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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매화 기행

매화-2024-009. 대구 남평문씨 인흥마을 매화 (2024.02.25.)

 

 

 

 

 

 

 

 

 

 

009. 대구 남평문씨 인흥마을 매화 (2024.02.25.)

 

 

대구 달성군 화원읍 인흥마을은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전한 문익점 선생의 후손들인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사는 곳이다

원래 '인흥사'라는 절이 있었던 폐사지에

뒷산을 등지고 마을이 자리를 잡았고 조선 후기의 전통한옥 9채와

문중 정자 2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약 180년 전 쯤에 마을이 조성된 인흥마을은

우리나라의 자연발생적인 전통마을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마을 배치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처음 이곳에 마을을 조성할 때,

이곳의 대표적인 마을 공공건물인 수백당(수봉정사) 터를 

중심축으로 삼아서 가로망을 짜고

그 뒤로 집터와 진입로를 바둑판형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한 

미리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문중 주거단지이다 

 

인흥마을 입구

주차장 앞으로 넓은 목화밭이 있고

인수문고 우측으로 제법 넓은 매화원이 조성되어 있다

봄비가 오락가락하고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휴일을 맞아 제법 많은 상춘객들이 매화원에 나왔다

 

인흥마을  매화원에는

수 백 그루의 2~30년 내외의 홍매, 청매와 백매가 있다

홍매는 대부분 개화를 시작하였지만

청매와 백매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마을 안쪽의 집집마다

담장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민 홍매도 개화를 시작하였고

마을 텃밭과 뒷산의 청매와 백매도 꽃불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인흥마을 입구의

대구수목원 매화정원에서 자라는 명매의 후계목을

길러낸 주인공은 정옥임 씨다

 수목원 매화정원의 매화는 모두 정 씨가 기증한 것이다

 

대구수목원뿐만 아니라

 지금 대구에서 매화를 볼 수 있는 곳의 매화나무는

정 씨가 다 대다시피 했다 

대구에서 매화마을로 가장 이름난 곳이 달성의 인흥마을.

남평문씨 집성촌인 인흥마을에는 곳곳에 매화나무가 있다.

마을 앞의 한쪽 마당에서 매화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자라는데,

이 마을의 매화도 모두 정 씨가 길러낸 것들이다

 

정 씨와 인흥마을의 인연은

20년 전쯤 남평문씨 집안의 부탁으로

인흥마을의 수봉정사에 마당에서 자라던 고목 <인흥매>의 가지를

접붙여주면서부터다.

 

지금 본래 <인흥매>는 죽고 없지만,

수봉정사 마당에는 정 씨가 그때 접을 붙여 키워낸 인흥매 후계목이

대를 이어 자라고 있다

정 씨가 길러서 문씨 문중에 넘겨준

인흥매 후계목은 여러 곳으로 보내졌는데,

그중 한 곳이 대구의 학당인 문우관이다

(글출처 - 문화일보 박경일 기자)

 

 

 

 

 

 

 

 

 

 

 

 

 

 

 

 

 

 

 

 

 

 

 

 

 

 

 

 

 

 

 

 

 

 

 

 

 

 

 

 

 

 

 

 

 

 

 

 

 

 

 

얻었다 한들 본래 있던 것

잃었다 한들 본래 없던 것

 

 

 

 

 

 

 

 

 

 

 

 

 

 

 

 

 

 

 

 

 

인흥마을 수봉정사

 

 

수봉정사(수백당)는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로서

주로 손님을 접대하고 문중의 모임을 열 때 사용되는 마을의 큰사랑채이고

그 옆으로 근래에 새로 지어진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서

 2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설 도서관이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별도로 있다

마을 안쪽으로 자리잡은 광거당(廣居堂)  형태의 재실(齋室)로서

문중 자제들의 교육과 도서관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여 년 전인 조선 후기에,

후손에게 돈이 아닌 지혜를 물려주라는 신념으로

대구의 인흥마을에

교육과 학문의 아카데미를 꽃 피운

남평문씨(南平文氏)수준 높은 교육철학과 집안 내력은,

원광대 조용헌 교수가 쓴

<오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라는 책에

아주 잘 나와 있다.

 

인흥마을의 수봉정사(수백당)

문중의 자녀교육과 학문교류의 전당이다.

그 옛날 문경호 선생이 후손들을 위해 비슬산자락에 근대식 집터를 닦았고,

수봉 문영박 선생은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 무렵에,

일본식 신식교육을 거부하고 만권의 책을 사들여 자녀교육과 민족교육의

기틀을 확립하여 오늘날 2만권의 장서를 보관한 인수문고의

전통과 학풍으로 이어졌다

 

 이렇듯남평문씨 인흥마을 조상들의

사전준비와 정성이 철저하고 미래지향적이었는데

어찌 집안에서 인물이 안 태어날 것이며 어찌 명문집안이 아니 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인흥마을은,

 마을의 대소사를 비롯한 모든 의사결정이 집안어른과 종손에 의해서

원칙과 도덕과 규범 속에서 이루어질 것 같은 봉건적인 성격이 남아있는

동족마을이다

 

 오늘날 프라이버시와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핵가족시대에 익숙해진 우리 세대가,

아직도 적당히 불편할 것 같은

인흥마을에서 살고 있는 남평문씨 사람들이 부러워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감상적인 생각일까?

 

 

 

 

 

 

 

 

 

 

 

 

 

 

 

인수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