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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지식카페>순교터 흙으로 붉은 벽돌 만들어…‘따뜻하게 감싼’ 성전

<지식카페>순교터 흙으로 붉은 벽돌 만들어…‘따뜻하게 감싼’ 성전

  • 문화일보
  • 입력 2019-04-10 10:46
 

네오고딕 양식의 장식고탑을 로마네스크적으로 변형한 전동성당의 정면.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⑮ 호남 최초 서양식 건물 전주 전동성당

일반 로마네스크 성당과 달리
고탑 등 신고딕적 요소 반영
피렌체대성당처럼 위엄 있어
회색·붉은색 두 가지 벽돌로
수직·수평성 살린 탁월한 조형

본래 성당 지으려고 했던 자리
이완용이 자신의 亭閣지어 방해
참수 선고한 전라감영 맞은편인
풍남문 밖 순교터에 건축 결정
신자들 땀으로 23년만에 완공
 

세계적인 걸작인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Notre Dame du Haut de Ronchamp)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크게 파괴된 옛 성당에서 나온 많은 돌과 콘크리트를 새 건물의 벽으로 다시 사용했다. 옛 성당의 돌과 콘크리트가 새 성당의 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독일 뒤렌에 있는 성 안나 성당(Annakirche)도 13세기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당이었으나, 1944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도시의 97%가 파괴됐을 때 이 성당은 바닥만 남기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그러나 1956년 루돌프 슈발츠(Rudolf Schwartz)는 파괴돼 사방에 흩어져버린 성당의 돌을 전혀 새로운 성당에 하나하나 다시 쌓아 올렸다. 700년 동안 도시의 신자들을 감싸주던 성당의 돌들은 그들의 옷이요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건물의 물질은 사람의 몸이 돼 역사와 기억을 이어간다.

전주 전동성당 내부. 두 가지 벽돌로 수직성과 수평성을 함께 조정하면서도 공간을 따뜻하게 감싼다.


전주의 유명한 전동성당(殿洞聖堂)의 돌과 벽돌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위의 두 성당보다 훨씬 영성적이다. 전동성당은 1908년과 1914년 사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고, 호남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자 호남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1937년부터 1957년까지 전주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쓰였다.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을 이해할 때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원통을 반으로 자른 둥근 천장을 돌로 만들어 내부를 덮는 점이다. 이 둥근 천장을 볼트(vault)라 한다. 그러나 이 힘이 수직으로만 가지 않고 옆으로 벌어지려고 하는데 이 힘을 추력(推力)이라 한다. 이 추력을 막으려면 성당 측면을 볼트를 반으로 자른 지붕을 가진 벽체로 버텨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성당 안 내부는 가운데 넓은 통로가 생기고 그 양옆에 또 다른 통로를 두게 된다. 이렇게 해서 3개의 통로가 생기는데 이런 성당을 ‘3랑식(三廊式)’ 성당이라 부른다.

이런 구조가 되다 보니 대부분 성당의 정면 중앙에는 삼각형의 지붕이 높게 서고, 그 좌우에는 기울어진 지붕이 붙게 된다. 그렇지만 유럽의 큰 성당은 그 육중한 둥근 돌 지붕의 무게 때문에 정면의 벽체가 밀려나지 않도록 좌우에는 아주 높은 구조물을 얹는다. 그러니까 이 구조물은 종을 달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더욱 안전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고, 그다음에 이곳에 종을 달았다. 그 대신 이 두 탑은 가운데 지붕보다 훨씬 높았다.

이런 로마네스크 성당과는 달리 전동성당은 유럽의 성당에 비하면 벽돌로 지어져 규모가 작은데도 정면 중앙에 높이 솟아 있는 고탑(高塔, steeple)과 좌우에 있는 계단탑은 성당을 매우 위엄 있게 해 주고 있다. 이 고탑은 계단탑 높이의 두 배나 될 정도로 매우 높다. 그런데 이 고탑은 19세기의 네오고딕(neo-Gothic) 양식에서 나온 형식이다. 고탑은 보통 탑(tower)과 그 위에 종탑(belfry), 또 그 위에 채광탑(lantern)이 놓여진 다음 제일 위에 뾰족탑(spire)이나 돔을 덮었다. 전동성당의 고탑은 마치 피렌체 대성당처럼 약간 위로 솟은 돔(pointed dome)을 제일 위에 얹고 벽돌로 육중하게 처리해 신고딕적 요소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동성당은 ‘비잔틴풍의 총화형(蔥華形) 뾰족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라며 여기저기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총화형’이란 파꽃 모양이라는 뜻인데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비잔틴의 돔은 돔을 받치는 독특한 구조체 위에 얹은 원이거나 타원형의 돔이어야 하므로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서는 둥근 천장을 아치가 띠처럼 가로지르는 경우가 많다. 하중이 대단한 돌 지붕이 내려앉지 않게 보강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전동성당에서는 돌이 아니고 그 표면을 회반죽으로 마감한 둥근 천장을 회색 벽돌 아치가 가로지르고 있다. 유럽의 로마네스크 성당에서는 대개 천장을 받치던 아치가 바닥까지 내려오기도 하고, 집중하중을 받는 기둥(피어, pier)을 세울 때는 기둥머리까지 내려온다. 이렇게 하면 내부 공간의 수직성이 크게 강조된다. 그런데 전동성당에서는 천장에 있던 회색 벽돌 아치가 채광창이 있는 벽에서 멈추고 색깔을 바꾸어 붉은 벽돌로 돌기둥의 머리까지 내려오게 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전동성당이 규모가 작고 입구에서 제대까지 깊이가 별로 깊지 않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 띠는 제대의 뒷벽을 돌아 내부 공간 전체를 따뜻하게 감싼다. 이런 의도를 보강하려는 듯이 트리포리움(triforium, 작은 아치 세 개가 묶여 있는 벽 중간층)의 난간벽도 붉은 벽돌을 주조로 하고 있다. 그 결과 아케이드는 아케이드대로 제대를 돌아 한 묶음이 되고, 트리포리움의 층도 채광창이 있는 벽도 각각 다른 묶음이 돼 공간을 수평으로 감싼다. 만일 천장의 회색 벽돌 아치가 기둥머리까지 내려왔더라면 수직성이 강조되는 것만큼이나 공간의 깊이는 훨씬 덜 깊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벽돌로 수직성과 수평성을 한 번에 조정했다. 정말 탁월한 조형이다. 여기에서 ‘따뜻하게 감싼다’는 것은 유럽 성당에 비해 규모가 작은 전동성당이지만 우리만의 정서를 담고 성공적으로 토착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이 성당의 자리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이며 호남에 천주교를 전파한 모태 본당이고 전교의 발상지였다. 전주본당이 설립된 것은 1889년이었는데, 이때 초대 주임신부로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보두네(Baudounet) 신부가 부임했다. 당시 전주 신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 때문이었다. 전주성당은 날로 급증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에 너무 비좁아서 큰 성당을 짓게 됐다.(‘천주교 전주교구사’) 보두네 신부는 당시 건축설계 경험이 있는 푸아넬(Poisnel) 신부를 찾아가 설계를 부탁했다. 푸아넬 신부는 명동대성당의 설계와 공사를 감독한 코스트(Coste) 신부가 선종하자 그 뒤를 이어 마무리를 지은 사람이었다.

이 성당은 공사 기간 내내 전주 시내에 사는 많은 신자가 공사에 참여했다. 이뿐만 아니라 진안, 장수 심지어는 장성 사거리 지역의 신자들까지 공사 기간 밥을 지어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손마디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어깨에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이는 명동대성당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전동성당은 이런 신자들의 희생적 노력 끝에 1908년 공사를 시작한 지 만 6년 만인 1914년에 외형공사를 모두 마쳤다. 그러나 완공된 것은 1931년이므로 착공에서 성전을 봉헌하기까지는 무려 23년이 걸렸다. 건물의 외형만이 건물의 다가 아니다. 함께 지었던 이들도 건물을 말하는 법이다.

본래 이 성당 설계는 지금의 터가 아닌 오목대가 있는 장소를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이 밖으로 누설되면서 당시 전라도관찰사였던 이완용이 그 자리에 정각(亭閣)을 지으며 방해했다. 이에 뮈텔 주교는 지금 한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오목대를 찾아와 이곳은 전주를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첫 순교자의 피와 얼이 서린 풍남문 근처의 남문 밖 지금 터에 성당을 짓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해 이 터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전주읍성의 성벽은 풍남문을 지나 태조로로 이어지다가 경기전길로 꺾였다. 태조로가 곧 성벽자리였다. 태조를 모시는 경기전이 성벽에 면해 있었는데, 현재 이 경기전과 성당은 길을 두고 마주보고 있다. 그 정도로 성당은 성벽에 바짝 붙은 채 약간 서쪽으로 풍남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우연히도 이 성당은 순교자에게 선고를 내리던 전라 감영과도 마주보고 있었다. 이처럼 전동성당은 먼저 그 자리가 어떤 곳이었는지 이해하고 봐야 한다.

성당 공사가 한창이었을 때 전주 성곽의 돌을 성당 주춧돌로 사용하게 됐다. 일제강점기 통감부의 도로 개수사업과 신작로 신설 계획에 따라 풍남문을 제외한 3개 성문과 성벽이 헐리게 되자 보두네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공사의 노력으로 1909년 7월 철거되는 남문 밖의 성벽 돌과 흙을 성당 건축재로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때 모든 신자는 총동원돼 성벽의 돌과 흙을 운반해 성당의 기초와 벽에 사용했다. 그렇게 하여 같은 해 10월 성당 주춧돌 공사가 끝났다. 그런데 이 주춧돌을 보려면 제대 뒤에 있는 바닥의 작은 문을 열고 사람의 키 정도 지하로 들어가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돌은 그 흔한 돌이 아니다. 순교자들의 참수를 지켜보던 성벽의 돌이 성당의 주춧돌이 됐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전주 풍남문 밖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한 순교터이며, 신유박해 때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과 초기 전라도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것을 더 잘 이해하려면 성당 앞마당에 있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상 앞에 서서 풍남문 쪽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은 커다란 유리 건물이 배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성인상 뒤로 성벽이 겹쳐 보인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면 이 두 성인상을 두고 성당과 성벽이 하나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성당 자리는 성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풍남문에 윤지충과 권상연의 목이 걸려있을 때 그들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전동성당이 있는 이 자리였을까, 아니면 더 멀리 지금의 남천교인 오홍교를 향하고 있었을까?

석재는 화강암으로 제일 유명한 익산 황등산의 화강석을 썼고, 목재는 치명자산을 매입하고 그곳의 나무를 사용했다. 치명자산 또한 유항검과 그의 처 신희, 동정부부로 순교한 큰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 등 유항검과 가족 6인의 합장묘가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하여 전동성당은 지은 자리, 돌, 흙, 벽돌, 나무들이 모두 모여 순교터를 이어받은 건축물이 됐다.

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해 외벽은 중국인 100여 명이 전주에서 구운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그러나 이 붉은 벽돌 벽은 볼 때나 만져볼 때나 늘 보던 평범한 벽돌로만 보면 안 된다. 성당의 붉은 벽돌은 이들의 참수를 지켜본 성벽에서 나온 흙으로 만들어졌다. 명동대성당과 중림동 성당의 벽돌도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 왜고개는 조선시대에 기와와 벽돌을 공급하던 와서가 있던 곳이면서,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로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 병인박해로 순교한 남종삼 등 10명의 순교자가 수십 년 동안 매장돼 있던 곳이었다. 더구나 모든 신자도 힘을 합쳐 이 벽돌을 쌓았음을 상기하라.

왁자지껄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많은 사람이 거닐고 있는 그런 길에 오늘도 전동성당은 서 있다. 그러나 전동성당을 볼 때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숙연한 마음을 가지고 성당과 사라져 버린 성벽의 관계를 생각하며 성당의 붉은 벽돌을 직접 만져볼 일이다. 이 성당의 돌은 도시 안의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지은 사람들의 역사와 기억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일보 3월13일자 28면 14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출처 - <지식카페>순교터 흙으로 붉은 벽돌 만들어…‘따뜻하게 감싼’ 성전 :: 문화일보 mun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