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풍경>급하게 만든 임시건물, ‘미적 호소’ 없이도 도심 속 활력이 되다
- 문화일보
110m나 되는 긴 경사로에 2500대를 주차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 중앙역 앞의 옥외 자전거 보관소. 수상버스가 그 아래에서 연결된다. ⓒWikimedia
■ 건축과 일상
(24) 암스테르담 자전거 보관소
수상버스서 환승위해 운하 위에 지어져… 뚫린 벽으로 중앙역·광장·도로 한눈에 들어와
건물과 건축의 차이는 예술적 가치의 유무?… 구분 자체가 낡은 사고방식
‘건축’(建築, architecture)과 ‘건물’(建物, building)이 왜 다를까? 이 두 말은 다른 단어이니 당연히 다른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건축이고 어떤 것이 건물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건축은 ‘the art or science of building’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서 ‘building’이란 건물이 아니라 ‘짓기’이므로 건축이란 ‘짓는 방식 또는 과학’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를 ‘건축술’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많지만, “건축은 건축술이다”라고 하면 같은 말을 되풀이하니 무슨 말인지 더 알기 어렵다. 일상에서는 이렇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어쨌든 건축이란 ‘짓는 방식’이지 ‘지어진 것’은 아니다.
‘짓는 방식’이란 이런 것이다. 수많은 재료를 선택에서 집합하는 방식, 태양열을 활용해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식, 방과 방을 연결해 사람들에게 쓸모 있게 만들어가는 방식, 주변에 남아 있는 오래된 나무와 공존하는 방식, 교육의 본질을 생각해 이것을 공간으로 바꾸는 방식 등 그 방식은 참으로 많다. 집을 짓는 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건축’이다.
그래도 ‘짓는 방식’에는 짓는 대상이 되는 것, 곧 구조물이 있어야 하는 법. 이때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건물이다. 건물은 땅에 정착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무나 돌과 같은 구체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벽과 지붕 등으로 지어져야 한다. 이것에 한 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 건물은 사람이 거주하려거나 일하려거나 물건을 보관하려는 여러 목적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래서 건물에는 주택이며 사무소며 창고와 같은 일정한 용도가 정해져 있다. 따라서 건물은 땅, 재료, 벽과 지붕과 같은 요소 그리고 용도가 합쳐진 것이다. 건축과 건물은 이렇게 다르다.
그런데 건축과 건물을 지나치게 구분한 사람이 있었다. 건축역사가 니콜라우스 페브스너(Nikolaus Pevsner)였다. 그는 1943년에 쓴 저서 ‘유럽 건축사 개관(An Outline of European Architecture)’에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건축과 건물을 구별하는 말이, 널리 읽혔던 이 책의 서문에, 그것도 제일 앞줄에 쓰인 덕분에 매우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이렇게 썼다. “자전거 보관소는 건물이지만 링컨 대성당은 건축의 하나다. … 그러나 건축이라는 용어는 미적인 호소에 대한 어떤 견해로 설계된 건물에만 적용된다.” 그러니까 모든 건물이 건축이 될 수 없으며 ‘미적인 호소’를 갖추고 있을 때만 비로소 건물은 건축으로 승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건축의 최대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도 페브스너보다 먼저 이렇게 말했다. “돌과 나무와 콘크리트를 써서 집을 짓고 궁전을 짓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건설이다. … 그러나 그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줄 때, 나는 비로소 행복을 느끼며 이렇게 말하리라. ‘이것이 아름다움이고, 이것이 건축이며, 그 속에 예술이 있다’고.” 역시 아름다움과 예술이 있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곁들어 있을 때 비로소 건축이 된다는 주장이다.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생각에 영향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건축과 건물을 참 심하다 할 정도로 부당하게 구분하는 것이 문제다. 단순한 기술을 구사해 만들면 건물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의 조형 의지가 담기면 건축이 된다고 깊이 믿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단순한 기술을 구사해 만들어진 결과로서의 구축물을 건축물이라 하고, 공간을 이루는 작가의 조형 의지가 담긴 구축의 결과가 건축이다. 그래서 건물은 물리적이고 기능적인 사물 정도의 것이지만, 이와는 달리 건축은 사유의 가치를 가진 것이며, 형이상학적 생산과정을 담은 것”이라고 단정한다. 여기에서는 ‘미적인 호소’가 변해 ‘정신(spirit)’이 된다. ‘건축-정신=건물’이고 ‘건물+정신=건축’이다. 정신을 참 좋아한다. 여기에 한술 더 뜬다. 건물은 기술자가 만드는 것이지만 건축은 건축가가 설계하는 것이라는 거다. 건축에 종사하는 건축기술사가 들으면 참 기분 나쁠 말을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적인 호소’가 없는 ‘자전거 보관소’ 계열의 건물은 한낱 즉물적인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게 과연 맞는 말인가? 도대체 이 ‘미적인 호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짓는 방식’의 모든 것을 대신하는 말인가? 일정한 수준에 이른 미술관, 도서관 같은 우등생 시설은 건축이라 높여 부르고, 주차장이나 자동차학원 같은 것은 건물이라고 낮춰 부른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우리 도시에는 수준 낮은 건물이 차고 넘친다. 듣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오늘날의 지속가능한 사회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사고다.
또 건축은 건축가의 의지와 개념이 유입된 것이고 건물은 건축가의 개입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건축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훌륭하게 서 있는 건물은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이미 1964년의 베스트셀러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의 유명한 전시회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을 통해 명백해졌다. 그는 인간이 자연과 타협하고 자연을 역이용한 익명의 건물을 들어 미개사회 마을의 이름도 없는 이들이 근대도시가 보여주지 못한 바를 앞서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지역주의 건축을 열게 된 큰 계기가 됐다.
길과 운하의 흐름과 함께 있는 암스테르담 중앙역 자전거 보관소. @Pinterest
건축과 건물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건물을 짓는 방식이 건축이고, 그렇게 해서 지어진 물적인 결과물이 건물이다. 정신이 담겼고 안 담겼고 하는 것으로 구별될 것이 아니다. 건물이라 불리는 구조물 안에서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풍부하게 산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건축이나 건물이냐”는 “인간이냐 사람이냐”라는 구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인간(人間)은 사람이 모인 세상을 뜻하고, 사람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뤄 사는 동물을 가리킨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 건물을 만들지만, 그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다. 이 말은 오늘날 한국 건축계에서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번역하며 건축의 역할을 자랑하고 있다. 원문의 ‘building’을 굳이 건축으로 번역하고, ‘our buildings’도 건축으로 바꿔 버렸다. 처칠의 말이 너무 멋있어서 인용하고는 싶은데 건물이라고 표현하자니 뭔가 좀 마음에 안 들어서 건축이라고 슬쩍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도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자전거 보관소가 암스테르담에 있다. 암스테르담은 자전거의 도시로 모두 60만 대의 자전거가 있다. 한 사람에 한 대꼴이다. 특히 암스테르담 중앙역 부근은 세계 최대의 옥외 자전거 보관소라 할 정도로 무수한 자전거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중앙역 바로 앞의 운하 위에 2001년 임시 자전거 보관소(Bicycle Flats Central Station)가 세워졌다. 설계는 ‘VMX Architects’가 했다. 바로 뒤에는 ‘이비스 스타일 암스테르담 센트럴 스테이션(ibis Styles Amsterdam Central Station)호텔’이 서 있다.
이 보관소는 암스테르담 중앙역 광장에 있는 수많은 자전거 받침대를 치우고, 동시에 지하철 공사 기간 사용할 수 없는 두 군데의 실내 자전거 보관소를 대신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 임시 자전거 보관소는 적은 예산으로 빨리 지어서 한 3년 사용하다가 2004년에는 닫을 예정이었는데, 아직도 잘 사용하고 있다.
이 보관소는 당시에 새로 개조한 부두에 닿지 않은 채 중앙에 일렬로 놓인 13개의 이중 원기둥에 지지됐다. 빠른 시공을 위해 다른 곳에서 미리 만들어 온 부재를 조립해 물 위에 자립한 구조물이다. 운하를 타고 온 시민들이 자전거를 바꿔 타도록 수상버스가 그 아래에서 돌 수 있어야 했다. 일종의 환승역인 자전거 보관소다. 110m나 되는 긴 경사로가 연속돼 있기 때문에 걷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편리하게 주차할 수 있다. 입구는 양쪽 끝과 중간에 있고 경사도가 3도 정도로 나선형으로 오르내린다. 무려 자전거 2500대를 보관한다.
얼마나 자전거가 많은지 이 보관소를 ‘피에트’(자전거)와 ‘플랫’(아파트)을 합쳐서 ‘피에트플랫’(Fietsflat)이라 부르고 있다. 세계 최초의 자전거 아파트 보관소다. 약간 경사진 긴 주차 덱 위에는 네덜란드 전역에 깔린 자전거 도로와 같이 붉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내리며 주차할 곳을 찾는 것은 불편한 일상이다. 자전거 보관소라고 하면 흔히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It-shouldn’t-be-here)’, 임시로 싸게 빨리 지어야 하는 골칫거리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자전거 보관소는 이 장소를 일시적이지만 도시에서 가장 활기 있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놓았다. 이 보관소는 자전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운하를 바라보며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매일의 경험을 스펙터클하게 즐기는 곳이며, 보안상의 이유로 벽이 없어 주변 역사적인 도시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관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때로는 스케이트 보더들이 포디움(높은 기단)을 이용해 고난도의 스턴트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자전거 보관소는 암스테르담 중앙역, 광장, 사방으로 이어지는 도로, 운하 등 도시의 중요한 운송 흐름 속에 함께하고 있다. 따라서 이 보관소는 단순히 자전거만 타고 내리는 곳이 아니다. 작고 사소한 건물일지라도 그것이 도시의 어떤 환경과 문맥 속에 놓이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도시의 활기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자전거 보관소는 암스테르담에서 꼭 봐야 할 7개의 역사적 건축물과 16개의 현대건축물 중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고, 네덜란드의 젊은 건축가들이 만든 최고의 건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건물 중 하나가 됐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일찍이 “길은 건물이 되고 싶어 한다(A street wants to be a building)”고 했는데, 중앙역, 호텔, 운하, 도로가 모두 보이는 위에서 이 임시 자전거 보관소를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이 길과 운하의 흐름은 자전거 보관소라는 건물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할 만하다. 또 “길은 건축(architecture)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고, “길은 건물(a building)이 되고 싶어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오래전 ‘미적인 호소’ 하나만으로 건축과 건물을 구분한 페브스너의 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확률밀도함수 곡선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아주 다른 것이 상위 2%이고 그다음 조금 다른 것이 14%를 차지한다. 그리고 한가운데 꼭짓점을 좌우로 34%씩 모두 68%가 중간 부분을 차지한다. 도시의 건축도 이와 같다. 유명 건축가가 설계하고 상을 받은 2%의 우등생 건축으로만 도시의 생활환경이 이뤄지는 게 결코 아니다. 조금 더 다른 14%와 중간 부분에 있는 68%를 포함한 84%의 의미 있는 건물 모두가 의미 있는 도시를 만드는 법이다. (문화일보 10월 2일자 14면 23 회 참조)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 용어설명
루이스 칸 : 루이스 이저도어 칸(영어명 Louis Isadore Kahn, 1901∼1974). 펜실베이니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세계적인 건축가. 예일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많은 건축물을 세웠고, 50세에 포스트모던 건축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침묵과 빛’이라는 테마로 건축물을 지었다. 1971년 AIA 금메달 및 1972년 RIBA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미국 예술학회 회원으로 뽑히는 등 20세기 걸출한 건축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 예일대 예술 전시장,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등이 있다.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국제적인 건축설계 회사. 혁신적인 디자인과 전문적인 서비스로 명성을 얻고 있다. 1995년에 설립됐으며
VMX Architects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돈 머피(Don Murphy)와 비즈니스 디렉터 레온 테우니센(Leon Teunissen)이 운영하고 있다. 머피는 런던의 사우스뱅크대와 암스테르담의 베를라지 연구소에서 교육받았다. 테우니센은 델프트 공대에서 건축 및 건축 관리를 공부했다. 협업을 통해 모든 면에서 혁신적인 디자인을 제안하고 있다.
출처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풍경>급하게 만든 임시건물, ‘미적 호소’ 없이도 도심 속 활력이 되다 :: 문화일보 mun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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