데, 당시 함께 출정했던 다른 장수들이 모두 패퇴하거나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한 것과 달리 위청만이 홀로 흉노의 본거지까지 진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후 위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 흉노 정벌에 나서 하남(河南) 지역을 수복하고 오르도스 일대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으며, 이 공로로 대장군에 임명되어 명실상부한 한나라 최고 사령관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사마천은 위청의 용병술을 두고 신중하고 치밀하게 병력을 운용하며 무리한 모험을 피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대담하고 저돌적인 곽거병의 용병술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지점이다.

 

곽거병은 위청의 생질로서 나이 열여덟에 처음 종군하였는데, 사마천은 그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담무쌍한 기질을 타고났다고 서술한다. 곽거병은 첫 출정에서 소수의 정예 기병만을 이끌고 본대를 이탈하여 수백 리를 질주한 끝에 흉노의 수급을 크게 베어오는 전과를 올렸고, 이 공으로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하서 지역을 두 차례에 걸쳐 원정하여 흉노의 혼야왕(渾邪王)과 휴저왕(休屠王)의 세력을 격파하고 이들의 투항을 받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 하서 원정의 성공으로 한나라는 서역으로 통하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을 확보하게 되어 훗날 실크로드 개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곽거병은 나아가 막북(漠北)까지 진격하여 흉노 선우의 본거지를 위협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러한 혁혁한 공로로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그 지위가 대장군 위청에 버금가게 되었다.

 

사마천은 이 두 명장의 성품과 처세에 대해서도 예리한 평가를 남긴다. 위청은 겸손하고 신중하여 병사들과 아랫사람들에게 관대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황제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처세의 조심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고 사마천은 지적한다. 실제로 위청은 자신의 문하에 인재를 두고 키우는 데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는 무제의 뜻을 헤아린 처신으로 해석된다. 반면 곽거병은 젊고 대담한 만큼 오만한 면모도 있었는데, 사마천은 그가 원정 중 병사들의 굶주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은 사치스러운 음식을 즐겼다는 일화나, 활쏘기 놀이를 위해 땅을 파서 구장을 만들었다는 일화 등을 통해 그의 인간적 한계를 가감 없이 기록한다. 이는 이광이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신망을 얻었던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으로, 사마천이 전공의 화려함 이면에 자리한 인물의 그늘까지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서술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곽거병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마는데, 무제는 그의 죽음을 크게 애도하며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그의 무덤을 기련산(祁連山)의 형상을 본떠 조성하도록 하였다. 이는 곽거병이 생전에 무제로부터 받았던 각별한 총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위청 역시 훗날 곽거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제의 총애가 옅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사마천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외척의 총애란 것이 결국 황제 개인의 호오(好惡)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따라 얼마든지 부침할 수 있는 불안정한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결론

「위장군표기열전」은 무제 시기 흉노 정벌 전쟁을 실질적으로 승리로 이끈 두 명장의 혁혁한 전공을 기록한 편이면서도, 그 성공의 이면에 자리한 여러 층위의 명암을 함께 짚어낸다는 점에서 단순한 무공의 찬양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위청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처세와 곽거병의 대담하고 오만한 기질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두 사람 모두 외척이라는 특수한 인연을 통해 발탁되었다는 공통의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사마천은 이 두 인물의 성공을 통해 무제 시기 한나라의 군사력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성공이 개인의 순수한 능력만이 아니라 황실과의 인연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음을 은근히 지적한다.

 

특히 이 열전은 제49편 「이장군열전」과 나란히 놓고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 평생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고도 봉후에 오르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광과,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화려한 전공으로 최고의 지위와 영예를 누린 위청·곽거병의 대비는, 능력과 성과가 반드시 정당하게 보상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마천의 일관된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위장군표기열전」은 무제 시기 한나라의 군사적 전성기를 기록한 실록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전공과 영예의 이면에 자리한 권력과 인연의 작동 방식을 예리하게 통찰한 사마천 특유의 역사 서술이 응축된 편이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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