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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40.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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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열전 제40 편 ㅡ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서론(序論)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열전 제40권에 나란히 배치한 계포(季布)와 난포(欒布)는 초한(楚漢) 교체기와 한초(漢初) 정국을 관통하며 살아남은 두 인물이다. 이 편이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 한때 유방(劉邦)의 적진에 섰던 인물이면서도 훗날 한(漢)의 신하로 살아남았고, 그 생존의 방식이 '신의(信義)'와 '수치를 견디는 지혜'라는 공통된 축 위에 서 있다는 점 때문이다. 사마천은 여기에 정공(丁公)이라는 대조적 인물을 짧게 삽입함으로써, 같은 처지에서도 상반된 선택을 한 인물들의 운명을 극명하게 병치한다. 이는 단순한 인물 열전을 넘어, '무엇이 진정한 절의(節義)인가'라는 물음을 역사서술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론(本論)

 

계포는 초(楚)나라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협기(俠氣)로 이름이 났다. 항우(項羽)의 장수로서 여러 차례 유방을 궁지에 몰아넣었기에, 한이 천하를 통일한 뒤 유방은 천금(千金)의 현상금을 걸고 그를 잡으려 했다. 계포는 자신을 숨겨 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삭발하고 목에 칼을 쓴 채 노(魯)나라 주가(朱家)에게 종으로 팔려 갔다. 주가는 그가 계포임을 알아보고도 내색하지 않은 채, 여음후(汝陰侯)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을 찾아가 설득한다. "신하는 각기 자신의 주인을 위해 일할 뿐인데(臣各爲其主用), 계포가 항우를 위해 힘쓴 것 또한 그 직분일 뿐입니다. 항우의 신하를 다 죽인다면 천하의 인재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 논리에 설득된 등공이 유방에게 아뢰어, 계포는 사면되고 도리어 낭중(郎中)에 제수된다. 이후 문제(文帝) 대에는 하동수(河東守)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계포의 신의는 초나라 사람들 사이에 "황금 백 근을 얻는 것이 계포의 한 번 승낙을 얻는 것만 못하다(得黃金百斤,不如得季布一諾)"는 말로 전해질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명성은 조구생(曹丘生)이라는 변사(辯士)의 유세를 통해 더욱 굳어진다. 처음에는 계포가 그를 경박한 인물로 여겨 꺼렸으나, 조구생은 "초나라 사람들 사이에 그대의 이름이 퍼진 것은 제가 곳곳에서 그대를 칭송했기 때문"이라 말하며 환심을 사고, 이후 계포의 명성을 천하에 더욱 넓히는 역할을 한다. 사마천은 이 일화를 통해 명성이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하는 자의 역할이 함께 작용함을 은근히 드러낸다.

 

이와 대조적으로 짧게 다루어지는 정공(丁公)의 일화는 절의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기능한다. 정공 역시 항우의 장수로서, 팽성(彭城) 전투 이후 궁지에 몰린 유방을 사로잡을 수 있었으나 사사로운 인정으로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천하가 평정된 뒤 정공이 포상을 바라며 유방을 찾아오자, 유방은 도리어 그를 참수하며 "정공은 항왕의 신하이면서 충성하지 않아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한 자다. 후세에 신하 된 자들이 정공을 본받지 않도록 하라"고 선언한다. 계포와 정공은 같은 처지—항우의 신하로서 유방과 맞섰던 자—에 있었으나, 하나는 끝까지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살아남았고,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배신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사마천은 이 병치를 통해 한 고조(漢高祖)가 중시한 것이 '자신에게 이로운가'가 아니라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켰는가'였음을 보여준다.

 

난포는 양(梁)나라 사람으로 본래 곤궁한 처지에서 팽월(彭越)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팽월이 양왕(梁王)에 봉해졌다가 훗날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고 그 시신이 효수되어 "감히 시신을 거두는 자는 체포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마침 제(齊)에 사신으로 가 있던 난포는 돌아와 금령을 무릅쓰고 팽월의 머리 앞에서 곡을 하며 제사를 지냈다. 체포되어 유방 앞에 끌려가 삶아 죽임을 당할 위기에서, 난포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항변한다. "팽월은 한실(漢室) 건립에 큰 공을 세운 신하인데, 이제 사소한 의심만으로 주살하셨습니다. 공신마저 이렇게 처리하신다면, 앞으로 누가 폐하를 위해 힘쓰려 하겠습니까." 그의 강직함에 감명받은 유방은 오히려 그를 사면하고 도위(都尉)에 임명했다. 훗날 경제(景帝) 때에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장군에 이르고, 유후(兪侯)에 봉해진 뒤 생을 마쳤다.

 

결론(結論)

편말에서 사마천은 태사공왈(太史公曰)을 통해 두 인물을 함께 평한다. 계포가 용사(勇士)의 신분으로 삼베옷을 입고 노예로 자신을 팔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견뎌낸 것은, 자신의 재능을 믿고 후일을 도모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 평하며, 하찮은 치욕에 목숨을 끊는 범부(凡夫)의 태도와 이를 대비시킨다. 또한 난포가 팽월을 위해 곡을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자신이 처한 바를 알아 함부로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도, 무겁게 여기지도 않았으니, 옛 열사(烈士)라 한들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라고 극찬한다.

 

결국 계포난포열전이 전하는 절의의 핵심은 맹목적 충성이나 무모한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철히 인식한 위에서 지켜야 할 도리와 버릴 수 있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에 있다. 계포는 굴욕을 견뎌 재능을 지켰고, 난포는 죽음을 무릅써 의리를 지켰으며, 정공은 눈앞의 이익을 좇다 도리어 신의를 잃어 죽음을 자초했다. 사마천은 이 세 인물의 서로 다른 선택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난세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목숨의 보전이나 상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지켜낸 것이 무엇인가에 있음을 역사서술의 형식으로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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