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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지식카페>수천개 상품의 파노라마… 전시공간이 ‘욕망하는 대중’ 낳았다

<지식카페>수천개 상품의 파노라마… 전시공간이 ‘욕망하는 대중’ 낳았다

  • 문화일보
  • 입력 2019-05-01 10:40
 
 

철과 유리로 지어진 수정궁 내부. 수정궁은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제1회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졌다. @ Pinterest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16) 근대적 소비공간의 원형 ‘수정궁’·‘봉 마르셰’

- 첫 만국박람회 열린 英 수정궁
30만장 유리 뒤덮은 전시장에
각국 산업제품 한데 모아 배치
당시 영국인 3분의 1이 다녀가
대부분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

- 세계 첫 백화점 佛 봉 마르셰
처음으로 상품 쇼윈도에 진열
장대한 건물안 샹들리에 장식
손님에 귀족이 된듯한 느낌 줘
에스컬레이터로 이동 쉽게 해

1859년 세계의 인구는 10억 명이었는데 1925년에 20억 명이 됐다. 10억 명이 느는 데 66년 걸렸다. 그러던 것이 1960년에 30억 명이 됐고 2000년에 60억 명이 됐다. 30억 명이 느는 데 불과 40년 걸렸다. 이런 속도로 증가하다가 2019년 현재 76억 명이 됐다. 1859년부터 160년 사이에 무려 66억 명이나 늘었다. 이런 인구가 도시에 급격히 모여들자 도시의 역할도 크게 변했다. 도시가 팽창하며 땅값이 올라가자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분리됐고, 예전의 광장과 같은 중심은 도시 안에서 사라지게 됐다.

‘수정궁’을 참고해 지어진 봉 마르셰 백화점의 중앙 계단. @ Brown University Library

 

도시에 흡수된 노동력은 군중이 돼 도시 안에서 이동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인 대중이 됐다. 이들은 근대산업사회를 맞아 기계 생산으로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상품·화폐·자본 속에서 급격히 평등해졌다. 상품은 평등을, 평등은 균일을, 균일은 모방을, 모방은 대중을 낳았다. 20세기 도시 사회와 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851년 런던에서는 제1회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이 주도한 이 박람회는 당시 세계의 공장으로 번영했던 영국의 압도적인 공업력을 세계에 과시하는 동시에 원재료, 기계, 공업제품, 미술 등 네 가지 부문에서 당시의 국가별 첨단 산업 제품을 전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 만국박람회를 위해 임시로 지어진 것이었지만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는, 명실공히 근대건축의 길을 열어준 가장 위대한 건물이 지어졌다. 철골과 유리로 지어진 이 건물은 수많은 제품을 전시하는 거대한 쇼케이스였다. 그런데 이 수정궁이라는 쇼케이스는 수많은 제품을 모든 이에게 보여줌으로써 소비의 욕망을 자극하는 근대 이후의 상업 공간의 원형이 됐다. 지금부터 170여년 전 일이다.

수정궁의 원형이 된 것은 당시 식물원의 온실이었으며,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온실 기사 조지프 팩스턴(Joseph Paxton)이었다. 그는 3800t의 주철과 700t의 연철을 사용해 미리 만들어온 부재를 현장에서 조립하는 프리패브(prefab) 공법으로 불과 6개월 남짓한 기간에 건물을 완성했다. 이때 사용된 유리가 30만 장에 이른다. 사람들은 놀라운 기술로 완성된 수정궁을 통해 빛이 범람하는, 충격적인 무한한 공간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이 수정궁에는 하루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입장했다. 그리고 군중이 돼 광대한 공간의 빛 아래 진열된 상품을 함께 체험했다. 당시 어둑한 벽돌집에서만 살던 사람들에게 수정궁은 그야말로 미래의 새로운 건축공간을 미리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빛과 그림자의 대립이 없는 찬연한 빛의 세계는 마치 지평선을 보는 듯한 무한한 균질 공간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열대 식물이 가득한 대온실이 이국적인 환상을 자극했듯이, 수정궁의 놀라운 건축공간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공업 생산품과 함께 보는 이들의 눈을 크게 유혹했다.

그때의 내부를 그린 그림을 보면 시대를 가장 앞서간 것은 역시 철과 유리로 지어진 수정궁이라는 건물이었다. 다양하고 화려한 제품들이 질서 있게 잘 분류돼 있지 못한 채 어떻게 보면 혼란스럽게 집합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는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은 새로운 건축공간이나 제품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사실 ‘수정궁’이라는 이름도 주최자가 붙인 공식 명칭이 아니라, 당시 인기 있는 풍자 잡지인 ‘펀치’가 붙여준 닉네임이었다. 그러나 이 이름에는 새롭게 등장한 빛의 공간과 그 안에 진열된 제품을 바라보는 19세기 부르주아의 욕망이 잘 나타나 있다.

170여년 전의 수정궁인데도 처음 경험하는, 근대의 새로운 감각이 나타나 있다. 그 하나는 이동하는 군중의 시선이다. 하나의 지붕 아래에 배열된 수천 개나 되는 상품의 세계를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함께 보자니 계속 밀리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전시된 물품 사이를 이동하며 어떤 물건이 자기 마음에 드는지 재빠르게 선별해야 했다. 주최 측은 전시품에 최대한 가까이 오게 하면서도 물건을 볼 수 있게만 할 뿐 만지지 못하게 했으므로 사람들은 오직 눈으로만 전시품을 비교하고 선별해야 했다. 이것은 미술관에서 예술품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초유의 경험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전시된 공간 사이를 파노라마처럼 이동하며 돌아다녔다.

모든 사물이 사람들의 호기심이나 관찰로만 비교됐다. 물건은 일상적인 것인데도 거대한 공간 안에 전시된 이 물건은 비일상적인 것으로 바뀌어 나타났다. 아주 작고 현실적인 사물인데도 대규모의 스펙터클한 공간 속에서는 전시 가치로 바뀌어 나타났다. 이러한 사물의 가치 변화는 오늘날 우리가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의 무수한 상품 속에서 얼마든지 경험하는 바다. 수정궁은 이동하는 군중, 공간 속에서 뒤바뀐 시선과 사물의 가치와 함께 생각해야 할 건물이다.

수정궁에는 141일 동안 600만 명의 사람이 몰려왔다. 런던 인구의 약 세 배, 영국 국민의 3분의 1이 수정궁에 온 셈이다. 그런데 이들 중 가장 많은 사람은 중산계급이었다. 그만큼 수정궁은 중산계급의 사람들을 ‘상품을 욕망하고 소비하는 대중’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박람회장에 올 수 있게 해 준 것은 당시 영국 전국에 설치된 도로망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었다. 수정궁으로 사람을 대량으로 동원한 것은 그 시대 급속하게 발전한 매스 미디어였다. 이 당시에는 영국 전체에 신문사가 무려 1102개나 있었는데, 이런 신문들이 수정궁에서 있었던 일을 매일 보도해 주었다.

이런 수정궁에 이어 그 이듬해인 1852년에는 새로운 형식의 상점이 파리에 나타났다. 그 상점은 봉 마르셰(Bon Marche)라는 백화점이었다. 이런 백화점을 창안한 이는 부시코(Boucicaut) 부부였다. 남편 아리스티드 부시코는 여성용 옷감을 판매하는 상점의 점원이었는데, 그 상점은 처음으로 쇼윈도에 상품을 전시하며 손님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하는 소매점이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부시코 부부는 자금을 마련한 1852년 의류 및 생활용품을 박리다매하는 백화점을 세우고 그 이름을 ‘봉 마르셰’(‘싸다’는 뜻)라고 지었다. 그들은 1년 전에 완성된 ‘수정궁’을 참고했다. 새로운 유형의 건물이란 이런 사람들이 만들었지 건축가가 고안한 것은 하나도 없다.

군중의 출현은 도시에서 소비하는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8세기까지 시장은 흥정의 장소였다. 가게에 들어오는 것은 곧 물건을 산다는 뜻이었다. 물건값이 붙어 있지 않아서 손님은 주인에게 값을 일일이 물어보아야 했다. 그러나 물건값은 사람이나 주인의 기분에 따라 바뀌었고, 구매자의 사회적인 지위와 교섭 능력 등으로도 정해졌다. 더구나 귀족과 농민이 같은 장소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기계화로 대량생산되는 물건 앞에서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의 민주화를 경험하게 됐다.

부시코 부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규모 상점을 생각했다. 여러 상품을 한 곳에 갖추어 놓고, 상품에 가격표를 붙여 공정한 값을 받으며, 사지 않아도 좋으니 자유로이 들어와 상품을 보게 했다. 정찰제로 모든 고객에게 똑같이 판매하는 방식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러면 구매자가 물건을 훨씬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또 무료 배달은 물론, 사 간 상품을 교환도 해 주고 반품도 해 주며 구입한 상품을 우편으로 보내 주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필요한 것을 사러 가기보다는 매장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소비문화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그들이 세운 경영의 원칙은 오늘의 백화점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철도 덕분에 백화점은 광범위한 곳에서 상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또한 승합마차와 철도, 전차와 버스, 지하철 등 19세기 말부터 급속하게 발달한 대중교통이 사람들을 백화점으로 옮겨주었다. 게다가 일간신문 광고가 다양한 계층을 백화점에 오게 만들었다. 새로운 상업 건물은 늘 이렇게 정보의 발달과 관련돼 있었다.

또한 이들은 상점의 입구를 화려하게 만들어 손님을 즐겁게 해 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장려한 건물 안에서 샹들리에가 빛나는 백화점의 높은 천장과 대리석 바닥은 그야말로 궁전이었다. 실제로 백화점 한가운데 궁전에나 있을 법한 장대한 계단을 만들어, 누구나 자신이 귀족이 돼 상품의 궁전 안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좋아하는 상품을 고른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또한 백화점은 균일한 도시 공간을 모델로 해 많은 물건을 격자형 복도로 분할된 점포에 진열했다. 아울러 전관을 에어컨을 통해 균일한 실내환경으로 만들었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백화점은 마치 파노라마를 보듯이 수많은 상품 사이를 걷는 새로운 경험도 제공했다. 이는 19세기 철도가 등장하면서 경험하게 된 파노라마적 공간과도 관계가 있다. 볼프강 시벨부시(Wolfgang Schivelbusch)가 ‘철도여행의 역사’에서 말했듯이 이 경험은 열차의 차창에서 보는 것과 같은 파노라마의 세계였다. “우리는 백화점에서의 상품 현상을 파노라마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가속화된 열차의 속도가 여행자의 풍경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킨 것처럼, 구매자의 상품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킨다.” 여기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자 방문자들을 다른 층으로 쉽게 이동시켰다. 백화점은 그야말로 새로운 판매 방법과 기술,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고안된 빌딩 타입이었다.

열차는 어른이든 어린아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함께 탄다. 그리고 타고 싶은 곳에서 타고,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철도 여행은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백화점은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넓은 장소를 어슬렁거려도 되는 문자 그대로 불특정 다수에게 열린 상점이었다. 또한 백화점은 고객이 전시된 물건처럼 남에게 보이기를 원하면서도 쇼핑이라는 행위에 공공성과 오락성을 덧붙인 또 다른 의미의 근대적 공공 공간이기도 했다.

박람회가 열리던 수정궁의 공간, 상품, 사람, 시선, 욕망은 그 후 그대로 백화점, 쇼핑몰, 테마파크로 이어졌다. 대중사회란 인간이 익명의 개인이 되고 비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사회다. 백화점은 이런 사회가 발명한 새로운 상업 공간이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백화점, 쇼핑몰, 쇼핑센터, 대형할인매장, 아웃렛, 슈퍼마켓과 같은 다양한 소비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익명적인 평등을 누리며 공간을 경험하고 물건을 산다. 그러나 그 출발은 170여년 전 저 먼 나라의 수정궁과 봉 마르셰에 있고, 그것에서 시작한 상품과 그것을 보는 시선을 우리도 되풀이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현대의 일상이란 근대산업사회의 긴 연장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오늘날의 다양한 상업공간은 물건을 팔고살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상업공간을 공연히 낮추어 보는 습관이 있다. (문화일보 4월10일자 25면 15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