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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세계유산-023. 북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2) ㅡ 개성역사유적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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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 ㅡ 고려 왕조 500년의 자취를 품은 북한의 세계유산

 

서론

 

한반도에 자리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운데 북한 영토 내에 있는 것은 단 두 곳뿐이다. 2004년에 등재된 고구려 고분군, 그리고 2013년에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開城歷史遺蹟地區, The 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가 그것이다.

후자는 918년 왕건이 개창한 고려 왕조가 1392년까지 474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송악(松嶽), 곧 오늘날의 개성 일대에 남은 유적들을 하나로 묶은 연속유산(serial property)이다.

10세기에서 14세기까지 지속된 고려 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증명하는 12개의 개별 유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궁궐터, 성곽, 성문, 교육기관, 관측소, 왕릉군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한 시대의 통치 체제와 사상 체계를 총체적으로 증언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본론

1. 등재까지의 험로

개성역사유적지구는 단번에 세계유산이 된 것이 아니다. 2000년 5월 2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린 뒤, 2007년 1월 17일 공식적으로 등재신청을 하였으나 이듬해인 2008년 제3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범위와 완충지역의 부족을 이유로 반려되었다. 북한은 이후 신청서를 보완하여 재도전했으나, 2011년 제출한 서류마저 미비하다는 판정을 받아 심사가 2012년까지 미뤄졌다. 2012년 9월 말 이코모스(ICOMOS) 기술평가팀의 현지답사가 이루어졌고, 이듬해 실사 보고서에서 마침내 등재 권고 판정을 받으면서 2013년 6월 2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정식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첫 신청부터 등재까지 꼬박 6년이 걸린 셈이다.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유산에 부여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의 핵심은 두 가지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존재했던 다양한 문화적·정치적 가치들이 5세기에 걸쳐 이웃 국가들과 교류한 흔적이라는 점, 그리고 고려의 특출한 문화적 전통을 보여주는 물증이라는 점이다.

2. 12개 구성 유산의 얼개

개성역사유적지구는 단일 건축물이 아니라, 옛 도성 안팎에 흩어진 유적들이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연속유산이다. 등재 대상은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 만월대, 개성 첨성대,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릉, 7릉군, 명릉, 공민왕릉 등 12개 개별유적으로 구성된다. 국가유산청은 이를 성격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정리한다. 궁궐터와 성곽·대문 같은 도성 관련 유적, 관료 양성 기관을 포함한 두 곳의 교육기관, 그리고 천문 및 기상 관측소와 왕릉 같은 기념물이다.

 

만월대(滿月台) — 고려 궁궐의 심장부

만월대는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려 왕궁 터로, 919년 태조 2년부터 1392년 공양왕 4년까지, 곧 고려 왕조 전 기간에 걸쳐 국왕의 정치 공간이자 생활 공간으로 기능했다. 전체 면적이 39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이 유적은 자연 지세를 그대로 살려 조성되었으며, 중심 건축군·동부 건축군·서부 건축군·서북 건축군의 네 구역으로 나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유적이 남북 학술 교류의 상징적 현장이었다는 사실이다. 1973~1974년의 발굴에 이어,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여덟 차례에 걸쳐 남북 공동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명문 기와, 금속활자, 청자, 경첩 등 고려시대 궁중 생활사를 복원할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만월대 안에는 고려 건축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하는 남대문이 남아 있고, 그 안쪽에는 연복사의 종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왕건릉과 공민왕릉 — 고려 왕릉의 두 정점

개성 일대에는 고려 역대 왕들의 능묘가 산재해 있는데, 발굴조사로 실체가 확인된 것만 30기 정도이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태조 왕건의 현릉(顯陵)과 공민왕의 현릉(玄陵)이다. 왕건릉은 943년에 축조되었으며, 1992년 김일성이 방문한 뒤 발굴이 진행되어 내부 구조가 알려졌다. 석실은 큰 화강암으로 벽을 쌓고 네 개의 천장석을 덮어 만들었으며, 바닥 중앙에는 관대를 놓고 좌우에 부장대를 설치했다. 동쪽 벽에는 대나무와 매화, 서쪽 벽에는 소나무를 그리고 방위에 맞춰 사신도를 배치했다.

공민왕릉은 왕건릉에서 서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으며, 1365년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계기로 조성이 시작되었다. 두 왕릉의 관계는 후대에까지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했는데, 흥미롭게도 1992년 김일성은 왕건릉의 규모를 두고 "동명왕릉보다는 작게, 공민왕릉보다는 크게 만들라"고 지시한 바 있어, 왕건릉과 공민왕릉이 북한 문화재 정책에서도 상징적 위계를 지닌 유적임을 짐작하게 한다.

왕건릉 주변으로는 태조현릉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칠릉군, 서쪽에 명릉군이 자리하는데, 이들은 왕건릉·공민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으며 명릉군에는 고려 29대 충목왕의 능 1기가 포함된다. 전체적으로 왕릉 유적들의 배치를 보면 개성 성곽이 옛 도성의 외성에 해당하여 유산 대부분이 그 안쪽에 있는 반면, 공민왕릉·왕건릉·칠릉군·명릉군은 성곽 바깥에 위치한다는 공간적 특징을 지닌다.

 

교육기관과 유교적 상징 — 성균관과 숭양서원, 선죽교

개성역사유적지구가 단순한 왕조 유적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사상 체계를 증언하는 이유는 교육기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려 성균관은 관료를 양성하던 국가 최고 교육기관이었고, 숭양서원은 고려 말 충신이자 성리학자였던 정몽주를 기리는 서원이다. 특히 선죽교는 정몽주가 이방원 측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전해지는 다리로, 조선 건국을 둘러싼 왕조 교체기의 정치적 긴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며, 인근의 표충비(表忠碑)와 함께 절의(節義)의 기억을 새긴 기념물로 함께 등재되었다.

 

개성 첨성대 — 관측의 전통

개성 첨성대는 경주 첨성대와는 별개의 유적으로, 고려시대 천문 및 기상 관측소로 기능했다. 이는 만월대의 궁궐 유적, 성균관의 교육 기능과 더불어 고려가 정치·교육·과학이라는 세 축을 갖춘 성숙한 왕조 체제였음을 물리적으로 증언하는 요소다.

3. 남북 공동발굴의 의미와 남은 과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지닌 특수성 중 하나는 이 유산의 핵심부인 만월대가 남북 학술 협력의 실제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국가유산청은 한민족 공동의 문화유산인 개성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조명하고자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남북공동으로 개성만월대를 발굴조사했다고 밝혔으며, 이 협력은 이후 2018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경색과 함께 현재는 발굴조사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며, 유산의 보존 상태나 관리 실태에 대한 외부의 접근과 검증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은 이 유산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로 지적된다. 학계에서는 북한의 문화재 보존체계와 개성 지역 문화유적의 보존 현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향후 적용될 법적·행정적 사항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결론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북한이 보유한 두 번째 세계유산이자, 고려 왕조 500년의 통치·교육·신앙·매장 문화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낸 연속유산이다. 왕건릉과 공민왕릉이라는 두 정점의 왕릉, 궁궐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만월대, 유교적 절의를 상징하는 선죽교와 숭양서원, 그리고 성곽과 관측소에 이르기까지, 이 유산은 고려라는 한 왕조가 남긴 물리적 총체로서 한반도 중세사 이해에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만월대 발굴이 보여주었듯, 이 유산은 학술적 가치를 넘어 분단된 한민족이 함께 발굴하고 함께 지켜낼 수 있었던 드문 협력의 현장이기도 했다. 남북관계가 다시 열릴 때, 개성역사유적지구가 그 협력의 상징적 출발점으로 재조명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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