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풍경>버려진 차창으로 만든 유리지붕, 빈곤층에 ‘풍경’을 선물하다
- 문화일보
지붕 하나가 가장 가난한 주민들이 원하는 모든 바를 다 들어줬다. @Forrest Fulton Architecture
■ 건축과 일상
(23) 작은 지붕이 만든 ‘대승건축’
‘빈자들을 위한 건축가’ 목비 교수, 소외지역 머물며 주민 뜻 반영해 커뮤니티센터 설계
개인 위한 ‘소승건축’ 아닌 이타적 ‘대승건축’ 모본… “모든 사람은 영혼 위한 은신처 원해”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말하는 ‘승(乘)’이란 수레를 뜻한다. 큰 수레인 ‘대승’은 온갖 중생을 모두 태워 피안(彼岸)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니 무척 많은 사람이 타고, 작은 수레인 ‘소승’은 자기 한 사람만의 해탈을 목적으로 삼으니 혼자 탄다. 작은 수레의 정원은 한 사람이지만 큰 수레에는 인원 제한이 없다. 소승은 개인적 수행과 해탈을 주장하고, 대승은 사회적·대중적 이타행(利他行)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가르침을 건축에 적용하면 어느 것이 옳다고 금방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이 근거가 되는 건축은 ‘소승건축(小乘建築)’이고, 사회가 근거가 되는 건축은 ‘대승건축(大乘建築)’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은 무엇을 근거로 해야 할까?
‘대승건축’의 시작은 지붕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붕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건축물의 한 요소이지만, 한 그루 나무가 인간의 활동을 덮어주듯이, 건물은 지붕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모아 그 아래에 머물게 한다. 지붕이 ‘큰 수레’가 되는 것이다.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 제목도 있듯이, 지붕은 각기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구별 없이 품어주며 공동체를 이루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건축 요소라는 말이다.
미국 앨라배마주 헤일(Hale)군(郡)은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난 이래 번영하는 미국과는 오늘까지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극빈 지역에 머물러 있다. 인구는 해마다 줄어서 이제는 1만5000명 정도밖에 안 되는데,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극빈층이고 4분의 1 이상이 생활보호를 받고 있다. 1인당 소득도 미국 전체 평균의 절반 정도다. 실업자는 앨라배마주 평균의 2배여서 주민의 13%가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다. 그러니 이들의 주거는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지역에, 학생들과 함께 지역 주거환경을 조금이라도 향상시키고자 ‘농촌 스튜디오(Rural Studio)’를 설립한 건축 교수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건축가’로 불리는 오번(Auburn)대학교의 새뮤얼 목비(Samuel Mockbee) 교수였다. 그는 집을 설계하고 실제로도 시공하는 실습 프로그램인 ‘농촌 건축 스튜디오’의 2학년·5학년 학생들과 함께, 시민단체로부터 가난한 가족의 명단을 넘겨받고 이에 필요한 예산과 건자재를 직접 마련해 9채의 주택과 함께 20곳이나 되는 공동체 시설을 이 지역에 지었다. 그야말로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몸소 ‘대승건축’을 실천한 건축가였다.
이들은 먼저 이 지역에서 실제로 생활하며 빈곤한 지역 주민의 실태를 읽고 커뮤니티의 일부가 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대개는 비용이 문제였다. 정부 주택 보조금은 2만∼4만 달러 정도였지만, 실제로 이 지역에 주택을 지으려면 7만 달러가 있어야 했으므로 정부 보조금으로는 주택을 지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 이 고장에 있는 재료로 주민을 위한 주택을, 그것도 그들의 요구에 맞춰 설계하고 시공하며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주민과 대화하며 설계한다는 것은 요즘 도시 재생을 할 때 많이 등장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들은 달랐다. 이들은 건축주와 이용자인 공동체와 함께 생활하며 건축의 모든 과정을 통해 진정한 건축 과제를 발견해 갔다(‘희망을 짓는 건축가 이야기’에 이런 것이 번역돼 있다).
이런 오지인 헤일의 메이슨스 벤드(Masons Bend)라는 곳에, 그것도 개인이 소유하는 거의 버려진 작은 땅에 그들의 자세를 가장 잘 나타내는 전형적인 건물인 ‘메이슨스 벤드 커뮤니티 센터’를 지었다. 이 마을 인구는 약 100명. 그러나 이들은 저소득층인데도 교회가 없어 낡은 이동주택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주택보다는 작은 예배당이라도 먼저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이 주민들이 모이고 아이들도 돌봐줄 수 있는 공간이 되는 작은 옥외 커뮤니티 센터를 겸하길 원했다.
학생들은 삼나무를 기부받았다. 이 나무로 단순한 집성재를 만들어 트러스를 짜고 남은 것은 의자를 만드는 데 썼다. 다른 자재들은 현장에서 얻은 것들을 재활용했고 흙벽을 세워 커뮤니티 센터를 만들었다. 그런데 지붕의 한 부분은 비늘처럼 유리로 덮었고 나머지 부분은 알루미늄 시트로 덮었다. 이것은 저렴한 공사비로 마무리를 지어야 했음에도 지붕은 어떻게든 투명한 유리로 덮어 바깥 풍경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학생들의 희망이었다. 그렇지만 유리 지붕은 비용이 많이 들어 실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폐차의 방풍 유리를 재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유리는 어디서 생겼을까?
학생 중 한 명이 고향인 시카고에 갔다가 어느 폐차장에서 개최한 이벤트에 120달러를 내고 참가해 노래를 한 곡 불렀다.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는지 그것으로 상품을 받았다. 그 상품은 쉐보레 폐자동차에서 수거한 유리 80장이었다. 아마도 이 학생은 이 커뮤니티 센터에 쓸 유리를 위해 마침 상품으로 나온 자동차 유리 80장을 따려고 출연했을 것이다.
올리고 내리기 위해 쓰였던 차 문 유리창이라, 이 유리에는 이미 구멍이 나 있었다. 이들은 이 구멍을 이용해 새것과 똑같은 자동차 유리를 볼트로 경량 강관 프레임에 조립했다. 이 프레임도 어떤 기자가 기증한 것이다. 이 유리로 다 덮지 못한 부분은 얇은 알루미늄 시트로 덮었다. 그래서 알루미늄 지붕의 좁은 입구를 지나면 마치 물고기 비늘 같은 유리 지붕이 나타나며, 지붕은 주변의 풍경을 가볍게 반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예배당과 헛간이 합쳐진 형태가 됐고, 값싸고 흔한 재료에 유리의 현대적 느낌이 현장에서 합쳐진 건물이 됐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이 예배당을 ‘유리 예배당’(Glass Chapel)이라 부르고 있다.
지붕은 학생이 상품으로 받아온 쉐보레 자동차 유리 80장으로 만들어졌다. @Forrest Fulton Architecture
이 지붕은 어떤 첨단 건물에도 뒤지지 않는 자긍심을 주민들에게 선사했다. 유리 자체가 아니라 유리로 지어서 동네를 훤하게 만들어주자는 설계자의 의도, 그 재료를 얻어온 경위, 부족한 부분은 다른 재료로 대체하는 현장의 지혜,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커뮤니티 센터는 보잘것없이 작아도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큰 집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주요 재료는 재사용하고 약간의 노무비를 포함해 전체 공사비는 1만5000달러(약 1800만 원)가 들었다. 목비 교수는 이 건물을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건물 못지않은 최첨단 건축물”이라고 평했다.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이론이나 설계도에 바탕을 두고 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해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엔지니어와 달리, 뭔가 쓸모 있다고 생각해 모아온 단편, 바로 그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모아 시행착오를 겪으며 최종적으로 새로운 사물을 만드는 사람을 ‘브리콜뢰르(bricoleur)’라고 했는데, ‘농촌 스튜디오’의 학생들이 바로 이런 ‘브리콜뢰르’였다.
이 건물은 학생들에게는 1999년 졸업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에 완공된 이 커뮤니티 센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진 20대의 학생들과 훌륭한 선생이 함께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바닥에는 흰 자갈이 깔려 있고, 지금도 이곳에서는 예배를 드린다. 게다가 마을 중심부인 이곳에는 자치주 기금으로 운영하는 이동도서관과 이동보건소 차량이 정차해 교육과 의료 서비스도 해 주고 있다. 더위를 피해 잠깐 쉬는 곳도 되고, 주민들의 집회장이 되기도 하며, 동네 합창단의 연습장이 되기도 하고, 여름학교의 무료 급식소 역할도 해 준다. 게다가 밤이 되면 이 건물의 등불이 행인의 길을 밝혀 주기도 한다. 그야말로 지붕 하나가 따뜻하게 가난한 주민들이 원하는 모든 바를 다 들어주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이 공적인 것, 다목적적인 것, 모두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사용할 수 있는 모두의 집이다. 그러니 이 건물은 결코 허름하지 않은 ‘대승건축’이다.
우리나라 건축가 중에는 건축설계를 고도의 문화적인 작업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다. 물론 건축설계는 고도의 문화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건축설계를 고도의 문화적인 작업으로‘만’ 생각하는 게 문제다. 건축가의 고매한 사상이 들어가 아름답고, 멋있고, 매끄럽고 감각적인 모양과 색채를 가진 건물을 만들면 좋은 설계, 문화적 안목이 있는 좋은 디자인이라 믿고 있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기만 할까? 문화의 가치만이 건축설계의 모든 목적일까? 본래 디자인의 가장 큰 목적은 사람의 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데 있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사회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의 생활도 더욱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2007년 뉴욕의 쿠퍼 휴잇 국립디자인박물관(Cooper-Hewitt National Design Museum)에서 인상적인 한 전시회의 제목을 ‘나머지 90%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Other 90%)’이라 붙였다. 오늘날의 디자인은 세계 인구의 10%밖에 안 되는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머지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디자인이란 어떤 것인지를 이 전시회는 묻고 있었다.
늘 새로운 옷을 달리 입고 나오는 자동차나 휴대전화를 디자인하는 것이 디자인의 전부가 아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해 주는 디자인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이런 인식 아래 설계되는 건축물이 우리 사회에 많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디자인은 제품을 팔기 위한 ‘상업적 디자인’이다. 대부분의 건축설계를 수주하는 과정이나 해결하는 결과도 따지고 보면 상업적 설계에 속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축설계도 대부분은 잡지의 특집으로 소개되는 상업적 디자인에 속한다. 그러나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에너지를 절감하거나, 누구에게나 깨끗한 물이 공급되게 하거나, 빈곤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도록 요구하는 디자인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이렇게 사회문제를 의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설계를 ‘사회적 디자인(social design)’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소비를 위해서가 아닌, 고장의 재료를 사용한 적정한 기술로, 설계 과정에 주민이 깊이 참여해 주민과 함께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축, 그래서 누군가에게 늘 고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축물이 이 땅에 많이 지어져야 마땅하다.
평생 이런 건물을 농촌에 지어온 목비 교수는 “건축설계란 바깥에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는 사람들의 안쪽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똑같이 따뜻하고 깨끗한 방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한 은신처도 원한다”고 믿었다. 유명한 건축가가 지어준다고 저절로 훌륭한 건물이 되는 게 아니다. 모두를 담는 ‘대승건축’은 간단한 지붕, 그러나 사회적인 애정을 가지고 조건과 요구를 만족하려고 애써 설계한 작은 지붕에서도 충분히 시작되는 법이다.
(문화일보 9월 4일자 19면 22 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 용어설명
희망을 짓는 건축가 이야기 : 미국 건축가 새뮤얼 목비(Samuel Mockbee)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원제 ‘Rural studio : Samuel Mockbee and an architecture of decency’).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이자 소외된 흑인들의 거주지역인 앨라배마주 헤일(Hale)군에 희망의 집을 무료로 지어준 새뮤얼 목비 교수와 그가 개설한 오번(Auburn)대학교 건축학과 실습 프로그램인 ‘농촌 스튜디오(Rural Studio)’의 활동을 그렸다. 목비 교수가 건축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며 경제적이고 견고한 재료를 이용해 건축물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도하는 모습을 120장이 넘는 사진과 함께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월간 ‘아키텍처’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던 저자 안드레아 오펜하이머 딘은 훌륭한 건축가란 ‘위대함보다 선량함을, 정열보다는 연민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책은 2005년 ‘공간’ 사에서 번역, 출간됐지만 현재는 절판돼 ‘중고 서적’으로만 구입할 수 있다.
브리콜뢰르(Bricoleur) :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가 자신의 대표작 ‘야생의 사고(The savage mind)’에서 정립한 개념. 사전적으로 브리콜뢰르는 ‘도구를 닥치는 대로 써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문명 세계의 엔지니어는 목적에 꼭 맞는 재료와 도구가 없으면 일하지 못하지만, 야생의 세계에서 브리콜뢰르는 자기 앞에 있는 한정된 재료와 도구만으로도 이를 활용해 현실을 극복해 나간다. 전문가들은 융합의 시대인 21세기에야말로 브리콜뢰르들이 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출처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풍경>버려진 차창으로 만든 유리지붕, 빈곤층에 ‘풍경’을 선물하다 :: 문화일보 mun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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