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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42. 단게 겐조 Tange Kenzo

1. 건축가 단게 겐조 

Tange Kenzo , 丹下健三 , <일>たんげけんぞう

출생국적
1913. 9. 4, 일본 시코쿠[四國] 에히메 현[愛媛縣] 이마바리[今治]
일본

요약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활동한 일본의 주요건축가.

도쿄제국대학에서 공부했고(1935~38), 마에카와 구니오[前川國男]의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대학으로 돌아갔다(1942~45). 1949년 이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

처음으로 완성한 건축물은 1950년에 열린 고베[神戶] 산업무역박람회의 전시관이었으며 가장 유명한 초기 작품은 히로시마[廣島] 평화기념관(1946~56)이었다. 그후 몇 년 동안 도쿄 시청(1952~57), 시즈오카[靜岡] 의사당(1955~57), 구라요시[倉吉] 시청(1955~57), 구라시키[倉敷] 시청(1958~60), 다카마쓰[高松]에 있는 가가와[香川] 현청(1955~58) 등을 비롯하여 뛰어난 공공 건물들을 설계했는데, 특히 가가와 현청은 일본의 전통 건축과 현대 건축을 오묘하게 조화시킨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초기 건축물은 대부분 가벼운 철골을 사용했고 평범한 직4각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60년대의 작품은 철근 콘크리트와 혁신적인 공법을 사용하여 좀더 대담하고 극적인 형태를 취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회를 위해 설계한 국립 실내종합경기장이 그 예이다. 이 경기장은 사실상 2개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두 건물은 전체를 덮는 구부러진 지붕을 이루면서 서로 이어져 있고, 일본의 전통 기법이 탁월하게 발현되어 비대칭적이면서도 균형있게 배열되어 있다. 그는 같은 시기에 도쿄의 성모 마리아 성당도 설계했는데 이 성당은 가파른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하늘로 치솟은 지붕에는 스테인레스 스틸이 사용되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해외에서도 굵직한 주문을 많이 받아 타이완·사우디아라비아·알제리·이란에 대사관과 대학 건물 등을 지었다. 1966~70년에는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일본세계박람회(엑스포 70)의 종합 기본계획을 세웠다. 후기에는 세부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전체적으로 결합하여 불규칙하면서도 기능이 고려된 건축물을 지었다. 그는 또한 작가, 교사, 도시 계획가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의 저서로는 〈도쿄 도시 계획〉(1960)·〈가쓰라―일본 건축의 전통과 창조 桂―日本建築の傳統と創造〉(1960)·〈이세―일본 건축의 원형 伊勢―日本建築の原形〉(1962)·〈건축과 도시설계〉(1975) 등이 있다.

출처

 

 

 

2.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사진
원폭돔 내부(붕괴되지 않도록 철골을 설치하였다.)
아침 노을의 원폭돔
공원쪽에서 바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전경
반대편에서 바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이름
한국어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원폭 돔)
영어
Hiroshima Peace Memorial
(Genbaku Dome)
일본어
原爆ドーム[1]
프랑스어
Mémorial de la paix d'Hiroshima
(Dôme de Genbaku)
국가·위치
 
등재유형
등재연도
등재기준
(vi)[2]
지정번호
 

1. 개요

일본 히로시마시 나카구 나카지마에 위치해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원폭돔 및 평화기념공원 3부분으로 구성된 공원으로 흔히 간단하게 원폭돔으로 불려진다. 원폭돔과 평화기념관은 바로 옆에 있으나, 강이 중간에 흐르며, 다리를 통해서 모두 이어져 있다.

2. 역사



원폭 투하 전의 모습. CG로 합성해서 재현.

원래 이 폐허가 된 건물의 정체는 히로시마현 상업전시관(広島県物産陳列館)으로 1910년 히로시마현 시의원회가 히로시마 현 내의 산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상업 전시관을 세우기로 결정한 것이 이 건물의 기원이다. 그 후에, 체코의 건축가인 얀 렛트르(Jan Letzel)의 설계에 따라 모토야스 강(元安川)의 동쪽 자리에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공되었다. 1933년 상업전시관은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広島県産業奨励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히로시마 물산기념관과 그 주변을 실체화한 모형

히로시마 물산 장려관은 원래 5층으로 된 중심 코어(core)가 있는 3층의 벽돌 건물로서, 구리로 덮인 철골의 타원형 돔이 얹어져 있었다. 면적은 1,023㎡, 높이는 25m에 이르렀고, 물산장려관은 히로시마시의 한 가운데 위치한데다, 구조상 히로시마의 스팟 역할을 하는 건물이 되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원자폭탄과 그 후폭풍인 화염때문에 약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비록 골조뿐이기는 하지만 폭심지(爆心地)인근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겨졌다. 폭심지는 1933년 개원한 시마병원(島病院)이 있는데 흔히 폭심지시마병원(爆心地島病院)라고 부른다. 현재 건물은 개원할 당시 건물은 당연히 아니고 현재 병원 옆에는 이 곳이 폭심지였다는 작은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하나 뿐이긴 하지만 원폭돔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당시 히로시마 물산장려관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전원 즉사했다. 건물의 골조가 비교적 무사하게 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생존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히로시마현의 재건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건물은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이 되었으며,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는 원폭 돔을 영구히 보존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이 1950년에서 1964년 사이에 설계, 조성되었으며, 공원 안에 있는 평화기념 전시관 역시 1955년에 문을 열었다. 1952년 이후로 이 공원은 매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평화 기념식을 열고있다.
 
지금의 원폭돔은 말 그대로 폐허이다. 주요 건물들이 폭발 당시 완전히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외벽이 철강과 시멘트 플라스터로 덮여 있는데, 폭발의 흔적으로 철골이 드러난 부분도 있으며, 툭치면 부서질 것 같은 부분도 존재한다. 특히 평화기념관 안에 있는 일전 물산장려관 사진과 비교해보면 그때 당시의 창문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구조 역시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에 여러 돌들이 역시 폭발당시 최대한 그대로 널부러져 있는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복원사업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보존을 원했기 때문에 그 맞았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지금도 일본정부는 이 원폭돔을 2년, 3년 주기로 복원공사를 하면서 그 폭격맞은 원형 그대로 완벽히 보존하고있다.

3. 원폭돔이 무사했던 이유



이 사진을 보면 좌측 하단에 빨간 선(흰색 안내카드가 있는 위치) 위 6~700m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물산기념관의 위치가 보인다. 원래 미군의 투하조준 지점은 기념관 오른 편의 T자형 다리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 거리에서 정상적인 건물이 남진 않았으므로 원폭돔은 지붕과 마루, 2층 이상의 내벽 대부분이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이정도가 남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자폭탄이 터진 위치와 원폭돔이 가까워서였다. 즉 원자폭탄이 터졌을때, 원자폭탄의 충격파를 측면이 아닌 수직 방향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돔 아래 건물의 중심부는 비록 골조뿐이기는 하지만 남아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외에도 몇가지 것들이 남아서 물산장려관의 남쪽에 있는 서양식 정원에 있던 분수의 잔해같은 것들도 남았고 그 모습은 원폭돔처럼 폭발 직후의 형태 그대로다.

4. 평화기념공원

평화기념공원(平和記念公園)은 원폭돔과 평화기념관 그리고 그 주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3가지 키워드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위령탑으로 동원학생 위령탑, 사망자 위령비 등이 곳곳에 늘어져 있으며, 히로시마 기념공원이 아니더라도 주위에 잘 찾아보면 1~2개정도 주위에 위치해있다. 이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을 추모하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두번째 키워드는 원폭으로 원폭을 맞았을 때,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피난가는 것을 동상으로 만든것부터(사진), 원폭의 어린이상, 원폭공양탑 등 원폭과 관련되어 무서움과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동상, 비석을 만들어 놓고 있다. 비교적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있다.
 
마지막 키워드는 평화다. 이 공원을 잘 보면 이 주변이 모두 '평화'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문객이 접근하는 다리도 '평화대교' 그쪽에 있는 종도 '평화의 종' 기념물로 '평화의 탑'(사진. 각나라말로 '평화'가 씌어있다). '평화의 샘'. '평화의 시계탑' 등 평화로 도배되어 있다.

공원이 꽤 넓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받아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올라 편안하게 대놓고 숙면을 취하는 길 고양이도 있고 저녁즈음이 되면 개들을 데리고 산책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다. 특히 대형개인 경우는 산책할 만한 공간이 별로 없다보니 대형견주들이 많이 보인다.

원폭이 투하된 아침 8시 15분에 맞춰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차임벨이 매일 1분 동안 울린다.

5. 평화기념관

평화기념관(広島平和記念資料館) 크게 동관과 본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관 1층에서 관람을 시작하며 이렇게 돈을 내고 입장하면 자동적으로 본관까지 연결이 된다. 입장료는 리뉴얼되면서 200엔으로 올랐다. 추가요금(400엔)을 내 음성 설명기를 빌리면 각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물론 한국어 설명기도 있다.

아래 설명은 리뉴얼 이전의 설명이라 2019년 현 시점과는 차이가 있다.



먼저 지하에는 조그마한 전시실이 있는데, 히로시마 시민 혹은 어린이들이 그린 원자폭탄 그림, 기획전시들을 하고 있다. 기획전시도 원자폭탄과 관련된 것으로 주로 피폭자의 사연과 그 피폭자의 집, 혹은 사망 위치 근처에서 나온 옷가지, 타지 않는 동전 같은 것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하 전시관으로 가려면 돈을 내지 않고 돈 내기 전에 입구 바로 우측에 보이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봐야한다. 무료다.



그 다음 1층에는 매표소가 있다. 팜플렛도 여기서 나누어주는데, 한국어도 있으니 챙겨두면 관람에 도움이 된다. 음성기기지원도 있다. 이곳을 통해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동관 1층 전시장은 피폭 전의 히로시마와 피폭 후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개발되어 투하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모형(위에 올려둔 모형. 원폭 돔을 옮겨둔 모형도 있다), 사진, 판넬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동관 2~3층 전시장으로 연결 된다. 이 부분은 히로시마 원폭 이후에 히로시마가 어떠한 상황을 겪었으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건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사진과 모형, 수기 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위의 사진은 원폭이 떨어진 후에 히로시마시의 연표로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본관은 히로시마의 여러 사진과 피해를 입은 물건들을 들고와서 전시하는 말 그대로 원폭의 무서움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인영의 돌'이라는 돌과 사다코의 종이학인데, 인영의 돌은 人影(인간의 그림자), 즉 인간이 있었던 흔적(원폭 그림자)이 남은 돌이라는 뜻이다. 히로시마역 앞에서 어떤 사람이 돌 위에 앉았는데,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그 사람이 승화가 되고 그 그을음만 남아서 검은 탄 자국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사다코의 종이학'은 2살 때 피폭된 사사키 사다코가 10년 뒤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 회복을 간절히 빌며 접은 것인데, 사다코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55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사다코의 천 마리 종이학은 평화와 반전 반핵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는 사다코의 인생과 같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원폭의 무서움을 몸서 보여주고 있다. 소녀의 비극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사다코는 '일본판 안네 프랑크'로 인식되고 있는 셈. 공원 야외에도 이 종이학을 형상화한 기념 조형물이 전시되어있고, 매년 8월 초 원폭 참사 추모일에 맞춰 각지에서 접은 종이학들이 도착하곤 한다.

또 유명한 전시물로는 신이치의 세발자전거가 있다. 테츠타니 신이치(사망 당시 3세)는 빨간 세발자전거를 타고 노는 것을 매우 좋아하던 아이였다. 당시 일본은 전쟁 때문에 금속을 죄다 압류해갔기에 자전거는 물론 세발자전거는 매우 귀했고, 부모가 군인인 지인을 통해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이 테츠타니 신이치는 친구 키미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피폭되었다. 키미코도 신이치와 함께 사망했다. 뒤에 나오는 신이치 남매의 유해 발굴 때에 손뼈가 발굴되었고 가족을 찾을 길이 없어 그녀의 손은 신이치 남매와 같은 곳에 매장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버지 테츠타니 노부오는 돌무더기에 깔린 신이치를 가까스로 구했는데, 신이치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 자전거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다. 결국 그날 저녁 신이치는 사망했고, 노부오는 그 자리에 아들과 자전거를 함께 묻었다. 약 40년이 지나 1985년, 노부오는 그날 사망한 신이치와 두 누나의 유해를 발굴했고, 그때 묻었던 자전거도 발견하여 여기 기증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코다마 테츠하루라는 작가가 그림책으로 출간해 일본과 여러 국가에 출시되었는데,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매우 강하게 나타냈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 반면, 7-11세용 그림책이면서 테마가 무겁고 그림 묘사가 상당히 무서운지라 대상연령이 보기엔 부적절하다는 평이 있다.

6. 논란

 

6.1. 문화유산 등록 당시 미국과 일본의 신경전

1996년 12월, 히로시마 원폭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 전쟁에 관련된 것이 문화유산으로 한번도 등록되지 않았다는데 이미 등록된 것(아우슈비츠)이 있는 이상 히로시마가 등록되는 것은 마땅하다"'며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등은 일본의 전쟁 책임 때문에 문화유산 등록에 반대의사를 표해 묘한 신경전이 오가기도 했다. (일 원폭돔 세계문화유산 지정, 미국 중국 반성없이 피해강조 우려 한겨레), (일 원폭돔과 전쟁범죄 동아일보)

6.2. 평화기념관 전시 내용의 편향성 문제

기본적으로 원폭투하와 그에 따른 피해를 알리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며, 과거 일본군의 전쟁 범죄에 대한 내용은 없다. 원폭을 투하한 국가인 미국과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즉, 진주만 공습부터 원폭투하까지의 진행과정을 설명한 전시물이 있을 뿐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원폭 투하를 슬퍼할 자격이 없다.'까지는 아니지만, 피해자 행세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전시물의 대다수가 원폭의 가공할 위력과 그 피해를 강조하는 데 치중되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일본인의 시각에서 보면, 과거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으며, 전쟁 범죄가 나빴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조차도 원폭이 떨어진 곳에 원폭의 참상을 알리고 이를 슬퍼하는 내용이 주된 전시물인 것에 별다른 이의를 갖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를 '전쟁의 가해자인 동시에 원폭의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것을 반영하며, 특히 우경화가 진행된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을 전후 자학사관과 반일세력의 일방적이고 부당한 덮어씌우기라는 인식마저 확대되고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앞에 가면 핵폭탄이 떨어진지 며칠이 되었고, 핵실험이 언제 가장 마지막에 일어났으며, 마지막으로 그 위치와 장소, 시간을 알려주는 종이와 시계를 둔다. 사진의 표지판은 북한의 3차 핵실험을 표시한 것. 한편 히로시마시 시장의 주 업무중 하나로써 핵실험을 하는 나라의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는 것이다.(저 철제판 하나하나가 항의서한을 새겨넣은 것이다.) 소련, 미국 가릴 것 없이 핵실험이 일어났다고 하면 다 보냈다. (日원폭 피해도시 등 반핵단체, 미국 핵실험 강력 항의 1997 연합뉴스)

일본의 민간인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핵폭탄을 맞았으니 피해자라고 주장할 여지도 있을 수 있지만,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은 미국의 편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핵무기를 쓰면 자국의 병사들을 별로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 2005년에 히로시마 원폭에 살아남은 생존자 대표와 당시 버섯구름을 찍은 해롤드 애그뉴 박사와의 면담이 있었는데 생존자 대표들은 민간인 집단에게 핵을 떨군 것으로 인해 많은 이웃들이 죽었으며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만 해롤드는 이를 거부하는 모습과 "나도 니들이 벌인 진주만을 통해 많은 친구를 잃었다. 만약 사과를 요구한다면 당신나라 군대 일본제국군에게 사과를 요구하라"라고 했다. 이들은 인류에게 사용하지 말아야 할 원폭에 관련된 애그뉴씨가 직접 사과해야 먼저 사망한 이들이 편히 잠들지 못 한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자 애그뉴는 오히려 당신이 우리들한테 사과해야 한다며 거부의사를 표하며 당신네들 정부가 또 전쟁을 하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며 반박했다.영상.

이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군에 의한 일본인 민간인 피해 외에도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들 피해도 존재한다는 것 역시 중요한 지점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 피해를 입은 미국의 민간인들 외에도 중국인, 필리핀인 등 아시아인들을 포함해서 계산할 경우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민간인 피해자를 모두 합치더라도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압도적으로 많다.

조선인 희생자는 대략 히로시마에서 3~4만명 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한국인 위령비 아래에 묻혀 있는 희생자 명단은 약 2,500명 가량인데, 이는 물론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희생자의 명단만 넣은 것. 추정 희생자 수에 따르면 이는 히로시마 원폭 전체 희생자의 약 10%에 해당한다. 참고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치면 약 6만에서 최대 7만까지 조선인 원폭 희생자가 있다고 추정된다. 물론 이러한 통계가 모두 맞다고 할 수는 없는것이 히로시마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을 공식적으로 집계한 것이 14만명이라는 것을 가정했을 때, 이는 비약이라는 관점도 있다. 아울러 조선인뿐만 아니라 히로시마에 수감되어 있던 연합군 포로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

위의 비판을 히로시마에서도 인지하여 결국 2019년 대대적인 기념관 리뉴얼 과정에서 어느정도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 리뉴얼은 당초 동관부터 시작하던 것을 본관부터 시작하는 동선의 수정을 위시로 하여 그동안 초입에 나오던 인형들을 당사자들의 비판을 존중하여 제거하고 피폭자들의 유품 혹은 피폭자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린 그림 등을 중심으로 한 구성을 강화하여 점차 줄어드는 피폭자들의 증언을 최대한으로 보완하고 시간이 갈 수록 관람객들이 이들의 증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여 이루어진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미흡했었던 외국인 피폭자 관련 전시물이 추가되었는 데 2019년 8월 6일 NHK 스페셜 방송에서는 미군 포로의 인식표 및 조선 출신자로 피폭 당시 군인이였던 분의 사진과 군인수첩이 전시되어있다. 해당 수첩의 주인공이신 곽 모씨의 경우에는 촬영일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생존해 계셨기에 자신의 물건이 전시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해당 박물관에 찾아가서 자신의 물건을 보면서 원폭 피해자가 일본인뿐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전시관 도입부의 설명 문구에 강제징용이 있었음을 언급하는 내용과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원폭을 맞았다는 내용이 간략하게나마 언급되어 있다.

6.3.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한 일본의 미국에 대한 비난 및 미국의 핵실험에 대한 일본의 대미비난 여론



1997년 미국의 `임계치 이하' 지하핵실험에 대해 3일 2차대전 당시 원폭 피해도시인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 시장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중국이 우려를 표명했다. 히라오카 다카시 히로시마 시장은 "미국은 (이번 실험 목적이) 핵무기 안전성 확보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려는 강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한다"면서 "우리는 이같은 실험이 핵무기 개발경쟁을 다시 재연시킬지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이토 잇초 나가사키 시장은 "유감보다 강한 분노를 느낀다"면서 "이번 실험이 핵실험 금지를 위한 국민들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미국에 강하게 항의할 것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 대변인인 가지야마 세이로쿠 관방장관은 이에 대한 논평을 거부,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반핵단체들은 이날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그밖의 다른 주요 도시에서 집회를 갖고 미국의 지하핵실험을 비난했다. 한편 지난 95,96년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던 중국은 이날 우려를 표명했지만 비난에 이르지는 않았다.[3]

6.4.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비문 전문

이 비가 처음 세워진 건 1970년인데, 이때는 원폭기념공원의 바깥쪽에 있었다. 히로시마시 당국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이 비의 공원 내 건립을 제한했기 때문. 이때 히로시마시가 댄 핑계는 공원 내에 이 이상 시설물이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그 뒤로도 새로운 구조물들이 잘만 들어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간의 갈등. 맨 처음 비가 세워졌을 때는 민단측에서 세웠는데, 여기에 대해서 조총련측에서 반발을 했다. 왜냐하면 비의 이름이 '한국인' 위령비였기 때문. 조총련측은 '조선인도 있다' 면서 여기에 대해 반발을 했고, 1980년대에는 한국인 위령비와 별도로 '조선인 위령비'를 세우겠다면서 히로시마시 측에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이미 한국인 위령비가 있으므로 안 된다. 하나로 통일하든지 알아서 해라'는 식의 시의 거부로 거부되었다.

결국 1999년 2월에 합의가 이루어져 비의 이름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되었고, 이때서야 간신히 공원 내로의 이설이 허가되었다. 히로시마시 측에서도 국제사회의 비난이 두려웠는지, 그래도 그 뒤로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기념비에 관한 내용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공식 사이트, 팜플렛에 위치, 정보등이 조그만하게 포함이 되어 있기는 하다. 그리고 일본의 평화기념공원 가이드들은 안내 코스에 절대 이 비를 넣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질문받지 않는 한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묻어버리려는 행위로서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는 현재 일본의 상황을 대변한다는 시각이 보인다.

전쟁을 일으켜서 핵폭탄을 맞았고, 이 과정에서 피폭이 만들어낸 여러 끔찍한 기억 때문인지 적어도 히로시마 사람들은 반전주의 성향이 강하다. 전쟁 당시 별 피해 안 본 일본인이 되려 극우 성향이 더 강하다고...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안 겪어본 놈들이 더 설친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에도 있었다. 마츠에 소요 사건 참조. 얘네는 커티스 르메이에게 불태워지지 않아서 왜 항복하냐고 설쳐댔다.

고려대학교 일어일문과에서는 와세다대학과 함께 정기적으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출처 - 나무위키

 

 

 

 

 

 

 

 

 

3. [효효 아키텍트-19] 건축문화 강국 일본의 출발, 단게 겐조

 
[효효 아키텍트-19] 건축문화 강국 일본의 출발, 단게 겐조


매일경제  2020.01.17


[효효 아키텍트-19]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일본은 지난 1979년 상이 제정된 이후 미국과 동일한 8명의 건축가가 수상해 최다 수상자를 낸 국가다. 단게 겐조(1913~2005)가 1987년 수상한 이래 그의 제자 마키 후미히코(1993년), 이소자키 아라타(2019년)가 수상했다. 프리츠커상 수상자 수만으로 한 국가의 건축 경쟁력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건축계에서 일본은 힘이 세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이미 근대부터 역동적으로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다. 19세기 후반 서양에 전파된 우키요에(浮世畵)라 불리는 다색 판화가 서구에 일본 문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낳았다. 앞선 에도 시대, 일본 도자기 또한 서양인의 사랑을 받았다. 일본 건축 문화는 20세기 초부터 서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로 진화하는 작업을 체계화해 왔다. 도쿄는 이미 1920년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의 작품이 건축돼 있었다. 라이트는 1906년 일본을 방문한 뒤 도쿄 제국호텔(1922년)과 자유학원을 설계했다.

단게는 동양의 파리라고 불렸던 중국 상하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푸른 잔디가 깔려 있는 붉은 벽돌집에서 살았다. 어린 단게는 상하이 조계지의 서양 건축에 매료됐다. 단게는 1930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히로시마로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 외국 잡지에 게재된 르코르뷔지에의 소비에트 궁전을 알게 됐다.

단게는 도쿄대 졸업 후 르코르뷔지에 사무소에서 경력을 쌓은 마에카와 구니오(1905~1986) 사무소를 거쳤다. 단게가 이름을 떨친 건 1942년 일본건축학회에서 실시한 대동아건설영조계획 공모전에서 1등을 하면서다. 그의 설계안은 실제 건설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는 1946년부터 도쿄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단게 실험실을 설립해 일본 건축계를 이끌 마키 후미히코, 가미야 고지, 이소자키 아라타, 구로카와 기쇼, 오키 다네오 등을 참여시켰다.


▲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사진=flickr


1949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설계 공모에서 원폭 투하 중심지 인근 전체를 평화기념공원으로 조성하자는 단게의 안이 채택됐다. 이후 20년간 시민 20만명을 도시 외곽으로 이주시키는 대역사가 벌어졌다. 1955년 준공된 기념관은 전후 일본 건축의 지침이며, 전통주의에 대한 고민이 드러났고, 일본 현대 건축을 찾아가는 이정표가 됐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군국주의 시절 대동아건설영조계획 공모전에서 수상한 설계안과 '충격적인 유사성'이라는 이름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단게와 동시대 일본 건축가는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간 김수근(1931~1986)의 도쿄예대 시절 스승인 요시무라 준조(1908~1997)가 있다. 요시무라는 도쿄예대 졸업 후 라이트와 함께 도쿄 제국호텔 설계에 참여한 앤터닌 레이먼드(1888~1976)에게 모더니즘 건축을 배웠다. 요시무라 건축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는 실용적이고 소박한 미를 특징으로 한다.

단게의 제자인 마키는 도쿄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다. 그에 비하면 김수근의 10년에 걸친 도쿄 시절 학습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한 1960년대 초 국내 환경에 적용하기는 적합하지 않았다. 다른 동시대 인물로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건축가 미노루 야마사키(1912~1986)가 있다. 미노루는 2001년 9·11 사태에서 표적이었던 뉴욕 세계무역센터(1973년·WTC)를 설계했다.

1961년 3월, 단게는 건축 잡지 신건축(新建築)을 통해 '도쿄계획-1960: 그 구조개혁의 제안'을 발표했다. 1960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세계디자인회의에서 단게를 멘토로 하는 실험적인 젊은 건축가 그룹 '메타볼리즘'이 미래 도시에 대한 제안을 발표했다. 도쿄 만 바다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2만5000가구가 거주하는 모듈식 건물을 짓는 계획안이다. 메타볼리즘은 점점 높아지는 도시의 인구밀도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제안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한 메가스트럭처 건축 운동과 고도 경제 성장기로 진입하던 전후 일본 사회의 조건·기대와 맞물려 '도쿄계획'의 유토피아적 면모를 분석한다. 단게에게 전후 일본의 부흥과 재생에 몰두하는 국가주의자로서 면모가 나타난다. 이 제안은 집권 당국이 추진한 성장 우선 정책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도시계획안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은 1979년 제주도 '해저 바다호텔' 계획안을 세운 적이 있다. 제주도 중문 앞바다에 해저 15층, 해상 40층, 1200개실의 원뿔 형태인 바다호텔을 짓는 것이었다. 케이블과 작은 배로 육지와 연결하고 태양열 집열과 풍력발전 장치를 갖춘 이상적인 계획안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단게가 꿈꾼 일본의 미래는 자원과 재화를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관리함으로써 국가의 경제성장을 극대화할 있는 일종의 합리주의적 시스템, 즉 모더니즘의 거대한 '기계'다."(조현정 카이스트 교수. 일본 근현대 건축사 전공)


▲ 도쿄 도청사((TMGB, tokyo metropolitan government building, 1991) /사진=flickr


단게는 1960년대 들어 단순한 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각종 건축 요소를 새롭게 조직해 역동적인 구조체를 형성하는 일종의 구조주의 건축을 모색했다. 철근 콘크리트와 혁신적인 공법의 사용은 좀 더 대담하고 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는데, 도쿄 성모 마리아 대성당(1964)과 도쿄 올림픽을 위한 요요기 국립경기장(1964)을 설계했다. 성모 마리아 성당을 설계하면서 고딕 건축에 탐닉한다.

그의 나이 70대 후반에 지은 도쿄 도청사(1991년, TMGB·tokyo metropolitan government building), 80대에 지은 후지TV 방송국(1996년)은 생을 대표하는 작품에 속한다. 건축가에게 70·80대가 전성기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도쿄 도청사에 대해 박영우 건축가는, '첨단기술이 집약된 모던 절충주의'라고 요약한다.



"설계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과 성장 일로에 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상징인 마이크로칩 콘셉트를 섞었다"면서 "외관 콘셉트가 된 프랑스 고딕 성당 파사드, 외벽의 여러 창문 타입, 화강석과 메탈의 외피 처리 등 포스트모던 특징인 어플리케(장식적 요소)가 현란하고 가지런히 구성돼 있다"고 평가한다.

[프리랜서 효효]

※참고자료=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no.41(조현정·2014년), 박영우 건축가 블로그

출처 - 나홀로 테마여행 | [효효 아키텍트-19] 건축문화 강국 일본의 출발, 단게 겐조 - Daum 카페

 

 

 

 

 

 

4. Kenzo Tange 건축 포트폴리오, 소개

  • by 재키 크레이븐

도쿄 도청 (도쿄 시청)

 

도쿄도 청사 (도쿄 시청), 1991 년 겐조 겐조 (Kenzo Tange) 디자인. 사진 © Victor Fraile / Corbis Sport / Getty Images (cropped)

 

New Tokyo City Hall Complex는 Tange Associates가 설계 한 수십 개의 정부 프로젝트 중 첫 번째 인 1957 년 도쿄 도청을 대체했습니다. 새로운 복합 2 개의 고층 빌딩과 의회당은 도쿄 시청 홀 타워 1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도쿄 시청 정보 :

완료 : 1991
건축가 : 단게 겐조
건축 높이 : 798 1/2 피트 (243.40 미터)
 : 48
건축 자재 : 복합 구조
스타일 : 포스트 모던
디자인 아이디어 : 파리에서 노트르담 후 두 타워 고딕 성당

 
 

탑의 꼭대기는 도쿄풍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불규칙적 인 모양으로되어 있습니다.

출처 : 뉴 도쿄 시티 홀 복합체, 단게 어소시에이츠 웹 사이트; 도쿄 시티 홀, 타워 I 및 도쿄 도청, 엠포리스 [2013 년 11 월 11 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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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 성당, 도쿄, 일본

 

 
성모 마리아 대성당, 도쿄, 일본, 1964 년, 겐조 겐조 사진 © 파블로 산체스, flickr.com의 pablo.sanchez,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 표시 2.0 일반 (CC BY 2.0)

 

최초의 로마 카톨릭 교회 (목조 고딕 양식의 건축물)는 2 차 대전 중 파괴되었습니다. 독일 쾰른 교구는 교구민들의 재건을 도왔습니다.

Saint Mary 's Cathedral 소개 :

전용 : 1964 년 12 월
건축가 : 단게 겐조
건축 높이 : 39.42 미터
 : 하나 (지하실 더하기)
건축 자재 : 스테인레스 스틸 및 프리 캐스트 콘크리트
디자인 아이디어 : 급증하는 4 쌍의 벽으로 프랑스의 13 세기 샤트르 대성당 과 비슷한 교차 평면도로 전통적인 고딕 양식의 기독교 십자가 설계를 만듭니다.

근원 : 역사, Tange 동료; 도쿄 대교구 www.tokyo.catholic.jp/eng_frame.html [2013 년 12 월 17 일 접근]

03 of 05

모드 학원 누에 고치 타워

 

모드 학원 누에 고치 타워, 겐조 탕지, 도쿄, 2008. 유라시아 사진 / Robert Harding World Imagery / Getty 이미지

 

겐조 겐조 (Kenzo Tange)는 2005 년에 죽었지 만, 그의 건축 회사는 영국의 건축가 인 노먼 포스터 (Norman Foster) 와 공통점이있는 현대식 고층 건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도쿄 도시 홀과 같은 이전의 작업과 비교하면 - 터널 콘크리트에서 하이테크 유리 및 알루미늄 . 아니면 1964 년에 헌정 된 Tange의 스테인리스 스틸 Saint Mary 's Cathedral의 영향을받은 현대 건축가 였을 것입니다.

Cocoon Tower 소개 :

완료 : 2008 년
건축가 : 단게 어소 시에이 츠
건축 높이 : 668.14 피트
 : 지상 50 층
건축 자재 : 콘크리트 및 철 구조물; 유리 및 알루미늄 외관
스타일 : 해체 주의자
수상 내역 : 2008 Emporis Skyscraper Award

자이언트 누에 고치 ( Giant Cocoon) 에는 도쿄의 영향력있는 교육 기관 HAL College of Technology 및 Design, Mode Gakuen Fashion and Fashion College, 그리고 슈토 이코 일리노이 의료 복지 대학이 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기 :

  • 모드 학원 고치 타워, 도쿄, 고층 건물과 도시 서식지에 관한 협의회

출처 : 모드 가쿠 엔 누에 고치 타워, EMPORIS [2014 년 6 월 9 일 접근]

04 / 05

쿠웨이트 대사관

 

쿠웨이트 주 일본 대사관. Takahiro Yanai / 순간 수집 / 게티 이미지 (잘린) 사진

 

일본 건축가 겐조 탕 (1913 ~ 2005)은 도쿄 대학의 단게 (Tange) 연구소에서 부화 한 신진 대사 운동가로 인정 받고있다. 신진 대사의 시각적 단서는 건물의 모듈 모양 또는 모듬 상자 모양 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Jenga의 발명 이전의 1960 년대 도시 디자인 실험 디자인이었습니다.

쿠웨이트 주재 일본 대사관 소개 :

완료 : 1970
건축가 : 단게 겐조
높이 : 25.4 미터 (83 피트)
이야기 : 지하 2 층, 펜트 하우스 2 층 7 개
건축 자재 : 철근 콘크리트
스타일 : Metabolist

출처 : 쿠웨이트 대사관 및 장관, Tange Associates 웹 사이트 [2015 년 8 월 31 일 접근]

05/05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

 
아치 및 평화 기념관 박물관 히로시마, 일본에서 평화 기념 공원 안에 물에 반영. Jean Chung / 게티 이미지 뉴스 / 게티 이미지 사진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은 원자 폭탄 투하로 유일하게 지어진 1915 년 돔형 건물 인 원폭 돔인 겐 바쿠 돔 (Genbaku Dome)을 중심으로 지어졌습니다. 그것이 폭탄 폭발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그것은 서 있었다. Tange 교수는 1946 년에 전통과 모더니즘을 결합한 재건 사업을 공원 전체에서 시작했습니다.

 

히로시마 평화 센터에 대해서 :

완료 : 1952
건축가 : 단게 겐조
연면적 : 2,848.10 평방 미터
기사의 개수 : 2
높이 : 13.13 미터

출처 : Project, Tange Associates 웹 사이트 [2016 년 6 월 20 일 접근]

 

 

 

 

 

 

 

 

 

4.  우탄트, 겐조 단게 그리고 붓다 탄생지

 옹강산  2022. 5. 18.
 
U Thant, Kenzō Tange and the Buddha’s birthplace

네팔리 타임스

쿤다 딕싯

2019년 5월 17일

1967년 버마인 불교도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이 순례를 위해 네팔을 방문했을 때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울었다.

몇 년 후 그는 그 성지를 방문하여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그의 손자 탄트 민트 우 조차도 인터뷰(아래)에서 그의 할아버지가 룸비니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우 탄트는 부처가 태어난 곳에서 영적으로 감동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네팔-인도 국경 근처의 황량하고 특징 없는 곳의 상황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사진: 미쿠 딕싯

카트만두로 돌아온 그는 마헨드라 왕을 만나 룸비니의 신성함 회복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뉴욕으로 돌아온 우 탄트는 붓다 출생지를 평화를 위한 국제 센터로 만들기 위해 UN 위원회를 구성했다. UNDP와 유네스코가 모두 참여했고 히로시마 평화 기념 박물관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를 고용하여 마스터 플랜을 작성했다. 단게는 룸비니를 방문했고 그의 회사는 1978년에 디자인을 제출했다.

룸비니를 보존하고 신성한 정원과 주변 공원을 조경하는 프로젝트는 1985년까지 완료될 예정이었지만 탄게는 그의 마스터 플랜이 완성되지 않은 채 2005년에 사망했다.

디자인에 대한 켄조 탄게의 선택은 전후 일본에서의 그의 위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본 건축가의 '신진대사' 운동의 일부였지만 그의 작품에는 분명히 전통적인 일본 또는 아시아 요소가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독실한 불교도도 아니었다. 신진대사는 성장과 응집의 생물학적 과정에서 영감을 받은 구조를 실험하려고 했다.

사진: 룸비니 박물관

실제로 단게는 스위스계 프랑스인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인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을 보고 건축학교에 들어갔고, 1930년대 소련 건축의 기능성에 감탄했다. 장식적인 요소를 기피하는 원시 콘크리트 거대 구조물에 대한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겐조 단게는 20세기 중반 건축 모더니즘의 '부르탈리즘' 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브루탈리즘(brutalism)은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건축의 뒤를 이어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융성했던 건축 양식이다. 이름은 르 코르뷔지에가 사용한 프랑스어 용어인 béton brut(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에서 유래했으며, 콘크리트가 노출되어 요새와 같아 보이는 건축물이 많다.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구 소비에트 연방 및 기타 공산권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주었다.(위키피디어-역주)

부지를 양분하는 운하의 남북 축(위)에 의해 통제되는 룸비니에 대한 단게의 기념비적인 마스터 플랜은 일련의 원형 극장과 공개 회의를 위한 광대한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박물관은 북쪽에 있고 성소의 동심원: 마야데비 사원을 둘러싼 신성한 정원은 남쪽 끝에 있다. 계획에는 수도원 구역, 도서관 및 방문객을 위한 룸비니 마을이 포함된다.

동쪽 수도원 구역은 남방불교를 위한 구역이고 서쪽 구역은 대승불교 구역이다. 마스터플랜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석조구조물이 허물어지고 있으며, 수도원 구역의 모든 사찰이 건축가가 염두에 두었던 전체적인 조화와 규모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MOVERS AND SHAKERS: 1967년 카트만두에서 마헨드라 왕과 우탄트. UN PHOTO / MARVIN BOLOTSKY

룸비니는 보드가야(깨달은 곳), 사르나트(녹야원-초전법륜지) 또는 쿠시나가르(열반지)와 같은 주요 불교 순례지로 발전하지 못했다. 주로 20세기 초에 상대적으로 늦게 붓다의 출생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네팔은 1950년대까지 외국인에게 폐쇄된 외딴 지역으로 인해 방치되었다.

우탄트 방문 후에도 부처님의 탄생지는 카트만두의 통치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우선순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카트만두의 통치자들은 네팔의 정체성을 세계 유일의 힌두 왕국으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룸비니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다. 룸비니가 오늘날 주로 무슬림 마을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또한 지역의 관심을 감소시켰다.

 

1972년 룸비니의 코끼리를 타고 룸비니를 조사하는 단게 겐조(가운데) 가우리 나트 리말, 룸비니 개발 위원회 초대 간사가 동행, 사진: LUMBINI DEVELOPMENT TRUST

1974년 우탄트가 사망한 후 프로젝트에 대한 UN의 초점과 기금 마련도 시들해졌다. 네팔 왕실은 국제 룸비니 개발 위원회 회의에 수차례 참석하고 룸비니 개발 트러스트를 후원했지만 기본 계획은 시들해졌다. 1990년 이후 부패, 부실한 거버넌스, 갈등이 만연했다.

룸비니에 대한 정부의 약한 의지와 투명성 부족은 수년에 걸쳐 기득권 단체가 룸비니의 명성에 돈을 벌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원과 지정학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수도원 지역의 규제되지 않은 건설로 도망쳤다.

2012년 아시아태평양교류협력재단(APECF)이 룸비니에 3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이라고 주장한 이니셔티브가 불투명한 사건 중 하나였다. 재단은 푸쉬파 카말 다할의 후원을 받았지만 단게의 마스터플랜을 폐기할 계획이어서 곧 논란에 휩싸였다. APECF의 계획은 현재 보류 중이다.

5월 18일 토요일, 비디아 데비 반다리(Bidya Devi Bhandari) 대통령, 케이포 올리(K P Oli) 총리, 기타 정부 장관 및 이 지역의 불교 국가 대사들은 국제 순례 및 관광 목적지로 네팔의 불교 순회를 발전시키는 데 새로운 자극을 주기 위해 룸비니에 있을 것이다.

아시아 도시에서 직항편이 허용되는 인근의 새로운 국제 공항(Gautam Buddha 국제 공항)이 내년까지 운영될 예정이며, 룸비니와 인도 국경 및 동서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도로가 업그레이드됨에 따라 때가 무르익었다. 새로운 호텔이 들어서고 겐조 단계의 모듈식 배럴 아치형 구조가 세계적 수준의 불교 박물관으로 개조되고 있다(아래 참조).

수십 년 동안의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단게의 광대한 공원은 이제 구글 어스와 카트만두에서 서쪽으로 35,000피트를 비행하는 비행기에서 볼 수 있다. 초목이 다시 자랐고 두루미가 성스러운 정원에 다시 둥지를 틀고 주말에 셀카를 찍는 시끄러운 피크닉에도 불구하고 이 사이트는 영적인 의미를 유지했다.

룸비니개발신탁(Lumbini Development Trust)은 현재 33세의 활기찬 승려인 메테야 사캬푸타가 이끌고 있으며, 그는 겐조 탄게의 마스터 플랜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는 최근 네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미래 세대를 위해 룸비니의 환경과 고요함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는 모두가 동참할 때만 가능합니다” 라고 말했다.


룸비니는 자석이 될 수 있습니다.”: Thant Myint-U

1966년 뉴욕에서 새로 태어난 손자인 Thant Myint-U를 안고 있는 우탄트

탄트 민트 우는 우탄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손자이며, 버마 대통령의 고문이며, '잃어버린 발자국의 강: 버마의 개인 역사(The River of Lost Footsteps: A Personal History of Burma)'의 저자이다. 그는 이번 주에 룸비니에서 열리는 자얀티 붓다 축하 행사를 위해 네팔에 있으며, 네팔리 타임스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룸비니의 미래 발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입니까?

그가 1974년에 사망했을 때 저는 여덟 살이었습니다. 우리는 뉴욕에서 함께 살았고 그래서 할아버지를 잘 기억합니다. 어두운 외투와 페도라를 입고 검은색 캐딜락을 타고 직장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서재, 책과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 뒤에 물레를 타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진,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나와 함께 수영하고, 버마 전통옷 롱기를 입고 휴식을 취하고, 할머니의 카레를 즐기거나, 뉴욕 타임즈에서 최신 뉴스를 읽고 있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룸비니 보존에 UN을 참여시키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시 가장 큰 갈등은 물론 냉전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이념적 갈등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종교가 평화를 위한 동맹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965년, 교황 바오로는 신세계에 발을 디딘 최초의 교황인 그의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했고, 유엔 총회 특별 회의에서 전쟁 종식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네팔에 와서 룸비니를 찾았습니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라고 말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서야 그가 불교도로서 뿐만 아니라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룸비니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관용과 비폭력의 가치를 대표하는 글로벌 센터로서 세계 평화의 더 넓 대의와 함께 룸비니의 발전을 연결하려는 특별한 비전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네팔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룸비니의 신성함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은 무엇입니까?

네, 저는 2008년 카트만두에서 보낸 1년에 대해 아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룸비니를 여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장소가 그러하듯이 모든 개발은 지역 사람들의 이익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그들에게도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버마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인도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합니다. 네팔의 불교 순례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교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양곤에서 카트만두까지 직항편이 없어서 정말 아쉽습니다. 문화, 역사, 심지어 정치적 경험까지 공유하는 방식으로 우리 두 나라는 더 많은 접촉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룸비니가 자석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지만 버마인들이 기회를 잡고 네팔을 더 일반적으로 탐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을 비롯한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이 뉴욕의 우탄트를 방문했을 때 UN 사무총장은 그의 손자 Thant Myint-U를 안고 있다.


룸비니 박물관 재창조 및 개조

사진: 미쿠 딕싯

숫도다나 왕의 배우자인 마야 여왕이 고탐 부처를 낳은 사라수 근처에서 붓다의 삶과 가르침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한 잘 설계된 박물관이 복원되고 있다. 이 최첨단 박물관은 연민, 개방, 진리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세계와 공유하는 문화 및 문화 센터의 새로운 기준을 세울 것이다.

신성한 정원 지역에 위치한 룸비니 박물관은 붓다가 태어난 곳의 건축 경관과 문화적 경험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프리츠크 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겐조 단게가 수십 년 동안 야심 찬 마스터 플랜의 일환으로 설계한 박물관 건물의 원통형 모듈은 방치되어 시들어갔다.

이제 룸비니 박물관은 네팔과 그 밖의 지역에서 온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아 룸비니 내의 진정한 문화 및 영적 오아시스로서 센터를 다시 상상하고, 개조하고, 확장했다.

박물관은 붓다의 탄생지가 보편적인 평화의 중심지라는 비전에 뿌리를 둔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발전 단계는 기본 계획과 박물관의 원래 비전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붓다 태어난 곳의 영적 가치 외에도 단게의 개조된 건축물의 모더니즘 유산은 해외 방문객들에게 추가적인 매력이 될 것이다.

룸비니개발신탁(LDT) 부의장 벤 메테야 사캬풋타(Ven Metteyya Sakyaputta)는 “우리가 룸비니로 여행할 때 부처님 가르침의 일부로 평화, 위안, 고요함을 찾기를 희망하므로 룸비니 박물관의 재창조는 매우 특별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대 룸비니 지역은 붓다의 탄생지일 뿐만 아니라 카필라바스투(싯다르타 왕자가 29세까지 살았던 사캬 왕국의 고대 수도), 데브다하(어머니 고향) 및 라마그라마(현재 붓다의 신체 유물이 있는 유일한 사리탑)를 포함한 200개 이상의 유적지가 있다.

"룸비니는 큰 불교의 영적 교차점에서 모든 불교(라바다, 대승, 금강승)이 함께 모이는 매우 특별한 장소이며 ... 마침내 전용 불교 박물관이 열리고 있습니다." 부탄의 종사르 잠양 켄체 림포체는 말한다.

이 구조는 현재 아시아 최고의 건축가인 크리스 야오가 복원 및 개조하고 있으며 새롭게 디자인된 박물관은 2020년 말에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2,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룸비니 광역 지역의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전시 가능성의 보존 및 평가가 진행 중이며, 태국의 해석 계획가인 알버트 파라비 월치라차이가 세계적 수준의 갤러리 공간을 큐레이팅, 디자인 및 제작한다.

승려이자 작가인 매티우 라차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룸비니 박물관은 네팔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유산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독특하고 영감을 주는 통찰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현대 미술, 시청각 쇼, 디오라마 및 인터랙티브 전시는 부처의 삶과 메시지에 대한 진정으로 현대적이고 강력한 경험을 위한 스토리텔링을 향상시킬 것이다. 룸비니 박물관 팀은 기금 마련, 예술 큐레이팅, 국내외 기부자, 파트너, 전문가 및 비전가들을 동원하느라 분주하다.

룸비니 박물관 관장인 수니마 우다스는 이렇게 말한다. "룸비니 박물관은 프로젝트가 아니라 우리의 공통된 사명입니다.”


룸비니 연대표

2,645년 전

어머니가 데브다하로 가는 도중 룸비니의 작은 숲에서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

2,575년 전

붓다 80세의 나이로 사망

기원전 3세기

아쇼카 황제가 돌기둥으로 탄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룸비니를 방문

기원전 5세기

중국 승려 법현과 현장이 룸비니를 방문하고 폐허에서 발견

1312

줌라의 왕 리푸 말라가 아쇼카의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새김

1896년

아쇼카 기둥이 탄센의 총독인 카드가 샴셰어 장군과 독일 고고학자 안톤 푸러에 의해 재발견

1899년

인도 고고학자 푸르나 찬드라 무케르지가 침식된 탄생 조각품을 발견

1932-39년

케샤르 샴시어 장군의 고고학 발굴로 고대 수도원과 사원이 드러남

1956년

마헨드라 왕 룸비니 방문

1959년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 네팔 방문 중 룸비니 방문

1967년

우탄트t 유엔 사무총장, 룸비니 방문, 국제평화센터로 발전 다짐

1972년

단게 겐조가 마스터 플랜 작성을 의뢰하여 1978년에 완료

1995년

고고학과, 부처가 태어난 정확한 지점에서 표지석을 발굴

1997년

유네스코, 룸비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2003년

마야데비 사원이 불탄일에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

U Thant, Kenzō Tange and the Buddha’s birthplace

www.nepalitimes.com


Drone view of Lumbini’s monsoon greenery

드론에서 본 룸비니의 몬순 녹지

네팔리 타임즈

2020년 7월 4일

모든 사진: SAGAR PANDEY

붓다의 탄생지지는 1967년 유엔의 버마인 불교도 사무총장인 우탄트가 네팔을 방문하여 룸비니로 순례를 떠나기 전까지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다. 완전히 방치된 상태의 폐허를 보고 우탄트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지를 국제 평화의 중심지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마헨드라 왕을 만나 룸비니의 신성함 회복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인 단게 겐조(Kenzō Tange)는 마스터 플랜을 설계하기 위해 고용되어 결국 1978년에 제출했습니다. 여기에는 박물관, 수도원 구역, 불교 도서관, 숲 및 습지가 포함되었습니다.

드디어 40년 만에 원대한 비전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룸비니 개발 트러스트(Lumbini Development Trust)에 따르면 현재 인프라의 90%가 완성되었습니다.

가우탐 붓다(Gautam Buddha) 국제공항은 지금쯤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COVID-19 폐쇄로 인해 연기되었습니다. 신성한 정원 지역의 룸비니 박물관이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사가르 판데이는 이번 주에 룸비니에 있었고 몬순 기간 동안 공중에서 신성한 장소와 주변 녹지의 멋진 드론 이미지를 캡처했습니다.

 

 

 

 

 

 

 

 

5. 케이블 건축물 - 일본 국립 요요기 경기장(国立代々木競技場)/단게 겐조

건축구조/구조디자인 

by GoldenRain 2021. 1. 21. 07:12

본문

 

선구적인 근대건축가들은 강철, 콘크리트와 같은 새로운 재료가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적인 형태를 적극적으로 탐구했습니다. 이때 건설된 많은 건축물들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역동적인 구조미를 뽐내고 있습니다. 케이블 건축물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본 국립 요요기 경기장(国立代々木競技場)

일본 동경 하루주쿠역에 가까운 국립 요요기 경기장은,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 9.4~2005.3.2)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경기장입니다. 일반적으로 단게 겐조는 당대의 모더니즘이 기능주의에 너무 치우쳐 있다고 보고 전통과 모더니즘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한 건축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기장은 당대의 구조기술을 활용하여 일본의 전통적인 이미지와 결합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총 1만 5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붕의 유기적인 곡선과 팽팽하게 당겨진 직선이 대비되면서 박진감이 넘치는 형태를 자랑합니다. 126m 달하는  기둥 사이에는 넓은 실내 수영장이 펼쳐집니다. 메인 케이블, 지붕 인장재  누름 케이블,  인장재가 제각기 구조적인 목적을 가지고 당겨지면서 조화로운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힘의 흐름을 명확히 드러내는 건축 형태는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입구쪽 전경

 

 

 

일본 요요기 국립경기장은 메인 케이블; 지붕 인장재 및 누름 케이블로 구성된 세 인장재가 제각기 구조적인 목적을 가지고 당겨지면서 조화로운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메인 케이블에서 44m 정도 떨어진 콘크리트 관람석 벽체에 케이블을 연결하면 아래로 휘어지는 현수선 생깁니다. 그런데 건축가는 현수선보다는  날렵한 모양을 원했습니다.  곡선을 만들기 위해 -형강을 사용해서 연결했는데 이렇게 하면 -형강에  응력이 부수적으로 생기게 됩니다. 

 

입구 반대편에서 바라본 현수선의 형태

 

이제 누름 케이블 -형강을 직각방향으로 당기는데 이렇게 하면 지붕 전체를 일체화하고 -형강에 균일한 강성을 부여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교차되는 지붕 인장재와 누름 케이블이 유기적인 곡면 지붕을 만들어 냅니다.

 

입구 반대편에서 바라본 현수선의 형태

 

I-형강으로 만든 지붕 인장재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메인 케이블로 당겨지면서 지붕의 하중을 전달합니다. 메인 케이블은 중앙부가 벌어진 형태로 볼록렌즈처럼 만들었는데,  부분으로 실내 환기뿐 아니라 자연 채광을 받아들입니다.  개의 기둥으로 당겨진 메인 케이블은 기초 콘크리트에 정착되는데 안쪽으로 당겨지는 추력에 저항하기 위해 지중보를 설치하여 서로 연결했습니다.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Washington Dulles International Airport)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 전경(By Joe Ravi,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6279816)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은 현수선이 완만하게 구부러진 지붕을 뽐내고 있습니다. 높이가 다른 거대한 피어(Pier) 기둥 양쪽에 걸친 케이블이 현수선을 만들어 냅니다. 현수선이 안쪽으로 당겨지면서 생기는 추력 거대한 피어가 지탱합니다. 바깥쪽으로 넘어질  기울어진 피어는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역동적인  보여줍니다.

 

 

케이블은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강풍이 불어 상승압력이 작용하면 위로 뜨게 됩니. 공항을 설계한 사리넨(Eero Saarinen)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승압력보다 지붕을 무겁게 만드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무거운 콘크리트로 지붕을 덮은 것이죠. 팽팽하게 당겨진 케이블 위에 PC 패널(Pre-cast Concrete; 공장에서 만든 콘크리트 ) 걸친  현장에서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방법으로 패널을 연결했습니다. 그런데 보를 만들어 PC 패널을 연결하기 전에 케이블이 충분히 당겨져야 최종 현수선 형태를 만들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로 중량물을 얹어 케이블을 팽팽하게 당긴  PC 패널을 연결했습니다.

 

지붕 케이블 위에 얹혀지는 PC콘크리트 판을 연결하는 방법

출처 - 케이블 건축물 - 일본 국립 요요기 경기장(国立代々木競技場)/단게 겐조 (tistory.com)

 

 

 

6. 청주시, 당장 문화재위원회 열고 의견수렴하라 - 청주시청 본관 철거 논란

 승인 2022.10.26 

 

‘본관동 스폿 스터디(Spot study)’ 800만원짜리 용역 보고서 살펴보니
연구위원 “철거 정당”, 자문위원 “문화재 등록 절차 밟아야”의견 상반

 

청주시청 본관 철거를 놓고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민선 8기 청주시가 내놓은 답안은 철거. 이범석 청주시장의 해법도 철거다. 민선 7기엔 보존이었다.

 

따라서 청주시는 효율성을 이유로 시민합의로 진행해 온 청주신청사 프로젝트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려 한다. 이 때문에 신청사 설계비 100억원을 날리게 됐고, 또 준공 기간 최소 1~2년 늦춰지게 됐다. 하지만 시는 이 모든 게 기회비용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10월 24일 충북시민사회연대회의 회원들은 문화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주시청 본관을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재로 직권 등록하라’고 압박했다.
 
청주시청 본관 건물 사진.

 

이에 대해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는 이범석 청주시장의 본관 철거 강행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지난 10 24일 충북시민사회연대회의 회원들은 문화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주시청 본관을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재로 직권 등록하라고 압박했다.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도 의회에서 청주시와 시장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시장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모 시의원은 청주시장 본관 철거가 시장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냐고 물으니 주택토지국 공공시설과장이 시장이 후보자 시절 공약을 내걸어서 당선됐으니 이는 시민들의 뜻이라고 말했다면서 기막혀했다.

 

왜 전문가 검증을 피하지?

 

청주시청 본관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은 채 건물 소유권자인 청주시는 철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문화재적 가치는 근대문화재의 가치를 따질 수 있는 전문위원들이 해야 한다. 시도문화재위원회를 소집해 등록여부에 대한 가부를 결정해야 하지만 청주시는 이 절차를 밟을 생각이 없다. 왜냐면 철거로 이미 답을 정했기 때문이다. 단 문화재청이 청주시청 본관을 문화재로 직권 등록할 여지는 남아있다.

청주시는 본관 철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한건축사협회 충청북도건축사회(회장 정운기)에게 본관동 스폿 스터디(Spot study)’ 용역을 맡겼다. 용역비는 800만원, 용역 기간은 9 22일부터 10 18일까지였다.

연구 과제를 수행한 참여위원들은 한재희 건축사사무소 석산, 양현모 건축사사무소 기억공간, 정운기 ANA건축사사무소 소속 건축사들이었다. 자문위원은 이상희 목원대 교수, 이희준 대전시문화재전문위원이었다.

하지만 용역 결과보고서를 보면 연구위원들과 자문위원들 내용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용역과정 또한 매끄럽지 못했다. 처음에 연구위원으로 위촉된 이상희 교수와 이희준 위원은 진행과정에서 용역팀에 사퇴 의사를 밝혔다. 용역과정에서 연구위원들이 자꾸만 본관 철거쪽으로 의견을 몰아갔다는 후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처음에는 연구위원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나중엔 자문위원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들은 의견서 또한 본관동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주시청이 갖고 있는 희소성, 역사적 가치 등을 따져볼 때 등록문화재 신청을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 보고서인데 내용이 정반대

 

자문보고서에 따르면 왜색이나 친일과 같은 시대 이율배반적인 논쟁을 떠나 진정성이나 보편성, 사회적 의미에 대한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 입면의 수직 수평성의 강조, 콘트리크 물성을 디자인적 요소로 반영한 내부 천정 구조와 지붕 굴뚝 상부에 조형적 의미를 갖는 구조물, 공공행정시설로서 공간구성 등 옛 청주시청사가 갖는 건축적 특징은 1960년대 건립된 동일유형 공공청사 중 희소성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이어 지역의 공공행정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건축자원인 구 청주시청사가 문화재 등록등의 제도적 틀 안에서 보존 범위에 대한 논의와 함께 시민들을 위한 활용방법 등을 다양하게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희준 위원(건축학 박사) 10 12일자로 중도일도에 청주시청사 보존 논란칼럼을 게재하고 본관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연구위원들은 본관동이 일본의 전통 목조의 특징을 현대적으로 잘 표현한 단게겐조의 가가와현청사와의 유사성을 보인다. 후지산, 욱일기 논란이 지속되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 57년 본관동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건축될 신청사의 100, 200년 역사 또한 이에 못지않다. 원도심 활성화의 핵심축, 토지이용의 효율성, 차량의 안전 및 편의, 예산의 절감 등을 위해 본관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신청사본관에 기억공간을 만들어 모형 전시, 디지털 자료 보관 및 활용방안을 찾자고 제언했다.

자문의원들과 연구의원들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 셈이다. 승효상 건축가도 최근 한겨레 신문에 청주시청 본관이 보존돼야 한다는 논지로 칼럼을 게재했다.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했다. 시는 지금이라도 문화재위원회를 소집해야 한다.

 

출처 -  충청리뷰  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