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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46. 로버트 벤투리 Robert (Charles) Venturi

1. 로버트 벤투리 Robert (Charles) Venturi

 
출생국적
1925. 6. 25, 미국 필라델피아
미국

요약 미국의 건축가.

매우 독창적인 작품과 저술로 20세기 미국 건축설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기능주의에 대안을 마련했다. 재치있고 명확한 말로 자기 작품의 비정통적 요소를 대변했던 그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유명한 선언 "적을수록 많은 것이다"(Less is more)에 대해 "적을수록 지루하다"(Less is a bore)는 주장으로 응답했다. 프린스턴대학교 건축과에서 구조의 장식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나중에 보자르 전을 따른 장 라바튀 밑에서 공부했다(1947~50). 1954~56년 로마에 있는 아메리카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오스카 스토노로프 사무소(필라델피아), 에로 사리넨 사무소(미시간 주 블룸필드힐스), 그리고 루이스 I. 칸(필라델피아) 사무소 등에서 설계가로 일했다.

1957~65년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건축과교수를 지냈으며 1965년 소련에서 미국 국무부 강사로 일했다. 로마의 아메리카 아카데미 주재 건축가(1966)와 이사(1966~71)를 지냈고 1977년에는 프린스턴대학교 건축·도시 설계학교 지도교수가 되었다.

저서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1966)에서 자신의 건축 철학을 이끌어냈으며 다양한 영향을 받아들이는 절충적 접근 방법을 요구했다. 자신이 일컬었던 "혼란스런 생동감"을 옹호하여 국제주의 건축가들의 엄격한 형식성을 거부했고 단순하고 직설적인 표현 대신에 모호성과 다의성(多意性)을 주창했다. 이 선언과 나중에 나온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Learning from Las Vegas〉(부인 데니스 스콧 브라운과 스티븐 이즈노어 공저, 1972)은 젊은 건축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상점 건축에는 많이 쓰였으나 '진지한 건축가'들에게 무시당했던 알루미늄판, 거친 벽돌, 광고판, 텔레비전 안테나 같은 재료와 시각적 참조물을 훌륭히 결합한 건축을 실현함으로써 이론으로 선언한 그대로 반어적인 유머를 보여주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알려진 절충양식 운동의 비공식적인 기수로서, 대부분의 작품에서 19세기 싱글 양식 주택을 비롯한 역사적인 사례들을 따랐다. 대표작으로는 퍼처스에 있는 뉴욕주립대학 인문과학 강의동(1973)과 필라델피아의 미국독립역사공원에 있는 프랭클린 정원이 꼽힌다. 프랭클린 정원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생가가 있던 터를 표시하기 위해 강철 골조로 주택 윤곽을 설치했다. 그밖의 주요작품으로는 인디애나 주 콜럼버스에 있는 투 베이 소방서(1968),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의 앨런 기념미술관 개수·증축(1976)과 뉴저지 주 애틀랜틱 시에 있는 말버러 블레넘 호텔 개수작업을 들 수 있다.

출처

 

 

 

 

 

 

2.  [건축가의 발자취를 느끼다29]  로버트 벤투리

 

 기사입력 2015-12-09 
 
풍부한 사고와 자유로운 유연성, 해박한 이론 갖춘 건축계의 古典

 

 
 
 “건축디자인이란 예기치 않은 결말을 허용해야 하는 모험적인 여행이다. 어쩌면 기대하지 않았던 거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때론 상황이 긴박하고, 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냉혹한 상황에서 한 가닥 진실을 끌어낼 때처럼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기호화 시스템으로 읽는 건축, 매너리즘 시대를 위하여>라는 이 책의 저자는 부부이다. 두 사람은 근현대 건축 사상 가장 뛰어난 건축책으로 꼽히는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 <라스베이거스의 교훈>의 저자이기도 하다. 로버트 벤투리와 데니스 스콧 브라운은 부부라기보다는 일생을 함께 하면서 모든 것을 같이 일군 ‘파트너’에 가깝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벤투리는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1958년까지 사리넨, 루이스 칸 등의 사무실에서 일하다 자신의 건축회사를 설립했다. 1959년 펜실베이니아대 부교수, 1965년부터는 예일대 교수로 몸담기도 했다. 벤투리는 ‘위대한 건축가’이자 ‘위대한 건축이론가’이다. 1960~1970년대에 부인인 스콧 브라운과 함께 집필한 책들은 건축계의 ‘고전’으로 꼽힌다. 벤투리는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을 대변하는 ‘적을수록 좋다’라는 미스 판 데어 로에의 철학에 맞서 ‘단순한 것은 지루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의미의 명료성보다는 풍부함을, 양자택일적인 사고보다는 공존의 태도를 더 우위에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식과 상징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계에서는 이 때문에 벤투리를 모더니즘 이후를 이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으로 여긴다.

 
 
미국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는 이런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벤투리가 개인 주택을 개조해 만든 미국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은 재즈와 네온사인 등 팝아트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전통적인 미술관이라는 딱딱한 상징성보다는 도시와 주변이 갖고 있는 유연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야자수가 들어선 주변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미술관으로 꼽힌다. 샌프란시스코가 히피로 상징되는 자유의 도시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미국 필라델피아 `길드하우스 요양소`
 필라델피아의 길드하우스 요양소, 퓨어체이스의 뉴욕주립대 인문관, 코네티컷 뉴헤이번의 딕스웰소방서, 필라델피아 프랭클린재판소, 오하이오주 오베를린의 오베를린대 알렌미술박물관, 필라델피아 교외에 지어진 바스코 쇼룸 등에서는 건물 높이의 다양한 모습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벤추리의 작품 대부분은 미국 식 상업건축의 평범하고 획일적인 모습을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크기가 큰 작품보다는 작은 작품이 많고, 매우 번잡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조화가 가장 큰 핵심 주체이다. 프린스턴대의 버틀러대 기숙사는 벽돌, 석회암 장식과 줄무늬로 정문이 장식돼 있다. 대학 전체가 대리석과 회색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오베를린대 알렌미술박물관에서도 그의 이런 성향이 나타난다. 1917년에 지어진 건물을 1973년 증축하면서 벤투리는 기존의 다른 건축가들과 달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대신, 과거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했다. “걸작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너무 눈에 띄지 않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 벤투리의 설명이었다.

 
 
필라델피아 `바나 벤추리 하우스`
 벤투리 부부의 제자인 한국계 건축가 스티븐 송은 “건축 거장들은 대단히 자부심이 강하고 거만한 편이지만, 벤투리와 스콧 브라운은 투철한 이론가이자 예술가이면서도 이웃집 할아버지, 할머니 같다”면서 “건축가들이 엄청난 권력을 누리지만 인간이 중심에 놓인 건축이 아니면 지속가능한 건축이 될 수 없다고 늘 강조한다”고 평가했다.

 
 
 
에피스코팔 아카데미 부속 예배당(사진출처=위키미디어)
벤투리 부부는 건축계의 고질적인 ‘성차별’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거의 평생을 같이 작업하고 책을 썼지만, 1991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은 벤투리 혼자만 받았다. 이는 가즈요 세지마가 남성 파트너와 함께 수상한 것과 대비된다. 하지만 벤투리 부부는 국립 미술상, 빈센트 스컬리 주니어상 등 수많은 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며 함께한 공을 인정받기도 했다.

 박건형(칼럼니스트)

〈대한경제 - 건설을 보는 눈 경제를 읽는 힘 건설경제〉

 

 

 

 

 

 

 

3.  실재적인, 총체적인, 전략적인: 실천적 삶을 위한 탈비판 건축

남상문
사진
신경섭(별도표기 외)
자료제공
삶것
진행
박지윤 기자

 

삶+것 

19세기, 고트프리트 젬퍼가 건축에 생활 개념을 도입하고 카를 마르크스가 일상을 혁명의 진원으로 정의한 이후 건축에서 삶은 논쟁적 주제가 되어왔다. 인류 역사상 현대는 가장 빠르고 복잡하고 파편화되고 불투명하다. 따라서 건축가가 현대적 삶을 주제로 작업한다면 불완전하고 임시적이더라도 설득력 있는 제안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방법밖에 없다. 삶을 모토로 내세운 양수인(삶것 대표)의 작업은 반복 속에서 자기 긍정과 성취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거대하고 무거운 과업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니체와 알베르 카뮈가 지적했듯 끝없는 반복은 인간을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영웅으로 만든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분석해 문제를 발견하고 개념화한 후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양수인의 작업 방식은 철저히 미시 서사에 의존하고 있다. 어떤 추상적 관념이나 사상이 전체를 지배하지 않고 하나의 해결책을 다른 프로젝트에 적용할 수도 없다. 자연스럽게 작업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양수인은 문제의 내용과 범위를 명확히 정의해 프로젝트를 통제하는 전략가적 면모로 넓게 펼쳐진 삶의 양태를 기민하게 오갔다. 이는 건축가 개인의 재기와 끈질김 덕분이지만 한편으로는 임기응변에 능해야 하는 한국적 상황이 양수인의 건축을 진화시키는 것 같다.

건축에서 사물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강가에 놓인 다리를 사방(Geviert: 하늘, 땅, 인간, 신성)을 모으는 사물로 설명하며 실존의 근거로 제시하고, 현상학에서는 사물의 물성이나 구축의 시학에 집중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다양한 의미 생성을 위한 해석학적 모호함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양수인의 사물, 것(thing)은 실재(real)에 가깝다. 사물을 뜻하는 ‘thing’의 어원은 ‘assembly’다. 이는 사물의 근본이 부분 혹은 조각들의 모음에 있음을 뜻한다. 양수인은 실재하는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고 부분들의 구성을 재구조화하면서 건축을 타협된 현실에 저항하는 일종의 준-자율적 놀이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건축의 자율성을 뜻하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에서 작은 혁명을 반복하고 세계 곳곳을 유랑하며 자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노마드의 존재 방식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사회 주변부, 비주류, 대안시설 등 하위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왼쪽) 존 포트만의 하얏트 리젠시 애틀랜타(1967) / Screenshot from Portman Architects Website (오른쪽) 양수인의 컬쳐랜드 오피스(2020) ​ 

 

대중적 모더니즘의 유산 

컬쳐랜드 오피스는 민간 기업의 업무시설이지만 문화사업을 영위하는 기업 성격에 맞춰 저층부에 공연장, 임대형 문화시설, 카페와 편의시설 등을 배치하고 업무 공간은 상층부에 조밀하게 구성했다. 업무 공간에 임직원을 위한 옥외 발코니를 만들면서 남은 용적률은 옥상정원 위로 올려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우주선 모양의 전망 좋은 연회 공간을 만들었다. 프로그램 구성은 사전 기획된 것이 아니라 건축가의 제안을 의뢰인이 수용해 실현됐다. 건축가는 규모는 작지만 이 건물이 단순 업무시설이 아니라 도심 속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하도록 의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1960~1970년대 미국의 기업가형 건축가 존 포트만이 설계한 하얏트 리젠시 애틀랜타, 샌프란시스코, 휴스턴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 건물들은 공통적으로 저층부에 문화, 레저, 컨벤션, 상층부에 객실, 옥상에 우주선 모양의 전망 카페를 가지고 있다. 컬쳐랜드 오피스는 프로그램 구성, 도시적 맥락, 형태 조작 등에서 이와 유사한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건축가는 단순히 의뢰받은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조직해 건물이라는 제한된 외피 안에 담는 컨설턴트이자 다양한 인적 관계와 요구를 조율하고 독려하는 퍼실리테이터, 사회적 엔지니어다. 정북일조 사선제한, 지구단위계획, 지형의 단차, 용도와 성격, 공사비와 사업성 등과 같은 물리적 제약 조건에서부터 세세한 의뢰인의 요구 조건, 사용자 편의성과 쾌적성, 건물의 향후 활용 방안까지 건축가는 건물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항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공간은 사람들을 위한 상자가 아니라 이벤트가 됩니다. 어떤 건물이든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냥 물건일 뿐입니다. 저는 뭘 만들던 총체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림에서부터 조각, 가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요. 당신은 사람들을 위한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휴먼 인터페이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삶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존 포트만▼1 

 

존 포트만은 낙후된 도심을 재생해 삶의 조건과 복리를 증진시킨 위대한 건축가라는 칭호와 인기에 영합한 상업적 디벨로퍼라는 불명예를 동시에 갖고 있는 양면적 인물이다. 그에 앞선 선례로는 록펠러 센터를 설계한 건축가 레이몬드 후드가 있다. 렘 콜하스는 『광기의 뉴욕』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유토피아주의자로, 레이몬드 후드를 현실에 기반한 대안적 모더니스트로 평가한다. 20세기 초 정부 주도의 공공 건축과 시민사회가 공동체의 이상을 이끌었던 유럽 모더니즘과 달리 미국은 코니 아일랜드와 맨해튼이 상징하는 대중문화, 시장경제, 자유주의, 실용주의 등이 모더니즘을 주도했는데 68혁명 이후 근대의 모순이 폭발하던 시절 콜하스는 피터 아이젠만의 자율적 건축과 로버트 벤투리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미국의 대중적 모더니즘을 선택적으로 복원함으로써 파편화된 현대사회와 도시에 대응하려 했다.

러시아 구성주의, 미스 반 데어 로에, 코르뷔지에 등 초기 모더니즘의 선례를 참조한 프로젝트에서 그는 대도시의 밀집과 혼돈, 익명화된 비장소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포용하며 기술, 자본, 개발, 거대 구조물, 불확정성 등을 통해 근대의 기획을 연장시켰다. 그가 모더니즘에서 제거한 것은 계몽주의적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다. 미국의 대중적 모더니즘을 환기시키는 컬쳐랜드 오피스는 어떤 선험적 범주나 도덕, 추상적 관념에 기대지 않고 실재에 기반한 합리적 분석과 문제 설정을 통해 적절하고 가용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모순과 위험을 창작의 기회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콜하스와 닮았다. 여기에는 아키그램, 아키줌, 슈퍼스튜디오 같은 순진하고 낙관적인 유토피아도, 피터 스미슨과 앨리슨 스미슨, 제인 제이콥스의 제안 같은 인류학적 호소도 없다. 단순 명쾌한 개념과 현실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이성, 의심할 수 없는 실재가 빛나고 있을 뿐이다. 건축가는 논리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모호함과 미지의 신화적 세계를 회피한다. 콜하스는 건물의 내외부를 분리해 별개의 세계로 봤지만 컬쳐랜드 오피스는 전면도로 방향으로 각 층마다 옥외 발코니를 만들고 식재를 계획해 내외부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었다. 영동대로 측 건물 전면은 저층부 모퉁이를 유리 커튼월로 마감하고 투명 엘리베이터와 보이드, 엇갈린 발코니와 브리지 등을 활용해 수직성과 역동성을 강조했다. 반면 정북일조 사선제한을 받은 탄천 측 건물 후면에는 단순한 상자형의 공연장 매스와 지형을 활용한 수평적 정원을 배치해 도시적 맥락에 대응했다. 독특한 형상의 실크 스크린 유리 외피 역시 순수하게 자율적 형태를 추구한 듯 보이지만 사실 이 파사드 디자인은 도회적 유리 커튼월을 선호하는 의뢰인의 취향, 에너지 효율, 유지 관리비용, 향에 따른 일조 차폐, 조망의 조절, 인접 대지와의 관계, 공사비 절감 등 건물의 내외부를 아우르는 다양한 맥락과 제약 조건에 반응한 상호 텍스트적 결과물이다.

 

▼1​ Richard L. Eldredge, ‘No architect ever loved Atlanta like John Portman’, Atlanta Magazine, Jan. 2018.

 

 


(왼쪽) 마누엘 아이르스 마테우스의 카사 나 테라(2018) / Image courtesy of Silent Living / ©Nelson Garrido (오른쪽) 양수인의 보통집(2020) ​ 

 

형태 없는 건축 

보통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형태적 무관심 혹은 인위적 디자인의 최소화다. 인근에 위치한 문화재 때문에 건물 높이를 낮춰야 했고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을 자연녹지 지역 건폐율 20% 내에 수용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물을 경사지에 반지하 형식으로 묻게 됐지만 지하화된 건물이라고 해서 형태를 추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콜하스의 보르도 주택, RCR 아르퀴텍테스의 루럴 주택, 마누엘 아이르스 마테우스의 카사 나 테라, 알바로 레이테 시자의 톨로 주택 등은 조형적 완결성을 목표로 하거나 실험적 형태 조작을 시도한 지하 주택 사례다. 하지만 보통집은 주변 지형에 순응해 매스를 단순하게 배치하고 지상으로 드러난 건물의 정면도 요철 없이 단일면으로 구성해 중립적인 인상을 준다. 형태는 공간, 디자인과 함께 근대건축을 정의하는 3대 요소다. 근대건축에서 형태는 의미가 배제된 지각의 심리적 양상, 즉 시지각과 형식미학의 정점에 있었다. 형태는 아무 내용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선과 면, 빛과 음영을 통해 관찰자를 기쁘게 한다. 말하지 않는 침묵의 건축이다. 미스는 건축 이외에 건축에 영향을 주는 일체의 정황과 충돌하는 힘들을 소거하고 형태를 순수한 짓기의 결과물로 정의했다. 이때 형태는 의뢰인의 취향과 열망, 시장의 요구, 건설의 생산 조건 등이 지배하는 세속적 현실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무기가 된다. 그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유리 커튼월의 왜곡된 표면은 형태의 내재적 질서와 권위를 무력화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을 건물에 투영한다.

그에게 형태 자체는 건축의 목적이 아니었다. 양수인 역시 형태에 무관심하다. 하지만 미스의 비판적 건축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러하다. 그에게 형태는 건축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회문화적 변수를 통제하고 조율하며 퍼즐을 맞춰나간 결과물이다. 양수인이 생활했던 2000년대 미국에서는 건축의 자율성을 사회 비판과 저항의 도구로 보는 비판 진영과 이를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자폐로 냉소하며 건축의 도구성을 옹호했던 탈비판 진영이 대립하고 있었다. 건축이 건축 외부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고 시대적 흐름에 동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탈비판 진영은 시장 친화적이고, 신기술을 적극 활용하며, 다양한 참여자들 사이의 소통과 협력을 강조했다. 단정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작업을 보면 양수인은 탈비판 진영에 좀 더 가까운 건축가다. 보통집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건물 같지만 사실 세 채의 단독주택이다. 세 건물은 중정을 에워싼 매스라는 공통된 공간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산자락 경사가 점차 완만해져 평지를 만나게 되면서 세 집 지하 중정과 진입도로의 관계 또한 변화한다. 결국 중정에 들어서려면 A동은 입구에서 반 개 층을 올라가야 하고 B동은 반 개 층을 내려가야 하고 C동은 한 개 층을 내려가야 한다. 중정의 레벨이 각각 다르니 중정에서 보이는 풍경과 분위기도 다르다. A동의 중정은 지상과 다를 바 없이 조망이 확보되고 개방적이지만 B동의 중정은 위요된 느낌이 강하다. C동의 중정은 완전히 지하로 들어가 돌풍이 부는 날에도 고요함을 유지한다. 각각의 중정은 의뢰인의 취향과 요구 조건을 반영해 마감 재료와 식재 계획을 달리 했다. 중정을 에워싼 건물 역시 가족 구성원, 프로그램, 규모 등에 따라 실 배치와 가구 구성을 차별화했다. 보통집에서 차이를 만드는 요소는 형태와 공간이 아니라 중정과 대지와의 관계, 건물과 중정과의 관계다. 

 

 


(왼쪽) 오션어스 사옥(2010) (오른쪽) 헬리녹스 크리에이티브센터 부산(2023) 

 

냉소와 희망 사이

헬리녹스 크리에이티브센터 부산(이하 HCC 부산)은 1996년 최초 사용승인 이후 여러 차례 건물의 주인과 용도가 바뀌며 증축을 거듭해온 건물을 민간 기업의 사옥 겸 쇼룸으로 리모델링한 프로젝트다. 누적된 건물의 이력도 복잡하지만 업무, 판매, 물류, 근린, 문화, 이벤트 등의 용도로 구성된 프로그램과 의뢰인의 다양한 요구 조건은 건축가에게 고차 방정식에 가까운 난제를 던졌다. 건축가는 처음 시도하는 고난이도의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 의사처럼 작업했다. 기존 건물을 샅샅이 조사, 분석해 삭제해야 할 부분과 존치해도 되는 부분을 나누고 저층부 장식 계단, 화물용 엘리베이터, 옥외 필로티 주차장, 옥상정원, 발코니, 전열교환설비 등 증축이 필요한 부분은 기존 구조물과 공간 구조를 최대한 활용해 최적화했다. 예를 들면 의뢰인의 요구로 전열교환기가 실제 필요 용량보다 크게 설계됐는데 배관의 직경이 커지면서 기존 건물의 낮은 천장고 안에 설치가 힘들어졌다. 건축가는 보 아래로 배관을 연결하기 위해 구조와 배관이 간섭하는 부분은 배관을 납작한 사각 모양으로 제작하고 최대한 간섭이 생기지 않도록 설비 레이아웃을 직접 다시 그렸다. 동시에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제작을 최소화하고 기성품을 최대한 활용하는 최적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의뢰인 요청에 따라 외부 마감에 쓰인 벽돌 역시 곡면을 표현하기 위해 주문 제작했는데 건축가는 제작 물량을 줄이기 위해 타입의 개수를 제한하고 곡률이 다른 옥외 필로티 주차장 부분은 벽돌을 세로로 쌓아 기성품으로 마감했다. 새로 만든 옥상 난간벽은 대부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졌지만 기존 구조가 취약한 부분은 자중을 줄이기 위해 금속 틀로 형상을 만들고 전체를 동일 재료로 마감했다. 물류 상하차용 천장고를 확보하기 위해 높아진 주차장 필로티 지붕이 지상으로 노출된 기계식 주차타워를 일부 차폐하면서 이면 도로와 연결되고 높은 플랜트 박스가 시선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도 정교한 퍼즐 조각 같다.

이외에도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이슈와 문제가 있었지만 건축가는 엄청난 작업량과 인내심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HCC 부산은 외피를 손보는 정도의 간단한 리모델링 프로젝트로 시작했지만 건축가가 난제를 하나씩 풀며 가능성을 현실화하자 최종적으로는 초기 예산의 다섯 배가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건축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래된 지층의 고고학적 절단면 같은 건물에는 이곳을 거쳐간 다양한 사람들의 역사와 자취가 화석처럼 남아 있다. 건축가는 구축의 흔적을 은폐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노출해 전시했다. 존치된 과거의 흔적은 낭만적이고 회고적인 시적 감흥을 일으키지만 한편으로는 현상 변경을 최소화해 구조를 안정시키고, 철거 물량을 최소화해 폐기물 발생과 공사비를 절감한다는 실리적 효용도 있다. HCC 부산은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질서나 위계 없이 부분과 부분이 선후 관계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국소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 기존 골조에 새로운 구조를 정착시키면서 미완처럼 보이는 충돌의 지점들이 생기고 여기서 발생하는 역동적 긴장이 관찰자에게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며 해석의 지평을 확장한다. 이러한 완결되지 않은 모호함은 양수인의 전작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이기도 하다. 건축가는 리모델링 프로젝트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었는데 리모델링이 기후 위기와 저성장에 직면한 우리 시대에 시의적절할 뿐만 아니라 건축 생산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도전적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여성, 인권, 생태, 평화 등 신사회운동이 윤리적이고 교조적이었다면 오늘날 환경과 사회에 대한 관심은 미시 서사와 거대 담론을 오가며 새로운 비전을 제공한다. 우리가 할 일은 종합에 대한 오래된 회의와 냉소를 거두고 미래를 탐구하는 것이다. 

 


컬쳐랜드 오피스

 

 

월간 「SPACE(공간)」 6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출처 - 실재적인, 총체적인, 전략적인: 실천적 삶을 위한 탈비판 건축 (vmspace.com)

 

 

 

 

 

 

 

 

4.  [카페 현상] 건축사 속 카페

진행
방유경 기자

「SPACE(공간)」 2023년 5월호(통권 666호​)

[카페 현상] 건축사 속 카페

 

미상, 카페 드 플로레, 1887, 프랑스 파리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의 교류의 장으로, 파리 문화의 중심이 되었던 대표적인 카페다. 아르누보 양식으로 모던 카페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고 1930년대 아르데코 양식으로 리노베이션되었다.

Screenshot from Café de Flore’s website

 

 

아돌프 로스, 카페 무제움, 1899, 오스트리아 비엔나​​​​

토털 디자인을  추구하던 당대 비엔나 체제시온 건축가들을 강하게 비판했던 아돌프 로스의 인테리어 디자인이 잘 드러난 공간이다. ‘카페 니힐리즘’이라 불릴 정도로 장식을 배제한 백색의 공간 안에 장인의 가구를 배치했다.

source: Wikimedia Commons

 

찰스 레니 매킨토시, 윌로우 티룸, 1904, 영국 글래스고​

토털 아트를 추구했던 건축가 매킨토시 특유의 기하학적 패턴과 디자인이 메뉴판 커버부터 사이니지, 가구, 갤러리 등에 전체적으로 적용됐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 디자인이 눈에 띈다.

source: Wikimedia Commons

 

 

요제프 호프만, 카바레 플레데르마우스, 1907, 오스트리아 비엔나​

당대 비엔나 체제시온을 대표했던 호프만의 토털 디자인 철학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카페와 같은 역할을 한 장소로, 가구부터 포스터 같은 소품까지 체제시온 디자이너들이 함께 디자인했다.

source: Wikimedia Commons

 

 

아돌프 로스, 아메리칸 바, 1908, 오스트리아 비엔나​

미국 성조기를 변형한 입면, 마호가니로 어둡게 마감한 좁은 내부가 유리를 통해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감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기능을 따르는 형태, 장식 배제, 안락한 실내 등 로스의 건축 철학이 녹아 있다.

source: Wikimedia Commons

 

 

야코뷔스 아우트, 카페 데 유니, 1925, 네덜란드 로테르담​

네덜란드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인 데 스테일의 멤버였던 아우트는 로테르담 사회주택 건설을 담당하는 시립 주택회사의 요청으로 두 벽돌 건물 사이 공터를 채울 카페 설계를 의뢰받았다. 몬드리안의 회화를 연상시키듯 흰색 바탕에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입면 구성은 순수한 조형을 중시했던 데 스테일의 건축 언어를 드러낸다.​

source: Wikimedia Commons​​

 

 

 

​미스 반 데어 로에+릴리 라이히, 카페 벨벳 앤드 실크, 1927, <여성 패션> 전시장 내, 독일 베를린​​

미스는 독일 실크제조협회의 의뢰를 받아 릴리 라이히와 함께 <여성 패션> 전시장 한쪽에 카페 벨벳 앤드 실크를 디자인했다. 다양한 높이의 직선과 곡선 파이프에 매달린 커튼이 유기적인 공간을 구획하는 것이 특징이다. 개방된 곡선과 직선의 교차는 비슷한 시기 계획한 빌라 투겐트하트(1928~1930)의 평면을 상기시킨다. 내부에는 미스의 캔틸레버 의자(MR chair)를 배치했다.

ⓒMoMA, New York & Mies van der Roh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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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 플레츠니크+빈코 글라츠, 카페 벨베데레, 1930년경~1945, 슬로베니아 블레드​

슬로베니아의 가우디로 불리는 요제 플레츠니크는 국왕의 요청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브레드 호숫가에 별장을 설계했다. 30m 높이의 기둥 세 개가 완공된 상태에서 국왕이 암살당하며 프로젝트는 중단됐고, 이후 그의 제자 빈코 글라츠가 기둥 위에 티하우스를 지어 완성했다.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의 정취가 공존하는 자연 속 폴리와 같은 공간이다.

source: Architectuul (CC BY-SA)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브라질리아 삼권광장 티하우스, 1960년대, 브라질 브라질리아​

니에메예르가 브라질리아 삼권광장 중앙에 설계한 방문자센터를 겸한 티하우스다. 국회의사당, 대통령궁, 최고재판소 세 건물이 삼각형 구도로 배치된 상징적 공간 한가운데 위치하여 공공성을 띤 프로젝트다. 반 층 가라앉은 긴 수평 매스와 투명하게 열린 내부 공간은 니에메예르 건축의 모더니스트적 조형성을 잘 보여준다.

ⓒChang Yongsoon

 

로버트 벤투리+스캇 브라운, 그랜즈 레스토랑, 1962, 미국 필라델피아​

인접한 두 채 연립주택을 저렴한 학생 식당 및 카페로 개조한 프로젝트다.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1966) 출간과, 어머니의 집(Vanna Venturi House, 1959~1964)을 선보이기 전 초기작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컵 모양의 입체 간판은 그들이 주장하던 이해하기 쉬운 건축을 드러내는 요소다.

 

Image courtesy of Venturi, Scott Brown and Associates, Inc.

 

알바루 시자, 보아 노바 티하우스, 1963, 포르투갈 마토지뉴스​

대표작 레카 스위밍풀(1966) 인근에 위치한 티하우스로, 자연과의 조화와 존중을 중요시하는 시자의 건축적 태도가 잘 드러나는 초기작이다. 자연 암석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을 그대로 살리며 낮게 가라앉은 건물은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며 풍경과 동화된다.

ⓒNam Sungtaeg

 

안도 다다오, 요오도 티하우스, 1985~1988, 일본 오사카​

오사카의 스미요시 주택(1975)으로 주목받은 이후 진행했던 소규모 프로젝트로, 안도는 오래된 목조건물을 개조하면서 각각 베니아 나무판, 블록, 텐트로 만든 다실 세 개를 설계했다. 일본의 전통적 다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벼운 재료와 구조를 통해 건축적으로 탐구한 작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Image courtesy of Tadao Ando Architect & Associates

 

이소자키 아라타, 우지안 티하우스, 1992, 일본 시나가와​

이소자키가 현대의 새로운 재료로 전통 다도 건축의 예법을 계승하는 다실을 설계한 도전적 작업이다. 이소자키는 이 과정을 ‘조합의 미학’이라 명명하며, 전통 예법을 따르되 티타늄  벽, 철제 가리개와 처마, 삼나무 패널 지붕 등을 추가하면서 다도 분위기에 어울리는 명상적 공간을 설계했다.

Image courtesy of GOTENYAMA TRUST CITY

 

프랭크 게리, 콘데 나스트 카페테리아, 1996~1997, 미국 뉴욕

뉴욕에서 완공된 게리의 첫 작업으로 철판이 아닌 유리를 휘는 데 도전한 프로젝트다. 티타늄 천장 아래 크기와 곡률이 제각각 다른 70개 이상의 유리벽을 부스 형태로 설치했다. 자유 곡면을 형성하는 거대한 유리 벽이 굽이치는 실내 공간은 개방성과 역동성을 동시에 드러내며 게리 특유의 유동하는 공간감을 잘 드러낸다.(사진은 2018년 리모델링된 모습)

Image courtesy of the Durst Organization

 

세지마 가츠요+니시자와 류에, 고가 파크 카페, 1998, 일본 이바라키​

세지마는 공원을 자유롭고 임의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무한히 펼쳐진 공간이라고 자주 언급했다. 활동 초기인 1997년 고향인 이바라키 코나 공원 내에 준공한 이 카페는 내부의 얇은 기둥들이 숲의 나무처럼 자유로이 놓이고 그 사이의 (반)투명한 공간에 의자, 테이블을  무작위적으로  배치했다. 사나(SANAA)의 단일화된 수평적 비위계 공간 유형의 프로토타입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source: Wikimedia Commons

 

 

월간 「SPACE(공간)」 666호(2023년 5월호) 지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SPACE, 스페이스, 공간

출처 - [카페 현상] 건축사 속 카페 (vmspace.com)

 

 

 

 

 

 

 

 

5. 건축사로 산다는 것은

 

2023. 2. 13. 09:10ㆍ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Living as an architect

 

‘어떻게 하면 평범한 일상에서 건축의 공간을 느끼고 더 좋고 편리한 건축으로 만들 수 있을까?’
질문의 연속이다. 나는 대학 시절 서양의 유명 건축사의 이론과 작품을 탐구하면서 건축을 시작했다. 유명 건축물들의 섬세함과 공간의 창의성은 감동으로 다가왔고, 나도 저런 건축을 하는 건축사(Architect)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살아왔다.

건축 스타일과 구축 방식은 수 세기 동안 역사적인 기록과 작품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의 문화와 환경에 맞게 변화하여 오늘날의 건축 형태를 만들어 냈지만, 좋은 건축을 만들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하며 감동을 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건축사는 어떤 메신저(messenger·전달자)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건축을 시작했던 1970년대에는 어떠한 정보나 서적도 쉽게 구할 수 없고, 일본어로 된 자료집이나 복사된 책, 가끔 접하는 잡지에서 보는 평면도가 고작이었다. 이 자료들을 짜 맞추어 상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1980년대 들어 외국 서적을 사 모아 연구하면서 건축을 알아갔다. 1990년대는 해외여행 자유화로 건축탐방이 가능해져 현지로 날아가 심층적으로 학습할 수 있었다. 
점차 건축사로 살아가면서, 무엇이 좋은 건축물인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내가 설계한 도면대로 시공되면 좋은 건축물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형태적 창의성과 공간의 구성 등의 요소에 골몰, 건축의 구법과 재료, 디테일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기, 나는 여전히 모더니즘 건축에 천착했다. 

업력이 쌓이면서 건축은 예술이며, 그 자체로 중요한 메시지(message)를 전달하며 기호(signage)를 나타낸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게 시공을 통해 이루어진다. 많은 건축사들은 건축물이 들어설 현장을 방문하여 장인들과 소통하면서 디자인을 결정하고 만들기에 관여한다.

 

골프존카운티 청통 GC 클럽하우스 ⓒ 이승무


“전체와 디테일은 하나다(르 코르뷔지에)”, “돈 없이는 디테일도 없고 개념뿐이다(렘 콜하스)” 이는 건축의 유명한 명제이다.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디자인은 디테일이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말들을 주문 외우듯 중얼거렸다. 건설(시공)이란 단지 건축물의 실용적인 필요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건축을 바라보는 감각과 경험을 실제화하는 과정이다. 이는 건축물을 이해하는 방식이 과학의 표본이 되고, 감성적 반응의 대상이 되며, 역사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건축사가 갖는 미적 감각 수준의 메시지만으로는 건축 장소를 해석할 수 없고, 공간을 이용하고 건축하는 사람들의 통합된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본다. 건축이 예술품으로 인지되는 것은 현실 이상의 어떤 가치를 사회에 전파하기 때문이다. 건축은 구축을 넘어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반복되는 질문이지만 예술의 경지에 이른 건축은 일생에 한 번도 기회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기억 속으로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이면 집에 머물며 긴 시간을 보냈다. 중정 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 마음에 조바심을 냈다. “가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떼를 쓰면서 할머니가 홍두깨로 밀어 만든 칼국수 삶는 걸 보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여름 장마 기간에는 긴 시간 집에 머물게 된다. 심심하면 집에 대해 이것저것 살펴본다. 마루 하부는 왜 비어 있나. 비가 떨어지면서 댓돌 하부로 떨어지게… 처마와 채양, 비를 모으는 학의 입모양인 물받이, 마루의 패턴 등과 한지 문을 열면 눈에 들어오는 뒷마당과 나무 담장. 나의 어린 시절 건축적 기억은 실내 공간에 머물며 외부를 바라보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비 오는 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했다.

소규모 주택을 계획하면서 사용자의 입장에서 ‘나에게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의 의견과 상호 조율로 개념 설계를 시작한다. 개념은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사고의 틀 속에 기억되는 것이다. 대형 사무소에서 시작한 주택 프로젝트는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건축적 열망의 재점화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나의 주거지는 전통 한옥을 거쳐 서울 제기동의 개량 한옥이었다. 결혼 후에는 집장사가 지은 양옥집 그리고 아파트. 조선, 일본, 서양의 혼종 건축물을 경험한 게 전부였다. 한국 건축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일상의 건축으로

성북동 주택 스케치 ⓒ 이광만


집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집이라는 공간에서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생활에 젖다보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산다. ‘나에게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끔 만든 주택 설계에 집중한 2000년대 이후, 인문학적 사고가 깊어지면서 건축사로 성장해가고 있다고 느꼈다. 아파트 시대 이전 본래의 거주공간인 주택을 설계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삶과 정체성, 공동체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눈을 떴다.  

건축사로 살아오기를 40년. ‘나는 건축으로 이 세상의 무엇을 개선하였고 무슨 개념과 표준을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돌아보면, 양적으로 엄청난 건축 설계 실적을 쌓았지만, 일본, 서양 것을 적당하게 어루만져서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호구지책을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보화 시대, 매일 쏟아지는 건축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정리를 하곤 한다. 여전히 대부분이 서구적 르 코르뷔지에의 개념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왜 우리 세대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주택의 표준을 만들어 세계에 나누어주는 선진화된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가? 왜 우리 세대는 식민시대에 예속된 사고의 틀 속에 머물러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각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표준을 만들어 선도국가로서 역할을 하는데, 유독 건축 분야는 왜 아직도 ‘건축은 예술이다’라는 주장에 머물러 있으며 몇몇 아틀리에 건축사들의 조형 언어가 후배들에게 선망이 되곤 하는가?

2000년대 생들의 대표격인 BTS는 세계적인 수준의 K-POP을 만들어 선도 국가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건축 분야에서는 누가 프리츠커상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 건축은 아직도 중국, 일본 건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의 개념과 표준에서 도약하고 건너가려는 혁명적인 갈등과 투쟁적 논쟁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다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 소명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연속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한국 건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겹쳐진다. 국제주의 건축이 등장한 이래 그동안 우리의 많은 천재 건축사들이 도시에 축조물을 실행하면서 건축을 “창조자이며 새로운 예술”이라 말하였다. 건축사들은 전문가의 식견과 창의적 발상을 시공자와 자신을 구분짓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 행위가 전체 맥락에서 차별성을 갖는 작품 행위라는 자부심을 갖고 노력한다. 지난 40년, 특히 주택 설계를 하면서 시공과 디테일을 우선으로 하는 장인의 위치로 돌아가는 게 나의 건축적 소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 건축’, ‘한국 주택’ 개념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장인 기술은 결국 산업화된 목재 건축 강국 일본의 현대적 중목 구조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청담동 주택 ⓒ 이광만


한국건축

‘한국건축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한국인의 정의는 어떻게 내리는가?’
‘한국인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우리가 하는 건축을 한국 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영어로 KOREAN ARCHITECTURE라는 호칭을 생각해 보았다. 한반도에 살면서 중국, 일본, 미국, 서구의 건축 등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건축은 국제주의 양식, 근대건축, 현대건축이라는 서구 기준의 시대 구분으로만 이야기했다. 우리 풍토, 기후, 환경에 적용하면서 프랑스식, 일본식, 바로크, 로코코, 바우하우스 양식이라는 다양한 수식어를 사용하였다.

수식어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하던 중에 ‘버나큘러’라는 개념을 접했다. 처음
에는 그 나라의 기후나 환경에 잘 적응하는 지역 건축이라고 생각했다. 버나큘러를 처음 알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끈 로버트 벤투리와 데니스 스콧 브라운이다. 이들은 『라스베이거스의 교훈(Learing from Las Vegas. 1972)』에서 일사불란한 통일성보다는 복잡다단한 모순을,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보다는 역사성(history)과 버나큘러(vernacular·지역성)를 강조하는 건축의 문맥(contextualism)을 주장했다.

 

성북동 주택 ⓒ 윤재혁


한국 건축은 시간이 지나면서 ‘버나큘러’라는 개념 어휘로 설명되었다. 나는 집장사가 지은 프랑스식 집에서 자라 바우하우스 스타일 초등학교를 다녔고, 미스 반 데어 로에 스타일 사무실에서 일하고, 디즈니랜드 스타일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르 코르뷔지에 스타일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세대에 속한다. 우리 세대와 동년배 건축학도는 국립민속박물관, 부여박물관, 전주시청사, 독립기념관 등의 정체성 논란을 거치면서, 한국 건축이 무엇인지 생각하였다. 나에게 한국 건축은 무엇인가? ‘한국식 버나큘러’ 건축은 실제 존재하는가? 

풍토건축, 지역 건축의 뜻으로 쓰이는 ‘버나큘러’라는 수식어는 생소함과 모호함과 위화감을 준다. 우리는 이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 한국 사람들은 버나큘러 건축(일상의 건축)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나는 이를 깊이 생각하고, 체험하고, 이론화하기 전까지 ‘일상의 건축’에 대해, 그 가능성에 대해서 무지하였다. 개념을 구체화하면서 ‘버나큘러’, 즉 한국의 ‘일상의 건축’에 빠져들었다.

‘버나큘러 건축’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한국에서 건축사로 살아가면서, 한반도를 떠나서 이민자나 유학생의 소수자, 이방인이 되었던 이들의 경험은 비슷하다. 외국에서의 문화 충격에 자신의 존재를 묻는 것은 비슷할 것이다. 한국 건축이란 개념을 찾아가야 하고 논쟁을 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한국 건축은 무엇인가. ‘버나큘러’의 개념과 지식으로 개념과 표준을 논해야 한다.
2000년대에 들어 고품질 주택의 설계, 시공을 위해서 소비자가 만족할 수준의 산업 및 시장이 형성되어야 한다. 건축 산업을 규정하는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의 주요 내용은 기획·설계·CM·FM의 4가지 업역을 정하고 자재공급과 생산 및 제조, 유통에 이르는 건축 관련 산업 전반이다. 건설이 제조업으로 자리 잡으려면 프리패브리케이션까지 공급·유통하여야 하기에 단체장으로서 법제화에 노력했다.

건축물이 플랫폼으로 만들어져 제조, 자재, 유통까지 합쳐진 조립 공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디자인이 구축되어야 한다. 선진화는 ‘개념을 확실히 하고 표준을 전해 널리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국경을 초월한 세계화(globalization)를 뜻하기도 한다. 

일본주택 산업은 100년 전 주택의 모듈 개념에 대해 토론하여 자, 척 모듈을 표준으로 건축 산업 전반에 사용하도록 정해 모든 자재, 가구 집기에 적용한다. BTS는 서양 음악을 차용하여 K-POP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가고 있다. 설계 수업 시간에 가장 많이 토론했던 건축 개념은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표준화할 수 있을까?

 

강경중학교 어린이 도서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기술의 선진화이다. 일본 주택의 900모듈의 개념은 제품 기술 선진화로 인한 대량생산과 품질보증이다. 친환경주택이란 개념으로 100년 주택을 만드는 그들이다. 우리 아파트 건설 산업은 이미 기술 선진화를 이루었지만, 개념과 표준까지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한국의 아파트가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없는 이유이다. 모듈을 설정 표준화하는 것이 해외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부동산의 평당 가격에서 나온 안목 치수와 발코니 확장이라는 정치적 레토릭에서 벗어나는 게 선진화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표준화할 것인가? 건축이 산업이라는 개념에 합의도 못하고 있고 ‘표준’ 성격을 규정하고 분석하는데 게을리하면, 현상에 대한 각자의 답은 현상 자체이다. 정보화 시대의 보편성이란 측면에서 접근하면 답이 보인다. 소품종, 대량생산이라는 모순되어 보이는 산업의 이해와 기술 선진화는 주택 산업을 변화시키는 단서가 된다. 이는 다양한 규모의 (설계)사무소와 건설, 시공 단체, 업체들이 자신만의 디자인 모듈, 단위 공간, 유닛에 대한 독창적인 사고와 나름의 규모의 경제(scale merit)를 구축한다는 의미이다. 

덴마크 건축사 BIG는 “우리 집은 점점 비싸지고 틀림없이 품질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모든 주택의 99%는 동일한 공간과 평면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 안에 생활하는 사람은 다 다르다. 이런 건축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집을 만드는 제조 및 제품의 힘과 대량 생산, 조립하여 다양한 주택을 만들 수 있는 일련의 모듈식 요소를 만든 건물을 개발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제 ‘우리가 집을 짓는 과정에서 제조 및 제품화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어떨
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도 다양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듈 방식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한국 건축에 맞는 모듈 혹은 유닛(단위)의 개념을 논의하여 우리의 표준을 정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대량생산, 조립하여 다양한 주택을 만들 수 있는 일련의 모듈식 요소로 만든 건물을 개발하는 것이 한국 건축을 선진화하는 길이고, 건축사로 사는 나의 마지막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건축적 사고로 일상에서 건축의 공간을 느끼고 사유하며 경험과 지식을 나눔으로써 기여하고자 한다. 

 

글. 이광만 Lee, Kwangman (주)간삼건축 종합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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