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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41. 원앙조조열전(袁盎鼂錯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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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열전 제41편 ㅡ 원앙조조열전(袁盎鼂錯列傳) 

 

서론(序論)

 

사마천(司馬遷)이 열전 제41권에 원앙(袁盎)과 조조(鼂錯)를 나란히 배치한 것은 단순한 시대적 인접성 때문만이 아니다. 두 사람은 문경지치(文景之治)로 불리는 한(漢) 초 안정기의 정국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통한 인물이며, 무엇보다 생전에 서로 극심하게 반목하다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이끌어냈다는 극적인 악연으로 얽혀 있다. 원앙은 직간(直諫)으로 이름났으나 사사로운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조조는 국가의 장구한 안정을 도모했으나 그 방법이 지나치게 성급하고 강경했다. 사마천은 이 두 상반된 인물을 한 편에 묶어 서술함으로써, 충성과 지혜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정치적 처신의 문제, 그리고 원칙과 시세(時勢) 사이에서 신하가 취해야 할 균형의 문제를 함께 제기한다.

 

본론(本論)

원앙은 초(楚)나라 사람으로, 형 원쾌(袁噲)의 천거로 낭중(郎中)에 임용되어 문제(文帝)를 섬겼다. 그의 강직함은 즉위 초부터 드러났다. 당시 승상 주발(周勃)이 여씨(呂氏) 일족을 제거한 공으로 조정에서 위세가 대단하여 조회 때마다 의기양양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는데, 원앙은 문제에게 "공신(功臣)의 신하와 사직(社稷)의 신하는 다릅니다. 공신은 한때의 공로로 교만해질 수 있으나, 사직의 신하는 나라의 존망을 자신의 몸보다 중히 여겨야 합니다"라며 주발을 지나치게 예우하는 태도를 경계할 것을 간언했다. 이후 주발이 실각하여 하옥되었을 때는 오히려 그를 위해 변호하여 구명하는 데 힘썼으니, 이는 원앙의 간언이 단순한 시기심이 아니라 권력의 균형을 살피는 데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원앙의 곧은 성품은 궁중 의전(儀典)에서도 드러난다. 문제가 총애하던 신부인(愼夫人)과 황후가 함께 자리할 때 신부인의 자리를 황후와 나란히 놓으려 하자, 원앙은 신부인의 자리를 뒤로 물리며 "존비(尊卑)에는 질서가 있어야 궁정이 화목해집니다"라고 아뢰었다. 문제가 언짢아하자 원앙은 여후(呂后)가 척부인(戚夫人)을 인체(人彘)로 만들었던 참혹한 전례를 상기시키며, 지금의 총애가 훗날 화근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문제와 신부인 모두 이 말에 감복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는 일화는, 원앙이 예법의 문제를 권력투쟁의 비극적 교훈과 연결하여 설득하는 정치적 감각을 지녔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강직함은 동시에 원한을 사기 쉬운 성정과 맞물려 있었으니, 그는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상(相)으로 나가 있을 때도, 환관 조담(趙談)이 황제와 수레를 함께 타는 것을 막아서는 등 거침없는 언행으로 조야에 적을 많이 두었다.

 

조조는 영천(潁川) 사람으로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형명학(刑名學)을 배워 엄격한 법치주의적 사고를 지녔다. 경제(景帝)가 태자였던 시절 태자가령(太子家令)으로서 지혜와 언변이 뛰어나 '지낭(智囊, 지혜주머니)'이라 불렸다. 경제가 즉위한 뒤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오른 조조는 제후왕들의 봉토가 지나치게 방대하여 장차 중앙 조정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삭번책(削藩策)을 거듭 상주했다. "지금 깎아도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깎지 않아도 반란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깎으면 화가 빨리 오되 작고, 깎지 않으면 화가 늦게 오되 클 것입니다"라는 그의 논리는 훗날의 사태를 정확히 예견한 통찰이었으나, 동시에 제후왕들의 격렬한 반발을 자초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제가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吳)·초(楚) 등 제후국의 봉지를 삭감하자, 오왕 유비를 필두로 일곱 나라가 "조조를 주살하여 황제 곁을 맑게 한다(誅鼂錯,淸君側)"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평소 조조와 사이가 나빠 조정에서 함께 자리하지도, 말을 섞지도 않던 원앙이 나서 경제에게 "조조를 죽여 오·초에 사죄하면 반란군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라 진언했다. 경제는 이를 받아들였고, 조조는 조복(朝服)을 입은 채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동시(東市)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조복을 벗을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는 서술은 그 처분의 참혹함과 기만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조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그치지 않았으니, 이는 원앙의 계책이 애초에 실효성 없는 정치적 희생양 만들기에 불과했음을 반증한다. 이후 원앙은 오왕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죽임을 당할 위기를 겨우 모면했고, 훗날 양효왕(梁孝王)의 황위 계승을 반대하다가 그가 보낸 자객에게 안릉(安陵) 성문 밖에서 살해당하며 생을 마쳤다.

 

결론(結論)

태사공(太史公)은 두 인물을 평하며 원앙에 대해서는 비록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사물에 응용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인(仁)을 바탕으로 의(義)를 내세워 강개하게 시세를 논했다고 평가하면서도, 명성을 좋아하고 자만하는 성정이 끝내 비명횡사를 자초했다고 지적한다. 조조에 대해서는 국가의 장구한 이익을 도모한 충정은 인정하면서도, "옛것을 고치고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히는 자는 죽지 않으면 망한다(變古亂常,不死則亡)"는 유명한 단언으로 그 비극적 결말의 필연성을 요약한다.

 

이 편이 전하는 역사적 교훈은 단순하지 않다. 원앙은 직언으로 이름났으나 그 직언이 항상 공적인 대의에서만 발현된 것은 아니었고, 사사로운 원한이 국가의 중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이용되었다. 조조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보았으나 그 실행에 있어 정치적 반발과 시세의 흐름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성급하고 강경한 방법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사마천은 이 두 인물의 상반된 결함을 병치함으로써, 신하 된 자에게는 곧은 지혜와 충정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그것을 시세에 맞게 운용하고 사사로움을 경계하는 절제까지 함께 갖추어야 함을 역사서술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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