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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지식카페>평생 이동하는 삶… 숱한 타인과 모였다 흩어지는 ‘단말기’ 같은 곳

<지식카페>평생 이동하는 삶… 숱한 타인과 모였다 흩어지는 ‘단말기’ 같은 곳

  • 문화일보
  • 입력 2019-07-03 10:37

공공공간이 된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 대합실.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19) 지하철역과 버스 터미널

집은 ‘定住 사회’전제로 한 것
직장·학교 등 규칙적인 이동外
체험·자극 찾아 끝없이 움직여

터미널은 끝에 있는 경계 뜻해
본래 중심의 지배 받던 곳인데
오늘날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의 경우
시내·고속버스·지하철 거미줄
주변엔 백화점·호텔·식당까지

머무는 곳이 아닌 통과하는 곳
이용료 없는 사실상 공공 공간
佛학자는 ‘非장소’로 부르기도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내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은 미술관이나 문화센터가 아니다. 타고 내리고 이동하려고 찾아가는 지하철역에 제일 많이 간다. 몇 해 전 다른 곳에서 잠시 살고 있었을 때는 우리 집까지 오게 할 수 없어 지하철역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에서 많은 사람과 만났다. 하도 이곳에서 자주 만났더니 나중엔 “아, 지하철역 그 카페에서 뵈면 되지요?”라고 먼저 말해줄 정도가 됐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내가 사는 곳의 단말기와 같아서 그곳을 중심으로 생활의 반경이 결정될 정도로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다.

‘집’이라고 하면 가족과 함께 이 땅에 머물며 살 수 있는 행복한 장소요 생활과 존재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늘 어디에 머무는 장소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이루며 정적으로 사는 정주(定住) 사회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들의 도시 생활이 이렇게만 이뤄질까? 아니다. 우리는 계속 이동하며 산다. 직장이나 학교에 등 규칙적으로 되풀이하며 이동하기도 하고, 새로운 자극이나 체험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오늘날의 도시는 정주 사회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그래서 도시 안에서 이동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이다.

본래 도시는 교통에서 생겨났다. 도시가 있어 교통이 생긴 것이 아니고, 교통이 있어서 도시가 만들어졌다.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서 오지의 성전으로 나오는 도시 ‘페트라’는 옛 나바테아(Nabatea) 왕국의 수도이며 향신료와 같은 귀한 물품 교역이 이뤄진 큰 도시였다. 그러나 교역이 끊기자 급히 쇠락하고 말았다. 이렇듯 도시는 교통, 통신을 매개로 하여 신체, 재화, 정보가 움직이고 만나는 곳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움직이는 사회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어떤 것일까? 침묵과 비움의 미술관? 아니다.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건물은 사람과 물건이 늘 꽉 차고 시끌벅적한 교통시설이다. 그래서 침묵과 비움의 건축은 이런 건물을 건축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 증축된 서쪽 통로 광장.


인쇄된 지도에는 나의 이동이 없다. 이런 지도에는 모든 장소의 위치가 좌표계의 격자 속 점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지도를 켜기만 하면 내가 있는 위치와 그 일대가 나타난다. 스마트폰 지도를 이용해 어디를 가고자 하면 어떻게 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한다. 이로써 나는 이미 그 지도의 공간 속에 들어가 있다. 인쇄된 지도의 어떤 점이 아니라, 버스, 지하철, 택시, 도보, 자전거 등 이동 방법에 따라 어디에서 어디까지 어떤 흐름의 선을 택할까를 표시해준다. 그것뿐인가? 움직일 때마다 나의 이동은 계속 적분되며 수정된다.

스마트폰 지도에서 서울 고속터미널역이나 강남역 등 교통의 흐름이 크게 교차하는 곳에는 지하층의 평면까지 표시된다. 더구나 이 지하층 평면을 확대하면 연결통로만이 아니라 상점 위치와 이름도 나오며 심지어 그 상점의 상세한 정보까지 소개해 준다. 늘 경험하는 이 사소한 사실에서 변화하는 우리의 일상공간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 도시에는 흐름과 이동이 교차하면서 결절점이 생기는데 지하철 환승역이 그것에 해당한다. 지하철 환승역은 갈아타는 역이지만, 인천에서 전철 타고 온 친구, 강북에서 버스로 온 친구, 근처에서 걸어서 온 친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장소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자주 만나면서 이런 환승역은 조금씩 천천히 이 시대 우리 도시의 중요한 장소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속버스나 시외버스, 선박 등의 시점이나 종점을 터미널(terminal)이라고 해서 고속버스터미널, 시외버스터미널, 여객선터미널이라고 부른다. 철도나 버스가 도착하고 출발하는 터미널은 본래 끝에 있는 것, 경계부를 뜻한다. 자료가 도착하고(입력) 출발(출력)할 수 있는 PC나 휴대전화를 터미널 또는 단말기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중심은 전체를 지배하고 이끄는 부분이지만, 주변은 중심의 지배를 받는 끝자락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전세가 뒤바뀌었다. 중심이라 여겼던 곳이 활기를 잃고 주변이었던 곳이 에너지가 넘치는 곳으로 변화하게 됐다.

서울의 센트럴시티터미널은 3개의 지하철역이 만나는 환승센터이며 이곳에 29개의 시내버스와 전국 42개 고속버스 노선이 이어져 있다. 게다가 이 건축물은 서울강남고속터미널과 이웃해 있고 백화점, 호텔, 식당가에 880m나 되는 서울 최대의 지하쇼핑몰도 연결돼 있다. 이 정도 되면 건축물 센트럴시티터미널은 그 자체가 교통과 통신을 매개로 사람, 물건, 정보가 움직이고 만나는 흐름의 도시다. 더구나 이렇게 연결된 전체는 모두 에어컨으로 조절되는 하나의 거대한 내부 공간이다.

센트럴시티터미널의 대합실은 고속버스를 기다리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가 대합실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곳에서 다른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무더운 여름에는 쉬고 가는 공원과 같은 장소이자 연결통로로도 쓰이는 공공공간이다. 자동차로 쇼핑센터에 가면 그 자체로는 공공영역이 아니지만, 걸어서 지하철역을 끼고 쇼핑몰과 함께 있는 버스터미널에는 기다리고 쉴 수 있는 공공공간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테마파크에서는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려고 시설 이용료를 내야 하지만, 쇼핑몰이나 버스터미널은 물건을 사지 않거나 버스를 타지 않는 사람도 모두 함께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곳은 법적으로는 공공공간이 아닐지라도 성격으로는 충분한 공공공간을 제공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King’s Cross Station)은 많은 지하철과 철도가 교차하고 있는 중요한 허브 역이다. 그런데 2012년 이 역의 서쪽에 대규모의 통로 광장이 증축됐다. 오랜 철도역의 벽에 기대어 반지름이 54m인 반원형의 지붕 구조가 2000개의 삼각형 지붕 패널로 이뤄져 있다. 단일한 역의 구조물로는 그 간격이 유럽에서 가장 길다. 승객들은 이 지붕 밑으로 주요 라인과 교외선으로 분배되고 자유로이 지하철에서 나오거나 가로로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한편에 발코니를 따라 각종 레스토랑이 있는 풍부한 쇼핑몰을 두었다. 왜 이런 것이 철도역에 세워질까? 그만큼 교통시설이 이동하는 도시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표를 사고 들어와 전시된 작품을 관람한 다음 정해진 출구로 나가게 돼 있다. 많은 건물이 이렇게 돼 있다. 그러나 거대한 교통의 연결망을 가지고 있는 버스터미널이 대형 쇼핑몰로 이어진 곳이라면 어느 누구나 어떤 위치에서 자유롭게 들어와 나가고 싶은 쪽을 선택해 드나들게 해 준다.

그렇지만 이런 교통 건축물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다. 미술관과 같은 건물은 미술 작품을 본다는 목적을 위해 가는 건축이지만, 지하철역이나 고속터미널은 그저 지나가기 위한 통과 건축이다. 사무소 건축이나 컨벤션센터는 사람들을 담는 그릇이지만, 터미널은 물을 주면 밑으로 다 빠지는 구멍 뚫린 화분과 같은 건축물이다. 그러나 터미널이나 지하철역과 같은 건물은 노점상이 있는 명동의 번화한 거리를 지나가다가 물건 구경을 하기도 하고 다른 길로 가기도 하는 아주 평범한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우리는 내 집 안에 내 마음이 머무는 나만의 방이 있고, 학교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친구들과의 추억이 깃든 자리가 있거나, 창신동처럼 오랫동안 봉제산업의 애환이 깃들어 있던 길, 골목, 가게 등이 있는 지역을 ‘장소’라 부른다. 장소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의 집합적인 기억이 쌓여 있으며 시간 속에서 변화해 가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도시에는 이런 장소가 많아야 좋은 도시가 된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오늘날의 도시는 이런 뜻깊은 장소로만 둘러싸여 살지 못한다. 이동하며 사는 것이 도시의 실제 생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보면 많은 것을 밖에 의존하며 산다. 그래서 늘 이동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정주와 유목(遊牧) 사이에 있는 존재가 됐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특정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익명적으로 주변을 관찰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집과 일하는 곳 사이, 여가를 즐기러 가는 사이에 지하철역, 고속도로, 쇼핑센터, 슈퍼마켓, 호텔, 공항, 길모퉁이, 몰, 광장 등 활동의 영역이 모호한 ‘중간공간’을 수없이 드나들게 됐다. 이 모든 것은 이동하는 시간을 공간으로 만든 시설들이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크 오제(Marc Auge)는 이동의 수단이 되는 지하철역, 고속도로 휴게소, 공항, 쇼핑센터, 대형할인매장, 슈퍼마켓, 체인 호텔, 환승공간, 레저 파크처럼 전 세계 어디에 가도 똑같은 풍경을 만드는 장소를 ‘장소가 아닌 장소’라는 뜻으로 ‘비장소(非場所·non-place)’라 불렀다. ‘비장소’란 장소라고 보기에는 장소의 성격을 잃고 의미가 부족한 장소를 말한다. ‘비장소’는 통과하는 것이 목적이지 기억을 남기려고 머무는 장소가 아니다.

‘비장소’라 하니 부정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비장소’란 장소의 성격을 잃었음을 부각하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도시에서 생활공간의 일부로 크게 차지한 이동공간이 장소는 아닌데도 이와 유사하게 다가오고 있어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 ‘비장소’다. ‘비장소’에서는 내부와 외부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경험한다. 종래의 장소와는 달리 이동 중에 경험하는 ‘비장소’는 오늘날 초근대(超近代)의 사회적 관계를 잘 나타낸다. 특히 스마트폰 지도에서 실내 지도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서울 고속터미널역 등이 바로 교통의 흐름이 교차해 생기는 이런 ‘비장소’다.

‘비장소’에서는 사람의 움직임도 다르다. 이런 곳에서는 특별하게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며 제각기 어딘가로 움직인다. 교통을 매개로 하여 도시의 일상공간에서 광역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서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으로 이뤄진다. 이런 무리를 군집(群集·crowd)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정한 사회적 존재방식인 집단(集團)과 다르다. 군집은 상업시설이나 교통시설 속에서 어떤 시간대에 서로 타자(他者)인 채로 모이고 흩어지고 이동한다. 그러므로 군집이 사용하는 도시공간은 공공공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정주 공간의 장소, 서로 친하고 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그리워하며 이 군집의 행동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나도 그 안의 한 사람으로 오늘 이 현대의 대도시에서 이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이동하면서 늘 외부와 접속되는 건물은 흔한 것이라고 낮추어 보기 쉽지만, 실은 그런 건축물이 대도시의 일상 생활공간을 대부분 차지한다. 그리고 이런 건물들은 사회를 이끄는 현실적인 자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현대건축은 여전히 농경사회에 근거한 공동체, 골목길, 동심원적인 도시 모델에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현대건축의 과제는 고독 속의 자유, 타자, 좁은 공간,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관계를 그대로 바라보는 데 있다. (문화일보 6월12일자 28면 18 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