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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 039.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 다른 무기로 같은 나라를 지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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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제 39편 ㅡ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서론: 말로 세상을 세운 두 사람

 

칼과 창으로 천하를 얻는 일과, 말과 예(禮)로 그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전혀 다른 재능을 요구한다. 초한 쟁패의 전장에서는 용맹과 전략이 최고의 가치였지만, 전쟁이 끝나고 한 제국이 세워진 순간부터는 전혀 다른 문제가 대두된다. 어떻게 이 신생 제국의 뼈대를 세울 것인가, 어떻게 오합지졸로 모인 공신들을 군주 앞에 질서 있게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사마천은 이 통치의 전환기를 상징하는 두 인물, 유경(劉敬)과 숙손통(叔孫通)을 하나의 열전에 나란히 배치했다. 두 사람은 검을 휘두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의 무기는 오직 말이었다. 유경은 정세를 꿰뚫어 보는 직언으로 국가의 방향을 바꾸었고, 숙손통은 예법을 설계하여 무질서했던 조정에 위계와 형식을 부여했다. 이 열전이 흥미로운 까닭은 두 사람의 방식이 극명하게 대조적이라는 데 있다. 유경은 강직하고 타협 없는 직언가였고, 숙손통은 시류를 읽고 유연하게 처신하는 현실주의자였다. 사마천은 이 상반된 두 인물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는 하나의 재능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결의 지혜가 함께 필요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본론

1. 유경(劉敬) — 수레를 끌던 자의 직언

 

유경의 출발은 매우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는 본래 누경(婁敬)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수졸(戍卒)로, 농서로 수자리를 살러 가던 길에 우연히 고조 유방에게 간언할 기회를 얻는다. 이 첫 만남에서부터 유경의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신분의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수도를 낙양이 아닌 관중(關中)에 정해야 한다고 직언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하들은 낙양이 주나라의 옛 도읍이었다는 이유로 그곳에 정착하기를 원했으나, 유경은 관중이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키기 쉽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지정학적 이점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유방은 처음에는 다수 신하들의 의견에 기울었으나, 장량이 유경의 견해에 동조하자 마침내 관중, 곧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이는 이후 수백 년에 걸친 한나라의 지리적 기틀을 결정지은 중대한 판단이었으며, 사마천은 이 일화를 통해 유경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언변가가 아니라 실질적인 국가 전략을 꿰뚫어 보는 눈을 지녔음을 분명히 한다.

유경의 진가는 흉노와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드러난다. 유방이 흉노를 정벌하러 나서려 할 때, 유경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벌에 반대하는 간언을 올렸다. 그는 흉노가 겉으로 드러낸 약함이 유인책일 가능성을 지적했으나, 유방은 이를 듣지 않고 친정에 나섰다가 결국 평성(平城)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에게 포위당하는 참혹한 실패를 겪는다. 이 사건 이후 유방은 오히려 유경의 선견지명을 인정하고 그를 중용하게 되는데, 이는 사마천이 즐겨 다루는 서사 구조—직언한 자가 당장은 미움을 받지만 결국 그 판단의 정당함이 증명되는 구조—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유경은 흉노와의 화친 정책, 이른바 화친지책(和親之策)을 제안하여 한나라 초기의 대외 정책 방향을 실질적으로 설계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또한 관동의 유력 호족들을 관중으로 이주시켜 지방 세력을 견제하자는 정책을 건의하는데, 이 역시 훗날 한나라의 중앙집권 체제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 숙손통(叔孫通) — 변신하는 유자의 처세

숙손통의 삶은 유경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린다. 그는 본래 진(秦)나라의 박사였으나, 진승과 오광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세황제 앞에서 반란의 실체를 은폐하고 아첨하는 발언으로 화를 피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이 장면을 상당히 냉정한 필치로 묘사하는데, 숙손통이 진실을 말한 다른 박사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황제의 비위에 맞는 말만 골라 했다는 사실을 굳이 상세히 기록한다. 이는 단순한 비판이라기보다, 숙손통이라는 인물의 근본적 성격—원칙보다 생존과 실리를 우선하는 현실주의—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서술 전략으로 읽힌다. 이후 숙손통은 항량, 항우, 유방 등 여러 주군을 전전하며 섬기는데, 그때마다 그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인다. 유자(儒者)의 옷을 벗고 초나라 복식으로 갈아입는 등, 자신을 받아들이는 군주의 취향에 맞추어 스스로의 외양과 언행을 계속 바꾸어 나간다.

이러한 처세술은 언뜻 지조 없는 기회주의로 보일 수 있으나, 사마천은 숙손통이 한나라에 정착한 이후 보여준 실질적 공헌을 통해 그의 처신에 다른 층위의 의미를 부여한다. 한나라 건국 초기, 공신들은 여전히 전장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조정에서도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고 심지어 칼을 뽑아 기둥을 치는 등 무질서한 행태를 보였다. 유방은 이러한 혼란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때 숙손통이 나서서 예법을 정비하겠다고 자청한다. 그는 노나라의 유생들을 불러 모아 조정의 의례를 설계하고, 여러 달에 걸쳐 신하들에게 절하고 물러나는 법도, 자리의 서열, 언행의 격식을 훈련시킨다. 그 결과 마침내 장락궁이 완성된 날 새로운 조회 의례가 시행되었을 때, 유방은 비로소 "내가 오늘에서야 황제가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 알았다"고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숙손통이라는 인물이 지닌 재능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상을 논하는 유자가 아니라, 통치에 실제로 필요한 형식과 질서를 설계해내는 실용적 예학자였던 것이다.

 

결론

유경과 숙손통은 언뜻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짝이다. 한 사람은 신분의 미천함에도 굽히지 않고 직언을 던진 강직한 전략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주군을 여러 번 바꾸며 시류에 몸을 맞춘 변신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이 이 두 사람을 굳이 하나의 열전에 묶어놓은 이유는,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는 과정에는 이처럼 상반된 두 종류의 지혜가 동시에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경이 없었다면 한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한 낙양에 도읍하여 훗날 여러 위기에 취약했을 것이고, 흉노와의 관계에서도 성급한 정벌을 반복하다 국력을 소진했을지 모른다. 숙손통이 없었다면 한나라 조정은 여전히 전장의 거친 기풍을 벗지 못한 채, 황제의 권위조차 제대로 서지 않는 오합지졸의 정부로 남았을 것이다. 한 사람은 국가의 방향을, 다른 한 사람은 국가의 형식을 세웠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무기—직언과 예법—를 들었을 뿐,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표, 곧 갓 태어난 제국을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는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사마천의 시선이 특히 예리하게 빛나는 지점은, 그가 숙손통의 처세를 단순히 미화하지도, 단순히 폄훼하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진나라 조정에서 보인 비굴한 아첨과, 한나라 조정에서 이루어낸 실질적 공헌을 나란히 서술함으로써, 사마천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 원칙을 지키다 화를 입는 것과, 원칙을 유보하고 살아남아 결국 더 큰 쓸모를 이루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진정한 지혜인가—이 질문에 사마천은 손쉬운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숙손통이 말년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 곧 큰 절개는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취지의 언급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변신이 지조 없음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 유연함이었다는 최소한의 변론을 슬며시 얹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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