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회색도시’ 주범이지만… 공간의 자유 선사한 ‘회색물질’
- 문화일보
- 입력 2019-02-20 10:30
페터 춤토어의 ‘클라우스 수사를 위한 야외 경당’ 내부. ⓒ김광현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일상 풍경 - ⑬ 철근 콘크리트 - 유용하지만 미움 받는 20세기 재료
1854년 첫 철근콘크리트 주택
다양한 구조 가능한 가소성 甲
가장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자재
성장·효율만 좇다 오명 썼지만
이것 없으면 편안한 현재 없어
‘무미건조·냉정’ 비판도 있지만
‘보편·자유’ 이미지 가진 재료
4535t의 이탈리아 ‘판테온 돔’
美 텍사스의 ‘킴벨 미술관’ 등
콘크리트·빛이 만들어낸 예술
나무나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따뜻하게 느껴지고 철골이나 유리로 지어진 건물은 냉정하다고 느낀다. 건축물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감정은 대부분 그것을 만든 재료에서 나온다. 그렇지만 어떤 재료도 강점이 있고 약점이 있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재료는 비싸거나 높이 지을 수 없고, 냉정해 보여도 튼튼해서 어디에서나 쉽게 지어질 수 있는 재료가 있다. 미움을 받아야 할 재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그 재료를 잘못 사용할 뿐이다.
근대 사회가 전개되기 시작한 19세기가 철골의 시대라면 20세기는 철근 콘크리트의 시대였다. 이 무렵에 포틀랜드 시멘트로 대표되는 인공 시멘트 생산이 크게 보급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과 100년 사이에 도시의 거의 모든 건축물과 인프라스트럭처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기술도 크게 발전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빌딩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 부분만 높이가 586m나 된다.
우리나라는 10명 중 6명이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에서 산다. 이것에 연립, 다세대주택 등을 합하면 75%나 철근 콘크리트 집에서 사는 셈이다. 여기에 학교, 사무실 등의 건물을 넣으면 우리가 사는 도시는 그야말로 ‘콘크리트 숲’이다. 그래서 철근 콘크리트는 삭막함과 획일적인 것의 대명사가 됐다. 성장과 개발, 효율만을 추구하는 과밀한 오늘의 회색 도시를 비판할 때 제일 앞에 등장하는 것이 무미건조한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오죽하면 환경을 파괴하는 콘크리트를 빗대어 ‘concreting of the environment’(환경에 콘크리트 치기)라고 말하겠는가.
콘크리트가 빛으로 변성하는 루이스 칸의 킴벨 미술관 볼트(vault). ⓒPete Sieger
그러나 만일 철근 콘크리트가 이 세상에 없었다 하자. 그러면 회색 도시는 안 나타났겠지만, 매일 땅속에서 타고 다니는 지하철도 없었을 것이고, 바다를 가로질러 섬을 잇는 거대한 다리도 없었을 것이다. 빛도 잘 안 들어오는 비좁은 공간에서 냉난방 설비 없이 살아야 하고, 공업화 건물, 시스템화한 건물은 애당초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아파트를 고작 콘크리트로 지어진 사각형 상자라고 맹렬히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과밀한 도시 주거를 해결하는 데에 아파트만 한 것이 없다. 그래서 애석하지만, 아파트는 여전히 ‘콘크리트 유토피아’다.
인간이 석회와 석고를 사용해 지은 가장 오래된 구축물은 이집트 피라미드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라는 말도 각각 라틴어 ‘caementum’(돌조각)과 ‘concretus’(응결하다)에서 나왔다. 그 정도로 콘크리트는 고대 로마 시대의 다리나 항만 등 토목 공사에 많이 사용됐다. 아르메니아의 초기 건축에서도 콘크리트 공법의 일종으로 안과 밖의 석재 사이에 골재를 넣은 모르타르를 채웠다. 이처럼 콘크리트는 근대 건축보다 훨씬 이전부터 발명돼 사용됐다.
그러나 근대 사회는 19세기 철강업의 발전으로 콘크리트에 철근을 넣어 보강하는 철근 콘크리트 기술을 발명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하도 유명해서 철근 콘크리트 건물도 그가 최초로 개발했다고 잘못 알고 있지만, 철근 콘크리트를 발명한 사람은 건축가가 아닌 엔지니어였다. 1850년 프랑스 정원사 모니에(J. Monier)가 스틸 와이어를 사용해 콘크리트를 보강한 저수조를 개발해서 특허를 얻은 것이 철근 콘크리트의 시작이다. 그러다가 1854년 건설업자 윌킨슨(W. Wilkinson)이 지붕과 바닥 콘크리트에 철근을 보강한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주택을 고안했고, 이후 수많은 산업 시설에 이것이 응용됐다. 시멘트와 물을 섞으면 시멘트 페이스트(풀)가 된다. 이것에 모래를 섞으면 시멘트 모르타르가 되고, 다시 이것에 모래와 자갈을 섞으면 콘크리트가 된다.
콘크리트는 압축력에 강하고 내화성이 높지만 잡아당기는 힘에는 약하다. 그래서 이것에 철근으로 보강한 것이 철근 콘크리트다. 이것에 철골을 넣어 보강하면 철골 철근 콘크리트가 된다.
콘크리트는 수동적이다. 콘크리트는 어디로든 옮겨지고 어떤 형태도 거의 다 만들어낼 수 있다. 또, 다른 재료에 비해 가격이 저렴할뿐더러 빠르게 발전하는 시공 현장에도 가장 잘 대응한다. 고급 기술자가 아니라도 철근을 짜고 경험치로 배합한 걸쭉한 콘크리트 액체를 부어 넣어 만들 수 있고, 미리 만들어온 레미콘도 최종적으로 사람이 조정하는 것을 보면 철근 콘크리트는 철골조에 비하면 세련된 재료는 아니다. 그렇지만 충분히 강도가 있는 품질을 지역이 어디든, 용도가 어떻든 거의 균일한 성능의 구조물을 만들어주는 재료로 철근 콘크리트만 한 것이 없다. 콘크리트를 획일적이고 냉정하다고 비판하지만, 그만큼 그것이 합리적이고 경제적이며 흔히 쓰이는 재료라는 뜻이다. 철근 콘크리트가 싫어서 목조로 짓는다 해도 땅속에 있는 기초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야 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와 혼합된 구조다.
콘크리트는 일정한 형상이 없이 질척질척한 회색의 액체를 비어 있는 거푸집에 흘려 넣어 굳게 해서 만든 재료다. 그래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전체가 하나로 묶인다. 이 덕분에 벽으로 나뉘어 있던 방을 자유롭게 해주고 복잡하고 다양한 요구 조건을 잘 받아주는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게다가 콘크리트는 유동적인 재료를 굳히므로 가소성(可塑性)이 뛰어나 셸 구조, 서스펜션 구조, 절판 구조, 아치 구조 등 볼륨감이 있고 형상이 자유로운 대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철근 콘크리트 덕분에 공간과 물체를 인식하는 태도도 크게 바뀌었다. 서양 건축이란 본래 돌이나 나무를 요소로 해 이를 하나하나 쌓고 결속한 것이어서 요소들의 치수 체계가 아주 중요했다. 그러나 원래 그 자체가 유동적인 콘크리트는 고전적인 질서와는 달리 단위도 없고 분절도 거의 없어서 비례 체계는 의미가 없었다. 그 대신 단순함, 솔직함, 냉정함, 청결함, 강력함을 나타내는 물성(物性)이 있는 추상적인 재료로 해석됐다.
냉정한 물성을 나타내기 위해 노출 콘크리트(exposed concrete)가 많이 쓰인다. 현장에서 친 콘크리트 위에 칠을 한다든지 돌이나 벽돌 등으로 마감하지 않고 거푸집을 떼어낸 상태로 마감한 것이다. 나무는 연륜을, 돌은 서서히 응고된 긴 시간을 드러내며 그것이 생산된 지역이나 장소를 기억하게 해준다. 그러나 플라스틱과 같은 신소재에는 그런 기억이 없다. 마찬가지로 노출 콘크리트도 얼마 전까지는 액체였는데 응고하면서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나 시간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철근 콘크리트는 자갈, 모래, 시멘트, 물에 철이라는 서로 다른 재료가 섞여 있는 불순물이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견고했던 재료도 약점을 드러내고 만다. 알칼리성인 콘크리트는 이산화탄소와 산소로 중성화하면서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그 속에 빗물이 들어가 철근까지 부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노출 콘크리트도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평활하게 하거나 오염을 방지하려고 발수제를 바르고 코팅을 한다.
시공 직후에는 무표정하고 냉정해 보이는 노출 콘크리트라 할지라도 빛이 사진의 필름을 감광시켜 흔적을 영상으로 남기듯이 거푸집의 나뭇결이나 이음매의 흔적을 인위적으로 남길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기억을 담아낼 수 있다. 라야 감독의 영화 ‘집의 시간들’에서 보듯이 재건축을 앞둔 노령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는 새 아파트와 달리 녹지 공간도 많고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로 변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콘크리트 블록 너머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고 표현한다. 정재은 감독의 영화 ‘아파트 생태계’도 무미건조한 줄만 알았던 콘크리트 속에 ‘사적 기억의 온기’가 넓게 퍼져 있음을 그렸다.
그런데도 토압을 막고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콘크리트 옹벽이나 담장과 같은 구조물이 삭막하다며 그 위에 페인트로 벽화를 그리는 사업을 많이 본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벽화의 페인트는 화장처럼 칠할 때는 잠깐 산뜻해 보여도 한두 해도 못 가서 추하게 벗겨지는 거짓 재료다. 디자인 벽화는 생활의 진정성을 지우고 희화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노화하며 물성을 드러내는 콘크리트라는 재료의 시간을 속이는 행위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며 냉정한 회색의 콘크리트라고 비난하지만, 바로 그 콘크리트가 다른 어떤 재료도 보여주지 못한 감동을 건축으로 표현한 예는 너무나 많다. 가장 오래됐지만 모든 사람이 감동하는 콘크리트 공간은 다름 아닌 판테온의 돔이다. 이 돔의 지름은 43.3m이고 중량이 4535t이다. 그런데 이 돔은 철근이 들어 있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큰 콘크리트 돔이다. 돔의 두께는 밑에서 6.4m로 시작해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부분에서는 1.2m로 줄어드는데, 하중을 결정적으로 분산시킨 것은 지름이 9m인 ‘눈’(oculus)이라 불리는 꼭대기의 구멍이다. 이 구멍을 통해 빛이 장대하게 비춰 들어온다. 그리고 아무 무늬도 없는 주변의 콘크리트 면 때문에 이 빛은 더욱 넓게 퍼지며 빛난다. 지어진 지 1800년이나 됐는데도 변함없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시대를 초월한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판테온의 콘크리트 돔은 이렇게 아름답다.
그뿐인가? 미국 텍사스 포트워스의 킴벨 미술관에는 콘크리트만이 가능한 빛의 건축 공간이 구현돼 있다.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은 길이가 30.5m나 되는 사이클로이드(cycloid) 볼트(vault)의 위를 잘라내고, 들어오는 자연광을 작은 구멍이 뚫린 알루미늄 곡면판으로 볼트에 반사시켰다. 그 결과 대공간을 만드는 육중한 콘크리트는 스스로 빛나는 비단으로 변성한다. 밝은 대낮이면 빛나는 비단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어두운 비단으로 변하며 자연의 빛 안에서 중세의 미술 작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는 독일 쾰른 교외의 작은 마을에 이곳에 사는 노부부의 의뢰로 ‘클라우스 수사를 위한 야외 경당’을 설계했다. 서너 명 들어가 앉으면 꽉 찰 공간을 이 마을 사람이 스스로 시공할 수 있게 원뿔형의 인디언 텐트를 치듯이 긴 통나무 112개를 거푸집으로 삼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50㎝씩 1년 동안 부어 굳혔다. 그리고 안에 있는 통나무를 3주 동안 태우며 콘크리트 벽을 검고 거칠게 만들었다. 벽에는 300개나 되는 구멍에 유리구슬을 박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빛이 유리에 빛나며 원시적인 벽면을 비추게 됐다. 거칠지만 섬세하고 차기는커녕 사람의 손이 만든 따뜻한 온기. 콘크리트만이 만드는 공간이다.
이 정도 되면 콘크리트는 냉정하기만 한 회색 재료가 아니지 않은가. 콘크리트는 보편과 자유의 이미지를 가진 재료이자 빛과 함께 시간과 온기를 전해 줄 수 있는 수동적인 재료다. 재료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인식이다. (문화일보 1월23일자 28면 12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출처 - <지식카페>‘회색도시’ 주범이지만… 공간의 자유 선사한 ‘회색물질’ :: 문화일보 mun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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