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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45. 아돌프 로스 Adolf Loos

1. 건축가 아돌프 로스  

아돌프 로스

[ Adolf Loos ]

 

출생 - 사망  1870. 12. 10. ~ 1933. 8. 22.
출생지  체코 브르노
직업건축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브르노에서 출생하여 비엔나에서 사망. 드레스덴에서 수학한 후 1893~189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일하다가 귀국 후 오트 바그너의 사상에 공명하게 되었으며 비엔나의 고르트만 가게 내장() (1898), 카르마 장()(1904), 슈타이너 저택(1910)등에서 무장식()주의를 구체화 시킴. 논문 『Ornament und Verbrechen(장식과 죄)』(1908)로 아르 누보를 공격함. 그러나 미하엘프라츠의 사무실용 빌딩(1910)이나 시카고 트리뷴 사()의 설계안(1923)처럼 대규모적인 건축에서는 고전 모티브를 썼음. 만년의 대표작은 파리의 트리스탄 차라의 집(1926).

작품

  • 미하엘프라츠의 사무실용 빌딩(1910년)
  • 시카고 트리뷴 사(社)의 설계안(1923)
  • 파리의 트리스탄 짜라의 집(1926년)

출처

 

 

 

 

 

 

 

 

2,  건축에서 장식은범죄? -  비엔나 로스하우스

 
 덴마크 건축사  2023. 3. 10. 
 

Adolf Loos - Wikipedia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위치하고 있는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작품 로스하우스 (Looshaus). 아돌프로스는 유명한 그의 저서 장식과 범죄 (ornament und verbrechen)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Looshaus - Wikipedia

근대건축에서 로스하우스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는 이전 건축물들에 비해 외관적으로 단순해지고 기능을 중요시 여긴 모더니즘 풍조에서 건축미학적인 부분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로스하우스 1층 평면도, 출처: google.com

오스트리아 비엔나 수도한복판에 아무런 상징 없이 기능주의 양식의 건물이 들어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당시 사회의 비판이 있었지만 저층부에는 장식을 넣고 상층부는 화단을 계획하는 것으로 정부와 건축가가 타협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보수주의자들에게 맨홀뚜껑같다는 비판을 받은 삽화, 출처: google.com

로스는 장식을 예술과 공예로 구분하여 생각하였고 건축은 공예의 범주인 일상성의 영역에 놓았다. 반대로 사회의 집산적인 기억과 표현을 담당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두었는데 이에 따라서 건축이 예술로 작용하는 경우는 사회와 문화를 표현하게되는 문화재 등으로 한정지었다.

Loos Haus inside view- google.com

로스가 건축에서 범죄행위라고 여긴 것은 일상성의 영역인 건축에서 예술적인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글에서도 일상적 용품에서 장식을 삭제하는 것이 문화적 진화라고 언급한적 있다고 한다. (예술가란 사람이 공간을 사용하는 자를 통제하고 그의 계획속에 사용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둘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이있다.)

문화 경제적 상징 영역인 저층부 디자인, 출처:google.com

로스하우스의 저층부는 판매와 소비, 업무의 세계이므로 건축물의 입면은 여러가지 상징적인 장식들이 많이 계획된 반면에 거주영역 (일상적)인 상층부는 단순 명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스하우스는 일상성에 반응하는 장소와과 집단의 영향을 받는 부분을 클리어하게 수직 조닝(zoning)하여 건축가의 건축적 사상을 달성한 작품이다.

로스하우스 내부에서 시내를 바라본 각도, 출처: google.com

 

 

 

 

 

 

 

 

 

 

3. 장식과 범죄 - 아돌프 로스

 정승혁  2023. 4. 16. 
 

어떤 사물이 너무나 완벽해서, 그것에 손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것을 빼지도 더할 수도 없을 때 그 사물은 아름답다. 이는 최고로 완벽하며 완결된 조화다.

장식과 범죄, 아돌프 로스

장식은 죄악이다. 장식은 구시대의 유물로 벗어나야 하는 사슬 같은 것이다. 로스의 주장이다. 장식과 범죄에서 로스는 신랄한 어투로 장식을 비판한다. 또한 ‘우리 시대의 장식’을 찾으려는 당시의 세태를 조롱한다.

 

빈의 로스하우스(looshaus)

로스하우스를 보면 그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변의 건물들은 수많은 요소들로 장식됐다. 하늘을 찌를 듯한 피뢰침과 건물 전면의 가짜 기둥들. 로스의 눈에는 이것이 모두 사족으로 보였다. 로스하우스는 장식이 전혀 없다. 저층부 석재는 날 것 그대로 무늬를 보여주고 벽에는 그 어떤 무늬도 찾아볼 수 없다.

 

로스가 디자인한 등받이가 있는 의자

가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일부 가구들이 오래된 양식을 가져와 장식하거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들을 비난한다. ‘장식은 노동자의 기쁨일 뿐이다.’ 이 말은 장식이 추가적인 노동력과 비용을 필요로 하며, 이는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건축이나 디자인에서 이러한 낭비와 피로를 최소화하면서도 기능성과 실용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PC 3 SV vinyl player(디터 람스의 디자인)

로스는 ‘양식 없음’이 20세기의 새로운 양식이라 말한다. 이것은 장식으로 뒤덮인 19세기 말에는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장식이 사라진 사회의 다음 장은 어떻게 될까? 극단적으로 장식을 배제한 사물들에 싫증을 느끼면? 그때는 다시 새로운 장식을 만들어야 할까?

일단은 내가 도시에서 시각적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것들에 갖다 붙일 이유를 찾긴 했다. ‘유럽풍 스트리트 몰’이나 빌라 기둥의 도리아식 오더 등의 것들 말이다. 하지만 로스의 말처럼 모든 장식이 죄악이며 깨어 부수어야 할 것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출처 - 장식과 범죄 - 아돌프 로스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4.  비엔나 제체시온과 아돌프 로스

 

예술과 기술, 결합 또는 분리

유럽의 19세기 말은 격변기였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기술과 예로부터 지켜온 전통 간의 괴리가 갈수록 두드러졌다. 제국주의는 확장세에 있었지만 경쟁은 날로 치열해졌으며, 내부적으로도 민족주의의 자각이 확산되고 있었다. 부유층의 삶과 문화는 점점 사치스러워지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비참해지는 자본주의의 병폐가 심각했다.

희망과 절망, 진보와 퇴폐, 지성과 욕망이 뒤섞인 당시의 ‘세기말(fin de siècle)’ 현상이 가장 극명했던 유럽 도시는 단연 비엔나(Vienna / Wien)였다. 쇠락해 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는 극단적으로 화려한 예술 문화가 꽃을 피워 비엔나 제체시온(Wiener Secession) 같은 장식적인 예술 운동들이 발달한다. 총체적 예술 작품의 이상을 추구하며, 예술과 기술을 결합시켜 모든 일상 오브제들의 형태를 예술적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응용 예술이 주류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비엔나에서 그 반대되는 사상 또한 등장하게 되는 것은 흥미롭다.

19세기 말의 비엔나

15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을 공식 계승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19세기 초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립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지속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황은 예전 같지 않았다. 1867년 헝가리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개명하나, 이는 제국의 마지막 몸부림과 같았다.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서 긴장 상태가 계속되다가 결국 사라예보(Sarajevo) 사건이 발생하며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될 것이다.

폭풍전야 상태인 19세기 말의 비엔나는, 폭발적인 인구유입에 따른 성장과 그로 인한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게르만 문화권의 중심지였던 비엔나는 서유럽의 라틴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잔틴의 잔재가 남아 있는 동유럽 문화, 그리고 옛 헬레니즘 지역을 그대로 삼켜버린 오스만 투르크의 거대한 이슬람 문화권과도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동서양 문화들이 융해되어 말 그대로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문화를 형성할 가능성을 지닌 곳이었다. 19세기 비엔나에서 다방면의 명사들이 배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건축에서의 변혁, 오토 바그너

회화와 건축에서도 기존의 전통과 분명한 차이를 이끌어내는 거장들이 19세기 후반의 비엔나에 등장한다. 건축가 오토 바그너(Otto Wagner, 1841~1918)의 1890년 비엔나 도시 계획안은, 비엔나를 세계의 수도에 걸맞은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비록 그의 계획안 전체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새로운 대중교통수단인 전철이 도입되고, 바그너가 디자인한 고가철교와 전철역사가 실현되며, 비엔나는 조금씩 근대적 도시의 얼굴을 갖추게 된다. 산업 기술로 인한 새로운 형태는 바그너를 통해 기념비적 형태로 재탄생된다. 기술이 건축을 통해 적극 표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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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토 바그너(Otto Wagner, 1841-1918), 철교 디자인, 비엔나, 1898 <출처: Wikimedia Commons>
2 오토 바그너(Otto Wagner, 1841-1918), 칼스플라츠(Karlsplatz) 역사, 비엔나, 1899 <출처: (CC BY-SA) Thomas Wolf @Wikimedia Commons>

 

바그너는 계속 뛰어난 건축 작품들을 남기며 비엔나의 젊은 건축가들의 모델이 된다. 특히 그는 1894년부터 비엔나 순수 예술 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의 건축 교수로 부임하여, 교육을 통해 직접 건축학도들을 양성하게 된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f Maria Olbrich, 1867~1908)나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 모두 바그너의 학생이자 그의 건축사무소에서 실무 수련을 했다는 사실은 의미가 크다.

바그너는 교수 부임 때의 첫 강연 내용을 1896년에 책으로 출판한다. 책 제목은 [근대 건축(Moderne Architektur)]이었다. 새로운 건축을 지칭하기 위해 바그너가 처음으로 사용한 이 표현은, 이후 20세기 초반의 건축을 지칭하는 보편적 용어로 역사 속에 남게 된다.

회화에서의 변혁, 구스타프 클림트

건축가 바그너가 성취해낸 리더로서의 역할을, 회화에서는 30대 중반의 젊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맡는다. 1890년대 후반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클림트의 그림은 비엔나의 보수주의적 아카데미 화풍에 큰 파장을 일으킬 만큼 도발적이었다. ‘포르노그라피’라 불릴 만큼 관능적으로 다루어진 여체는 전통적 누드화의 화법과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과거의 그림들에서 여체가 아름다운 여신의 조각상처럼 정적 구도로 배치되었다면, 클림트의 여체는 원초적 형상으로 물속에서 부유하듯 역동적이다. 그림 속 배경은 더 이상 원근법(perspective)으로 조성된 사실적 입체 공간이 아니다. 클림트의 배경은 점묘법처럼 작은 스케일의 장식면들로 채워져 있는 이차원적 평면이다. 게다가 배경과 주인공은 서로 감싸며 용해되는 듯하다. 몸을 덮고 있는 의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화려한 색채와 장식의 모자이크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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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금붕어(Goldfish)], 1901-1902 <출처: Wikimedia Commons>
2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키스(The Kiss)], 1907-1908 <출처: Wikimedia Commons>

 

클림트의 그림은 원근법 회화를 지칭하는 표현 ‘열린 창’과는 거리가 멀다. 원근법 그림의 관객이 창 내부에서 창 외부의 공간을 원경으로서 바라본다면, 클림트 그림의 관객은 그림 속 대상과 같은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깊이와 폭을 알 수 없는 액체 공간 같은 그림 표면은 관찰자를 빨아들인다. 중심과 외곽의 위계가 명확하게 나뉘어지는 전통적 그림과 달리, 클림트의 그림은 구성 요소들의 위계도 분명치 않다. 마치 시작과 끝이 없는 벽지의 장식처럼, 계속 반복되고 연속될 수 있는 문양의 패턴과 같다.

이러한 특징들은 비교적 사실적인 클림트의 풍경화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연 요소들은 그림 화면에 끝없이, 그리고 균등하게 퍼져 있으며, 그러한 풍경의 공간이 관찰자의 발밑으로 계속 펼쳐질 것 같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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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잔잔한 저수지(Tranquil Pond)], 1899 <출처: Wikimedia Commons>
2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너도밤나무 숲(Beech Grove I)], 1902 <출처: Wikimedia Commons>

비엔나의 총체적 예술 운동, 제체시온

새로운 공간을 표현하는 클림트의 그림은 건축과 무관하지 않았다. 비엔나 예술 수공예 학교(Kunstgewerbeschule) 출신인 클림트는 일찍부터 건축의 벽화 작업을 해왔으며, 건축가들과의 협업에 관심이 있었다. 건축 벽화, 즉 건축의 요소로서의 클림트 그림은 자연스럽게 건축 공간과 함께 작동하는 예술 작품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클림트의 작업은, 모든 예술들을 집결시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총체적 예술 작품(Gesamtkunstwerk / The Work of Total Art)’의 사상과 연관될 수 있었다.

 

비엔나 제체시온의 예술가들, 1902년 제14회 비엔나 제체시온 전시회 때의 모습. 사진 왼쪽 두 번째의 클림트는 마치 왕좌에 앉아 있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비엔나의 총체적 예술 운동인 비엔나 제체시온이 1897년 4월 창립될 때 클림트는 핵심인물이었다. 제체시온의 창설에는 바그너의 수제자들인 올브리히와 호프만도 함께했다. 화가 출신으로 유능한 장식예술가인 콜로만 모제(Koloman Moser, 1868~1918)도 대표적 구성원이었다.

1898년 1월부터는 클림트의 주도하에 예술 월간지 [베르 사크룸(Ver Sacrum, 신성한 봄)]이 출판된다. 알프레드 롤러(Alfred Roller)가 디자인한 창간호의 표지는 활짝 만개한 꽃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나무는 화분 속에 심어져 있으나, 뿌리는 화분을 부수고 삐져나와 순수한 대지로 뻗어나간다.

인위적 틀이 자연의 성장을 가둘 수 없듯이, 아카데미 예술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억압을 부수고, 보편적이고 이상적이며 자유로운 예술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1903년 말 출판 종료 이전까지 [베르 사크룸]은 제체시온의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새로운 회화, 그래픽 디자인, 장식 디자인 등을 지속적으로 선보인다.

 

[베르 사크룸(Ver Sacrum)] 창간호, 1898 <출처: Wikimedia Commons>

올브리히의 제체시온 전시관

[베르 사크룸]이 사실상 지면을 통한 가상의 전시관 기능을 수행했다면, 실제 전시 공간의 건축도 진행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아르 누보(Art Nouveau) 운동’이라 불리는 만큼, 비엔나 제체시온도 순수 예술의 틀을 벗어나 그래픽과 장식 디자인, 더 나아가 가구 등의 일상 기능용품 디자인과 건축으로 이어진다. [베르 사크룸]의 편집 자체가 하나의 그래픽 작품이라면, 1897년 올브리히가 설계를 시작한 제체시온 전시관(Secession Hall / Das Ausstellungsgebäude der Wiener Secession)은 공식적인 첫 번째 건축 작품이었다.

1898년 제2회 제체시온 전시회에 맞추어 개관한 제체시온 전시관은 비엔나의 칼스플라츠(Karlsplatz) 근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흰색 입방체들의 단순하고 대칭적인 구성을 선보인다. 특히 건물 중앙의 상부에는 금빛 잎사귀들로 형성된 구형 조형물이 돔(Dome)처럼 얹혀져 시선을 사로잡는다. 눈부시게 하얀 벽체 표면 위로는 빛나는 금박 장식의 문양과 조각들이 붙어 섬세하게 꾸며진다.

구형 조형물 바로 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또 주입구 왼편의 벽면에는 제체시온의 잡지 이름으로 사용된 문구 ‘신성한 봄 (Ver Sacrum)’이 붙어 있다. 자유를 바탕으로 이 시대의 새로운 예술이 태동함을 선전하고 있는 건물은 전시관으로서의 기능을 넘어 그 자체로 제체시온의 선언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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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f Maria Olbrich, 1867-1908), 비엔나 제체시온 전시관(Wiener Secession Hall), 1897-1898 <출처: Wikimedia Commons>
2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f Maria Olbrich, 1867-1908), 비엔나 제체시온 전시관(Wiener Secession Hall), 1897-1898 <출처: (CC BY-SA) Jorge Royan @Wikimedia Commons>

예술-건축가 공동체의 총체적 예술 작품

제체시온 전시관은 ‘총체적 예술 작품’이었다. 전시관 현관 바로 위에는 세 인물의 얼굴 부조상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회화(Malerei), 건축(Architektur), 조각(Plastik)’이라는 글자들이 붙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가 익티노스(Iktinos), 화가 아펠레스(Apelles), 조각가 피디아스(Phidias)를 이상으로 내세우며 창립되었던 파리의 보자르 학교(Ecole des Beaux-Arts)를 연상시킨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f Maria Olbrich, 1867-1908), 비엔나 제체시온 전시관(Wiener Secession Hall), 1897-1898. ‘회화, 건축, 조각(Malerei, Architektur, Plastik)’이라 쓰여 있다. <출처: (CC BY-SA) Thomas Ledl (talk) @Wikimedia Commons>

 

제체시온 전시관은 총체적 예술 작품이었지만 올브리히 단독의 개인 작품은 아니었다. 제체시온의 다른 예술가-건축가들과 함께 완성시켜 나간 집단적 작품이었다. 건물을 장식하는 것은 작품을 완성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절차였다. 건물 외벽의 장식과 조각들을 모제가 주도했다면, 내부의 장식은 호프만이나 클림트에 의해 보완되어 갔다.

1902년 비엔나 음악가 베토벤의 음악을 추모하기 위해 개최한 제14회 제체시온 전시회는, 전시관의 내부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다. 호프만은 전시를 기획하며 전시관 내부와 부조 장식을 새로이 디자인하였고, 클림트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표현한 14미터 길이의 거대한 벽화를 그렸다.

전시관 내부의 벽 상부에 배치된 클림트의 그림은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 / Beethoven Frieze)]로 명명되었으며,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그대로 남게 된다. 원래 그리스 신전 상부의 수평 부조 장식을 뜻하는 프리즈(Frieze)처럼, 아예 영구적인 건축 요소가 된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 공동체가 제체시온 전시관을 완성시켜 간 과정은, 마치 일생을 바쳐 고딕 성당의 건설에 참여했던 각 직능 장인들의 종교 의식과도 같은 집단적 작업의 모습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 / Beethoven Frieze)], 1902. 제14회 비엔나 제체시온 전시회 때, 전시관 내부 벽체 상단에 전시된 후 건물 속에 계속 남게 된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예술과 건축의 연결 고리, 응용 예술

전시관 건축 이후, 제체시온의 예술가-건축가들은 일상 오브제의 디자인으로 관심을 돌린다.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이 협력할 때, 그 연결 고리는 예술과 건축의 중간 영역일 수도 있는 ‘응용 예술(Applied Art / l’art appliqué)’이었다.

응용 예술은 순수 예술과 구별된다. 순수 예술이 회화, 조각과 같이 비실용적인, 그래서 ‘순수’한 예술 작품을 만든다면, 응용 예술은 실용적 목적을 위해 예술을 ‘응용’한다. 당시 응용 예술은 일반적으로 기능용품들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었으므로, ‘장식 예술(Decorative Art / l’art décoratif)’이라 불리기도 했다. 응용 예술의 작품은 결국 상품이 되며, 미술관이 아니라 부티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일상 공간에 놓여 ‘전시’되는 것이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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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콜로만 모제(Koloman Moser, 1868-1918), 금속용기, 1904 <출처: (CC BY) Sailko @Wikimedia Commons>
2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 등받침 조절 의자(Stitzmachine), 1905 <출처: (CC BY) sailko @Wikimedia Commons>

19세기까지 응용 예술은 수공예적 방식의 제품에 집중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응용 예술은 산업의 대량생산 방식을 포용하며 산업 디자인(Industrial Design)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응용 예술은 디자인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산업 디자인까지 포괄하는 광역적 의미의 개념으로 다루어질 수도 있다.

제체시온의 예술가들 가운데 호프만과 모제는 응용 예술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들은 1903년 ‘비엔나 공방(Wiener Werkstätte)’을 창립한다. 예술의 상업화를 위한 비엔나 공방은 ‘총체적 예술’의 이상과 ‘응용 예술’의 전략을 결부시켜 나간다. 제체시온의 대표적 건축 작품이 올브리히의 ‘예술’ 전시관이었다면, 비엔나 공방의 대표적인 총체적 예술 작품은 호프만이 설계한 ‘일상적’ 주거 공간, 스토클레 저택(Palais Stoclet, 1905~1911)이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Brussel)에 자리잡은 스토클레 저택은 비엔나 공방의 아이콘이 된다.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 스토클레 저택(Palais Stoclet), 브뤼셀, 1905-1911 <출처: (CC BY) Jean-Pol GRANDMONT @Wikimedia Commons>

 

거대한 저택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들의 구성으로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조금씩 반전이 시작된다. 외부 벽체의 고급스러운 석재 마감이 인식되기 시작하고, 벽체 모서리의 외곽선을 따라 둘러져 있는 섬세한 장식 띠가 눈에 띈다. 검소해 보이나 실제 소매와 칼라에 화려한 장식이 수놓아져 있으며, 은근히 고급 원단을 자랑하는 명품 정장 같다.

내부에 진입할 때 장식은 더욱 강조된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벽체의 문양과 함께 가구, 문틀, 손잡이, 전등, 욕조 등에 이르기까지 예술적으로 다듬어진 형태들이 드러난다. 비엔나 공방의 예술가들이 개입해 창조한 형태들로 꾸며진 건축 작품에 걸맞은 벽화는 당연히 클림트의 몫이 되었다. 클림트의 화려한 모자이크는 스토클레 저택의 내부 프리즈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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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 스토클레 저택(Palais Stoclet), 브뤼셀, 1905-1911. 식당 내부. 벽체 상부에 클림트의 모자이크 프리즈가 보인다. <출처: Wikimedia Commons>
2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스토클레 저택(Palais Stoclet)의 식당 프리즈 상세 <출처: Wikimedia Commons>
3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스토클레 저택(Palais Stoclet)의 식당 프리즈 상세 <출처: Wikimedia Commons>

예술가(건축가) vs. 기술자(장인)

비엔나의 예술가-건축가들은 일상의 삶과 관련된 공간과 오브제들의 형태를 예술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이와 같은 총체적 예술의 이상은, 영국의 예술 수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 벨기에와 프랑스의 아르 누보(Art Nouveau), 독일의 유겐트슈틸(Jugendstil), 공작연맹(Werkbund), 바우하우스(Bauhaus), 그리고 이곳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이르기까지 ‘전위적 건축 운동의 주류’로서 전 유럽 도시를 휩쓸고 있었다.

그 근간에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고전 시대처럼, 예술과 기술이 (재)결합하여 일상 공간에 조화를 부여해야 한다는 신념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실험 무대이자 대상은 주택과 주거용 기능용품이었다. 이를 위해 응용 예술의 선봉에 서고자 결심한 예술가-건축가들은 기술자인 장인들을 그들의 파트너로 삼으려 했다.

예술가-건축가들의 입장에서 응용 예술은 작업 전선을 기술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장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예술가-건축가들은 장인들 고유의 영역에 갑작스럽게 침범한 이방인들과 같았다. 게다가 주도권을 행사하려 하고 있었다. 장인들이 기능과 기술의 문제에만 집중하여 발전시켜 왔던 기능용품들에, 아름다움의 잣대를 들이대며 비판하는 예술가-건축가들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돌프 로스의 저항

총체적 예술과 장식 예술이 주도했던 세기말의 비엔나에서,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의 반란은 흥미롭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방 도시이자, 후에 체코 영토로 분리되는 브르노(Brno) 태생의 로스는 석공의 아들이었다. 로스는 독일의 드레스덴 공대(Technischen Hochschule in Dresden)에서 수학하던 중 홀연히 신대륙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1893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미국 체류는 그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896년 귀국해 비엔나에서 건축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로스는 작품보다 글을 통해 먼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의 글들은 당시 유명한 제체시온 건축가들인 올브리히와 호프만 같이, 응용 예술로 이름을 떨치던 예술가-건축가들을 신랄하게 공격한다.

 

1898년 비엔나 주빌레 전시회 포스터 <출처: Wikimedia Commons>

 

로스의 글들은 오스트리아 황제 탄생 50주년을 맞아 주빌레 전시회(Vienna Jubilee Expo 1898)가 개최되고 제체시온의 잇따른 전시회들로 응용 예술이 꽃을 피우던 1898년 무렵에 더욱 극렬해진다. 대세를 거슬러 고립의 길로 자신을 몰아세운 로스의 글들은 점차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로스는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지향하는 모든 건축-예술 운동에 반대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예술과 기술이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 발전되어 왔고, 그 덕분에 예술작품과 기능용품이 더욱 순수해질 수 있었다고 믿는다.

로스에 따르면 예술작품과 기능용품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예술작품이 정신적 가치와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충족시키기 위해 탄생했다면, 기능용품은 지금 이 순간의 실용적 기능과 구체적인 사용자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원히 남게 되는 예술작품과 달리, 기능용품은 끊임없이 개선되어야 마땅했다. 따라서 예술가의 작품과 달리 장인의 작품은 일시적이었으며 영속적일 수는 없었다.

응용 예술의 부정

실용성으로부터 자유롭기에 궁극의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는 예술을 기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거나, 실용성에만 충실해야 할 기능용품을 예술 작품인 것처럼 디자인하려는 예술가-건축가들의 시도는 로스에게는 신성모독과 같았다. 로스는 응용 예술(Applied Art)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했다. 그리고 응용 예술을 내세우는 예술가-건축가들을 ‘응용 예술가(Applied Artist)’라 불렀다. 이들은 상업적 목적을 위해 예술의 순수성을 팔아버린 ‘매춘부’나 다름없었다.

로스는 ‘응용 예술가’와 장인을 대립시켰다. 도자기를 디자인하는 예술가들이 ‘제도판’ 위로 이차원적 형태를 즉흥적으로 그린다면, 도공은 ‘화덕’ 앞에 앉아 실제 필요한 기술과 재료를 가지고 삼차원의 오브제를 구워낸다. 예술가는 독창적인 형태를 상상하고, 장인은 진짜 형태를 제작하는 것이다.

로스는 예술가-건축가들이 만들어낸 기능용품들이 결코 기능적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의자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예술가들이 만든 의자의 형태는 독창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앉기에는 불편하다. 의자의 형태란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스럽게 앉는 방식에 따라 그냥 결정되는 것이다. 이름난 예술가들이 아름다운 의자 형태를 상상하고 있을 때, 익명의 장인들은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묵묵히 만들 뿐이었다.

물론 예술가들은 시대의 양식(Style)을 찾아야 하는 소명을 갖고 있다. 각 시대마다 고유의 양식이 존재했듯이, 지금의 양식을 만드는 것이 이 시대 예술가들의 의무다. 로스도 ‘근대 양식(Modern Style)’의 필요성은 공감하고 있었다. 다만 기능용품의 양식을 찾으려는 응용 예술의 시도는 불필요하며, 아예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로스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기능용품들의 근대 양식은 이미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형태는 장인들의 오브제들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굳이 창조하려는 노력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총체적 예술의 부정

1900년에 발표된 로스의 글 ‘불쌍한 부자의 이야기(The Story of the Poor Little Rich Man)’는 제체시온 건축가의 방식으로 디자인된 주택에서의 비극적 삶을 비꼬는 우화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았다. 어느 사업가가 자신의 사회적 성공에 걸맞은 아름다운 집을 꿈꾸게 된다. 유명한 제체시온 건축가에 의해 디자인된 그의 집 내부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창조되어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후 건축가는 자신의 작품인 부자의 집 내부에서 그 어떤 변화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자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물건을 구입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선물조차 거절해야 했다. 모든 요소들이 미리 다 계획되고 배치되었기에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거나 교체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완벽하게 완성된 구성(composition)인 총체적 예술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글은 불쌍한 부자의 삶을 ‘시체’에 비유하며 끝을 맺는다. 그의 삶 모든 것이 다 완성, 완수되었기 때문이다.

로스는 주택 내부를 결정하는 이는 거주자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택은 거주자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주거 공간 속 오브제들의 형태와 배치는 그것을 결정한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 결국 본인이 자신의 집 내부를 직접 꾸밀 때, 집은 그 소유자를 진정으로 드러내는 법이다. 만일 제3자인 건축가가 디자인한다면, 그 내부는 단지 건축가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이다. 게다가 근대 양식의 기능용품들은 이미 존재한다. 따라서 거주자는 장인들이 제작한 기능용품들 가운데 우수한 것을 선택(구입)하면 된다.

건축가는 더 이상 기능용품의 형태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건축가가 모든 종류의 주거 문제에 있어 전문가인 것은 여전하다. 이때 로스는 건축가의 새로운 역할을 ‘주거의 교사’로 정의한다. 건축가는 어떠한 오브제들이 우수하고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시민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건축가는 근대적 삶의 방식을 자립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시민들을 양성하는 계몽주의자여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건축가 로스가 -그리지 않고- 글을 쓰는 이유였다. 자신의 사상이 널리 읽혀져 교육될 수 있기를 의도한 것이다.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 카페 무제움(Café Museum), 외부 <출처: (CC BY-SA) Vindobohann @Wikimedia Commons>

한편 이러한 로스의 주장은 당시 건축가로서 적지 않은 인테리어 작품을 계획한 자신에게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로스가 계획한 내부는 그의 사상을 보여주는 효과적 교재, 또는 시각적 시범(demonstration)과도 같았다. 1899년 그가 디자인한 카페 무제움(Café Museum)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카페 무제움은 ‘카페 니힐리즘(Café Nihilismus)’, 다시 말해 일반 가치나 도덕 규범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를 연상시키는 공간이라 불릴 만큼 도발적이었다. 제체시온의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여느 장식적 카페와 달리, 로스의 카페 무제움은 흰색의 무장식 벽으로 외부를 마감하고, 개성적인 장식들을 철저히 배제한 내부를 선보였다.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 플레데르마우스 카바레(Cabaret Fledermaus), 비엔나, 1907. 로스의 카페 무제움과 대조적으로 모든 가구들이 디자인되었으며 개성적인 내부 장식이 돋보인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모든 요소들을 독창적으로 디자인했던 제체시온 건축가들과는 달리, 로스는 장인들이 제작한 오브제들을 선택해 배치한다. 카페 무제움의 내부에 설치된, 오스트리아 장인 토네(Thonet)의 벤트우드(곡목) 의자들이 그 사례였다. 로스의 카페 무제움은 가까이 있었던 제체시온 전시관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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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 카페 무제움(Café Museum), 2003년에 복원된 내부 모습 <출처: (CC BY-SA) Thomas Ledl @Wikimedia Commons>
2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 토네(Thonet) 의자. 카페 무제움(Café Museum)에 설치된 의자이다. 사실은 로스의 의견이 반영되어 특별히 개선된 형태의 토네 의자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건축가들과 달리 로스는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출처: (CC BY) Sailko @Wikimedia Commons>

꺼지지 않는 불씨

영원할 것 같았던 비엔나 제체시온은 1905년 예술가들의 내분으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로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07년 독일공작연맹이 창립되자, 로스는 주동자인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와 앙리 반 드 벨드(Henry van de Velde)를 공격하는 일련의 글들을 1908년에 발표한다.

1910년에는 [장식과 죄악(Ornament und Verbrechen / Ornament and Crime)]이라는 글을 통해, ‘장식 예술’을 아예 범죄로 규정한다. 1910년의 글은 즉각적으로 국제적인 반향과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해 그는 비엔나 미카엘러플라츠(Michaelerplatz)에 일명 로스하우스(Looshaus)를 건축한다. 궁전을 향한 무장식의 아파트 입면은 당시 민원으로 공사가 중지될 만큼 도발적인 스캔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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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죄악(Ornament und Verbrechen)] 강연 포스터 <출처: Wikimedia Commons>
2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 로스하우스(Looshaus), 비엔나, 1910 <출처: (CC BY-SA) Thomas Ledl @Wikimedia Commons>

1920년대 후반까지 로스는 단순한 상자 외관 내부 속에 복잡한 공간 구성을 감추고 있는, 일련의 뛰어난 주택 시리즈들을 선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건축가 로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거의 잊혀졌던 그의 건축이 재발견되기 시작하는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그러나 로스의 이론은 당시의 젊은 근대 건축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10년대 중반 불어로 번역된 로스의 글은, 파리(Paris)에 정착한 스위스 출신의 무명 건축가, 샤를르 에두아르 잔네레(Charles Edouard Jeanneret)에게 읽혀져 각인된다. 그는 1920년부터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라는 가명을 통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건축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이었다.

세기말의 비엔나에서 로스가 일으켰던 응용 예술과의 고독한 전쟁을 르 코르뷔지에는 이어나가기로 한다. 파리에서 ‘장식 예술(l’art décoratif)’의 헤게모니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특히 1925년은 파리 국제 장식 예술 전시회(L’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écoratifs)가 열리는 기념비적 해였다. 르 코르뷔지에는 로스의 외침을 재현1)해야 했다. 그는 응용 예술은 불필요하며 이제 종말을 맞이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동일했다. ‘근대 양식’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제는 수공예가 아닌 산업 오브제들이 주인공이었다.

참고문헌
  • C. E. Schorske. Fin-De-Siecle Vienna: Politics and Culture. 1980.
  • C. Brandstätter. Vienna 1900: Art, Life & Culture. 2006.
  • Adolf Loos. Das Andere. 1903.
  • Adolf Loos. Ins Leere gesprochen (1897-1900). 1921.
  • Adolf Loos. Trotzdem (1900–1931). 1931.

    로스가 비엔나 제체시온, 독일 공작연맹을 비난했던 것처럼, 르 코르뷔지에도 1920년대 중반 독일 근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를 비판한다. 그로피우스가 교장으로서 창립한 바우하우스(Bauhaus)가 건축 학교보다는 응용 예술 학교에 가까운 교육 체계와 성과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글을 통해, 바우하우스가 즉시 응용 예술 교육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순수한 건축 학교로 남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발행일 : 2016. 03. 31.

출처

  •  남성택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프랑스 공인 건축사(ArchitecteDPLG)이자 스위스 EPFL 건축학 박사로, 2013년부터 한양대학교 건축학부에 재직 중이다. 건축을 중심으로 오브제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인위적 환경디자인을 통합하려는 총체적 이론의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엔나 제체시온과 아돌프 로스 - 예술과 기술, 결합 또는 분리 (건축과 미술, 남성택)

 

 

 

 

 

 

 

 

5. 아돌프 로스와 로스하우스_세기말의 위기를 건진 건축

  •  
대우건설 사보

1999. 2. 05

 

건축을 가리켜 기술과 예술이 합쳐져서 만들어 진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를 흔치 않게 본다.
이 말이 건축의 부분적 속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지는 모르나 건축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이 될 수 없다. 건축은 기술이나 예술 이전에, 인류가 삶을 시작하면서 그 역사를 같이 시작하였으며, 기술의 발달이나 예술의 성취는 오히려 건축으로 말미암아 괄목하게 이루어 진 것임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순서를 봐도 그 설명이 잘못되었다.
영어로 Architecture라는 단어는 으뜸이라는 뜻의 Arch와 기술, 학문이라는 뜻의Tect가 합쳐져서 된 것이니 이를 그대로 옮기면 ‘큰 기술, 큰 학문’이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건축이 우리의 삶에 물리적 환경 뿐 아니라 정신적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게 되므로 큰 기술, 큰 학문이 되지 않으면 그 오묘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건축으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으며 이루어진다. 우리 인류가 건축을 만들지만 더불어, 만들어진 건축으로부터 우리의 삶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 대부분 우리의 행동은 그 건축의 위치와 장소에 의해 만들어 지고 심지어 우리의 사고조차 건축에 영향을 받고자 한다. 수행하고자 하는 이가 조용하고 조그만 방을 찾는 것이 그 작은 예이다.
아무튼 우리의 삶과 대단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는 건축인 까닭으로, 어느 한 시대의 건축 속에는 그 시대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건축이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완벽한 기억장치가 된다는 말이다.

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건축이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참 좋은 기록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고고학자들이 옛 사람들의 주거지를 발견하고 환호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건축은 한 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건축으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으며 생활하는 한, 때때로 우리의 시대가 지향해야 할 문화의 방향을 가르키기도 한다. 즉 소극적인 거울이 아니라 그 시대의 선과 도덕을 내보이는 적극적인 거울이라는 것이다.
이는 참된 건축이 가져야 할 중요한 가치이며 건축의 역사는 그러한 정통적 건축으로 구성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시대의 전환기 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이 있어 왔지만, 한 세기가 종언을 고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교훈을 주는 건축이 있다.


아돌프 로스( Adolf Loos )가 설계한 로스하우스( Loos Haus )가 그 것이다.

19세기의 말엽 유럽사회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오랫동안 그 사회를 지탱해 왔던 귀족문화가 서서히 붕괴되고 대중문화가 새로운 가치를 갖게 되면서 이 두 가치체계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형국을 맞는다. 이 갈등은 귀족이나 일반시민 모두에게 그들이 오랜 역사 내내 지녀왔던 가치관의 전도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이는 그 때까지의 시대를 중심적으로 이끈 의식이 실종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른 바 세기말적 징후가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18세기에 유럽에 일기 시작한 산업혁명은 평민에게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하였고 생활에 여유를 가져 다 주게 된다. 농민들은 노동의 대가가 보장이 되지 않는 농토를 버리고 더욱 나은 삶을 꿈꾸며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든다. 도시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더욱 발달되는 산업은 경제적 부의 축적을 그들에게 허용한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스스로 기업을 일구기도 하여 신흥 부자가 속출하고 그들은 경제적 여유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여유는 그들이 꿈으로 동경해오던 귀족적 생활을 현실에서 가능하게 하였으나 그들 신분과 의식에 맞지 않는 그 생활은 허영일 수 밖에 없었다. 그 허영은 그들의 삶에서 공허한 것이어서 그들은 그 간극을 메우고자,그들의 의복과 방을 더욱 과도한 장식으로 꾸미고, 나아가 그들이 소유한 건물은 그들의 열등의식을 덥고자 과시적 형태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공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사는 도시는 건전하지 못한 가십거리로 가득 차게 되고 선함과 진실됨과 아름다움에 대한 판별의 기준이 지극히 모호해 지게 되었다. 즉 사회 전반으로 퇴행적 취향이 만연하고 말초적 허무주의에 빠져, 예술은 성을 유희의 도구로 삼으며 도덕의 경계는 희미해 진다. 드디어 그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그 때가 19세기 말엽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세기말의 위기였다.

합스부르그 왕조 이래 유럽 문화의 중심도시로 자리 잡은 비인 역시 왕조의 퇴조와 더불어 데카당트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전개를 직감한 이 도시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이러한 세기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정이 긴요함을 각성하고 치열한 예술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분리를 의미하는‘세쎄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운동은 ‘그 시대에 그 예술을, 그 예술에 그 자유를 (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이란 경구를 내세우며 관능과 시대착오에 빠진 문화에 새로운 가치와 틀을 세워 정면으로 대립한다. 오토 바그너를 필두로 요셉 마리아 올브리히, 구스타프 크림트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요 예술인이며 지식인들이 모두 이 운동에 동참하고 뜻을 같이 하여 각종 예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아돌프 로스도 처음에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돌프 로스는 1870년 브루노에서 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그곳의 왕립 기술학교에서 건축을 배운 그는, 20대 초반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의 세계박람회를 견학한 후, 새 시대의 도래에 대한 무한한 감동을 안고 26세 되던 해 비엔나로 돌아와 1933, 63세의 옹 고집스러운 일생을 마칠 때 까지 줄곧 이 도시에서 활동하였다.
그도 애초에는 이 세쎄션 운동에 동감하고 이에 참여하였으나 얼마 후, 그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의 이념과 생활마저 또 다른 형식의 강요라고 비판하며 이들로부터 비켜나와 그의 구별된 건축을 그 세기말의 도시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1909년 어느 날 비엔나의 도시 한 복판에 허영에 빠진 이 도시에서 용납할 수 없는 건축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로스하우스가 그것이다.

 

그가 건물의 개조나 인테리어 설계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무수히 거치고 난후 , 비엔나 시의 중심부에 짓게 된 이 주거와 상업시설의 건축은 아돌프 로스에게는 첫번째 큰 프로젝트인 동시에 이 크기로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의 후기에 그 깊이를 더해 간 그의 건축관은 물론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보인다. 순수한 재료 사용이나 도덕적으로 그에게 결정적 건축원칙이 된 장식의 배제, 그리고 그의 후기 주거계획안을 특징지운 공간의 연결성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평범한 근대 양식으로 보일 수 있는 겉 모습이지만, 모든 근대 양식이 이 건축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의식하고 이 건축을 보면 우리의 시각이 달라진다.
이 건축이 서게 되는 장소는 비엔나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중심적인 곳인 합스부르그 왕조의 궁전인 호프부르그가 위치한 미카엘러 광장의 건너편이었다. 격자의 창으로 무심히 뚫린, 아무런 장식 없는 이 건물은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왕궁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으며 비엔니의 도시가 아름다운 장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비엔나 시민들에게는 반역적 건축이었다.
당연히도 이 건물을 짓는 동안, 이 새 건물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비난 전선이 일었다. 비난은 주로 상부구조의 무장식에 대한 것에 집중되었다. “눈썹 없는 건물”이라거나, “맨홀뚜껑 같은 건물” 등이 이 부분에 동원된 주된 비난의 언어였으며, 심지어는 로스에 호의적인 비평가들 조차 이 말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특유의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로스는 이 건물을 위한 공개 심포지엄에서 장식에 대한 그의 입장을 역설한다.
모든 건축이 스스로를 과시하기에 급급한 도시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장식은 죄악’이며 참다운 건축은 내부로 향한 것이어야 하고 침묵이야말로 이 어지러운 도시에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귀머거리에 고함’이라는 글은, 본질과 근원을 잊고 부유하는 그 공허한 사회를 향하는 고뇌하는 지식인의 절규이며 심판자적 질타였다.
그의 확신에 찬 충고는 드디어 비엔나의 시민들을 설득하였고 그의 경구는 그 도시의 지식인들을 에게 마저 경탄이 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당대의 철학자인 칼 크라우스는 이 건축을 두고 “아돌프 로스는 미카엘러 광장에 건축을 세운 게 아니라 철학을 세웠다”라고 말하였다.

 

이 로스의 신념은, 이성에 바탕을 두고 인간 정신의 승리를 향하는 모더니즘을 탄생케 한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 모더니즘은 20 세기의 문화창조를 주도하여 인류로 하여금 세기말의 위기를 극복하게 한 위대한 시대정신 이었으며 우리의 현대를 있게 한 바탕인 것이다.

이미 한 세기 전의 일이며 그것도 우리와 뿌리부터 다른 먼 나라들의 이 역사가 요즘에 끊임없이 상기되는 까닭이 무엇인가.왜 잘 살아야 되는지를 모른 체 잘 살아보자고 질주해 온 우리의 지금, 천민자본이 득세하여 도시는 이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그러진 모습의 희한한 건축으로 어지럽고 그 속의 문화는 퇴폐와 저질이며 사회는 온통 무너져 내리는 부정과 부패의 가십으로 가득 찬 모습이 그들의 그 때와 너무도 흡사하다. 가장 빨리 지었다고 자랑한 다리가 끊어지고 넘치는 소비의 상징이던 백화점이 무너져 수 백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단순한 기술적 붕괴 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우리사회를 지탱해 온 논리의 붕괴이며 물질에만 탐닉해 온 편향된 가치의 추락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바야흐로 경제로 표현된 초유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게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미궁의 시대를 꿰뚫을 새로운 시대정신을 우리는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이 로스하우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지금도 결코 작지 않다.

출처 - 아돌프 로스와 로스하우스_세기말의 위기를 건진 건축 | IROJE

 

 

 

 

 

 

 

 

 

6.  프라하 여행 : 빌라 윈터니츠(Villa Winternitz)

 
 너굴  2023. 3. 19. 
 
 

드레스덴에서 만난 언니가 나에게 추천해준 아돌프 로스의 빌라 윜터니츠와 빌라 뮐러.

사실 두군데를 다 가보고 싶었지만 관람 시간대가 안맞았던 관계로 빌라 뮐러만 가게 되었다.

아돌프 로스를 사실 잘 몰랐던 나. 찾아보니 장식은 필요없다라고 모더니즘 건축의 첫 걸음을 뗀 인물이더라구.

어디서 보기엔 꼬르뷔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돌프 로스를 잘 몰랐지만 친한언니의 강력한 추천과 평면을 잠깐봤더니 흥미로와 보여서 가기로 했다.

위치는 여기

Na Cihlářce 2092/10, 150 00 Praha 5-Smíchov, 체코

Na Cihlářce 2092/10, 150 00 Praha 5-Smíchov, 체코

 

가는 길은 트램타고 가서 조금 걸어야한다.

프라하 중심지는 아니라서 주거단지가 많이 보이는데 또 나름대로 보는 경치가 있다.

걷는 중간 산같은 공원이 나온다.

이 곳을 지나면 한적한 주거지가 나온다.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이 하얀집이 바로 아돌프 루소의 빌라 윈터니츠다.

보면 한눈에 알 수 있게 앞에 크게 사진이 있다.

장식적 요소를 거부한 아돌프 로스 답게 모던한 볼륨과 비례의 건물 형태를 볼 수 있다.

들어가면 바로 앞에 보이는 계단이 입구가 아니라 그 뒤에 나무 뒤에 보이는 작은 문이 입구이다.

들어가면 보라고 책자를 준다. 사실 대충 보고 사진만 찍었다.

이 집의 하이라이트라고 볼수 있는 거실공간.

거실을 1.5층에 두면서 단독적으로 분리를 시켰고 거실 옆이 다이닝 룸인데 반층 올라가서 위치하고 있다보니

시선은 통하지만 공간은 분리가 되어있는 상태이다. 그 덕분에 층고 높고 시선적으론 분리가 되지 않았지만 동선적으로 분리가 된 거실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장식을 거부했다고 했지만 부분적으로 보이는 조적과 나무, 페인트 등으로 본인만의 장식을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3D 형태로 만들어놔서 그럴싸하게 전시했지만 조잡하고 알아보기 힘들었음. 누가 이렇게 함 ㅡㅡ

장식 싫어했던 건축가의 뜻을 받들어서 이런 다이어그램도 심플하게 해야지!

화장실의 타일 장식이 눈에 띈다.

계단의 색과 벽의 색 그리고 창틀의 색이 아주 잘 어올린다.

내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던 요소가 바로 이 부분이다. 하이쭝이 벽 안으로 들어갔고 색도 벽 색과 맞춰서 아주 예쁘다.

은근히 작은 침실. 하지만 분위기가아늑하고 좋다.

외부 테라스로 나가는 문. 작고 좁지만 비율적으로 예쁘며 역시 조적벽으로 장식 아닌 장식을 해놓았다.

일하는 방으로 보이는데 창문과 조적벽이 잘 어올린다.

이 작은 집을 다 둘러보는덴 한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집에서의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역시 거실을 동선적으로 분리시켰으나 시각적으론 분리시키지 않았고 1.5층의 특이한 형태로 높은 층고와 더불어 정원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형태로 계획했다는 것이다.

또한 겉에서 볼땐 모던한 하얀 볼륨형태였지만 내부는 동적이며 사용한 재료 또한 외부에 비해 많고 장식적이라면 장식적이다.

건축가가 좋아하는 재료 벽돌, 나무, 콘크리트를 잘 사용해서 잘 어올리게 계획했단 것이 인상적이였다.

장식을 싫어했다는건 외부에 있는 기둥이나 그런 장식들을 싫어했지 이 건축가가 창틀에 쓴 색이나 화장실 타일들을 보면 엄청 싫어하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집을 다 구경하고 나선 오 좋다라고만 생각되어졌는데 계속 여운이 남는 약간 특이한 집이였다.

보통 이렇게까지 생각이 들진 않는데 별거 아닌 구조지만 뭔가 집의 분위기라던가 아 이런 곳에서 산다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게속 드는 집을 방문했던 것 같다.

다음번엔 아돌프 로스의 다른 집도 방문하고 싶다. 아무래도 이 집보단 빌라 뮬러가 더 유명한 것같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빈의 로스하우스도 방문하고 싶다.

이번에 읽는 책이 알랭드보통의 행복의 건축인데 읽다가 이 빌라 윈터니츠를 떠올리게 한 구절이 있어 그 구절로 이번 글을 마무리하겠다.

"이 집의 거주자들의 수많은 병들을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들은 행복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 행복에 건축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했다."

-알랭드보통, 행복의 건축

 

 

 

 

 

 

 

 

 

 

7.  당신은 어떤 집에서 살고 싶나요?, <홈 스토리즈>

 

안녕, 에디터B다. 부산 여행의 목적은 언제나 맛집이었다. 밀면, 돼지국밥, 복국, 어찌나 먹을 게 많은지 2박 3일은 부족했다. 심지어는 부산국제영화제에 갈 때도 동래파전을 먹기 위해 영화 두 편을 포기할 정도로 음식에 매달렸다. 하지만 여행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이제는 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밸런스라는 걸. 아무리 먹는 게 중요해도 보고 듣고 쉬는 것을 넣어 복합적으로 계획을 짜야 여행의 완성도가 올라간다. 만약 부산 여행을 준비 중이라면 이곳을 추천한다. 수영구 망미동에 자리잡은 복합문화공간 F1963에 위치한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이다.

 

F1963은 공장을 뜻하는 Factory와 1963년 완공된 고려제강의 설립 일자를 합쳐서 지은 이름. 한때 거대한 공장이었던 이곳은 리모델링되어 부산을 대표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은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서 진행 중인 <홈 스토리즈>만 소개할 예정이나, F1963에는 국제갤러리 부산점, 예스24 등 즐길 거리를 비롯해 복순도가, 테라로사,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 4층에 위치한 신선한 로컬 식재료를 활용해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마이클 어반팜테이블 등 먹거리도 풍부해 온종일 둘러보기에 좋다. 그럼 공간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전시를 둘러보자. <홈 스토리즈>는 내가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최근에 봤던 전시 중 가장 인상 깊은 전시였다.

 

<홈 스토리즈>는 현대자동차와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함께한 특별 전시다. 이들은 2021년부터 파트너십을 맺었다.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서 진행되는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과의 협업 전시는 단순히 기존의 전시를 순회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차의 스토리도 함께 녹여 양사의 공동 비전을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파트너십을 통해 진행했던 첫 전시 <헬로 로봇, 인간과 기계 그리고 디자인>에서는 현대차그룹의 로봇들을 함께 전시해 다양한 로봇의 활용과 의미를 보여줬다. 두 번째 협업 프로젝트인 이번 <홈 스토리즈> 전시에서도 현대차의 대형 SUV 전기차 비전을 제시하는 아이오닉 콘셉트카 ‘세븐(SEVEN)’과 이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스튜디오 스와인의 신작을 함께 선보이며 모빌리티까지 확장된 홈(Home)의 개념과 미래의 비정형적인 주거 형태에 대한 담론을 던지고 있다.

디자인에는 이유가 있고, 인테리어 역시 마찬가지다(물론 이유 없는 디자인도 있지만 좋은 디자인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한다). 단순히 예뻐 보이는 것도 그냥 만들어지진 않는다. <홈 스토리즈>에서는 주거 문화와 인테리어가 어떠한 맥락에서 변화했는지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이번 전시는 관람 순서부터 재미있다. 전시는 '미래'의 생활 공간이 될 모빌리티를 의미하는 아이오닉 콘셉트카 '세븐(SEVEN)'에서 시작한다. 다음으로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선보이는 지난 100 년 간의 혁신적인 인테리어 스토리가 ‘현재’에서 ‘과거’순으로 전시된다. 이후 ‘세븐’의 친환경 소재를 활용해 미래 쉘터의 모습을 구현한 스튜디오 스와인의 몰입형 설치 작품 '흐르는 들판 아래'의 전시 공간으로 마무리된다.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다시 미래로 흘러가는 방식 덕분에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인테리어의 변천사와 자동차의 결합, 신선한 조합이다. 모빌리티 기술의 발전으로 미래의 자동차는 더 이상 이동 수 단이 아니며, 하나의 ‘생활 공간이자 집’으로 확장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섹션을 통과할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의 뿌리에 가까워졌다. 만약 순행으로 진행되었다면 딱딱한 역사 공부처럼 느껴졌을 텐데, 역행이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그리고 도슨트의 설명이 정말 알차고 친절하니 가이드를 받는 걸 강력 추천한다.

전시의 첫 번째 파트는 아이오닉 콘셉트카 ‘세븐(SEVEN)’이다. 주거 문화에 대한 전시라고 하더니 모빌리티 스토리로 시작하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요즘의 자동차는 차박, 카 오피스(Car Office) 등 이미 새로운 용도를 입고, 이동 수단을 넘어 사람들이 주거하며 일상을 보내는 공간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말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자율주행이 지금보다 더 고도화될 거다. 운전은 인공지능에게 맡긴 채 운전자는 편하게 동승자와 얘기하거나 드라마를 보지 않을까. '세븐(SEVEN)'에는 이러한 상상이 반영됐다.

스티어링 휠(운전대)이 사라지고 대쉬 보드는 슬림해졌다. 시트는 라운지 체어처럼 편안하고, 회전식으로 제작돼 일행과 둘러앉아 업무도 보고 회의를 할 수도 있다. 선루프에는 비전 루프 디스플레이가 있어서 누우면 바로 영화 감상 이 가능하다. 눕는 곳이 바로 영화관이 되는 셈이다. 이런 차가 언제 상용화될지 알 수는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현대자동차가 만들어줄 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다.

자, 이제 하늘거리는 커튼 사이로 들어가, 전시의 두 번째 파트를 살펴보자.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소개하는, 20여개의 혁신적 인테리어를 통해 진화한 지난 100년간의 주거 문화다.

이 파트의 첫 번째 테마는 '자원으로서의 주거 공간'이다.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자원으로서의 주거 공간? 과거와 현재의 주거 공간을 대하는 방식을 비교해보면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근무 공간을 겸하기도 하고, 여행자에게 숙소로 빌려주기도 하고, 취향이 같은 낯선 사람을 초대해 네트워킹 파티를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부동산 개념에서 집은 주요한 자산이자, 투기 대상이기도 하다. 첫 번째 섹션은 집을 대하는 색다른 시선, 다양한 주거 활용법을 보여준다.

그랜비 포 스트리트 by 어셈블(2013-현재)

첫 번째로 소개할 프로젝트는 젊은 건축가 그룹 어셈블(ASSEMBLE)의 그랜비 포 스트리트다. 리버풀의 마을 그랜비는 많이 낙후되어 있는 상태였다. 마을에는 빈집이 많았고, 대부분은 파손된 채로 방치됐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러 주민들도 많이 떠났는데, 그럼에도 남아 있는 주민들은 마을을 되살리기 위해 거리를 청소하고 빈집 벽에 그림을 그리는 등의 노력을 했다. 어셈블은 2013년 그랜비의 주민들과 함께 도시 재생 프로젝트 '그랜비 포 스트리트'를 시작했다. 폐자재를 활용해서 집을 새롭게 만들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발생한 욕실 타일, 문손잡이, 벽난로 프레임 등은 업사이클링했다. 업사이클링한 재료를 판매하는 건 지역의 주요 비즈니스로 자리 잡았다.

역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인 걸까. 주민들은 마을을 버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되살리려 노력했고, 어셈블이 함께한 이 프로젝트는 2015년 영국의 권위 있는 미술상 '터너 예술상'을 수상했다.

안티빌라 by 브란들후버+엠드, 벌론

전시장에 입장할 때 내가 했던 말을 혹시 기억할까? '하늘거리는 커튼 사이로 들어가'라는 표현처럼, 이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과의 협업 전시 파트는 거대한 하얀색 커튼으로 전시관별 세부 구분을 해 놓았다. 반대편이 살짝 보이는 반투명함 덕분에 전시장은 답답하지 않으면서 공간 구분이 된다. 안티빌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독일의 브란들후버가 만든 안티빌라는 기존의 건물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하중의 영향을 받지 않는 벽은 모두 제거하고, 난방에 유리한 소재로 만든 커튼으로 공간을 구분했다는 것. 외관에서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투박함을 느낄 수 있고, 내부는 우아하다. 첫 번째 섹션에서는 그랜비 포 스트리트 같은 도시 재생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디자인된 공간을 살펴볼 수 있다.

엘리 by 요지겐 포케토(2017)

마드리드의 건축 스튜디오 엘리에서 만든 '요지겐 포케토'도 흥미롭다. 부동산 가격이 끝도 없이 치솟으면서 대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점점 더 좁은 집으로 쫓겨나게 된다. 엘리는 10평형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구조를 선보였다. 바닥을 높여서 공간을 분할하고 높아진 바닥을 활용해 수납장을 만들어냈다. 요지겐 포케토는 수많은 물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도라에몽의 마법 주머니에서 착안한 이름인데, 작은 공간의 효율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어울리는 작명이다.


이제 두 번째 테마 공간으로 가보자. 1960년대부터 80년대의 인테리어를 다룬 '인테리어의 대격변'에 대한 전시가 펼쳐진다.

트렌드는 정반합을 반복한다. 가령, 실용주의가 유행하면 조금씩 다른 버전의 실용주의1, 실용주의2가 나타나다가 전혀 다른 장식주의가 출현한다. 그러다 서로 뒤섞이고, 발전하고, 다시 새로운 트렌드가 출현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진입하면서 외향적인 가치가 대두되었는데, '인테리어의 대격변'에서는 정확히 이 시기의 트렌드를 다룬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라거펠트 아파트 by 칼 라거펠트, 앙드레 푸트만(1983경)

1981년 에토레 소트사스, 미켈레 데 루키 등 밀라노를 기반으로 한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모여 멤피스 그룹을 만들었다. 이들은 모더니즘에서 규정하는 '좋은 취향'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멤피스 그룹의 패션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앙드레 푸트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주거 공간을 멤피스 그룹이 만든 가구로 가득 채웠다. 사진 속 형형색색의 인테리어를 보자. 색 조합이 자유롭고, 각각이 개성적이며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듯한 모습이다. 첫 번째 사진에 나오는 공간이 바로 라거펠트가 머물던 방인데 휴식을 위한 공간이 이토록 화려할 수 있다는 게 라거펠트답다. 우리 집은 바우하우스의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으로 꾸며도, 친구 한 명 정도는 멤피스 디자인으로 집을 꾸미면 좋겠다. 카페에 가듯 기분 전환을 위해 자주 놀러 가고 싶으니까.

실버 팩토리 by 앤디 워홀(1964)

이번에는 1960년대 뉴욕으로 가보자. 주인공은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았던 예술가들. 이들은 작업실이나 창고로 쓰던 큰 건물을 처음에는 작업용 스튜디오 겸 집으로 사용했다. 층고가 높은 창고나 폐공장 같은 스타일을 로프트 하우스 혹은 로프트 타입의 주거라고 한다. 지금은 대형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다. 그 뿌리가 바로 1960년대 뉴욕.

1964년 앤디 워홀은 한때 모자 공장이었던 공간의 벽과 천장에 은박지를 잔뜩 붙이고 은색 스프레이로 페인트칠을 했다.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가구에도 은색 스프레이를 뿌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버 팩토리는 앤디 워홀의 아파트이자 아티스트들의 교류 공간이자 작업 스튜디오가 됐다. 워홀은 스크린 테스트라 불리는 단편 영화를 수백 편 제작했는데, 500편이 넘는 스크린 테스트가 실버 팩토리에서 촬영됐다.

나카진 캡슐 타워 by 구로카와 기쇼(1970-1972)

일본 최초의 캡슐 아파트 '나카진 캡슐 타워'. 이 건물을 도쿄에서 직접 본 사람도 많을 거다. 건축가 구로카와 기쇼의 남다른 예술 감각을 보여주는 나카진 캡슐 타워는 144개의 캡슐을 사용해 13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캡슐 하나는 약 2.4평의 면적에 2.3미터의 층고로 사이즈가 작지만, 주거와 업무가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50년 이상 운영되며 도쿄 긴자의 관광명소였으나 현재는 안정성의 문제로 철거가 됐다. 노후 캡슐을 정기적으로 교체한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각 캡슐의 소유주가 달라 교체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카진 캡슐 타워는 철거되었지만 이후 모듈형 주택이나 캡슐형 숙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3번째 공간의 테마는 '자연과 기술'이다. 1940년대부터 60년대의 인테리어 특징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모더니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주방에는 모듈러 시스템과 기계화로 표현되는 모더니즘 개념이 주거 공간에 반영된다. 두 번째 특징은 주거 공간에 자연을 들여온다는 것. 자연적인 형태와 소재가 인기를 얻고 직선적이지 않은 유기적인 형태가 인기를 얻는다.

까사 데 비드로 by 리나 보 바르디(1951)

통유리창 밖의 숲을 보는 여인, 바로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다. <홈 스토리즈> 포스터에 사용된 바로 그 사진이다. 이탈리아 출생의 리나 보 바르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축을 할 수 없게 되며 남편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을 간다.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살 집을 건축하게 되는데 그 유명한 '까사 데 비드로'다. 뜻은 '유리의 집'. 이름에 걸맞게 3면을 통유리로 만들었고, 아래에는 필로티 구조로 지어졌다. 통유리를 사용한 덕분에 자연의 풍경을 실내로 불러들인다. 그렇다고 까사 데 비드로를 단순히 자연을 감상하기에 좋은 집으로만 보면 안 된다. 집으로 향하는 계단서부터 조경이 시작된다. 지역의 토종 식물을 심어 놓은 유리 중정과 실내의 식물을 보면 까사 데 비드로는 자연의 일부, 자연 그 자체처럼 보인다.


자, 이제 어느덧 마지막 테마에 이르렀다. 4번째 테마 공간의 주제는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를 다룬 '모던 인테리어의 탄생'. 여기에서는 모더니즘이 어떻게 태동하기 시작했는지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등 굵직한 사건의 여파로 1920년대의 디자이너들은 장식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실용적인 인테리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 키친 by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1926)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 키친이 그렇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건축가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는 현대 시스템키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 키친을 만들었다. 그녀는 일찍이 미국의 경영학자 프레데릭 테일러가 연구한 노동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노동자 동선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쉬테-리호츠키는 테일러의 이론을 부엌에 적용했다. 사진 속 구조를 보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하게 보이는데 프랑크푸르트 키친이 지금 일반화된 시스템키친의 뿌리다. 덕분에 주부가 움직이는 동선이 크게 단축됐다. 부엌의 역사에서는 혁명과도 같은 변화였다.

빌라 뮐러 by 아돌프 로스(1928-1930)

 

아돌프 로스의 '빌라 뮐러' 역시 눈여겨봐야 할 작품이다. 아돌프 로스의 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장식은 범죄다"라는 말이다. 위 사진을 보면 모더니즘과 비교했을 때 화려해 보이지만 당시의 트렌드와 비교하면 화려한 장식을 많이 배제했다. 다양한 색감이 섞여 있을 뿐 가구 디자인이나 구조 자체는 모던하게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내부 인테리어보다는 빌라 뮐러의 외관을 더 좋아한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지만 빌라 뮐러의 외관은 흰색과 노란색 두 가지만 활용했는데, 지금 봐도 굉장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게 아름답다.

마지막 공간은 <홈 스토리즈>의 100년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인 만큼, 반드시 관람해야 할 작품도 많다. 엘시 드 울프의 빌라 트리아농, 애쉬콤의 세실 비튼,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빌라 투겐트하트 등.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아직도 많이 남았지만, 언급된 작품을 포함한 더 많은 작품은 직접 방문해서 감상하길 바란다.


흐르는 들판 아래 by 스튜디오 스와인(2023)

인테리어의 100년사를 충분히 살펴봤다면, 이제 독립된 옆 전시장으로 입장하자. <홈 스토리즈> 전시의 3번째 파트 에서는 영국의 디자인 듀오 ‘스튜디오 스와인(Studio Swine)’이 현대자동차의 미래 모빌리티 비전에 영감을 받아 제 작한 신작 <흐르는 들판 아래> 전시 공간이 펼쳐진다.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온통 푸른색이다. 마치 바닷속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스모그가 있어서 시야는 살짝 흐리고 벽에는 거울이 설치되어서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시원한 향도 난다. 그리고 어디선가 '지지지직 지지지직'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출처는 천장이다.

천장에는 60개의 플라즈마관이 설치되어 있다. 알 수 없는 패턴으로 작동되는 관에서 나는 소리가 모여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플라즈마는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 중 고체, 액체, 기체보다 더 희귀한 물질이라고 한다. 번개, 폭풍, 북극광, 혜성의 꼬리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데, 지구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별과 태양이 플라스마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의 99%는 플라즈마라는 설명을 들었다.

<홈 스토리즈>는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 얘기하는 전시다. <흐르는 들판 아래>에서 말하는 우리가 사는 곳은 바로 '푸른 별 지구'. 스튜디오 스와인은 건축가 버크민스터 풀러가 지구를 "차가운 진공의 공간을 통과하는 지구라는 모빌리티"라고 언급한 것에서 착안해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시원한 향기, 우주를 표현한 소리, 눈을 편안하게 만드는 푸른색 조명 덕분에 거대한 지구에 앉아 우주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는 전시 공간에 놓인 긴 스툴을 현대차의 아이오닉 콘셉트카 ‘세븐(SEVEN)’에 사용된 친환경 섬유 소재로 제작 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모빌리티’와 같은 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전시를 다 봤다면 3층으로 올라가 '아카이브 라운지'에서 여운을 즐기자. 이곳에는 전시 준비 과정과 자세한 기획 의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내가 느꼈던 감상과 전시 기획자의 의도를 비교해보며 이번 전시를 마무리하면 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문구가 적힌 도어사인도 챙겨가자. 두 개, 세 개 가져가도 된다.

전시장을 나서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을까? 자연과 함께하는 집, 화려한 색감으로 가득 찬 집, 실용적인 가구가 있는 집 중에서 내가 원하는 집은 무엇일까. 어떤 집이든, 오늘 당장 꾸며볼 순 없어도 방향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홈 스토리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주거 환경이 어떠한 정치,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했는지, 그리고 미래의 주거 환경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제시하는 눈이 즐거운 전시였다. 전시는 10월 1일까지 열리며, 관람료는 무료다.

출처 - 당신은 어떤 집에서 살고 싶나요?, <홈 스토리즈> | 디에디트 (daum.net)

 

 

 

 

 

 

 

 

 

 

 

 

 

 

 

 

 

현대자동차가 최근 선보이는 홈 스토리즈전시는

지난 한 세기를 거쳐오며 주거 생활 양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본.

이번 전시에서는 공간과 공간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모빌리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홈 스토리즈전시는 관람객을 몰입형 여정 속으로 초대한다

아이오닉 콘셉트카 세븐을 통해 미래를 엿보고 나면,

주거 공간의 100년 역사가 눈 앞에 펼쳐지고,

마지막으로 디자인 스튜디오인 스튜디오 스와인(Studio Swine)의 설치 작품인

흐르는 들판 아래(Under a Flowing Field)”를 감상하는 것으로

모든 여정이 마무리된 

설치 작품의 스툴은 아이오닉 콘셉트카 세븐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소재를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스튜디오 스와인의 새로운 작품, “흐르는 들판 아래

관람객들이 예술적 시선으로 바라본 모빌리티의 미래를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쉘터를 연출설치 작품의 스툴은 아이오닉 콘셉트카 세븐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소재를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스튜디오 스와인의 새로운 작품, “흐르는 들판 아래

관람객들이 예술적 시선으로 바라본 모빌리티의 미래를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쉘터를 연출한다

 

현대자동차와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공동 기획한

홈 스토리즈전시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신기술의 개발로 인해

주거 생활이 변화해온 과정을 직접 살펴보고

미래 주거 공간에서 모빌리티의 역할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선사한다

 새로운 주거 공간으로 거듭날 콘셉트카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홈 스토리즈전시는 2023101일까지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서 만나보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