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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지식카페>프랑스 왕실·귀족의 동물 전시실이 기원… ‘서민 공간’으로 진화

<지식카페>프랑스 왕실·귀족의 동물 전시실이 기원… ‘서민 공간’으로 진화

  • 문화일보
  • 입력 2019-07-24 10:26

베르사유 궁의 메나제리. @The Stapleton Collection/The Bridgeman Art Library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20) 동물원의 역사

17세기 궁정 정원이나 공원에
동물들의 집 ‘메나제리’라 불러

루이 14세, 사육장 하나 더 짓고
8각형 평면을 동물 우리로 분할
중앙 건물에서 내려다보며 즐겨
세계를 굽어보는 파노라마 시선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지만
권력자 취향 따른 분류 벗어나
린네의 분류 따라 동물들 배치
1778년 이르러 일반인 첫 공개

동물 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로
런던 동물원 조류사육장 설계
밖에서 바라보던 통념 뒤집고
관람객도 함께 나는 듯한 느낌

“우리 동물원은 105종 750여 마리의 동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동물과 사람이 함께 행복한 동물원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 사람은 수집해 온 동물의 진귀한 모습에 흥분하고 동물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데, 이런 동물원이 과연 행복한 곳일까? 동물원은 도시 생활 속에 동물의 야성을 전시하는 시설이다. 식물원에 있는 식물은 공간 안에 자리를 잡고 자라난다. 그러나 동물원에서는 포획돼 온 동물과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 사이에 긴장이 흐른다. 안전을 위한 거리를 두고 동물과 사람이 서로 바라보는 곳. 그래서 동물원에는 야성과 문화 사이의 특유한 스펙터클이 있다.


동물원은 수집과 분류의 전시 공간이다. 수집은 축적과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고, 분류는 사물이 공간 속에서 등가로 공존하게 하는 지적인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동물원은 박물관, 미술관과 다르지 않다. 박물관은 진기한 물품을, 미술관은 예술 작품을 수집하고 분류 전시하지만, 동물원이라는 시설은 동물이라 해서 색다르게 보일 뿐, 그 본질은 수집이고 분류이며 전시다.

인류 최초의 동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아의 방주가 아니었을까? 모든 동물을 홍수로부터 보존하기 위해 3개의 층에 동물을 나누어 실었다. 그리고 이 동물원은 40일 동안 물 위를 떠다녔다. 그런데 바로크 시대의 만능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는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노아의 방주를 복원했다. 그의 상상적 복원에 의하면 수많은 동물이 균질한 아파트처럼 36개의 사각형 공간 속에 정연하게 분류돼 있었다. 흔들리는 배 안은 수집되고 분류된 동물원이었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은 자연이나 동물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근대라는 시대가 새로 고안한 것이다. 19세기에는 런던(1828)에 이어 암스테르담(1838), 안트베르펜(1843), 베를린(1844) 등의 도시 중심부에 동물원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19세기 말까지 세계에는 50개 정도의 동물원이 문을 열었다. 그 정도로 동물원은 근대의 시기에 식민지를 가진 유럽 국가에 집중돼 있던 사회적 시설이었다.

동물원은 영어로 ‘zoo’다. 그러나 19세기에 영어로 동물원을 나타내는 ‘zoo’라는 용어가 확립될 때까지는 17세기 초 프랑스 궁정의 정원이나 공원 안에 세운 왕실 또는 귀족이 수집한 동물의 집을 ‘메나제리’(menagerie)라 불렀다. ‘구경거리 동물 전시시설’이라는 뜻이다. 메나제리는 사로잡힌 야생 동물의 수집을 말하는 16세기 초의 중세 프랑스 용어로, 이 말의 어근 ‘menage’는 14세기 초 생산을 위한 가정용 우리를 관리한다는 뜻이었다.

메나제리는 마치 르네상스 유럽의 호사가들이 진귀한 물품을 보관하는 ‘카비네(cabinet)’와 비슷한 방식으로 동물을 수집하며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곳이었다. 또 이국적인 동물을 메나제리에 모아 놓는 것은 자기가 세계를 통제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메나제리에선 수집된 동물을 분류하고 유형학에 근거해 동물을 다루고 관찰했다.

런던 동물원 조류 사육장, 세드릭 프라이스 설계. @redthreadlogic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이국적인 새나 작은 동물들은 궁정의 장식품으로 여겼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1660년대 늘어나는 사나운 동물들을 관리하려고 두 개의 메나제리를 새로 지었다. 1661년 파리의 뱅센(Vincennes)에 세운 메나제리는 그 두 개 중 하나인데, 이 메나제리는 사나운 짐승들의 피 튀기는 싸움을 귀빈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지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국왕의 동물원을 해체했다. 이곳의 동물 일부를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파리 식물원의 과학자들에게 넘겼으나 이들이 일부 동물을 살려냈다. 이것에 베르사유 궁에 있던 메나제리가 해체되면서 인수한 동물들이 합쳐졌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근대적 동물공원인 오늘날의 파리식물원 부속 동물원(Menagerie le Zoo du Jardin des Plantes, 1793)이 생겼다. 이렇듯 건축에서 시설이란 기능적인 용도만을 위해 지어지지 않는다. 건축의 시설이란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때로는 계급적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그야말로 무한히 펼쳐지는 듯한 광대한 기하학적 정원을 가지고 있다. 그런 대정원의 한 모퉁이에 1664년 루이 14세는 이국적 취미의 동물사육장을 하나 더 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뱅센의 메나제리와는 달리, 자신의 위엄을 높이고 조신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주려는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동물원에서 흥미로운 점은 시선과 분류다. 동물사육장의 중앙에는 돔을 얹은 바로크 양식의 8각형 퍼빌리언을 두고, 주변도 이에 맞추어 8각형 평면을 동물 우리로 분할했다. 우리에는 제각기 다른 종류의 동물이 들어가 있었다. 한 변은 출입구가 되고 나머지 7개는 우리에 면하고 있었으며, 퍼빌리언과 우리 사이에는 산책로가 있었다. 당연히 이 건물의 가장 위층에 국왕이 서서 각 면의 창에서 분류된 야생의 동물을 내려다보며 즐겼다. 세계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파노라마의 시선이다.

왜 동물사육장은 원형이며, 중앙에 서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했을까? 먼저 기하학적으로 원은 세계를 표상한다. 동물은 국가를 표상하고 동물원은 세계를 표상한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2년 중국과 미국 정상은 우정의 표시로 판다와 사향소를 교환했다. 한·중 수교 2주년에도 중국 정부는 한국에 판다를 보냈다. 이렇듯 동물은 국가를 상징하며, 동물 교환은 국가의 관계를 상징한다. 또한 동물원에 이국적 동물이 있다는 것은 그 동물로 표상되는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도 됐다. 그래서 동물원의 평면은 원형이며, 원의 중심에는 지배자의 시선이 있었다.

베르사유 궁의 메나제리는 그 후 유럽 전역에서 모방됐다. 그중에서 이것을 제일 먼저 모방한 것은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Schonbrunn) 궁전의 동물원이었다. 프란츠 1세는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 1752년에 동물원을 완성했는데 짓는 데 7년이 걸렸다. 현존하는 동물원 중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다. 중앙에는 작은 퍼빌리언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등에서 포획해 온 동물들을 방사상으로 나뉜 13개의 우리에 넣었다.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는 이 퍼빌리언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코끼리, 낙타, 얼룩말 등을 360도로 둘러보기를 즐겼다.

근대 동물원에서는 권력자의 취향이 아니라 린네(Linne)가 시작한 분류에 따라 동물들을 배치했다. 동물원에서는 동물의 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수컷과 암컷 각각 한 마리씩, 많은 종류를 우리라는 공간에 분류해 기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동물에게 우리는 감옥이다. 그래서 베르사유나 쇤브룬의 사육장에서 루이 14세나 테레지아가 한 곳에서 주변 동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교도관이 중심에 서서 죄수를 감시하는 제러미 벤담의 ‘패놉티콘’(panopticon, 일망감시기구)과 공간 형식이 똑같다.

테레지아는 1778년 쇤브룬 궁전의 동물 사육장을 공개했다. 이것을 계기로 그때까지 특권층의 것이었던 동물사육장은 모든 서민이 즐길 수 있는 동물원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일요일만, 그것도 아주 점잖은 정장을 한 사람들에게만 개방되었지만, 1779년에 결국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그러자 이 동물원은 순식간에 대성황을 이뤘다.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18세기 말부터 귀족들이 수집한 유물이나 미술작품을 시민에게 공개한 박물관과 미술관은 산업박람회장과 함께 도시를 대표하는 시설이었다. 프랑스 혁명 중인 1793년에 파리 동물사육장도 일반에게 비로소 공개돼 시민에게 열린 동물원이 됐다. 일정한 요금만 내면 누구라도 귀족의 사유재산이었던 살아 있는 동물을 즐길 수 있는 도시의 오락 장치가 제도화돼 나타난 것이다.

1818년 영국의 타워 메나제리(Tower Menagerie)에는 포유동물이 43마리, 새가 11마리, 파충류가 4마리 있었다고 한다. 이렇던 영국에 런던 동물원이 등장했다. 1826년에 런던 동물학협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협회는 2년 후인 1828년 런던의 리젠트 파크에 세계 최초의 근대적 과학 동물원인 런던 동물원이 개장하자 대부분의 동물을 이 새 장소로 옮겼다. 이 동물원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동물을 수집하고 사육·전시하며 동물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는 목적을 가진 ‘시민’의 동물원이었다. 런던 동물원의 이름 ‘zoological garden’이라는 명칭에서 동물원을 ‘zoo’라고 부르게 됐다. 한편 미국에서는 북미 최초의 근대적 동물원이 1860년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개원했다.

런던 동물원의 공간 배치는 베르사유의 동물 사육장과 전혀 다르다. ‘왕의 장소’(미셸 푸코, ‘말과 사물’)에 시민이 등장했다. 원형의 평면 기하학적 중심, 높은 데서 동물들을 내려다보는 중심은 사라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이 주체가 돼 스스로 자유로이 움직이며 파노라마의 시선을 즐기는 동물원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중심이 해체된 것이 아니다. 런던 동물원은 여전히 지구의 모든 지역에서 동물을 수집하고자 한 제국주의의 부산물이었다. 런던 동물협회의 취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물학은 단지 흥미로운 지적인 학문이 아니라 창조주의 위대한 지혜의 힘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자연 신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그럼에도 현대건축은 동물의 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로 동물원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1960년 세드릭 프라이스(Cedric Price)가 설계한 런던 동물원의 조류 사육장(Snowdon Aviary)은 이런 지혜를 보여주었다. 프라이스는 영구적인 구조물로 건축물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며 상황에 맞게 변화하는 건축을 주창한 건축가였다. 그러나 이 사육장은 그가 실현한 유일한 작품이었다. 새장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이 상식인데 그는 이를 반대로 생각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 조류 사육장은 일단 새들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면 그물을 제거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구조물은 가설적이다.

프라이스는 큰 새가 방해를 받지 않고 날아다닐 수 있게 3각형 스테인리스 스틸프레임과 장력 케이블에 알루미늄 망을 덮어 공중에 떠 있는 경쾌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이 구조는 끝에서는 높고 가운데에서는 낮게 나는 철새의 이동 패턴과 횃대 사이를 이륙하고 착륙하는 새들의 움직임을 모방했다. 더구나 그 구조물의 내부에 걸쳐진 다리로 사람이 통과할 수 있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새를 관찰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새에게 관찰당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역전된 공간감도 느끼게 하지만, 사람은 자기도 공중을 나는 듯한 느낌으로 새를 감상할 수 있게 만든 유머러스한 새장이다.

그러나 이 조류 사육장은 원숭이 사육장으로 곧 리노베이션을 하기로 돼 있다. 그럼에도 이 조류 사육장은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깊이 인식한 건축물로 기록될 것이다. (문화일보 7월3일자 28면 19 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출처 - <지식카페>프랑스 왕실·귀족의 동물 전시실이 기원… ‘서민 공간’으로 진화 :: 문화일보 mun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