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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14. 프랭크 오웬 게리 Frank Gehry

 

1. 건축가 프랭크 오웬 게리

 



'이론에 치중하여 작품을 만드는 다른 건축가들의 경우와는 달리 자신의 건축이념을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내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찻잔에서부터 의자에 이르는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건축가'

- 피터 아이젠만,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프랭크 게리를 평가한 말이다. 가히 건축가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자신만의 디자인 프로세스와 건축이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잘 표현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상업적으로까지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프랭크 게리 성장과정과 배경

  
 건축계의 뚝심 있는 장인인 프랭크 게리는 190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유태교집안의 종교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라는데 특히 조부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망치, , 울타리, 파이프, 지붕재, 볼트, 나사, 쇠사슬, 금속기구류 등을 접하면서 재료의 본성을 어렸을 적부터 깨달았고 그 후 그는 건축에서 연결 사슬망이나 주름 접힌 메탈패널 등으로 발전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여기서 받은 재료의 본성에 대한 충격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그가 특이한 건축가로 불리워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 후 20살 즈음에 트럭 운전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야간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데 당시 그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하게 된다. 그 당시의 이미 그는 사물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하고 이당시의 경험과 사고가 그의 건축의 방향을 결정 지운다.
그는 또 조모로부터의 영향도 받게 된다. 조모는 특히나 물고기를 좋아했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조모의 물고기를 봐온 게리는 물고기라는 존재를 아주 친숙히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작품들에서 물고기라는 특이한 아이템을 많이 사용하였다. 할머니가 주말마다 시장에서 사오는 물고기들이 훗날 게리의 건축에까지 접목시키게 된 것이다. 이처럼 프랭크 게리는 조부모로부터 문화적인 가치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으며 자났고 그 영향들이 고스란히 훗날 그의 건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프랭크 게리는 그루엔이란 사람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1950년 그루엔과의 만남으로 인해 도시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전공하다 대학시절 교수들의 도움으로 1956년에는 하버드대학원 디자인학과에 들어가게 되는데 다른 학과의 강좌도 열심히 청강 하면서 그의 일생동안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도록 자극받게 되었던 것이다.
10여 년 동안 모더니스트의 규범 하에 디자인을 해오던 게리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미술과 건축간의 연계와 역사적 참조물의 표현적인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다. 60, 70, 80 년대를 거치면서 삶의 영고성쇠는 계속 형상화되어 가면서 게리의 작업이 변화되는 위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게리는 루이스 단찌거와, 론 데이비스, 에드모세 래리벨등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미술수법이 게리의 건축수법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또 예술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건축과 미술간의 은유적인 공감대를 창출하고 싶어 했다. 그의 건축에 있어서 미술과 건축의 조합이라는 게리수법의 가장 결정적인 스승은 필립존슨이었다.


프랭크 게리의 뛰어난 업적은 적축의 제도적 상황을 흔쾌히 초월한다. 게리는 자신의 작품에 직접성, 우연성, 즉흥성 등을 자유로이 혼합시킴으로써 미술작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친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 이유에선가 그를 '화가'로 부르는 것이다. 1970년대 게리는 이미 젊은 건축가들의 우상 이었다.  

 
주요수상 
1989년 프리츠커 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
1992년 월프예술상(건축부문/Wolf Prize in Art)
임페리얼 건축상(Imperiale Award in Architecture)
1994년 릴리안 기쉬상(Lillian Gish Award)
1996 TIME이 선정한 최고의 디자인 작품
(블라디미르 밀루닉 공동설계-프라하 네덜란드보험회사 빌딩 1992-95)



주요작품
1981~1984 로욜라 법과대학, 로스엔젤레스
1983~1984 캘리포니아 우주 항공 박물관, 로스엔젤레스
1987~1992 아이오와 대학 실험동, 아이오와
1989~1992 페스티발 디즈니, 마르네--발레(프랑스)
1990~1992 톨레도 대학 예술관, 톨레도
1988~1994 아메리칸 센터, 파리
1989~ 디즈니 콘서트 홀, 로스엔젤레스
1990~1993 와이즈만 미술관, 미네소타 대학
1991~1997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스페인 
  
 
 
프랭크 게리의 해체주의  
 
전통적인 건축형태로부터의 과감한 이탈을 주도하고 있는 프랭크 게리는 건축비평가들로부터 1990년대를 새롭게 이끌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해체주의(Deconstructivism)로 이름붙여지는 새로운 건축경향을 선도하고 있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해체주의는 정형적 질서를 강요하는 기존의 건축경향을 현실성이 없는 가식의 세계라고 비판하면서 시작된 일종의 반문명 양식 운동이다. 이러한 해체주의 건축은 관습화된 고급 예술과 현실 세계와의 불일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신들의 건축을 시작한다. 기존의 건축 양식들이 수천 년간 안정되고 질서 있는 조형 세계를 추구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에서는 늘 폭력과 전쟁 그리고 거짓이 난무하여 왔다. 해체주의는 직선, 직각, 사각형 등으로 구성되는 기존 건축 세계의 안정과 질서를 비현실적인 위선으로 거부하며 이러한 위선을 해체하고자 하는 비정형적이고 무질서한 건축 세계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해체주의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대중적 공식에 맞추려는 모든 디자인에 대한 도전이다. 해체주의의 혼란스러운 방식은 일단 대중에게 인식되고, 비평의 주제가 되고나면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어 더 많은 관심과 더 넓은 수용을 부추긴다. 해체주의의 형태는 기존 모더니즘의 통합성이나 규범을 이탈하고 새로운 긴장감을 주는 형태를 추구하는데 그 결과 파괴적이고 미완성적 표현이 되기도 한다.
디자인요소들은 통일된 전체로 구성되는 대신 해체되고 전체에서 분리되어 대개 날카롭게 각지고, 중복 되며 상호 침투하는 성격을 띈다.해체주의에서는 실외의 요소가 실내공간으로 침투하고 실내공간은 대개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밀폐된 공간으로부터 탈피한다.



프랭크 게리의 디자인 개념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기존 차원의 논리와 규칙 그리고 질서를 초월하여 새로운 차원의 개념을 창출하기 위해 우연성과 영감 등을 선호한다. 기존 사고의 차원을 초월하기 위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창조적 디자인 개념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건축디자인에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자연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려는 시도이고, 둘째는 규칙과 질서에 얽매어 있는 기존의 사고 형식을 깨뜨리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형태를 선호하는 것이며, 셋째는 순간적인 동적 변화 속에 나타나는 우연적 형태의 창출이다. 순간적으로 우연에 의해서 영감에 의해서 형성되는 자유로운 곡선과 매스를 자연에서 주변의 환경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창출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형태의 선호는 디자이너에 의해서 인공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형태보다 자연적 형태에서 얻어지는 자유로운 변화를 그의 창조적 디자인에 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프랭크 게리는 순간적인 동적변화 속에서 그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독자적 형태를 창조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변화되는 종이, 헝겊, 비닐 등에서 나타나는 순간적 구겨짐 등을 선호하는데 이렇게 우연하게 포착되는 형태들을 그의 디자인에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바탕은 기존의 틀에 놓여있는 규칙과 질서를 초월하여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변화속에서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한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가질 수 있다는 기존 질서의 초월에 있다.
   
프랭크 게리의 창조적 개념은 이전의 건축가들처럼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보다는 혼란의 상태에 놓여있는 현재의 건축철학 및 논리에 하나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도적 예술가의 정신과 같이 게리의 시험정신 또한 창조적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하나의 구심적이 되고 있다.  
  
 
 
프랭크 게리의 DESIGN PROCESS  
 
프랭크 게리의 DESIGN PROCESS 는 다른 건축가들과 확실히 차별화 된다. 프랭크 게리는 자신만의 난잡하고 멋스러워 보이는 스케치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스케일 모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모델로 승화시킨다.
모든 것은 이 모델에서부터 나오게된다. 건물매스의 결정, CAD작업, 구조적 문제 해결, 디테일 등 모든 작업들이 모델작업에 의해서 판단되고 최종적인 결과물도 모델에 의해서 완성된다.
전통적인 건축디자인과 다른 점은 그는 컨셉 디자인을 하는 도중에 컴퓨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컴퓨터를 그의 아이디어를 현실화 시키는 도구로서만 사용한다.
그가 전통적인 건축 디자인 방식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런 전통적인 디자인 프로세스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건축가들의 디자인 작업에 쓰이는 컴퓨터 프로그램 기술을 발명하기도 한점은 모순되고 차별화된 그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게리는 모델을 중심으로 한 디자인과정에서 건축디자인의 창조적 개념을 그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논리와 이론으로 발전시킨다. 이를 위하여 그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디자인 방법론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방법론에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을 응용하고 있다. 
 
 
  
 프랭크 게리의 유명한 작품으로 자연적인 물고기의 형태를 한 Bilbao 구겐하임 미술관의 디자인 작업은 CATIA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건축디자인 해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CATIA는 프랑스 소프트웨어회사인 Dassault에 의해 개발된 프로그램으로 주로 우주선이나 자동차 디자인에 유용된 프로그램이다.  


  복잡한 곡선들에 대한 작업은 복합적 형태를 해석하기 위하여 초기에 만들어진 카드보드의 스터디 모델을 CATIA에 부속된 Faro arm이라는 디지타이저를 통하여 스터디 모델의 곡선들이 추적된다. 이렇게 추적된 데이터들은 3차원으로 해석이 가능한 CATIA wire frame으로 전환되고 이것은 다시 구조해석 및 시공에 대한 디테일을 만들기 위한 건축적인 해석이 이루어져서 완성된다.


 

 

 

 

 

 

 

 

2. 세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

 

Frank Gehry (2020.09.03 10:12)

 

 

 

세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
현대건축의 거장 프랭크 오웬 게리

 

(Frank  Owen Gehry,1929년 2월28일ㅡ현재)

본명은 프랭크 오웬 골드버그(Frank Owen Goldberg)

유태인으로 미국 캐나다 온타리오 토론토 출생의 건축가이다

1989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건축을 하버드 디자인 대학교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했는데 이것이 그를 '예술가와 같은 건축가'로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건축학계에서 최고의 영예로운 상인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였으며

건축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와이즈만 미술관> <댄싱하우스 체코>

<온타리오 예술 갤러리> <게리 타워 하노버 독일>가 있고

<우드로 윌슨상> <미국 대통령 자유훈장> <AIA 골드메달> <국가 예술상> <캐나다 훈장>

<프리츠커상 1989>을 수상했다

침체에 빠진 스페인의 작은도시 빌바오를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한 계기가 된 구겐하임 미술관은

프랭크 게리가 티타늄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완성했으며 건축계에 혁명을 불러 일으켰고

도시를 살리는데 대성공을 했으며 프랭크 게리의 이름도 알리게 되었다

감정(emotion)과 느낌(feeling)이 있는 건축이 자기의 건축이라고 말한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은 기존의 질서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아웃사이더식의 건축이다

건축의 균형성등을 파괴하고 창의성 기하학적인 구성 날카로운 선과 자유로운 곡선

등을 건축에 사용하여 미래성을 추구한다

건축의 기계성을 비판하고 순수예술로서의 건축을 추구하는 것이 프랭크 게리의 건축이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은 이론으로 무장한 해체주의는 아니며  감각적으로 저항하는 건축을 추구한다

2019년 서울 오픈한 <루이비통 메종 서울>이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다

한국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루이비통 플래그쉽(Flagship) 건물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배너티 페어(Vanity Fair)지에서는 프랭크 게리를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 로 선정하였다

프랭크 게리의 작품은 시적이고 실용적이며 역사적이고 영웅적이다

1979~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엔잴레스 캠퍼스 교수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건축의 거장

최초의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오웬 게리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후기근대주의)은

보통 서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운동을 일컫는다

해체(deconstruction)와  다원적(多元的) 사고가 키워드이며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운동이다

건축계의 실험적 선구자 프랭크 게리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곡선과 기하학적인 구도를

건축에 담아 표현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이다

 

 

Architecture should speak of its time and place but yearn for timelessness - Frank Owen Gehry

"건축은  그 시대와 장소에 대해 말해야 하지만 영원함에 대해 갈망하기도 한다"

 

 - 프랭크 오웬 게리 -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미국 로스엔젤레스 2003


15년이라는 오랜 기간과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만든 대표작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프랭크 게리가  장미꽃이 피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고 원형경기장과 같이 배치하였으며

완벽한 음향효과가 나도록 설계하였다

웅장하고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마스터 합창단의 공연장으로 정기 연주회를 실시하고 LA를 음악의 전당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체인링크 펜스를 배경으로 월트 디즈니 홀의 왕관을 쓴 프랭크 오웬 게리

프랭크 게리는 엄격한 프로그램과 기능을 만족시키고 나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비틀다 보니 이런 건물 형태가 나왔다고 말한다





파나마시티 바이오무스 박물관 (PanamaCity Biomuseo) 프랭크 게리 2014
외관을 구성하고 있는 원색의 거대한 판들이 이채롭다
 



Frank Gehry  스페인 엘시에고에  2006


스페인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 Marques De Riscal Hotel Eltziego
와인 명가 Marques De Riscal 에서 만든 호텔로 와이너리 근처에 있는 5성급 럭셔리 호텔
21세기 최고의 건축가 Frank Gehry가 건축하면서 유명해졌다
호텔 외관은 항공기 외장재로 쓰이는 티타늄으로 덮여있는데 마치 춤을 추는 듯 아름답다
Frank Gehry가 스페인의 플라멩코(집시의 음악과 춤)를 추고 있는 무희의 치마자락의 모습을 보고 표현한 것이라한다
외관을 덮고 있는 보라색은 마르케스 데 리스칼의 대표 와인으로 유명한 레드와인의 색을 표현한 것이다

 

 

 

댄싱 하우스   체코 프라하 1996

체코 프라하의 춤추는 건물 1996 타임(Time)이 선정한 최고의 디자인 작품 Dancing Building
프라하의 자유로운 이미지를 갖게 한 의미있는 건축물이다
수직의 원기둥 건물이 남성을 곡선의 유리 건물이 여성임을 나타내고 있다

 




Frank Owen Gehry

살아있는 미국의 건축가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건축물을 창조하고 있는 프랭크 게리
자기의 건축이념을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내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건축가 일뿐 아니라찻잔에서 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디자인 하는 건축가 라는 호평을 받는다
프랭크 오웬 게리는  기발하고도 천재적인 발상과
예상치 못하는 영감과 통찰력을 건축으로 보여주는 건축예술의 거장이다
프랭크 게리는 건축계의 선구자이다


 

 


세계 최고의 고층 빌딩 (아파트)
8 스프루스 스트리트 Eight Spruce Street  New York  2010

Eight Spruce Street   Beekman Tower New York by Frank Gehry 2010
76-story skyscraper designed by architect Frank Gehry in the New York City

 

 

파도가 치는듯한  은빛 마천루(Skyscraper) 8 Spruce street 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2010년에 완공한 76층의 빌딩(아파트)이다

 

 

 

DZ Bank Building  Berlin  Germany  Frank Gehry 1999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독일 베를린의 DZ 은행 건물

 



유태인 가정에서 자라난 영향때문인지 프랭크 게리는 창의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유태인의 생활방식과 문화속에서 탈무드를 읽으며 자란 탓으로 탈무드식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있었다
"탈무드는 항상 모든 것을 물어보라고 가르칩니다
항상 호기심과 왜? 라는 질문이 평생 나와 내 건축을 따라 다녔습니다"
라고 말하며 건축가로서 성공한 프랭크 게리 그의 인생은 탈무드의 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194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프랭크 게리는 트럭운전사로 배달일을 하며 대학을 다니는 17세의 학생이었다
여러 미술 강좌를 듣고 예술가들을 만나게되고 그때 받은 도자기수업이 건축을 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도자기 선생님의 권유를 받으면서 건축에 관하여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를 회상하면서 프랭크 게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LA의 트럭 운전사이면서 시립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나를 재미나게 하는 것은 뭘까?
그리고 곧 그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보는 것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건축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서든캘리포니아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2년동안 군생활을 했으며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하버드 대학원에서 세라믹과 디자인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프랭크 게리는 "건축가는 도시계획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말한다
LA로 돌아와서는 Easy Edges라는 가구회사와 건축스튜디오를 운영했고
1977년 프랭크 게리는 자기가 사는 집을 리모델링하여 세상의 비평과 호평을 동시에 받았다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을 여행하면서 만난 유럽 미술관의 위대한 회화들은
프랭크의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62년 프랑스에서 돌아온 프랭크 게리는 센타모니카에 자기의 이름을 달고
프랭크 게리 어소시에이츠(Gehry Associates)라는 자기 회사를 열었다
프랭크 게리는 자유로운 방식을 추구하였으며
아방가르드 스타일(급진적인 스타일)에 심취했고 자기가 맡은 건축에 적용했다
물결모양으로 골판지를 이용한 가구를 만들어 명성을 얻기도 한다
물고기를 모티프로 한 건축물을 만들기 시작하여 악세사리 등에도물고기와 물결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프랭크 게리의 디자인 과정은 모델 작업에 근거를 두고 모델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유명한 작품으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이 디자인 작업은 'CATIA'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건축 디자인 해석에 의해 이루어졌다 항상 자유롭게 규제에 얽매이지않고 숨어있는 곳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프랭크 게리
1989년 건축계의 아카데미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할 수있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게되고
명성있는 건축가로 세상에 그의 위상을 알리게 된다

 




Frank Gehry House 프랭크 게리의 자택Santa Monica California 1978-1979

프랭크 게리의 집이 있는 곳은 전형적인 미국의 도시 지역이다
기와지붕이 있는 스페인식 스타일의 집들과 전형적인 미국식 형태의 집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프랭크 게리가 세상의 관심을 받게되는 것은 센타모니카에 있는자기의 집을 저렴한 비용으로 수리했을 때였다 리모델링한 집은 기존의 건축계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쓰레기 건축이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프랭크 게리를 따르는 건축가들은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며 세상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건축계의 실험적 선구자 프랭크 게리
창의성과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담는 건축가 프랭크 게리
건축물의 공간을 재구성하여 생명력이 있는 건축을 하는 사람이 프랭크 게리다
프랭크 게리는 건축물을 예술로 승화시키면서 현대건축에 큰 메세지를 남겼다

"건축은 예술이다"
- 프랭크 게리 -



위글 사이드 체어 Wiggle Side Chair  1972   Frank  Owen Gehry 


종이를 재활용한 골판지 의자 Wiggle Side Chair (Easy Edges Side Chair 1972)

골판지(물결 모양의 골이 지게 만든 두꺼운 종이)로 완성한 실험적인 의자

수공예와 절묘한 기술력 엉뚱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위글 사이드 체어는

창조성과 유쾌함을 발휘했으며  외면받던 소재인 종이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명품 의자로 실용적이면서 예술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프랭크 게리는 의자 하나에도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시계들

프랭크 게리의 손글씨가 담겨있다

 

 

 

 

프랭크 게리는 물을 좋아하고 물고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수영과 요트도 좋아한다

프랭크 게리는   자기의 건축에 자주 등장하는 물고기 잉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매주 목요일이면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갔다

나는 유대인 시장에서 산 살아 있는 잉어를 할머니 댁으로 가지고 돌아와  욕조에 담아두고 놀았다

나는 늘 물고기의 형태, 움직임, 그리고 그것이 물 위에 떠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가졌다"

프랭크 게리는 물고기 형상에 대하여 위와 같이 설명하면서

유년시절에 잉어와 같이 욕실에서 놀았던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유연한 율동,형상, 비늘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하나의 완벽한 상징물로 건축과 그가 디자인한 보석 등에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California Aerospace Museum  Exposition Park 1984캘리포니아 항공우주박물관  박람회공원

 

프랭크 게리의 초기 작품으로  박물관 전면에는 비행기 한대가 달려있다

이곳이 항공박물관임을 말하는 프랭크 게리만의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한 재미있는 표현방법이다

 

 

 


Peter B. Lewis Building  Cleveland  Ohio  Frank Owen Gehry 2002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피터 B. 루이스 빌딩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미국 2002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경영학교 건물
뛰어난 연구환경과 긍정탐구로 학문적 업적을 자랑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명문사립대학이다
의학, 치의학, 법학으로 명성이 알려져있다
이 학교의 경영학 건물을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하였다






 

Richard B. Fisher Center  Frank Owen Gehry 2003New York USAThe Richard B. Fisher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at  Bard College by Frank Owen Gehry
리차드 B. 피셔 공연예술센터 바드대학 뉴욕 미국 프랭크 오웬 게리
  프랭크 오웬 게리는 <David Cabin  데이빗 캐빈  아이딜와일드-파인 코브 1957> 을 시작으로
1962년 자기의 사무실 Frank O. Gehry and Associates을 오픈 하여 지금까지 건축 활동을 해 오고 있다 (현재 91세)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다수의 건축 상을 수상하였으며
1989년에는 건축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프리츠커(Pritzker) 상을 수상하였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건축가 최초의 해체주의 건축가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오웬 게리 Frank Owen Gehry

 

98% of what gets built today is shit - Frank Owen Gehry
"오늘날 지어지는 98%의 건물은 쓰레기다" 

 

- 프랭크 오웬 게리 -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Guggenheim Museum Bilbao 1997 Frank Owen Gehry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건축가 프랭크 오웬 게리가 1997년에 완공한 건축물이다

프랭크 게리가 티타늄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갑옷을 입은 것 같은 형태의 미술관을 완성했다

도시복원과 도시재생이라는 기적의 건축물로 도시를 살리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프랭크 게리라는 명성을 세상에 알렸다Frank Gehry (2020.09.03 10:12)

 

 

 

 

 

 

 

3. [포춘US]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창업스토리

 

유수의 상을 수상한 건축가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창업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Interview by Dinah Eng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건축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프랭크 오웬 게리 Frank Owen Gehry(89)는 포스트 모던 스타일 건축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으론 로스엔젤레스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파리의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설립한 게리 파트너스에는 160명의 직원이 있지만, 그는 여전히 모든 프로젝트를 직접 챙기고 있다.

나는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그 곳에서 철물점을 운영했다. 할아버지는 유대교 회당(synagogue)의 회장이었는데, 어린 내게 탈무드를 읽어주곤 하셨다. 탈무드는 한마디로 ’호기심 천국‘이었다. 이야기는 언제나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나는 탈무드를 듣고 대화를 하며, 거기에서 나오는 믿음과 생각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심장마비에 걸렸고, 철물점을 정리해야 했다. 이후 1947년 우리 가족은 삼촌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주류 판매점에서 일했다. 우리 가족은 그 곳에서 네 블록 정도 떨어진 LA 시내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거주했다.

우리 가족은 가난했다. 나는 17세 때 트럭 운전수로 일하며 로스앤젤레스 시립 대학에서 야간 수업을 들었다. 목공작업을 좋아했던 나는 이후 건축 설계 수업을 들었고,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USC)에 이끌려 그곳에 입학하게 됐다. 1950년 대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던 시기였다. USC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수들은 내게 “성공하려면 개명을 하라”고 조언했다. 아내 애니타가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1954년, 나는 성을 게리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나는 USC를 졸업한 후 미 육군에 입대했다. 전역 후에는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도시 설계를 전공했다. 하지만 수업이 재미 없어 중간에 자퇴했다. 이후 건축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LA로 돌아왔고, 1962년 내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당시 친구 중 한 명이 공동주택 6채를 짓자고 제안해 그와 동업을 했다. 둘이 자금을 모아, 우리에게는 거액이었던 5,000달러를 주고 부지를 구입했다. 그 친구에겐 보석 소매업체 케이 주얼러스 Kay Jewelers와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매장 몇 곳과 물류창고를 설계해줬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프랭크 게리 설계 사무소가 닻을 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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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로스앤젤레스 게리 파트너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프랭크 게리. 사진=포춘US



나는 특정한 일을 따내기 위해 친교를 쌓지 않는다. 다만 예술가 친구들을 위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의 작품 설치를 도운 후, 몇몇 투자자들이 참여한 그룹과 관계를 맺게 됐다. 그 무렵 LA 시는 현대미술관 건립을 추진 중이었다. 나는 LA 현대미술관이 1984년 올림픽 기간 중 폐장을 하자 미술관 임시 전시장을 설계했다.

세계 무대에서 일하려면 문화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그 차이를 알고 그것을 업무에 일체화시켜야 한다. 나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축하기 전, 현지 바스크 가족과 바스크 문화(및 언어정책) 장관 등 많은 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용주들이 초창기에 당신을 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당신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거나, 당신을 헐값에 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훗날 당신이 명성을 얻으면, 그들은 당신이 이름값을 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나는 현재 내가 건축한 빌딩에서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하지만 초창기에도 건축주의 지향점이 내 생각과 완전히 상충할 경우엔 일을 맡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면, 돈은 따라오게 마련이다. 나의 두 번째 아내인 베르타는 현재 CFO를 맡아 재정 측면에서 회사를 이끌고 있다.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는 콘서트 홀 디자인이다. 최근에는 서동시집 관현악단(West-Eastern Divan Orchestra)을 위해 무료 재능기부를 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지역 음악가들이 함께 연주를 하며 음악을 교류하는 장이다. 그 동안 내가 받은 수많은 상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줄리어드 음대 박사학위였다. 나는 연주를 못한다. 하지만 음악을 위한 공간을 건축한 공로로 그 학위를 받았다.

건축물을 예술로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많은 건물들을 상업적인 형태로만 짓고 있는데, 거기에 조금만 노력을 더해도 특별해질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즐기며, 그들에게 희망과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는 디자인의 건물을 짓는 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정체불명의 공격적 디자인 대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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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다운타운에 있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2003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사진=포춘US
 


▲프랭크 게리(프랭크 게리 건축회사 및 게리 파트너스 설립자)가 들려주는 최고의 조언

-모든 작업에 똑같이 집중하라: “프로젝트 규모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라. 그 프로젝트가 기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확인을 하라. 가장 사소한 부분에서 당신의 전체 작업이 판단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실험하라: ”나는 프로젝트에 착수할 때 어떤 예상도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내 아이디어들을 실험하고 질문을 던질 뿐이다. 나는 실제로 프로젝트 별로 20~30개의 모델을 만든다. 어떤 작업에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쉽다는 이유로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선 안 된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역시 옳지 않은 일이다.

번역 위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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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격·혁신… 건축을 예술로 승화시킨 대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등 설계
‘건축계의 전설’ 프랑크 게리 조명
‘루이뷔통 메종 서울’도 디자인

주류 건축과 달리 끊임없이 도전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 구축

프랭크 게리/폴 골드버거/강경아 옮김/3만2000원

 

프랭크 게리. 당대 활약 중인 건축가를 줄 세우면 맨 앞에 설 만한 거장이다. 1989년 건축가에게 최고 영예인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건립 이후 미국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체코 댄싱하우스, 캐나다 온타리오 아트갤러리 등을 통해 해체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군림했다. 심미안이 남다를 루이뷔통 재단이 지은 미술관도 그의 작품이다. 한국인 며느리를 뒀다는 이 노장의 작품은 서울 청담동에서도 볼 수 있다. 2019년 11월 선보인 루이뷔통 메종 서울이 주인공이다.

현역 건축가로 활동하면서도 대학에서 후학 양성을 해온 그에겐 “비용이 많이 들고 다수 대중이 아닌 초부유층을 위한 건축가”라는 비판도 따라붙는다. ‘심프슨 가족’에도 괴팍한 건축가로 등장했을 정도로 유명한 이 건축 거장의 업적과 삶을 가감 없이 소개하는 첫 전기물이다.

 

폴 골드버거/강경아 옮김/3만2000원

 

두꺼운 책이 술술 읽히는 건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저자 글솜씨 덕분이다. 폴 골드버거는 ‘배니티 페어’의 객원 편집자이자 15년간 ‘뉴요커’의 건축 비평가로 활동했다. 뉴욕타임스에서 시작한 건축 비평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주류 건축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보적인 건축 세계를 구축해 나간 아웃사이더이자 예술가에 가까운 건축가 프랭크 게리를 20대에 처음 만난 후 수십 년 이어온 교분을 바탕으로 게리의 삶과 작업을 충실하게 담아냈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서 사 온 잉어를 몇 시간이고 관찰했던 경험이 마침내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으로 이어지기까지, 프랭크 게리가 거쳐 온 삶의 발자취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1969년, 하루짜리 심포지엄을 위한 스튜디오를 개조하던 프랭크 게리는 빠듯한 예산에 맞춰 골판지를 사용한 의자를 만들어 냈다. 나무만큼 단단하면서도 유연성이 높은, 동시에 아름다운 종이 가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이지 에지(Easy Edges)’라 이름 붙은 이 판지 가구는 대박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게리는 자신이 건축가가 아닌 가구 디자이너로 기억되는 일을 염려해 손해를 감수하고 모든 사업을 철수해 버렸다.

큰 경제적 이익을 얻을 만한 기회 앞에서 번번이 등을 돌려 버리는 게리의 본능은 건축가로서의 자아를 지키려는 갈망에서 기인했다. 게리는 자신이 창의적인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로 소비되어 버리는 운명을 늘 두려워했다.

 

특히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대중적으로 성공한 후로 더욱더 그러했다.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게티이미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메릴린 먼로의 환생이다. 그 스타일은 관능적이고, 감정적이고, 직관적이며, 표현주의적이다.” 20세기 인류가 만든 건축물 걸작에 손꼽히는 빌바오 구겐하임을 두고 건축평론가 허버트 무샴프가 남긴 말이다. 메릴린 먼로의 나부끼는 치마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일렁이는 파도나 꿈틀대는 물고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건축물은 건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빌바오는 이 건축물 하나로 쇠퇴해 가던 공업 도시에서 연간 100만 명이 찾는 관광 도시이자 디자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빌바오 효과’라는 사회 현상학적 용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게리는 분명 브랜드였지만 건축가로서 작업을 이어 가길 원했다. 단순히 건물 설계를 해 나간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처럼 창의적 작업을 계속하고, 자신의 유명한 작품을 공식처럼 활용해 여기저기 복사하려는 수많은 유혹에 저항한다는 의미였다. 반복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건축 형태를 구상하는 용기로, 게리는 성공 가도 앞에서 등을 돌리며 오로지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건축계의 아웃사이더로 예술가 공동체 주변을 맴돌던 그는 늘 배우고자 하는 열망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리는 직관적인 태도의 예술가들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는 예술의 기술을 사용하여 건축적 목적을 수행하는 식으로, 주류 건축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관을 완성해 나갔다. 그의 건축물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게리의 건축물에서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 가장 놀라운 점은 독특한 형태를 만드는 그의 재능이다.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쭐대지 않는 그런 형태 말이다…건축물의 독특함이 기분 나쁜 느낌보다 신기한 생기를 내뿜는다는 점이다.”

극적이고 재기발랄한 게리의 작품에는 그가 진지한 설계자가 아니며 그의 건물은 비이성적인 창작물이라는 비난과 편견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으로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며 고군분투한 거장의 노력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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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길 위의 갤러리] 건축이 작품처럼 느껴지는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건축

 

우리나라에 선보인 첫 작품, 루이뷔통 메종 서울
자하 하디드와 함께 대표적인 해체주의 건축가
평범한 박스의 건축물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문화뉴스 임나래 기자] ‘세계 이색 건물’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건물이 있으니, 바로 건물의 옆구리가 찌그러진 모습의 체코 프라하에 있는 “댄싱 하우스”이다. 

화제가 된 이 건물은 이 앞에서 재미있게 찍은 사진 한 장을 시작으로 지금은 이 건축물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체코 프라하에 있는 '댄싱 하우스'.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명소가 되었지만, 건축 당시에는 도시 풍경과 동떨어진 디자인으로 많은 반대가 있었다. 건물은 건축주였던 댄서 부부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사진=Pixabay ©Nobert Pietsch
 
 

세상에는 수많은 건축물이 있지만, 사실 댄싱 하우스처럼 직관적인 형태를 보이는 건축물은 굉장히 드물다. 어떤 사물에서 영감을 받아도, 그 사물을 직관적으로 건물에 표현하지도 않는 경향이 있을뿐더러, 사물의 일부분을 굉장히 함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시선에서 영감의 요소를 알기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댄싱 하우스 같은 건축물이 재미있고 특이한 건축물로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가 없다. 

 

 

 

건축가인가 예술가인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

 

프랭크 게리(Frank Gehry)/사진=핀터레스트
 

프랭크 게리는 1929년생으로 올해 92세의 캐나다 출신 건축가이다. 92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건축계의 거장이다. 건축학계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건축가로서 현재는 UCLA 건축대학원에서 대학원생 지도를 겸하고 있다.

프랭크 게리는 처음 들어봐도, 그의 건축물은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정도로 많은 랜드마크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대표적인 건물로 미국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박물관이 있다.

 

 

이제야 자유를 만끽하며 눈치를 안 보고,

내가 하고픈 걸 맘껏 하는데

나이가 들었다고 그만둘 턱이 없다.

-뉴욕타임즈(NYT) 인터뷰中 

 

프랭크 게리는 우리나라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와 함께 대표적인 해체주의 건축가라고 불린다. 프랭크 게리가 건축가이지만 예술가로도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체주의 건축은 19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건축 양식으로, 간단히 말하면 이전까지 널리 퍼져있던 근대건축의 기능주의, 표준화, 합리성과 같은 건축 언어를 거부하고 건축물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찾아내 구조적 형태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프랭크 게리의 대표작중 하나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Walt Disney Concert Hall)/사진=Pixabay ©Falkenpost
 

 

근대건축의 직선과 박스 형태에서 벗어나 사선과 곡선, 그리고 비 기하학적인 자유 곡선의 건물이 해체주의 건축 양식에서 나타나며, 반듯하고 공간의 최대 효율이 나타났던 근대건축과는 달리 건축물이 비틀리고 휘어지면서 기존의 건축이 가진 관습을 파괴하는 형태가 나타난다.

 

해체주의 건축과 프랑크 게리의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

해체주의 건축의 특징 중 하나로, 단일건물을 도시보다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건축물을 설계할 때는 일반적으로 대지와 그 주변 경관을 필수적으로 고려하기에 동서양을 불문하고 한 지역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해체주의 건축의 경우에는 형태적인 특징으로 지역의 건축물들과는 대조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체주의 건축은 지역의 랜드마크 건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다.

 


 

'빌바오 효과'를 일으킨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이 건축물을 보기 위해 빌바오로 건축답사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종종 찾을 수 있다./사진=Pixabay ©txlopez
 
 

대표적인 예가 프랭크 게리 설계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부터 발생한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이다. 지금은 한 도시의 건축물이 그 지역에 미치는 영향 또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쇠퇴하는 공업도시였던 스페인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 건축으로 인해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거듭나게 되면서 건축물이 도시경쟁력을 높이는 현상에서 유래되었다.

 

건축은 그 시대와 장소에 대해 말해야 하지만,

영원함에 대해 갈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첫 건축물, 루이뷔통 메종 서울

 

지난 2019년 오픈한 루이비통 메종 서울. 프랭크 게리의 한국 첫 작품으로 당시에 많은 화제를 모았다./사진=루이비통 한국 공식 홈페이지
 

 

청담동에 자리한 루이뷔통 메종 서울은 프랭크 게리가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건축물로 지난 2019년에 개장하였다. 루이뷔통 메종 서울은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Foundation Louis Vuitton)에 수원 화성과 학의 모습을 형상화한 전통 동래학춤의 움직임에서 받은 영감이 더해졌다.

규모는 작지만, 그 안에 프랭크 게리의 건축과 한국의 전통문화가 담긴 루이뷔통 메종 서울은 외관에서 느껴지는 역동적인 형태와 재료에서 오는 가벼운 느낌이 잘 어우러져 독특한 건축물들이 많은 청담동 거리에서도 특히 더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프랭크 게리의 해체주의 건축이 언제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스페인 빌바오를 구겐하임미술관을 보러 많은 사람이 일부러 찾는 도시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도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으로 주민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다. 댄싱 하우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건축물 하나로 ‘빌바오 효과’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고, 그의 건축물들을 원한다. 이것이 바로 건축이 갖는 문화 영향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건축학교 졸업

AIA 골드메달

국가 예술상

캐나다 훈장

프리츠커상 (1989)

 

해외 주요작품

체코 프라하, 댄싱하우스(Dancing House)

스페인 빌바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Bilbao)

미국 로스엔젤레스,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Walt Disney Concert Hall)

독일 바일암라인,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Vitra Design Museum)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Millennium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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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비정형의 건축미가 돋보이는 ‘루이비통 메종 서울’

 

2019-11-11

 

한 척의 배를 연상시키는 구겐하임 미술관. 1997년 10월 18일 문을 연 구겐하임은 스페인 빌바오(Bilbao)의 랜드마크로 연간 13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세계적 명소가 됐다. 그 중심에는 ‘해체주의의 거장’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있다. 프랑스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미국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등을 설계한 캐나다 출신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는 1989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그는 “건축은 본질적으로 3차원의 오브제(object)인 까닭에 조각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전통적인 건축형태로부터의 과감한 이탈을 주도하고 있는 건축물을 창조한다.

 

현대 건축의 거장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비통 메종 서울' 

 

 

프랭크 게리와 루이비통의 만남 
현대 건축의 거장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비통 메종 서울’이 청담동에 오픈했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프랭크 게리의 작품으로, 건물 전면에는 유선형 유리 블록을 쌓아 한눈에도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프랭크 게리는 한국의 역사가 담긴 수원화성의 설계와 부산 동래학춤의 우아한 움직임에서 받은 영감을 접목해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담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은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의 형태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자유로운 곡선, 독특하고 유머러스한 형태 등 그의 창조적 디자인 개념에서는 건축 디자인에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자연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려는 시도와 함께 기존의 사고 형식을 깨뜨리는 자유로운 형태를 엿볼 수 있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 외관전경

 

 

루이비통 메종 서울은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총 5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그재그 형태의 입구와 쇼윈도를 시작으로 테라스까지 건물의 구조 전체를 덮고 있는 유리와 상부의 일렁이는 루버 형식(louvered)의 유리 판넬들이 어우러지면서 채광을 극대화한다. 
파격적인 곡선의 창조자로도 불리는 그의 명성처럼 기존 건축의 개념을 깬 곡선 비정형 구조와 특수 유리 등을 외장재로 활용한 미래형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하얀 석조로 이뤄진 건물 벽과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계단으로 개방감을 더한다. 
구겨진 종이를 연상시키며 다채로운 컬러감이 돋보이는 나무 조각의 조형물은 루이비통 메종 오픈을 기념하여 프랭크 게리가 고안한 스페셜 쇼윈도이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  내부전경

 

 

헤리티지를 담은 공간 
루이비통 메종 서울의 내부 인테리어 설계는 샤넬, 루이비통, 불가리, 디올 등의 매장을 디자인한 피터 마리노(Peter Marino)가 담당했다. 건축가 겸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그는 높은 층고가 돋보이는 입구부터 아늑한 라운지에 이르기까지 ‘루이비통 메종 서울’의 공간마다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미시언(Miesian) 방식으로 설계된 인테리어를 선보인다. 

 

다채로운 컬러감이 돋보이는 나무 조각의 조형물이 설치된 쇼윈도

 

 

차분하고 환한 분위기의 지하 1층은 루이비통 남성 컬렉션을 선보인다. 루이비통 여성 컬렉션을 만날 수 있는 1층과 2층 공간은 의류, 가죽 제품, 액세서리, 워치 컬렉션 등이 자리하고 있다. 2012년 처음으로 선보인 오브제 노마드(Objets Nomades) 컬렉션 역시 국내 최초로 상설 전시된다. ‘루이비통 오브제 노마드’는 하우스의 철학인 여행 예술을 재해석한 독창적이며 우아한 오브제 컬렉션이다. 아틀리에 오이(Atelier Oï), 캄파나 형제(Campana Brothers), 로우 에지스(Raw Edges) 마르셀 반더스(Marcel Wanders), 안드레 푸(André Fu) 등을 비롯한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오브제가 설치돼 메종의 인테리어 디자인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3층 공간은 프라이빗 살롱 공간으로 맞춤형 쇼핑 경험과 예약제로 운영된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오브제가 설치된 '루이비통 메종 서울' 내부전경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은 4층에 있다. 에스파스 루이비통은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의 전시 프로젝트 ‘미술관 벽 너머(Hors-les-murs)’의 일환으로, 일본 도쿄와 이탈리아 베네치아, 독일 뮌헨, 중국 베이징에 이어 서울에서 진행된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은 현대미술을 비롯해 동시대 미술 작가에게 영감을 준 20세기 작품을 소개하며, 전시를 통해 더 많은 대중이 예술과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해오고 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 전경

 

 

‘예술은 어디에나 있다(art is everywhere)!’
루이비통 메종 서울 내에는 예술 작품과 루이비통의 역사를 반영하는 아카이브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각층에는 마크 하겐(Mark Hagen), 마르셀로 로 귀다이스(Marcello Lo Giudice), 브랜든 스미스(Brendan Smith), 루이지 매놀피(Luigi Mainolfi), 마틴 클라인(Martin Kline), 하모니 해몬드(Harmony Hammond), 베르나르 오베르탱(Bernard Aubertin), 안젤름 라일(Anselm Reyle) 등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외에도 아틀리에 장인이 상주해 루이비통의 가죽 제품과 하드사이드 러기지 제품에 이니셜을 새기거나 특별한 수작업 페인팅 서비스 등의 개인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 전경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는 이번 메종 개관을 기념하기 위한 첫 전시로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조각을 선보인다. 자코메티는 스위스 보르고노로 출생의 조각가로 주로 추상적, 환상적, 상징적, 전율적인 일련의 오브제(objet)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루이비통 재단이 소유한 〈키가 큰 여인Ⅱ〉, 〈베네치아의 여인Ⅲ〉, 〈걸어가는 세 남자〉, 〈장대 위의 두상〉, 〈남자 두상 시리즈〉, 〈쓰러지는 남자〉 등의 작품 8점이 전시된다. 

 

 

〈키가 큰 여인Ⅱ〉 1960 ⓒ Succession Alberto Giacometti (Fondation Alberto et Annette Giacometti, Paris) 
ⓒ Adagp, Paris 2019 Photo credits: ⓒ Fondation Louis Vuitton/Marc Domage 

 

 

전시장 중앙에는 작은 머리와 거대한 발을 가진 작품 〈키가 큰 여인Ⅱ〉가 설치되어 있다. 높이 2m 77㎝로 자코메티의 작품 중 가장 큰 조각이다. 그의 작품은 인물을 가늘고 길게 표현하여 모호하고 신비스러우며 냉정한 인상을 준다. 바로 옆에 설치된 〈베네치아의 여인Ⅲ〉 또한 인물의 형태적 특징을 최소화해 가장 보편적인 모습으로 인간과 인간성을 상징했다.
인물 모델 탐구에 오롯이 전념하며 창작 활동 당시 가졌던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관념을 느낄 수 있다. 
자코메티는 인간의 절대 고독과 상처를 조각으로 빚어냈는데, 이는 작품 〈걸어가는 세 남자〉에서 엿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 시기, 다시 활기를 찾아가는 파리의 거리에서 작가가 느낀 실존적 고독을 담아내고자 했다. 

 

인간의 본질을 조각으로 재현해낸 실존주의 예술의 거장인 자코메티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2020년 1월 19일까지 진행된다.

 

출처 : 디자인 정글

에디터_ 한혜정(hjhan@jungle.co.kr)
사진제공_ 루이비통 코리아

 
 
 
 
 
 
 
 
 
 
 
 
 

7.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 1

최근 수정 시각: 2023-01-21 00:46:59

 

 
설립연도
1997
소재지
설립자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

 

1) 개요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구겐하임 재단은 뉴욕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하여 국제적 연결을 늘리고 있다. 빌바오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베를린 등에도 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하였으며 1997년 개장하였다.

미술관의 건립이 도시 재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으며, 이후 이와 같이 상징문화시설을 통해 도시재생효과를 얻는 것을 빌바오 효과라 칭하게 되었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도 이 미술관을 이유로 빌바오의 도시 재생을 성공적인 대표 사례로 지목하곤 한다. 특히나 한국이나 대만, 북미와 달리 재개발이 드문 유럽에서의 사례이다 보니 더욱 지목되는 것이 크다. 사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독보적으로 재개발이 많은 국가이기는 한데 그래도 한국과 대만, 북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2) 디자인



디자인을 중시하는 구겐하임 재단의 건축물 답게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특유의 디자인으로 매우 유명한데 이는 철강업의 쇠퇴로 침체되었던 빌바오의 경제를 되살리기까지 이르렀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디자인은 대형 현대 미술관의 디자인 분야 중 가장 실험적인 도전이었으며 이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새로운 미술관 건축양식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구겐하임 미술관의 영향을 받은 작품 중 하나.
 


벽의 외관은 타이타늄으로 되어있으며 밤에 보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특히 불규칙한 볼륨이 관람객을 매혹시킨다는 듯.
 
참고로 티타늄은 60톤 가량이 사용되었으며 판의 각 두께는 0.3mm이며 이렇게 얇은 두께는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이는 광원의 반사를 다채롭게 하여 매일마다 새로운 구겐하임 미술관을 볼 수 있다. 직접 본 사람에 의하면 물이 흐르는 느낌이라고 전해진다.

건물 앞의 거미 조각도 인지도가 높다. 동일 미술가(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세계 곳곳에 있으며 한남동의 리움미술관에도 있었다. 현재는 대구신세계에서 전시 중.
 

3) 전시

돌아다니는 사진들은 대부분 외관이지만 내부도 볼 만하다. 미술이나 건축에 관심 없는 사람도 충분히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준이다.

주로 현대미술 작품이 많으며, 1층은 주로 설치미술, 2층은 조각, 3층은 회화가 많고 3층에는 특별전시관도 있다.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4) 대중매체

 

 
 
 
 
 
 
 

 

8.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 2

 

Guggenheim Bilbao Museum, GUGGENHEIM BILBAO MUSEOA

도시 전체를 바꾼 미술관

 

 

주소 : Avenida Abandoibarra, 2 48009 Bilbao (34 94 435 90 00)
대중교통 : 전차 구겐하임(Guggenheim) 역, 지하철 모유아(Moyúa) 역
개관 시간 : 오전 10시-오후 8시
휴관일 : 매주 월요일(7-8월에는 월요일도 개관), 1월 1일, 12월 25일
입장료 : 13유로 (65세 이상과 26세 미만 학생 7.5유로, 어린이 무료)
홈페이지 : www.guggenheim-bilbao.es


빌바오(Bilbao)는 어쩌면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보다는 훨씬 덜 알려진 도시인지도 모르겠다. 스페인 북부 비스카야 만(프랑스 남서부 해안과 스페인 북부 해안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만)의 오래된 도시인 이곳은, 아무래도 여행하기가 쉽지 않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처럼 스페인을 방문할 때 필수적으로 들르게 되는 위치도 아니고 다른 관광지와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아무래도 찾아가기가 수월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을 찾았던 이유는 갈리시아의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길의 시작점으로 빌바오를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빌바오라는 도시에 대해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사회시간이었는데, 철강 산업이 발달한 세계의 도시 중 하나로(당시의 교과서가) 이곳을 꼽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떤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그냥 그렇다고 하니 암기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나오는 설명이라 봤자, 빌바오 근처에서 철광석이 생산되기도 하지만 석탄도 나오기 때문에 철강과 조선 산업이 발전했다는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빌바오라는 도시가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 바로 구겐하임 미술관 때문이다. 신문의 문화면에는 낙후된 공업 도시를 탈바꿈시킨 미술관이라며 꽤 집중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잘나가던 철강, 조선 산업 도시를 낙후된 공업 도시로 만들어 버린 원인이 우리나라의 철강과 조선 산업이 앞섰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때 알았다. 스페인어가 전공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학교에서 스페인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구겐하임, 구겐하임’ 할 때마다 시큰둥하게 ‘미술관이 도시를 바꿔봤자 얼마나 바꾸겠어?’ 하는 생각으로 몇 번의 여행 중에도 이곳을 여행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다 스페인 북부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로 마음먹고 비행기표를 알아보다 빌바오에서 출발하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가 동네 뒷산 가실 때 쓰시던 작은 배낭에 한 달 동안 쓸 짐을 억지로 구겨 넣고(그래 봐야 침낭을 넣고 나면 자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짐이랄 것도 없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자기 짐을 다 메고 걸어야 하니 배낭은 작을수록 좋다), 빌바오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빌바오의 첫 느낌은 그동안 봤던 스페인 북부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촘촘하게 붙어 있는 4-5층짜리 건물들, 스페인의 남부와는 달리 창이 크고 작은 베란다가 많이 달려 있으며 길거리의 느낌은 고풍스러웠다. 웬만한 음식은 다 맛있고, 포도주도 훌륭했다. 대성당이 중심이 되는 구시가지에는 한두 군데의 광장이 있고, 저녁 7시 이후에는 바글바글 모여서 저녁 식사 전 술 한잔을 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 등이 다른 스페인 중소 도시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산티아고까지 걸어가는 긴 여정 전에 시차 적응도 해야 하니 이틀 동안 묵으면서 도시 구경을 하기로 했다. 시에스타(점심을 먹은 뒤 잠시 낮잠 자는 시간) 시간이 끝나갈 무렵, 무릎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작은 숙소에서 방을 구하고, 짐이랄 것도 없는 짐을 풀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빌바오를 지나는 강은 네르비온 강인데, 이 강가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로부터 빌바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바다가 가깝고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교역이 발달했다. 15-16세기에 스페인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빌바오도 같이 성장했다. 도시를 찾는 사람이 늘었고 대성당이 건축됐다. 16세기 말-17세기에는 도시의 성장이 멈추는 듯했지만 19세기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석탄과 철광석 광산이 활발하게 개발되면서 철강, 조선 산업이 도시 경제를 다시 살려 낸 것이다. 더불어 철도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는 네르비온 강 양쪽으로 팽창했고 인구도 급증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의 빌바오는 바스코 지역뿐만 아니라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주춤했던 도시 경제는 전쟁 이후에 다시 회복되었지만 1970-1980년대에는 철강 산업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거대해진 도시가 오히려 부작용만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후반, 도시 재개발이 시작되었고 공항, 지하철, 다리 등이 새로 디자인되었다. 이와 더불어 진행된 프로젝트가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빌바오 시 정부와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이 만나서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에 이어 새로운 구겐하임 미술관을 빌바오에 짓기로 결정한 것이다. 미국의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건축가로 결정되었고, 1997년 스페인 국왕 부처의 참석 하에 미술관이 개관했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네르비온 강가에 자리한다.

ⓒ Nikopol

 

 

빌바오에서 꼭 해 봐야 할 것은 핀초(pintxo) 먹기다. 보통 마드리드나 안달루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바에서 술을 시키면 타파(tapa)를 약간 준다. 우리나라로 치면 뻥튀기 같은 기본 안주랄까. 감자튀김이나 올리브, 혹은 토르티야 한 조각, 감자샐러드 약간, 이런 식으로 술 한 잔에 곁들일 만한 음식을 주는데, 이것을 타파라고 한다. 혹은 술과 함께 음식을 시킬 때 레스토랑에서 한 사람 앞에 한 요리를 시키듯 하지 않고 조그만 접시에 나오는 음식인 타파를 시키기도 한다. 타파란, 손바닥을 펼친 정도 크기의 접시다. 그런데 빌바오에서 유명한 것은 핀초다. 나무 꼬치에 꽂거나 빵 위에 음식을 얹고 이쑤시개를 꽂은 타파라고 하면 될까?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좋다. 생김새도 예뻐서 진열된 것을 보기만 해도 한두 가지는 꼭 먹어 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매년 핀초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구시가지에서 핀초와 와인을 사 먹고, 대성당을 구경하고, 산책을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핀초를 파는 바

빌바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다음 날 숙소 근처 카페에서 핫초콜릿과 추로스로 아침을 먹고,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향했다. 강가에 지어진 전차 길은 깔끔했고, 전차가 지나가는 길은 모두 공원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네르비온 강가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이윽고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나를 반겨 준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강아지, 제프 쿤스의 〈퍼피〉였다.

 

 

 

제프 쿤스

〈퍼피〉

Puppy

 

제프 쿤스 〈퍼피〉

1992, 스테인리스스틸, 흙, 꽃, 1240x830x910cm

 

세상에서 가장 큰 강아지일 뿐만 아니라 가장 변하지 않는 강아지일지도 모르겠다. 높이는 12미터가 넘고, 뼈대는 철골 구조다. 태어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도 강아지다. 제프 쿤스(Jeff Koons, 1955-)는 1980년대 중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작가인데, 늘 대중과 교류하고자 했다.

강아지의 형태는 컴퓨터로 정교하게 모델링했지만 꽃과 식물은 18세기식 정원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거대한 조각은 예쁘고 귀여운 것은 다 모아 놓은 것 같다. 초록색 잎과 적당히 어울린 꽃이 그렇고, 웨스트 하이랜드 테리어 종의 강아지 역시 귀여움의 대명사다. 그러나 은근히 통제 불가능한 면도 있는데, 크기가 그렇다. 식물이나 강아지나 둘 다 자라나는 존재다. 그러나 작가는 결국은 모델링 작업과 사후 관리를 통해서 이를 통제해 냈다.

제프 쿤스는 이전에도 엘리트적인 것과 대중적인 요소를 결합하곤 했는데, 〈퍼피〉 역시 토피어리 장식과 물을 주면 머리가 자라는 인형 사이에 있는 존재다. 결국 〈퍼피〉는 여러 가지 이질적인 것의 결합이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결합, 엘리트적인 요소와 대중적인 요소의 결합, 거대한 크기가 주는 위엄과 강아지와 꽃이 주는 달콤함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건축 자체부터 화제가 되었던 미술관이다. 프랭크 게리의 혁신적인 디자인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사진으로 봤을 때는 너무 번쩍여서일까. 무언가 스페인의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고 겉돌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본 프랭크 게리의 건물은 마치 조각 같았다. 미술관 앞의 야트막한 연못에 비친 티타늄 건물은 아직은 강렬하게 내리쬐는 스페인의 9월 햇살을 받아 빛났고, 잔잔한 연못은 강과 이어진 느낌이 들어 구겐하임 미술관이 강 바로 옆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사진으로 보면 연못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강 바로 옆에 있는 듯 보이나, 사실은 강과 바짝 붙어서 세워진 것은 아니다. 더불어 잘 정비된 네르비온 강가의 산책로, 그곳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십대부터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노부부까지, 의외로 빌바오라는 도시와 그곳의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33,000장 이상의 티타늄 합판, 돌, 유리로 지어진 이 건물은 구불거리는 유연한 곡선 때문에 유기적인 느낌을 준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티타늄 건물이라 강렬한 햇살에 쉽게 빛난다.

ⓒ Kamahele

 

 

 

 

루이즈 부르주아

〈엄마〉

Ama
 
 
루이즈 부르주아 〈엄마〉

1999(2001년에 주조), 브론즈, 대리석, 스테인리스스틸, 895x980x1,160cm

 

건물의 반대편에는 거대한 거미가 도사리고 있다.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의 〈엄마〉다. 프랑스 출신 조각가 부르주아는 1990년대부터 거대한 거미를 만들어 왔는데, 제목에서도 보이듯 부르주아에게 거미는 곧 엄마다. 거미는 실을 잣고 직조를 해서 자녀를 위한 먹잇감을 구한다. 배 아래의 주머니에 새끼들을 매달고 다닐 정도로 헌신적인 보호자다. 부르주아의 어머니는 태피스트리(여러 색의 실로 무늬를 넣어 짠 직조물. 벽에 걸어서 장식용, 보온용으로 사용한다)를 복원하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곧 엄마 거미는 새끼 거미의 엄마이면서 루이즈 부르주아의 엄마이기도 하고, 곧 우리 모두의 엄마다. 〈엄마〉 거미는 구겐하임 빌바오뿐만 아니라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Tate Modern Collection)를 시작으로 캐나다, 러시아, 일본의 미술관에도 설치되어 있다. 서울의 삼성미술관 리움에도 있기 때문에 한번 가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립한 재단은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으로, 현대미술의 전시, 교육, 연구, 출판 등을 목적으로 1937년에 설립된 곳이다. 솔로몬 구겐하임은 금광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가문의 사업가였는데, 젊어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어서 작품을 수집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은퇴하고 미술 작품 수집에만 전념했다. 추상회화가 주된 컬렉팅 대상이었으며, 재단 설립 이후 뉴욕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건물에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을 열었다.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에 이어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이 개관했으며 현재 아부다비에도 구겐하임 미술관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제니 홀처

〈빌바오를 위한 설치 작품〉

Bilborako instalazioa
 
 
 
 

 

제니 홀처 〈빌바오를 위한 설치 작품〉

1997, LED 조명 9개, 가변설치

ⓒ Jenny Holzer / ARS, New York - SACK, Seoul, 2015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이 높다란 중앙 홀이 나온다. 천장도 한번 올려다보고, 목이 아프면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건물 내부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어둑한 공간에 반짝거리는 글씨 기둥을 만나게 된다. 제니 홀처(Jenny Holzer, 1950-)의 〈빌바오를 위한 설치 작품〉이다.

제니 홀처는 언어, 문장, 경구 등을 주 소재로 사용하는데, 주로 뉴욕의 여러 건물 외벽에 조명으로 문장을 만들어 비춘다든지, 조명기구로 글씨를 써서 세운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 왔다. 그러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위한 작품에서는 프랭크 게리의 건물에 맞추어 아홉 개의 LED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에는 바스크어, 스페인어, 영어로 된 문장들이 빛난다. 문장의 내용은 에이즈 연구를 후원하는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조명기구를 이용한 설치이기에 이 작품이 있는 부분은 일단 조명이 어둡고, 높이가 12미터 정도 된다. 기둥의 느낌은 위풍당당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둥과 기둥 사이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도 있고, 뒤의 배경도 다 보인다. 미술관 바닥이 매끄럽기 때문에 바닥에 비치는 LED 조명 기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맨해튼의 길이나 건물 앞 보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무작위로 작품을 보는 식이었다가, 미술관에 그림을 볼 준비를 하고 들어온 사람들로 대상이 바뀌었다는 점이 제니 홀처의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점이다. 예전에는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실내의 나선형 벽을 따라서 나선형 작품을 설치하기도 했다.

강가로 나 있는 테라스로 가보자. 제프 쿤스의 〈튤립(Idi-bihotzak)〉 같은 작품도 볼 수 있고, 미술관과 근처의 풍경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프랭크 게리의 티타늄 벽, 미술관 너머로 보이는 라 살베(La Salve) 다리를 보면서 새로운 빌바오의 풍경을 만끽하는 것도 좋다. 라 살베 다리의 원래 이름은 ‘스페인의 왕자들(Puente Príncipes de España)’ 다리이지만 바다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던 선원들이 이 다리를 보고는 ‘라 살베(성모찬송)’라는 기도문을 외우거나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다리의 빨간 아치는 2007년에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새로 설치된 것이다.

 

제프 쿤스 〈튤립〉

1995-2004, 다양한 색상이 코팅된 크롬 스테인리스스틸, 203x460x520cm

ⓒ Ardfern

 

 

미술관에서 라 살베 다리가 보이는 풍경도 멋지다.

ⓒ File Upload Bot

 

 

 

 

리처드 세라

〈시간의 문제〉

Denboraren materia

 

 

리처드 세라 〈시간의 문제〉

1994-2005, 내후성 강재 (녹슨 철판), 가변크기

ⓒ Richard Serra / ARS, New York - SACK, Seoul, 2015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에는 녹슨 철판으로 만든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의 설치 작품이 여덟 점 모여 있다. 그의 작품은 그림이나 작은 조각을 보듯 한 자리에 서서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워낙 규모가 크기 때문에 작품의 앞, 옆, 혹은 사이를 걸어 다녀야 한다. 이 때문에 보는 이의 움직임에 따른 효과, 즉 매 순간 달라지는 원근법을 느끼게 되며 위치에 따라 작품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철판을 따라 걷는 길은 때로는 넓고, 때로는 좁고, 길기도 하고, 점점 좁아지는가 하면 철로 된 벽은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다. 이 거대한 연작을 볼 때 중요한 요소는 시간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걸리는 시간(전체를 보려면 좀 걸어야 하니까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관객의 머릿속에서 조각 나서 입력됐던 이미지가 하나로 합쳐져 큰 이미지를 이루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시간의 문제〉를 보는 좋은 방법을 소개한다. 일단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 설치된 갤러리 104 아르셀로미탈(Gallery 104 ArcelorMittal) 전시실로 가서 작품을 대충 훑어본다. 그리고 나서 2층의 발코니로 가는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작품 전체를 조감도로 감상한다. 리처드 세라의 작품은 워낙 규모가 커서 한눈에 보기가 힘든데,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세라의 작품이 있는 갤러리로 내려간다. 작품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눈으로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공간, 시간적인 경험을 해 보자.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술관일 뿐이다. 그러나 확실히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 이전과 이후로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빌바오가 있는 바스코 지방은 원래 자신들만의 문화, 언어, 음식 등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곳이었다. 이와 더불어 국제적, 현대적 문화 아이콘인 구겐하임이 생기면서 도시에 활기가 생겼다고 표현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미술관을 다 보고 나면 빌바오의 구시가지와 함께 칼라트라바(Calatrava) 다리 (원래 이름은 수비수리(Zubizuri)다. 바스크어로 흰색 다리라는 뜻인데,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의 이름을 따 보통 칼라트라바 다리라고 부른다)와 이소자키(Isozaki) 타워(일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가 설계한 쌍둥이 건물)도 둘러보자.

 

이소자키 타워의 모습

ⓒ Laukatu

 
칼라트라바 다리의 모습

ⓒ Ardf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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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경화

최경화는 스페인의 언어, 미술, 음식, 문화, 사람, 도시, 시골을 좋아하는 서울 토박이. 대원외국어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스페인어를,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꿋..펼쳐보기

출처

스페인 미술관 산책 | 최경화 | 시공아트

"예술의 나라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국립카탈루냐 미술관,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등에 소장..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