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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20. 아이 엠 페이 I. M. Pei

 

 

1. 건축가 아이 엠 페이 I. M. Pei

 

위키백과
 

 

 
이오 밍 페이 (2006년 룩셈부르크)

이오 밍 페이(Ieoh Ming Pei, 중국어: 貝聿銘 베이위밍[*], 1917년 4월 26일 - 2019년 5월 15일)은 이름의 이니셜인 I. M. Pei로 잘 알려져 있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로, 모더니즘 건축의 마지막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돌, 콘크리트, 유리, 강철등을 이용해 추상적인 형태를 즐겨 만들어낸다.

 

약력

 

 
루브르 피라미드, 프랑스 파리.
 
 

페이는 1917년 4월 26일 중국 광저우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가로, 이후 중국은행 은행장과 중국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그의 가족은 이후 상하이 인근에 있는 쑤저우로 이주했다. 그는 홍콩의 세인트 폴스 칼리지(St. Paul's College)와 상하이의 세인트 존스 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18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였고, 1940년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교에서 건축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후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 진학하여 잠시 공부한 뒤에, 프리스턴에 있는 국방 연구 위원회에 들어갔다. 1944년 그는 하버드로 돌아와서 한때 바우하우스에서 교편을 잡았던 발터 그로피우스 아래에서 수학하여, 1946년 건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의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1951년 휠라이트 여행장학금을 받았고, 1954년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48년 부동산 개발업자인 윌리엄 제켄도프에게 고용되어 Webb and Knapp에서 근무하였다. 이 회사에서 페이는 많은 대규모의 건축설계과 도시계획을 담당하였고,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양식에 따라 건물을 설계하였다. 페이는 1955년 자신의 설계 사무소인 I. M. Pei & Partners를 개업하였다. 1989년 제임스 잉고 프리드와 헨리 콥의 이름을 따와 사무소의 이름을 Pei Cobb Freed & Partners로 바꾸었다. 1983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였다.

1990년 페이는 공식적으로 은퇴하였으나 이후에도 설계 작업을 하거나 회사에 자문을 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은퇴 후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과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 등을 설계하였다.

2019년 5월 15일 10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마지막 작품

마카오 과학센터는 92세 때인 2009년 완공되었다.

선행

프리츠커상과 함께받은 10만 달러의 상금을 중국 건축학도들의 미국 유학을 돕기위한 프로그램에 사용하였다.

수상

프리츠커상 (1983) Twenty-five Year Award (2011),(2004) AIA Gold Medal (1979) 대통령 자유 훈장 (1993) 로열 골드 메달 (2010) National Design Lifetime Achievement Award 디카마쓰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 (1989)

주요 건축물

  •   
  • 1961년 - 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
  • 1963년 - 타이완 퉁하이대학 루스 예배당

  • 1974년 - 미국 내셔널 갤러리 동관

  • 1978년 - 인디애나 미술관

  • 1989년 - 홍콩 중국은행 타워

  • 1995년 -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

 

 

 

 

 

 

 

 

2. 유년의 원림(園林)과 현대 건축을 조화시킨 아이엠 페이

 

1) 유년의 원림(園林)과 현대 건축을 조화시킨 아이엠 페이(上)

 

[효효 아키텍트-49] 유년의 원림(園林)과 현대 건축을 조화시킨 아이엠 페이(上)


매일경제  2020.08.13


[효효아키텍트-49]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밍페이(Ieoh Ming Pei, 貝聿銘, 베이위밍)가 2019년 5월 10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뉴욕타임스는 한 페이지를 할애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렸다. 페이는 아이엠페이(I. M. Pei)로 잘 알려져 있다.

페이는 1917년 중국 광저우의 은행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곧 그의 가족은 상하이 인근 일명 '정원의 도시' 쑤저우로 이주했다. 페이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 18세에 미국으로 이주해 1940년 매사추세츠공과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1946년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발터 그로피우스의 지도로 건축학 석사를 취득했다.

1948년부터 7년간 뉴욕 부동산 개발업자 윌리엄 제켄도프가 설립한 회사 웹앤납(Webb and Knapp)을 다녔다. 그는 대규모 건축 설계와 도시계획을 담당하면서 실무를 익혔다. 미국 의회는 전후 주택난을 타개하고자 1949년 법안 '타이틀 원'을 통과시켰다. 도심의 슬럼 지구를 헐고 새로운 고층 주거시설로 재개발하는 환경 개선 법안이었다.

페이는 구조와 외피가 하나 되는 방식의 콘크리트를 개발했으나 평당 공사비가 650달러나 됐다. 제켄도프는 고속도로와 다리를 짓는 콘크리트 회사를 페이에게 맡겼다. 페이는 평당 단가를 365달러로 낮출 수 있었다.

페이가 개발한 콘크리트 건축의 특징은 모서리 디테일이다. 고층 콘크리트 건물은 재료 때문에 무거워 보인다. 측면은 45도 접어서 안으로 집어넣고, 전면은 갈라서 측면 위에 포개면 모서리에서 빛이 나고 전면과 측면은 미끄러지면서 건물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페이는 창문 앞에 두꺼운 콘크리트 루버(채광이나 통풍을 위한 비늘창)를 두었다.

1955년 아이엠페이 앤드 파트너스(I. M. Pei & Partners)를 설립했다. 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1961),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Place Ville Marie(PVM, 1962), 대만 퉁하이(東海)대 루스 예배당(1963)을 설계했다. 페이는 케네디가와 두 번에 걸친 인연을 갖는다. 두 번 다 케네디가 죽고 난 뒤이고 페이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1917~1963) 사후 미망인 재클린은 건축가 여러 명을 만났다. 그중에는 미스 반데어로에와 루이스 칸도 포함됐다. 페이는 재클린이 사무실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리셉션 공간을 새로 페인트칠 했다. 테이블 위에는 신선한 꽃다발을 뒀다.



재클린이 "리셉션에 늘 신선한 꽃을 두세요?"라고 물었고 페이는 "당신을 위해 오늘만 두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어떤 도서관을 염두에 두느냐"는 재클린의 물음에, "아직은 (당신과 대화가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페이가 케네디와 같은 출생연도(1917)라는 것도 선정된 이유였다. 페이는 1965년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개발업자의 설계사'에서 '미국 최고 아키텍트'로 부상했다.

디자인은 삼각형의 메스와 사각형 유리 박스가 결합한 형태이다. 아트리움은 글라스 커튼월로 되어 보스턴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탁월한 조망을 확보했다.




▲ 보스턴 JFK대통령 도서관(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1979)




페이는 JFK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1979) 설계 후 워싱턴 국립미술관을 수주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이 미술관을 보고 페이에게 루브르 박물관을 맡겼다.


댈러스는 케네디가 암살당한 불행한 도시인 반면 페이의 작품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1964년 케네디 암살로 인한 댈러스시의 부정적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시장은 시청사를 새로 건립하고, 커뮤니티 재생 사업을 시도했다. 시장은 신축 시청사가 상징성을 갖도록 해달라고 페이에게 요청했다.

댈러스 중심지에서 영 스트리트(Young Street)를 따라 걷다 보면 캔틸레버(외팔보)로 지탱하는 육중한 건물이 122피트 높이에 560피트 길이의 시청이다. 시각적으로 쓰러질 것같이 압도하는 느낌과 강한 에너지를 풍기는 카리스마 있는 역동성이 시청사 건물로 상징된다.

페이는 시청사 신축을 위해 주변 환경에 조화시키고자 고심했다. 다운타운 업무지구의 고층건물 스카이라인 형태와 시청사를 대응시키는 방향을 정했다. 페이는 건물의 저층부보다 상층부에 설계의 초점을 두었다. 건물 전면은 34도 정도 기울어지게 설계했다. 건물이 앞으로 쓰러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건물 앞으로 광장이 펼쳐지듯이 배치되고, 지지 기둥이 건물을 들어올리도록 했다. 이 방식은 르 코르뷔지에가 인도 '샨디가르(Chandigar)' 대법원 건물을 설계한 방식을 차용했다.

공사비가 당초 예산을 뛰어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착수 11년 후인 1978년 완공됐다. 신청사 완공 후 페이는 높은 지지 여론을 바탕으로 댈러스에 '오페라하우스', 중심부 상업지구에 뾰족한 모서리가 찌를 듯이 하늘을 향하는 오각형 암청색의 유리를 사용한 '파운틴 플레이스(Fountain Place)' 건물을 설계했다.




▲ 보스턴 존 핸콕타워(John Hancock Tower. 1968~1976)




보스턴의 존 핸콕 타워(John Hancock Tower, 1968~1976)는 JFK도서관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됐다. 페이의 파트너인 헨리 코브(Henry Cobb)가 관여했다. 
인근의 트리니티 교회는 보스턴 출신의 건축가 헨리 리처드슨이 '유럽식' 건축과 '뉴잉글랜드식' 건축을 혼합해 리처드슨 로마네스크(Richardson Romanesque)라는 새로운 미국식 건축양식을 적용한 첫 사례로 평가받는다.

트리니티 교회는 보스턴 대표 광장인 카플리 스퀘어에 있다. 프루덴셜 타워는 카플리 서쪽에 정사각형 52층 타워로 보스턴에서 가장 높이 지어졌다. 타워는 '최대 면적, 최대 수익 확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워진 박스형이었다. 이는 역사와 예술과 지식으로 자부심이 가득한 보스토니언(보스턴 사람)에게 외지 기업인 장사꾼 뉴요커(뉴욕 사람)가 가하는 선전포고였다.

프루덴셜의 경쟁사이자, 보스턴 토박이 보험사인 존 핸콕이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다. 핸콕은 반격을 기획했다. 핸콕이 선정한 대지는 트리니티 교회 옆이었다. 보스턴 건축계는 반대했다. 시는 전문가 자문단 의견에 흔들렸다. 건축주인 핸콕은 시공을 허가해주지 않으면, 1만2000명의 직원을 데리고 본부를 시카고로 이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보스턴시는 핸콕의 손을 들어줬다.

보스턴 출신의 카브는 트리니티 교회의 상징성을 위해 자신을 최대한 낮췄다. 정사각형 대신 평행사변형 타워는 트리니티가 드러나게 되고, 핸콕은 물러난다. 평행사변형 탓에 핸콕타워의 코너는 예각으로 접혀 코너가 얇아 보인다. 타워의 좁은 면에 홈을 파서 검은색 스테인리스 스틸을 부착해 타워의 날카로움을 더 돋보이게 한다.

[프리랜서 효효]

※ 참고자료=건축가 이중원 칼럼, 박영우 건축가 블로그, 임산 블로그

 

 

2) 유년의 원림(園林)과 현대 건축을 조화시킨 아이엠 페이(下)
 
 
[효효 아키텍트-50] 유년의 원림(園林)과 현대 건축을 조화시킨 아이엠 페이(下)


매일경제  2020.08.21




워싱턴 국립미술관 동관(National Gallery east building. 1978) /사진=wikimedia





[효효아키텍트-50]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동관(National Gallery east building·1978)은 워싱턴 내셔널몰의 동측 맨 가장자리에, 국회의사당을 지척에 둔 위치에 있다. 서관인 본관은 네오클래식 빌딩으로 존 러셀 포프(John Russell Pope)가 설계했다. 본관 중앙에 판테온풍의 돔이 있다. 우측 동관은 모던하다. 서관과 동관 연결 통로의 상부 지상 플라자(가든)에는 유리 피라미드 천창(天窓)들이 지상으로 돌출되어 있다.


동관은 사다리꼴 모양의 대지에 기본적인 평면 구조에 크게 두 덩어리의 삼각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이등변 삼각형의 전시 공간 덩어리로 기존 서관의 동서축을 따라 대칭적으로 배치되었다. 다른 하나는 왼쪽 남측의 삼각형 덩어리로 지원 시설이다. 이 두 덩어리가 중앙의 삼각형 아트리움(void 공간)에 의해 묶인다. 전시 공간 덩어리의 세 군데 코너에는 마름모꼴의 타워를 높여 다른 덩어리와 볼륨적으로 균형을 맞추었다. 비평가 헉스터블(Ada Louise Huxtable)은 1971년 페이의 설계도를 리뷰한 후 그가 "미국 최고의 건축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루브르 미술관 피라미드(Louvre Pyramid. 1989) /사진=wikipedia





루브르 피라미드(louvre pyramid·1989)의 콘셉트 디자인은 1983년 페이 사무실에서 작성되었다. 페이는 이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페이는 금기시되어온, 거대한 바로크풍의 드농(denon), 쉴리(sully), 리슐리외(richelieu) 세 개의 궁전으로 둘러싸인 나폴레옹 광장을 파헤쳐 지하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유리 피라미드를 세워 루브르의 현관이 되는 계획을 세웠다. 엄청난 빛이 쏟아지는 지하 아트리움 로비를 각 궁전으로 이어지는 허브로 만드는 게 디자인 핵심이다.


루브르 미술관의 복잡하고 비효율적이던 전시 공간과 관람 보행 동선은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개선되었다. 라운지, 화장실, 카페테리아, 강당 등의 지원 편의 공간이 확충되고 업그레이드되었다. 루브르 피라미드는 세 개의 궁전에 의해 'ㄷ'자형으로 둘러싸인 나폴레옹 광장의 정중앙에 주 출입구를 만들면서 외부 지상 공간은 일반에게 완전 개방되었다. 광장이 센강 변이나 인근 메트로 입구로 연결되는 지상 통로가 되었다.

광장의 정중앙에 정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작은 정사각형을 45도 틀어서 그렸다. 그리고 세 번째 더 작은 정사각형을 같은 방식으로 채웠다. 이것이 유리 피라미드의 밑면이 되었다. 두 번째 정사각형의 각 변은 광장의 통로가 되었다. 나머지 삼각형들은 낮은 연못이 된다. 그리고 큰 사각형 서측의 4분의 1 면적은 떼어내 피라미드의 입구로 할애하여 광장의 일부가 되게 보도 포장을 하였다. 두 번째 정사각형의 꼭지점 바깥에는 세 개의 작은 유리 피라미드를 오브제처럼 세워 그랜드 피라미드에서 세 방향으로 각각 갈라지는 지하 통로의 천창 역할을 하게 했다.

루브르 프로젝트 2단계 역피라미드(Inverted Pyramid)는 루브르 미술관과 파리메트로와 연결되는 지하 쇼핑몰에 있다. 실외에서 보면 카루젤 광장의 원형 녹지대 안에 역피라미드의 바닥면 유리가 보인다. 역피라미드는 루브르 피라미드로 통하는 지하 통로의 천창 역할을 하는 아이콘이다. 모두 위나 측벽 모두 프레임 없이 유리 패널이 버트조인트로 구성된다. 그만큼 투명성이 높아진다.

같은 해인 1989년 페이가 설계한 홍콩 중국은행 타워(Bank of China Tower, Hong Kong)가 준공되었다. 5개의 철골 기둥에 의해 지지되는 유리 타워는 풍요의 상징인 대나무 형상이다. 중국은행은 주권이 반환되기 전 홍콩에서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로 중국계인 페이의 설계가 필요했다.

중국 은행 경쟁사인 영국계 자본 홍콩상하이은행(HSBC) 홍콩 본사는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에게 용역을 주어 내부 건축 자재가 외부로 노출된 양식으로 짓고 있었다. 47층으로 준공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축물이었다. 페이는 풍수지리학자들 의견을 받아들여 지그재그 모양으로 중국은행을 설계했고, 액운을 반사한다는 이유로 건물 전체를 유리로 감쌌다. 노먼 포스터는 중국은행 타워를 날카로운 칼로 비유하며 그 방향이 자기 건물에 향한다고 하여 옥상에 대포 모양 구조물을 만들어 방어했다.

1989년 그의 건축사무소는 두 명의 새로운 파트너가 합류하면서 페이 코브 프리드 앤드 파트너스(Pei Cobb Freed & Partners)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0년 대표 건축가직을 내려놓고 소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쑤저우 박물관(Suzhou Museum , 蘇州博物館) /사진=wikimedia





페이가 중국에 남긴 작품으로는 베이징 향산호텔(香山飯店)과 쑤저우 박물관이 대표적이다. 쑤저우 박물관은 미불의 서화 작품을 비롯해서 1만5000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의 출구는 타이핑톈궈중왕푸(太平天國忠王府)로 이어진다. 쑤저우 박물관 바로 옆에는 중국 4대 정원(庭園)의 하나인 줘정위안(拙政園)이 있다. 줘정위안이 고전적 원림(園林)이라면, 쑤저우 박물관은 21세기 현대적 원림이라고 할 수 있다.

페이는 어린 시절을 쑤저우 4대 원림 중 하나인 삼촌 소유의 스쯔린에서 보내곤 했다. 스쯔린에서의 유년의 추억은 이후 그의 건축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대나무를 형상화한 홍콩의 중국은행 건물,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에 반영되었다.

5년의 공사 끝에 2006년에 완공된 쑤저우 박물관은 간결한 선을 이용한 동양적인 아름다움과 사오각형 패널의 건축 소재를 통한 현대적 미가 조화된 건축물로 탄생했다. "Love him or hate him(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페이의 건축을 두고 미국인들이 하는 말이다. 그의 건물은 콘크리트, 강철, 유리 자재를 즐겨 이용하고 자연친화적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다.

페이는 1997년 일본의 한 종교단체 요청으로 시가현 시가라키(信樂) 미호미술관(1998년)을 설계했다. 미술관은 30만평의 시라가키 자연에 감추어져 긴 터널을 지나고 계곡을 이어 주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만난다.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을 주제로 설계하였다.

[프리랜서 효효]

※ 참고자료 : 건축가 이중원 칼럼, 박영우 건축가 블로그, 임산 블로그
 

 

 

 

 

 

 

 

3. 이타미 준의 바다,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 그리고 아이 엠 페이

 

2023. 1. 5. 09:0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The Sea of Itami Jun, Sketches Of Frank Gehry, and I. M. Pei

 

 

 

대학시절 영화를 좋아하던 터라 왜 건축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다큐는 없는지 궁금했다. 이십 년 전 영화 관련 책을 쓰다가 약간의 아쉬움 때문에 건축사라는 직업이 강조된 영화들을 따로 모아 이야기를 했었다. 영화 속 건축사들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찾아보니, 주인공 직업이 건축사가 상당하다. 뭔가 있어 보이는 직업? 자유로운 시간과 물리적 이동 거리도 다양하니 시나리오상 안성맞춤인 주인공 직업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다면 건축사라는 직업 명칭이다. 분명 시공사 현장 소장인데 번역은 건축사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도 많다. 건축사와 현장 소장은 영어로도 다르고, 건축사(가)는 법적 자격자만 사용하는 호칭 Architect이다. 그래도 대학시절 내가 선택한 전공이 멋지게 나올 때는 쓸데없는 집단의식에 빠져서 기분이 좋았다. 영화에는 여러 직업이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관련 직업인들이 감정적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 비단 건축하는 이들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아무튼 괜한 동질감은 직업으로 건축을 하는 내내 쓸데없이 감정적으로 우호적이 된다. 그런 감정덕분에 건축이나 건축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더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관련 책을 출판한 덕에 1998년부터 강의하던 학교에서 십여 년 가까이 ‘영화 속 건축’을 테마로 설계 수업을 진행했었다. 영화만큼 공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시선을 이해하기 좋은 학습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직설적인 공간에 대한 이해 도구이기도 했고, 이야기구조로 드러나는 은유적 공간에 대한 이해 도구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업하던 중 실제 유명 건축가(사)인 프랭크 게리를 주연으로 찍은 다큐멘터리가 국제적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아마존을 통해 CD를 구입해 보니 감독이 시드니 폴락이다. 가벼운 로맨틱부터 다소 진지한 현실 비판까지 다루는 주제가 폭 넓은 노장 극영화 감독이다. 그런 사람이 건축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니...

 

 

 

 

 


포장을 뜯자마자 학생들하고 같이 보기도 했다. 시드니 폴락의 친구이기도 한 프랭크 게리가 주연한 다큐멘터리다. 거의 밀착해서 24시간 따라다니듯 촬영한 : 프랭크게리의 스케치, (원제목 : Sketches of Frank Gehry)는 프랭크 게리의 생각과 일상을 들여다 보는 셈이라 그의 건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완성되는지 흥미로웠다.
기억에 남는 몇몇 장면들 중 프랭크 게리를 세계 건축계에 알린 작품인 LA에 있는 그의 주택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카메라는 게리의 설명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조각조각 이어진 철물점 이미지의 주택은 하늘과 빛, 그리고 클로즈업한 부분들을 보여준다. 갑자기 집에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건축하는 이들과 달리 영화하는 이들의 카메라 앵글은 좀 더 이야기 중심적이고, 뭔가 상징과 은유를 담는 것에 능숙하다. 확실히 카메라 앵글이나 시선의 차이가 많다. 대체로 건축 잡지에 나오는 또는 건축하는 이들이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아름다운 대상에 집중하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매력적인 연예인들의 화보 사진 같이 최대한 건축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드러낸다.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 역시 그렇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비례나 구성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뭔가 인간적인 느낌은 거의 없다.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는 진지하게 그의 건축을 설명하기 보다는 그의 일상을 추적하면서 일기 쓰는 것처럼 시나리오를 만든 듯하다. 게리의 다큐가 일상의 현재를 다루듯이 했다면 이타미 준의 바다는 조금 다르다.

다큐의 시작은 제주도의 독특한 미술관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래전 이 미술관을 처음 보고 너무 신기했다. 통상의 미술관이라고 하면 그림이나 조각, 공예 등 대상물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작디작은 제주도의 미술관은 덩그러니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을 전시하고, 돌을 전시하고, 물을 전시한다. 독특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자연이고, 건축의 감성적 요소들 아닌가? 이타미 준이 전시한 것은 시적 감성을 전시한 것 같았다. 바람소리가 들리고 영화의 인트로가 시작되면서 그의 작품 몇 개와 개인사적 이야기로 진행이 된다. 개인적으로 이타미 준을 처음 안 것은 작품이 먼저였다. 1984년 서울 대학로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지나가다 독특한 건물이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김석철 선생이 설계한 두손 갤러리 였다.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던 것이 등하교길에 있는 김수근 선생의 미술회관(지금은 아르코 미술관)과 두손 갤러리 등은 입시공부로 머리 아픈 내게는 탈출구였고 오아시스였다. 하교길에 이런 미술관을 종종 들렀다. 두손 갤러리 지하에는 클로즈드(Closed)라는 카페가 있었고, 지하 두 개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블랙, 다른 하나는 화이트. 이번 다큐를 보니 아마도 80년대 이타미준은 흑백에 빠져 있는 무채색의 시기였던 것 같다. 아주 나중에 건축잡지에 나온 그의 스케치를 보면서 일본의 극단적 디테일주의자인 다카마츠 신과 중첩됐다. 다만 두 사람의 선은 매우 다르다. 나는 다카마츠 신을 망가적 로봇디테일 주의자로 보는데, 이타미 준은 전혀 다른 굵직굵직한 덩어리들과 재료의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가 왜 이타미 준이라는 일본식 이름의 예명을 썼는지 처음 알았다. 사실 공항이름에서 가져왔다는 대목에서 뭔가 그의 내면에 있는 유목적 정체성의 혼란을 알 것도 같았다. 그런 유목성은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시간 넘게 상영되는 이타미 준의 이야기는 단지 건축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배타적 국가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이주자의 삶. 직업에 대한 애정과 애착, 그리고 그것을 자녀에게 잇고 싶어 하는 마음. 일종의 집착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이 다큐의 전체적인 인간적 흐름은 동일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 되고 이해됐다. 한국인으로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 거주하는 외국에서의 삶은 겪어보지 않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치열한 고민과 갈등 속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나고 자라서 모든 추억과 기억이 일본에 있는 이에게 무작정 왜 한국어를 못 하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느냐라는 질문은 일차원적인 것 같다.
그런 그의 갈등은 아마도 건축에서 차분해지고, 마음의 평정을 갖는 것 같았다. 초기작에 비해서 점차 후기로 들어가면서 점점 선은 더 단순해지고, 오히려 감성적으로는 강렬해진다. 그의 부모님 집에서 보듯이 초기 작품은 과잉 의욕이 드러나 보이지만, 그의 빛과 질감에 대해 집착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감성적 느낌들은 마치 시어처럼 구사되어 전체 건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타미 준 역시 현대 수많은 건축사들의 도전처럼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지만, 흔히 우리가 아는 노출 콘크리트와 뭔가 좀 다르다. 안도다다오의 노출이 묘한 긴장감과 반짝이는 질감으로 마무리 한다면 이타미 준의 노출은 좀 더 거칠고 인간적이다.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구사하는 노출 콘크리트의 약간 건조한 구성과도 다르다. 맹숭맹숭한 영국 음식처럼 싱거운 느낌인 반면에 이타미 준의 경우는 좀 더 감정적 느낌을 전달한다.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더 유머있고, 의도적 거침이 있는 것 같은 그런 감성적 디테일을 보여준다.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고 얼마 안 있어서 EBS 국제 다큐 영화제 소식을 듣고, 프로그램 검색에 들어갔다. 안도 다다오의 다큐도 이 프로그램에서 봤었는데, 죽 훑어보니 건축 섹션이 있었고, 여러 이야기들이 나온다. 좋아하는 렌조 피아노도 있고, 노만 포스터도 있다. 그중 얼마 전 102세로 돌아가신 아이 엠 페이에 대한 다큐: 아이 엠 페이의 건축세계 (원제목:  I.M. PEI: Building China Modern.)를 발견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한 시간 남짓 보았다.
이 다큐를 보면서 깜작 놀란 것이 90살이 다 된 노장의 에너지였다. 흔히들 건축은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증가할수록 좋아 진다고 하는데, 일찍이 성공한 아이 엠 페이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90이 넘어서도 여전한 현역이고 건축에 대한 밀착된 감정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다큐는 미국 PBS의 미국의 거장 시리즈 중 하나로 만들어졌다. 다큐의 중심에 나온 건물은 소주의 부호 출신으로 수백 년을 살아온 자신의 어릴 적 고향에 건축된 박물관이다. 2002년에 시작되어 2006년에 건축된 소주(蘇州) 박물관의 진행 과정을 다큐로 담았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다큐를 제작한 앤 메이크피스 역시 노장이라는 점.(1947년 생으로 2010년 상영했으니, 다큐 제작 시점을 보면 63살에 만든 셈이다.) 젊은 노익장은 정말 노익장인 아이 엠 페이의 작업 루트를 따라가면서 촬영한 셈인데, 아이 같은 아이 엠 페이의 미소가 한 몫 단단히 한다. 대부분의 건축사들의 표정이 다소 근엄하다 못해 화난 듯 해 보이는데, 아이 엠 페이의 해맑은 미소같은 표정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사실 아이 엠 페이는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로 미니멀리스트 건축사로 대표적 인물이다. 현대 건축의 중요한 시절을 장식한 인물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대담한 형태의 자유로운 표현이 놀랍다. 사선이나 원형은 건축에서 사용하기 무척 어려운 도형인데, 아이 엠 페이는 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이 다큐에 나오는 소주 박물관만 하더라도 사선과 사각형, 원형으로 구사하는 매스들의 집합체이다. 아이 엠 페이의 탁월한 감각은 루브르 피라미드에서 새삼 읽혔지만, 소주 박물관을 만들어내는 기하학의 구성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단순한 기하학으로도 충분히 소주의 건축적 정체성을 훌륭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비슷한 기하학으로 일본에 건축한 폴라 미술관과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아이 엠 페이의 뛰어남은 기초 도형인 삼각형과 사각형만으로 각각의 국가적 건축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폴라 미술관은 누가 봐도 일본 전통 건축을 현대화 한 것 같고, 소주 박물관은 중국 소주 건축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읽혀진다. 이런 것이 대가의 능력일까?

 

 

 

 

 


그런데 아이 엠 페이의 건축세계를 보는 동안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갔다. 그것은 건축사를 대하는 중국 공산당 간부인 소주 시장 등의 태도다. 한마디로 영접하는 모습에 감동을 넘어서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한국 건축사가 아이 엠 페이만큼 성공한 사례도 없고, 세계 건축계에 작품세계를 인정받는 경우가 거의 없긴 하지만 이 장면만큼은 정말 부러웠다. 그것은 창작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의미다. 한마디로 업자 취급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이 글의 맨 처음 언급한 프랭크 게리의 디즈니 콘서트 홀에 초대 받아 무대에 선 장면과 중첩된다. 우리는 그림이나 음악을 연주하는 창작가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건축사들은 어떤가? 하나의 훌륭한 건축을 창작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커녕 업자로 취급하는 수준 저열함을 가지고 있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그냥 계약에 의해서 수주하는 업자일 뿐이다. 개인적 경험에서도 굳이 오라고 해서 찾아간 개점식에 이름 한번 부르지 않고, 멀찌감치 바라본 수치심이 떠올랐다. 시공사 대표가 한마디 하고, 마을 대표가 한마디 하는데 뙤약볕 밑에서 느껴지는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원래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건축사를 존중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창작한 사람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면서 그 역시 한국에서 작업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알게 한다. 일본에서는 이방인이라 힘들었을 것이고, 한국에서는 또 다른 이방인과 건축사에 대한 태도로... 하지만, 마지막 제주도 건축 후원자를 만나서 펼쳐진 그의 에너지와 결과물에서 행복한 말년이었을 것 같았다. 성공한 건축사들의 다큐를 보면서 그들의 치열함이나 건축적 성과보다, 더 멋지고 부러운 점이 이 부분이었다면 조금 거시기 한 걸까?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

출처 - 월간 건축사

 

 

 

 

 

 

 

4. 루브르 피라미드 설계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I.M. 페이 별세(종합)

 

"최후의 모더니즘 건축가…그를 언급하지 않고는 지난 60년 건축사 얘기못해"

美국립박물관·홍콩 중국은행·카타르 이슬람박물관 건축…대한제국과도 인연

 

 

102세를 일기로 타계한 건축가 이오 밍 페이

[AF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김승욱 기자 =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를 설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貝聿銘)가 10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16일(현지시간)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이오 밍 페이가 숨을 거뒀다고 그의 아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건축가 중 한 명인 페이가 별세했다고 전했다.

페이의 건축회사인 '페이 콥 프리드 & 파트너스'는 그의 별세 소식을 확인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본명보다 이니셜인 'I.M. 페이'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 동관, 홍콩 중국은행 타워,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 등 세계 각지의 랜드마크 설계자로 명성을 떨쳤다.

 

 

1989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앞에 선 I.M. 페이

[AP=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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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모더니즘 건축가'로 불리는 페이는 자신이 설계한 박물관, 호텔, 학교 등에서 '빛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정밀한 기하학적 구조와 추상미를 보여줬다고 로이터가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I.M. 페이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지 않고서는 지난 60년의 건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로버트 스턴 전 예일대 건축대학원장의 평을 전했다.

1917년 4월 중국 광저우에서 유명 은행가와 플루트 연주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모친 사망 후 이사한 상하이에서 1930년대 빌딩 붐을 목격하고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

부친은 아들을 의사로 키우고 싶어했으나, 페이는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193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I.M. 페이가 설계한 홍콩 중국은행 타워(가운데 왼쪽)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각각 받은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공산당의 중국 장악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1948년 뉴욕의 유명 부동산 개발업자 윌리엄 제켄도프의 회사에 취직한 페이는 대규모 도심 재생사업과 다용도 복합시설 건축 등의 실무 경험을 쌓은 뒤 1955년 뉴욕에 자신의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무명 건축가였던 그는 페이 필립 존슨, 미스 반데어로에, 루이스 칸 등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1964년 보스턴 존 F. 케네디 기념도서관 설계를 수주하면서 유명 인사로 발돋움했다.

이어 1968∼1978년 그가 지휘한 워싱턴 국립미술관 동관 건축은 미국건축가협회(AIA)가 선정한 미국의 10대 건축물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삼각형과 사다리꼴 등의 기하학적 구조가 주변 경관과 잘 조화된 이 미술관 건축은 루브르 박물관 리노베이션 사업 수주로 이어졌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을 보고 감명을 받은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1983년 페이에게 루브르를 맡긴 것이다.

 

 

 

1987년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공사 장면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프랑스 국민과 정치권, 언론은 외국인 건축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금은 루브르의 상징이 된 21m 높이의 거대 유리 피라미드가 전통적인 프랑스 양식의 기존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분노의 여론도 일었다. 프랑스 르몽드는 그의 작품을 "디즈니랜드 별관"이라고 혹평했다.

이와 관련해 페이는 2008년 NYT 인터뷰에서 "동시대의 건축가들은 뭔가에 현대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시대가 변했고 우리는 진화했다. 하지만 난 그 시작을 잊고 싶지 않다. 오래가는 건축은 뿌리가 있어야 한다"라며 전통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애썼다고 설명했다.

고국으로 눈을 돌린 페이는 중국 베이징 프래그런트 힐 호텔(1979∼1982년)과 홍콩의 중국은행 타워(1982∼1989년) 건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83년 미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개관한 로큰롤 명예의 전당도 대표작 중 하나다. 로큰롤에 관해서라면 비틀스의 이름만 겨우 알던 페이가 명예의 전당 건축을 위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콘서트를 관람하는 등 '공부'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페이는 1990년 공식적으로 은퇴했으나 이후에도 혼자 설계 작업을 하거나 회사에 자문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I.M. 페이가 설계한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

[AP=연합뉴스 자료사진]

 

 

공식 은퇴 후 설계한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1997년 개관)과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2008년 개관)도 그의 걸작 중 하나다.

9세기 이집트 카이로에 세워진 아흐메드 이븐 툴룬 모스크에서 영감을 얻은 이슬람예술박물관은 모더니즘과 고대 이슬람 건축을 잘 융합했다는 평을 받는다.

페이는 1979년 미 건축가협회(AIA) 금메달을,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을, 1983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1992년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각각 받는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프리츠커상과 함께 받은 10만 달러의 상금은 중국 건축학도들의 미국 유학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에 사용했다.

생전에 그는 대한제국 황실과도 인연을 맺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 이구는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이오 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이구는 이곳에서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를 만나 결혼했다.

왜소한 체격과 부엉이 모양의 둥근 안경 차림으로 유명한 그는 201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낳았고, 이 중 2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루브르 공사 현장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I.M. 페이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kind3@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