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위키백과
국적 미국 | |
출생 1867년 6월 8일 미국 위스콘신주 리치랜드 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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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1959년 4월 9일(91세)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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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구겐하임 미술관 카우프만 저택 (낙수장) 라킨 빌딩 유니티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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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프로젝트 타리신 플로리다 서던 컬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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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년 6월 8일 ~ 1959년 4월 9일)는 미국의 근대 건축가이다. 매우 독특한 양식의 건축 설계로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생전에도 매우 유명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로 남아 있다. 그의 다채로운 사생활은 많은 머릿기사가 되었으며, 특히 두 번의 이혼과 1914년 그의 탈리진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직원에 의한 방화살인 사건으로 유명하다.
미국 위스콘신주 리치랜드센터에서 태어난 라이트는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을 중퇴하고 시카고에서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아드라 설리번 사무소에 근무하였는데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건축에서 동사무소의 치프 디자이너로서 참가하게 되었다. 1894년에 독립한 사무소를 개설하여 처음에는 개인 저택을 전담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서는 대건축에 착수, <힐사이드 홈 학교>(1902), <라킨 비누회사의 빌딩 (Larkin Building)>(1904), <유니티 교회>(1906), <시티 내셔널 뱅크>(1909) 등의 작품을 세웠다.
이러한 활약을 통하여 루이스 설리번의 후계자로서 시카고 파를 지도하면서 미국 건축의 절충양식을 타파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1911년 위스콘신에 자택 <탈리어센 이스트>과 1938년에는 애리조나에 <탈리어센 웨스트>을 세워 이 두 곳에서 제자와 기거를 함께 하면서 새 건축가의 양성에 힘썼다.
그동안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면서 특히 일본의 <데이코쿠 호텔>과 <자유학원>을 건축하였다. 1930년대의 저명한 작품에는 <존슨회사 사무소>, <카우프만 저택 (낙수장)>이 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와 <존슨회사 연구소>와 <웨이파라의 교회> 등이 걸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9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에서 사망하였다.
유년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67년 미국 위스콘신주 농촌 리치랜드 센터에서 프랭크 링컨 라이트(Frank Lincoln Wright)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라이트(William Cary Wright, 1825년 ~ 1904년)는 연설가, 음악 선생님, 목사였고 종종 변호사로 일했다. 윌리엄 라이트는 카운티 학교 교사였던 애나 로이드 존스(Anna Lloyd Jones, 1838년 혹은 1839년 ~ 1923년)를 만나 결혼했고, 다음 해에 리치랜드 카운티 장학사로 취업했다. 매사추세츠주 출신이었던 그는 원래 침례교 목사였지만, 이후 처가를 따라 유니테리언교로 개종했다. 애나 로이드 라이트는 웨일스에서 위스콘신주 스프링 그린으로 이민온 번창한 유니테리언 대가족인 로이드 존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한편, 애나 로이드 라이트의 형제 중 한명인 젠킨 로이드 존스는 미국 서부에 유니테리언 주의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두 부모는 의지가 강한 성격이었고, 그들의 독특한 관심사들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장남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커서 아름다운 건물들을 지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를 공언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녀는 신문과 잡지에서 오려낸 영국 성당들의 판화로 아기방을 꾸며서 아직 신생아였던 아들이 야망을 갖도록 했다. 1870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가족은 메사추세츠 주 웨이머스(Weymouth)로 이사하여, 윌리엄 라이트는 소수의 신도들의 목사로서 봉사했다.
애나 로이드 라이트는 1876년 필라델피아 만국 박람회에서 프리드리히 프뢰벨이 개발한 교육용 블럭을 보았다. 이 블럭은 프뢰벨의 혁신적인 유치원 교육 커리큘럼의 기반인 프뢰벨 선물세트였다. 교육자인 애나 로이드 라이트는 이 프로그램에 큰 관심을 갖고 한 세트를 가지고 돌아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오랜 시간동안 이 세트를 가지고 놀았다. 이 세트에 들어있는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 블럭들을 조합하여 조립하면 수많은 3차원 물체를 만들수 있었다. 그의 자서전을 통해 그는 이러한 놀이가 어떻게 그의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했다. "나는 몇년동안 그 작은 유치원 책상 앞에 앉아서 직육면체, 구, 삼각형을 가지고 놀았다. 이 매끈한 단풍나무 블럭들이 아직도 내 손 안에 있는 것 같다." 그의 건축물의 큰 특징은 기하학적인 명료함이다.
라이트 가족은 웨이머스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윌리엄 라이트가 취업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로이드 존스 가문이 있는 위스콘신주 스프링 그린으로 돌아갔다. 라이트 가족은 위스콘신주 매디슨에 정착하여 윌리엄 라이트는 음악 레슨을 하면서, 매디슨의 신생 유니테리언 단체의 비서로서 일했다. 윌리엄 라이트는 가정적인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의 자식들과 음악,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나누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4살이 되자 그의 부모 사이가 멀어졌다. 애나 로이드 라이트는 윌리엄 라이트의 경제력에 불만을 가졌고, 그에게 가족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애나 로이드 라이트가 신체적 애정이 없다는 이유로 윌리엄 라이트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1885년 이혼 절차가 완료되었다. 그후 윌리엄 라이트는 위스콘신 주를 떠났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두 번 다시 그의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그의 외가 로이드 존스 가문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의 중간 이름을 링컨에서 로이드로 바꿨다.
교육 (1885년 ~ 1887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매디슨 고등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1886년 그는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는 파이 델타 쎄타 사교클럽에 가입했다.[6] 그는 두 학기 동안 파트 타임으로 수업을 들었고, 토목학 교수 앨런 D. 코노버(Allan D. Conover)와 함께 일했다. 그는 대학교를 중퇴했지만, 1955년 동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학위(Doctorate of Fine Arts)를 수여받았다.
초기 업적
실스비와 그 외 초기 경력 (1887년 ~ 1888년)
1887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일자리를 찾아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갔다. 1871년에 있던 시카고 대화재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시카고에 수많은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시카고에 대한 첫 인상은 더러운 도시, 복잡한 거리, 실망스러운 건축물이었지만, 그는 시카고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며칠만에 여러 유명 건축 사무소에서 면접을 치르고 조셉 라이먼 실스비(Joseph Lyman Silsbee, 1848년 ~ 1913년)의 건축 사무소에 제도공으로 들어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86년 그의 가족이 발주한 위스콘신주 스프링 그린에 있는 유니티 채플을 건설할 때 실스비의 제도공 및 공사 감리관으로서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라이트는 실스비의 회사에서 그의 가족이 발주한 두 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하나는 시카고에 있는 그의 삼촌 젠킨 로이드 존스의 모든 영혼의 교회(All Souls Church)이고, 다른 하나는 스프링 그린에 있던 두 이모의 힐사이드 홈 스쿨 I이다. 1887년 실스비의 다른 제도공으로 세실 커윈(Cecil Corwin), 조지 W. 매허(George W. Maher), 조지 G. 엘름슬리(George G. Elmslie)가 있었다. 라이트는 곧 커윈과 친구가 되었고, 라이트가 자신의 주택을 건설할 때까지 커윈과 같이 산다.
라이트는 실스비로부터 주급 8달러의 임금을 받고 일했는데, 그는 이 임금이 자신의 업무 성과에 비해 적다고 느꼈다. 그는 실스비의 건축 사무소에서 퇴직하고, 비어스(Beers), 클레이(Clay), 더튼(Dutton)의 건축 사무소에 디자이너로 취직한다. 하지만 곧 그는 혼자서 건축 디자인을 하기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닳았고, 실스비의 건축 사무소로 돌아간다. 이 때 실스비로부터 임금을 인상받았다. 실스비는 주로 빅토리아 시대 건축 양식과 복고주의 건축 양식을 선호했지만, 라이트는 그 시대의 브루탈리즘보다 "고풍스러운 그림 같은 건축"을 선호했다. 라이트는 좀 더 진보적인 건축을 지향했다.
애들러와 설리번 (1888년 ~ 1893년)
라이트는 시카고에 있는 애들러(Adler)와 설리번(Sullivan)의 건축 사무소에서 오디토리움 빌딩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마무리할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라이트는 그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의 장식 디자인에 버금가는 인상주의자임을 입증했고, 두 번의 짧은 면접 끝에 설리번의 견습생이 된다. 라이트는 설리번의 다른 견습생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라이트는 견습 기간 초반 몇 년 동안 다른 견습생들과의 격한 논쟁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설리번은 그의 견습생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리번은 라이트를 그의 날개로 감싸고 라이트에게 디자인의 많은 부분을 맡겼다. 라이트는 후에 설리번을 존경하는 선생님이란 의미의 독일어 "리버 마이스터(Lieber Meister)"라고 불렀다. 그리고 라이트는 현장 감독 폴 뮬러(Paul Mueller)와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에게 1903년부터 1923년 사이에 자신의 여러 공공 건축물과 상업 건축물의 현장 감독을 맡겼다.
1889년 6월 1일, 라이트는 그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 리 "키티" 토빈(Catherine Lee "Kitty" Tobin, 1871년 ~ 1959년)과 결혼한다. 이 둘은 라이트의 삼촌 젠킨 로이드 존스의 모든 영혼의 교회에서 만나 1년 간의 교제 끝에 결혼했다. 설리번은 라이트에게 5년 간의 고용 계약을 제시하여 어린 부부를 경제적으로 도왔다. 라이트는 더 나아가서 설리번에게 "설리번 선생님, 제가 선생님 밑에서 5년 동안 일하길 원하시면, 작은 집을 지을 수 있는 돈을 빌려주실 수 있나요?"라고 부탁했다.
라이트는 설리번에게 빌린 5천 달러로 시카고 근교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 시카고 가(Chicago Avenue)와 포레스트 가(Forest Avenue) 사이의 교차로 한쪽 모서리에 있는 공터를 사들였다. 그리고 그는 그 전에 살던 고딕 복고주의 양식의 주택은 그의 어머니에게 드리고, 자신의 새로운 가족이 살게 될 작은 싱글 양식(Shingle style)의 주택을 오크 파크에 지었다.
애들러와 설리번이 건설한 오디토리움 빌딩 최상층인 17층의 1890년 평면도를 보면 설리번의 사무실 바로 옆에 라이트의 사무실이 있었다. 사실 이 사무실을 라이트가 설리번에게 추천하여 이 회사에 취업한 라이트의 친구이자 동료 제도공인 조지 엘름슬리와 같이 사용했다. 라이트는 수석 제도공이 되었고, 이 회사의 모든 주택 디자인을 담당했다. 엄밀히 말해서 이 회사는 주택 건축을 취급하지 않았는데, 중요한 상업 건축 프로젝트의 의뢰인이 부탁한 경우에만 주택 건축을 맡았다. 라이트는 업무 시간에는 중요한 의뢰를 담당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주택 디자인은 업무 시간 이후 저녁이나 주말에 그의 집에 있는 작업실에서 진행했다. 역사가 로버트 트웜블리(Robert Twombly)는 건축 양식을 잘 살펴보면 비록 라이트가 주택 디자인의 총책임자였지만 설리번이 전체적인 형태나 모티브를 결정했고, 종종 라이트의 임무는 설리번의 스케치를 구체화하는 정도로 축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라이트가 참여한 프로젝트는 미시시피주 오션 스프링스에 있는 루이스 설리번 방갈로(Louis Sullivan's bungalow, 1890년)와 제임스 A. 찬리 방갈로(James A. Charnley bungalow, 1890년), 시카고에 있는 베리-맥하그 주택(Berry-MacHarg House, 1891년), 루이스 설리번 주택(Louis Sullivan's House, 1892년), 제임스 A. 찬리 주택(James A. Charnley House, 1891년)이 있다. 이 다섯 건축물 중 찬리 가문의 의뢰로 세워진 두 건축물만 현재까지 남아있다.
한편 설리번의 융자금과 초과 수당에도 불구하고 라이트는 항상 돈이 부족했다. 라이트는 그가 비싼 옷과 차를 좋아하고 그의 집을 비싸게 꾸민 탓에 돈이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빚을 갚고 여유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라이트는 회사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적어도 9개의 주택 건축 의뢰를 받았다. 그가 나중에 "해적판" 주택이라고 부른 이 집들은 화려한 앤 여왕 시대 스타일과 식민지 시대 복고주의 스타일에 변화를 준 보수적인 형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일반적인 건축 양식과 다르게 이 집들은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의 볼륨감과 절제된 요소가 강조되었다. 예를 들면, 여러 개의 창문을 가로로 길게 배치한 것, 외팔보, 그리고 개방된 평면도 등이 그러했는데, 이것들은 후에 그의 작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이 중 토마스 H. 게일 주택(Thomas H. Gale House), 로버트 P. 파커 주택(Robert P. Parker House), 조지 블러썸 주택(George Blossom House), 월터 게일 주택(Walter Gale House)를 포함한 8개의 주택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라이트가 애들러와 설리번에서 주택 건축을 하는 동시에 개인 시간에 혼자서 주택 건축을 진행하는 동안 설리번은 이에 대해 알지 못 했다. 1893년 설리번은 한 주택을 봤는데 이 주택은 그가 두말할 것 없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드가 디자인한 주택이었다. 이 집은 시카고 켄우드에 있는 설리번의 연립 주택에서 불과 한 블럭 거리에 있는 앨리슨 할랜(Allison Harlan)의 집이었다. 위치는 둘째치더라도 챈리 주택과 비슷한 주택 디자인의 구성과 발코니 트레이처리의 기하학적 순수함은 누가 봐도 라이트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이트의 5년 고용 계약은 회사를 통하지 않은 부업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이트는 설리번의 건축 사무소를 떠나야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Frank Lloyd Wright An Autobiography)에서 그는 부업이 계약 위반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설리번이 라이트가 부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화가 나고 상처받아서 이후의 부업을 금지하고 5년 계약이 완료될 때까지 오크 파크에 있는 라이트 주택의 부동산 양도 증서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 라이트는 상관의 적대감을 견딜 수 없었고 이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댄크마르 애들러(Dankmar Adler)는 "그가 연필을 던지고 애들러와 설리번 건축 사무소를 나간후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라이트에게 좀 더 동정하는 입장이었던 애들러는 나중에 부동산 양도 증서를 보내주었다.
한편, 라이트는 그의 탤리어신 견습생이었던 애드거 태펠(Edgar Tafel)에게 설리번이 할랜 주택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 그 자리에서 바로 라이트를 해고했다고 말했다. 태펠은 라이트가 해적판 주택에 대한 계약서에 종종 세실 커윈에게 대신 서명해달라고 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라이트도 부업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다른 여러 사건이 설리번과 라이트의 관계를 금가게 했다. 이러한 증언의 신뢰도에 상관없이 라이트와 설리번은 12년 동안 만나지도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과도기와 실험 (1893년 ~ 1900년)
애들러와 설리번을 떠난 라이트는 시카고 랜돌프 가에 있는 설리번이 디자인한 쉴러 빌딩 최상층에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차렸다. 라이트가 이 빌딩의 위치가 애들러와 설리번에서의 사무실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에 이 빌딩에 사무실을 구했다. 세실 커윈이 라이트를 따라 이 사무실로 옮겨왔지만, 이 둘은 각자 독립적으로 일했고 서로를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요 작품
- 구겐하임 미술관
- 카우프만 저택 (낙수장)
- 라킨 빌딩
- 유니티 교회
- 탈리어센 웨스트
- 플로리다 서던 컬리지
- 존슨 빌딩
- 데이코쿠 호텔
- 자유학원
- 시티 내셔널 뱅크
- 100여채의 유소니언 주택
출 처 - 위키백과
2.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건축론
FRANK LLOYD WRIGHT AND ORGANIC ARCHITECTURE
유기적 건축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경외심에서 빚어지는 것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생애와 작품 세계 20세기 건축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이 지대했던 건축가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거장 건축가로 길이 기억되고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 1867-1959년)는 살아생전부터 개인사로나 작품 세계로나 시끌벅적한 논쟁과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라이트는 위스컨신州에서 태어나서 스프링그린 (Spring Green)이라는 소도시 근처의 한 농가에서 이모와 삼촌이 들끓는 친척들 사이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음악가였던 아버지가 라이트가 열여덟살 되던 해에 가족을 버리고 떠나자 라이트는 위스컨신 대학에 등록하여 잠시나마 공학 공부를 했다.
낭만적인 천재, 예술적 우상타파자, 영웅적 개인주의자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더 큰 도시 시카고를 가서 당시 경제 부흥과 신건축 건설붐에 힘입어 나날이 팽창하며 시카고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수놓고 있던 시카고 건축학파 (Chicago School of Architecture)의 아들러와 설리번 건축 사무소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건축계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아들러와 설리번 건축 사무소에서 닦은 실무 경험은 라이트가 별다른 대학 학위나 훈련없이도 방년 26세의 나이로 독립 건축 사무소를 차릴 수 있게 해준 귀중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라이트의 개인생활은 연속된 결혼 실패와 비극이 겹친 질풍노도로 점철되다시피 했다. 실제로 불안정한 결혼생활과 연이은 사생활 스캔들은 무시할 수 없이 많은 수의 클라이언트들이 그를 건축가로 고용하길 회피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정도였다. 라이트는 20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6명의 자녀를 낳아준 조강지처 캐터린을 버리고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프랑스로 건너가서 당시 한 클라이언트의 부인과 살았다.
그는 애인과 함께 버젓이 고향인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으로 돌아와서 둘이서 살 개인주택 겸 작업실을 지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탈리에신 (Taliesin: 웨일즈어로 ‚반짝이는 눈썹’이라는 뜻) 하우스였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깐, 라이트가 데리고 있던 관리인이 애인, 애인의 두 자녀와 손님 4명을 모조리 살해하고 집을 불살라 버리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그 모든 비극을 뒤로 하고 라이트는 두 번이나 화재로 타 없어진 이 집을 재건해서 스프링그린 방문객들은 지금도 언덕 귀퉁이에 붙어있는 아름다운 자태의 탈리에신 하우스를 감상할 수 있다.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에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거주용 개인주택이자 작업실 탈리에신 하우스는 첫 결혼, 두 차례의 화재, 가족의 비극을 뒤로 한 채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 Photo courtesy of the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35살 되던 해인 1922년, 라이트는 드디어 정식 이혼을 하고 미리암 노엘 (Miriam Noel)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지만 여러 우여곡절 끝에 5년후에 이혼했다. 같은 해에 라이트는 세번째 부인인 올기바나 밀라노프 (Olgivana Milanoff)와 결혼하면서 드디어 그가 항상 꿈에도 그리던 자연을 벗한 환경 속에서의 안정된 결혼생활을 꾸리게 되었다고 한다.
라이트는 탈리에신 하우스에서 살면서 건축 설계일과 후학 양성에 정열적인 힘을 쏟았고 시간이 나는대로 농사일도 하였는데, 그가 젊어서부터 착상해 온 ‚유기적’ 건축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생활 환경을 누린 셈이 되었다. 그는 남서부의 아리조나州의 스코츠데일 (Scottsdale)에다가 두번째 개인 주택인 탈리에신 웨스트 (Taliesin West)를 지어 중서부의 혹독한 겨울 날씨로부터 피해 지내면서 강의와 저술 활동까지 활발하게 펼쳤다.
1930년대부터 꾸준히 해온 그의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아 놓은 책 『건축의 미래 (The Future of Architecture)』(1953년 출간)는 라이트의 건축 철학을, 그가 직접 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An Autobiography)』(1932년 초판 발행)은 유명 연예인에 못지 않은 격동의 사생활과 작업 세계에 대한 이 건축가의 고백이 담겨있다.
자연 + 인간 = 유기적 건축 …자연을 관찰하라, 자연을 사랑하라, 자연과 가까이하라. 자연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그의 후학들에게 한 말.
겨울철을 피해 남부에 지은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에신 웨스트 주거용 주택 겸 아텔리에. Photo courtesy of the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유기적 건축론 (organic architecture)의 원칙을 깊이 신봉하며 한평생 추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그 어떤 특정의 개인 양식을 구축했다거나 고집하지 않았다고 자평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건축을 업으로 삼기 시작한 1890년대 이후부터 모더니즘 철학과 미학에 근거한 다양한 건축적 실험을 단행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축에 ‚유기적 (organic)’이라는 개념을 그의 건축 철학에 도입한 때는 20세기가 갓 출발한 때인 1908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기적 건축 철학은 그의 스승인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이 모더니즘 건축을 일컬어 즐겨 사용했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이라는 그 유명한 슬로건에 라이트가 개인적으로 깊이 동경하며 추구하고자 했던 ‚자연 (nature)’의 개념을 한데 버무린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건축물은 모름지기 주변의 자연적 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건축물은 그 자체로 단지 부동하는 상자 같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실내가 외부 환경 사이의 공간이 서로 넘나드는 열려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기초 원리에 충실했다. 그 결과 라이트의 건축 세계를 좀 더 가까이 들어다보자면 뚜렷한 양식이 판독가능하지 않으면서도 매 작품들에마다 공동적으로 흐르는 형식적인 특징들을 추려낼 수가 있다.
예컨대, 그는 ‚유기적’ 공간 창조를 위해서 건축물 전체를 직사각형, 다이아몬드형, 또는 육각형 같은 여러 단위 (module)의 규칙적인 모양의 기하학적 부분들로 구성 조합하는 것을 기본으로 여겼다. 또 공학도 출신이라는 훈련 배경 덕택에 그가 매우 즐겨 사용했던 건축 구조적 요소로는 캔틸레버 (cantilever)라는 긴 막대 기본형태의 구조물은 예컨대 발코니 처럼 방침대 구조물 없이 공중에 붕 뜬채 양 끝자리 만을 건축 본체에 매달리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1909년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가 설계하여 완공된 로비 하우스 (Robie House)는 프레리 하우스 양식의 대표적인 예다.
이같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적 특징들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경우는 일명 ‚프레리 하우스 (Prairie house’ (들판 위의 집이라는 뜻)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주거용 개인 주택들일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미국 중서부의 광활하면서도 완만한 자연적 풍광에 특히 잘 어울린다고 평가되는 그의 프레리 하우스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꼽는다면, 1) 수평적인 선을 강조하고, 2) 대체로 1층을 유지하는 건물 본체와 나트막하고 깊에 드리워진 지붕을 채택했으며, 3) 실내 공간과 외부 자연 공간이 두절되지 않도록 넉넉하게 열린 공간을 지향해서 완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서부 지역의 지형을 아늑하게 감싸안은 듯한 감흥을 안겨준다는 것일테다.
그는 땅 속에 박혀 있는 지하실 공간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1894년 독립 건축 사무소를 차린 이후로 수주받아 설계한 개인 주택들의 설계도에는 대부분 지하실이 없다. 집건물이란 땅 속에 박혀 있을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땅 위에 서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믿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신념이 잘 반영한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주거용 주택의 실내 공간 또한 이전까지 미국에서 널리 일반화되어 있던 실내 공간 설계사의 관습에서 과감하게 탈피했다. 예컨대,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의 주거용 집 실내는 거실, 침실, 주방, 식당 등 기능별로 두터운 벽으로 뚜렷하게 구분된 방들로 구성된 영국 빅토리아 시대풍의 실내장식이 지배적이었다.
라이트는 그같은 폐쇄형 공간 뿐만 아니라 평균적인 인간의 신체 규모에 부응하는 아담한 ‚휴먼 스케일 (human scale)’의 열렬한 옹호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컨대 개인의 주문으로 1901년에 일리노이州 하이랜드 파크에 지은 워드 윌리츠 하우스는 집안의 벽들을 거의 제거하고 그 대신에 거실 중간에 벽난로를 설치하여 입구와 거실 공간을 자연스럽게 분리시켰다. 그는 공간이 한정된 개인 주택을 설계할 경우, 공간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입구를 보통 남성의 평균 신장을 넘지 않는 나트막한 입구와 지붕으로 설계한 다음 일단 실내에 들어서면 집안의 1층과 반2층 공간 전체로 시야가 확 트이도록 설계함으로써 기대이상의 공간확대 효과를 주는데도 명수였다.
그가 주문받아 설계한 프레리 수많은 하우스 프로젝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백미白尾로 꼽히는 예는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 위치한 로비 하우스 (Robie House)다. 1906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된 이 개인 주택은 긴 장방형 건평 위에 3층으로 올린 개인 주택이다. 캔틸레버 구조를 활용해 얹어진 지붕의 길이는 무려 6.4미터에 이르며 그 지붕 밑에는 같은 길이로 펼쳐진 서향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다. 3층 짜리 집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2층집 높이도 채 안될 만큼 나트막한 천정을 지니고 있지만 집 곳곳을 돌아가며 설치된 대형 유리창과 출입구와 얕게 드리워진 지붕 구조 덕분에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태양광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클라이언트 에드거 카우프만의 주문으로 설계된 폴링워터는 캔틸레버 건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6년 완공.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연륜이 보다 무르익은 30여년 후, 미국 동부 펜실바니아州의 한 갑부 상점주인인 에드가와 릴리앤 카우프만 부부의 의뢰로 1939년에 베어 런 (Bear Run)에 지어진 폴링워터 (Fallingwater)는 폭포수 위를 가로지르며 주변의 사암 위에 콘크리트 캔틸레버 공법을 사용해 지어진 드라마틱하기로 유명한 대표적인 개인 주거용 건축물이다.
벌써 수년째 현재까지 구미권 언론들은 본래부터 아슬아슬하게 지어져서 콘크리트 균열 및 누수 등 틈틈히 구조적 결함을 보여온 이 폴링워터 하우스가 아니나 다를까 곧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도해 오고 있다.
쏟아지는 폭포수 위에 걸터앉은 집을 짓는다는 착상 자체부터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사자같은 자존심의 표현이었다고 평가되어 온 데다가 그같은 자연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연 풍광과 건축, 외부와 실내, 원대한 컨셉과 실용적인 생활이 한데 잘 조화된 주택이 구현체라고 불려온 만큼 폴링워터는 미국인들에게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버금가는 미국인의 꿈, 신기술, 자유, 아름다움의 집약결정체이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 웨스턴 펜실바니아 보존소가 관리하고 있는 이 폴링워터 하우스의 보존관리 및 수리 예산액은 15만5천 달러 가량 된다고 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주로 돈많은 개인 갑부들이나 사업가들을 주 클라이언트로 상대하며 주문 주택 설계를 했다. 라이트가 요구하는 설계비 외에도 값비싼 고급 건축 자재 구입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던 고객들은 돈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생전 건축가로서 이루고 싶었던 꿈은 ‚유에소니안 하우스 (Usonian House)’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인의 집’ (US + -onian, 라이트는 미국을 유에소니언 (Usoni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이 조어가 뜻하듯 그의 유에소니안 주택은 평생 미국인들을 위한 저렴하고 민주적인 집을 지어 보급하고 싶다는 그의 한평생 꿈을 반영했다.
특히 그가 유에소니안 하우스로 제시했던 주택 디자인은 주로 ‚ㄴ’자 모양을 한 평면 구도 위에 콘크리스, 벽돌, 목재 합판, 창문용 유리 소재를 채용한 단순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흔히 시끌벅적한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들의 주택에 조용한 침실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ㄴ’자 평면도를 고집했고, 시공의 편의를 고려해서 표준화된 정사각형 콘크리트 벽, 상하수도 파이프, 난방용 파이프, 목재 실내벽과 뒷뜰로 난 유리창을 고집했다. 라이트의 그같은 이상이 담긴 유에소니안 하우스들은 지금도 위스콘신州의 매디슨市와 캘리포니아 곳곳에 50여군데 남아있다.
낭만적인 정신과 혁신과 합리적인 이성의 거장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70년에 걸친 건축가 일평생에 걸쳐 설파한 ‚유기적 건축’의 이상이란 인간의 지적 정신 세계를 통해서 걸러진 자연과 조화롭게 결합시킬줄 아는 건축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이상주의적이었다.
클라이언트의 키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건축 칫수를 자신의 몸칫수에 기준을 삼아 설계한 그만의 특유의 ‚휴먼스케일’에 대한 신념과 목재와 같은 자연적인 재료 외에도 건축 신소재와 건축 기술에 대한 강한 옹호 태도는 인본중심적인 르네상스적 예술 정신과 모더니즘적 신사고의 결합이라해도 좋을 것이며 그는 바로 그같은 정신에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찾았다.
클라이언트가 저급 취향의 집을 원할 때 어떻게 타협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프랭크 로이드는 이렇게 단언했다. „그의 취미가 아무리 모자랄지라도 유기적 이상에 기초하여 설계하면 반드시 탁월한 취향의 건축이 탄생하게 되어있다.“ 진정한 건축미란 주어진 공간과 특정 순간이 빚어 내는 것이지 보는자 개인의 취향으로 결정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Photos courtesy: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 이글은 본래 『공간사랑』 LG화학 사보 2005년 6월호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
3.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이준구입니다.
오늘 소개할 내용은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LIFE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미국의 건축가인데요!
향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셨는데요.
그가 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었는지 같이 알아봅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근대 건축으로 시작해서 생의 마지막에
는 현대 건축으로 나아가신 분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건축을 융합 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 건축물이 독자적 양식을 갖
추고 이 후 현대 건축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준 인물 중 한명입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르 코르뷔지에
또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유명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대립쌍으로
20세기 현대 건축의 양대산맥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그가 어떤
건물을 설계했는지 이쯤 되서 알아
볼까요? ㅎㅎ
구겐하임 미술관
이 사진은 바로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인데요. 규모가 어마어마 하죠.
죽기전에 가봐야 할 건축물 순위에
오를 정도로 어마어마 한 디자인입니다.
바로 사진에 보시는 것처럼 이 미술관의
설계자가 바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인데요.
이 디자인은 마치 달팽이 모양같다고
표현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1943년에
착공해서 1959년에 완공되면서 개칭했는데요.
일정하게 곡선으로 이뤄져 있고 건물 자체가
5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우아하고 현대적입니다.
그리고 미술관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도
나름 키포인트입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무조건 위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유리창으로 된 천정을 통해 보이는 하늘 빛이
메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가보지 못 했지만, 건축물이 너무
이뻐서, 미술 관람보다는 건축물에
매료 되서 앉아서 사진만 찍을 것
같습니다 ㅎㅎ
나선형 복도로 이어진 내부도 전체가
미술관이라는데요. 벽면에는 작품이
걸려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통 미술관은 직사각형으로
된 형태로 되있는데, 가운데가 뻥 뚫린
벽면 전체가 곡선으로 되있다고 하니,
직접 보고 싶을 정도네요..
다음으로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건축물은
낙수장 ㅎㅎ
폭포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해서 유명하죠~
낙수장(Falling water)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건축물입니다. 이름이
한국에서 지은 별장같이 보이지만,
낙수장은 영어로 'falling water'라는
이름입니다.
건축물 감상 가보실까요~
외부의 구조 뿐만 아니라
내부구조도 심상치 않는데요.
제가 실내인테리어 전공자다보니
인 바라보는 시야가 다른 것도 있고
정정하겠습니다. ㅎㅎ
건축물 자체가 주변과 이질감이
나지 않게 자연스러움의 자연과의
조화가 남다른데요. 현지의 돌을
그대로 겹겹이 쌓아 벽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바깥의 풍경을 그대로 들이기
위해 가로로 긴 창을 내고, 주변 바위
재질을 그대로 살려 바닥을 마감해 표현
했다고합니다.
이 사진은 낙수장을 처음 공사할 때
사진인데요. 정말 위험 위험하죠?
자연적 피해가 없게 폭포 위에서
정말 그대로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조금은 위험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기초가
불안정해 보여서 디자인 진행하기에도
힘들어 보이는데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문제에 대한 구조 보강을 지속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생각으로 해보자면,
바다위에 다리를 짓는 것 처럼, 다리는
건너는 이동수단으로 짓지만, 이것은
뭔가 자서전이 책으로 담겨 있다면,
유명한 건축가들은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낙수장은 국가에 귀속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예술작품이
되었습니다.
왜 국가에 귀속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됬을까요?
혁신적인 아이디어 였지만,
폭포소리에 잠을 재대로 잘 수 없었다고
합니다. 건축물적으로는 '미'가 있지만,
라이프스타일이죠.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
을 염두해두고 설계해야한다고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많은 건축물을 설계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대표ㅕ적으로 오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낙수장을 소개해드리면서
설명해 드렸는데요.
다음에도 재밌는 소개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좋은 하루되세요~
4.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20세기 건축계의 위대한 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5)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한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밝히시오”. 그러자 그 남자는 이렇게 답하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입니다.” 재판관이 어떻게 그런 답변을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소이다.” 그 남자가 바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이다.
라이트는 20세기 건축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이 지대했던 건축가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거장 건축가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그는 매우 독특한 양식의 건축 설계로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개인사로나 작품세계로나 시끌벅적한 논쟁과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2000년 미국건축가협회에서 20세기 10대 건축물을 선정했다. 그런데 그중 4개가 라이트의 건축물이었다. 그는 또 오늘날 시카고시가 건축의 도시로 찬사를 받게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871년 대화재로 폐허가 된 시카고 시의 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시카고를 현대건축물의 보고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사람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는 1867년 미국 위스콘신 주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위스콘신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가난한 집안이라 학비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한 불화로 아버지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라이트는 고학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1887년 시카고로 가서 근대건축의 선구자 루이스 설리번의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배웠다. 루이스 설리번은 현대 디자인에서 명언으로 평가받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말을 남긴 사람이다.
라이트는 1889년 시카고 근교의 오크파크(Oak Park)에 자신의 집을 짓고 건축가로서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는 여기서 첫 번째 아내와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이 집은 이후로 세 번의 증축을 거쳐 홈 앤드 스튜디오(Home and Studio)로 거듭난다.
이 시기 라이트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비롯해 1894년에는 독립사무소를 열어 본격적인 건축사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루이스 설리번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나아가 ‘시카고파’를 이끌면서 미국 건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시카고파는 1880년대 초~1900년대 초 미국 시카고에서 활약한 근대 건축가 그룹을 말하는데, 치장을 중시하던 기존 건축양식을 타파하고 단순하면서도 안정적인 철골구조와 넓은 유리창을 특징으로 하는 건축물을 만들었다.
한편, 라이트는 건축가로서 전성기를 보이던 1911년 기존의 오크파크 저택과 조강지처 부인을 버리고 위스콘신에 내연녀와 함께 살 새로운 저택 《탈리에신 이스트》을 지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애리조나에 《탈리에신 웨스트》을 세웠다. 그런 뒤 이 두 곳에서 제자와 함께 기거하면서 신예 건축가 양성에 힘썼다.
라이트는 일본과도 인연이 깊다. 1893년 콜럼버스의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일본은 호오덴 사원을 본뜬 전시관을 세웠는데, 라이트는 이때 처음 일본 전통건축을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후 일본 건축과 예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라이트는 1906년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일본의 예술과 동양철학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그의 작품에는 동양의 사상이 반영되기 시작했고, 실제로 《동경 제국호텔》과 《자유학원》을 설계하기도 했다.
동경제국호텔은 내진과 방화에 대비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을 도입하여 설계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예정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 그런데 호텔이 완공된 다음해인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동경의 많은 건물들이 붕괴되거나 화재에 휩싸였다. 그러나 제국호텔은 멀쩡했다. 이것은 건축가 라이트의 명성을 또 한 번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자연을 관찰하라. 자연을 사랑하라. 자연과 가까이 하라. 그런다면 자연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라이트는 이세상의 모든 구성물은 서로 내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으며 고립된 것은 없다고 보는 세계관 즉 ‘유기적 세계관(有機的 世界觀)’에 바탕을 둔 건축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건축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주변의 자연적 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건물은 상자와 같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실내와 외부 환경이 서로 넘나드는 열려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기본원리에 충실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이트는 현대건축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르코르뷔지에와 쌍벽을 이루며 비교된다. 르코르뷔지에는 도시와 기계를 찬양하며 대량생산에 의한 효율을 주장하면서 이후 모더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반면 라이트는 자연적인 건축과 환경적인 건축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라이트의 자연주의 건축철학이 가장 잘 반영되어 나타난 건물은 그의 후원자였던 에드거 카프만의 여름 별장인 《낙수장(Falling Water)》이다. 1939년 완성된 이 저택은 폭포 위에 지어져 자연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 20세기 위대한 건축으로 손꼽히는 이 건축물은 인간과 자연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인문학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대중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뉴욕에 소재한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이라 하겠다. 건축주인 구겐하임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술관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라이트는 그 요청을 훨씬 뛰어넘는 건축물로 화답했다. 미술관 건물 전체의 모습은 아래보다 상부가 넓은 달팽이 모양 내지 원통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라이트는 기존 맨하튼의 직선적인 건축 형태나 미술관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모두 깨트려 놓았다. 그동안 건축계에서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던 '평평한 바닥'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건물 전체가 경사면을 이용해 계단 없이 이어진다. 바닥과 벽, 천장이 함께 흘러가는 모양을 통해 공간과 구조의 유기적인 흐름을 추구한 것이다. 결국 라이트는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곡선과 연속적인 공간을 실현함으로써 향후 미술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건물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고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의 사후 반년 뒤에 완공되었다.
그런데 이 구겐하임 미술관 본관 이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미술관 분관이 있다. 다름 아닌 스페인 빌바오 시에 있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Guggenheim Bilbao Museum)》이다. 이 미술관은 프리츠크 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 수상자인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작품이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여타 다른 미술관과는 달리 전시된 작품보다도 미술관 건물이 오히려 더 유명하다. 미술관 자체가 설치미술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의 존재만으로 쇠락해가던 공업도시 빌바오가 한 해 100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변모하였다. 여기서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라이트는 40대에 이미 건축가로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며 건축주였던 친구 부인과의 스캔들로 인해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된다. 이후 건축가로서의 활동도 뜸해지고 20년 가까이 잊힌 건축가가 되어 갔다. 그래서 건축가로서 황금기라 할 수 있는 50대를 거의 공백기로 보냈다. 그러나 라이트는 이 어려운 시기를 처절한 자기반성과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연마의 시간으로 삼았다. 마침내 그는 60세 이후 세기적 걸작인 《낙수장》을 발표함으로써 화려하게 다시 일어섰다. 그로부터 연이어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걸작들을 발표하였다.
라이트의 사생활은 한마디로 자유분방했다. 바람둥이 기질과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향을 지닌 그는 쪼들리는 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빚을 내어 비싼 옷을 사 입고 고급 자동차를 몰면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그의 사생활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고객들이 그와의 비즈니스를 회피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라이트는 나이 42세가 되던 1909년, 20년 동안 같이 살며 6명의 자녀를 낳아준 조강지처 캐터린을 버리고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프랑스로 건너가서 자신의 고객인 사람 아내와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이 내연녀와 함께 버젓이 고향인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으로 돌아와서 둘이서 살 개인주택 겸 작업실을 지었다. 그 주택이 유명한 《탈리에신(Taliesin)》이다.
당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결혼은 인간의 굴레가 아니다. 사람이 개인적 자유와 결혼 생활의 노예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 간통은 세상과 맞서는 진실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위선적인 사회관습이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사생활에 얽힌 스캔들로 인해 주변의 비난을 받았고, 마침내 비극적인 사건까지 발생한다. 1914년, 그의 주택 겸 작업실인 《탈리에신》 관리를 맡고 있던 남자가 라이트의 내연녀와 아이들을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르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라이트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곧 바로 탈리에신 복구 작업에 나선다. 이 때 복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맡은 일이 도쿄의 제국호텔이다.
그리고 제국호텔이 완공되던 1922년 그는 첫 부인과 이혼을 하고 두 번째 아내를 맞게 된다. 그런데 1925년 기껏 복구한 탈리에신 주택이 또다시 불타 사라진다. 화재 당시 이웃 주민들은 화재진압을 돕기는커녕 라이트가 수집해 놓은 동양의 예술품들을 훔쳐갔는데, 그만큼 주변의 미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아내와도 결혼생활 5년 만에 이혼하게 된다. 이후 동유럽의 귀족 출신 여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으면서 모처럼 삶의 안정을 찾게 되고 이후 죽는 날까지 건축 설계 작업을 계속했다.
한평생을 논란 속에서 살았던 위대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걸작들을 남긴 채 92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왼쪽)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낙수장. 계곡 위에 지은 여름 별장으로 자연과 동화되는 유기적 건축에 대한 라이트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 Scott Frances/Esto
(오른쪽) 검은 중절모에 긴 타이, 검은 재킷을 즐겨 입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을 설계했다.
한 남자에게 재판관이 묻는다. “당신이 누군지 밝히시오.” 그러자 답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올시다.” 재판관이 어찌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가 답한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소이다.” 한번은 그 남자가 설계한 빌딩의 입주자가 물이 새어 책상 위로 떨어진다는 불평을 하자 그 남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책상을 옮기시오.” 그 남자가 바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이다.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신화적 존재다. 세상은 그를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데어로에, 발터 그로피우스와 함께 ‘세계 건축의 4대 거장’이라 부른다. 20세기 미국에 혁신적 주택을 만들어 인기를 얻었으며, 뉴욕에 구겐하임 뮤지엄이란 기념비적인 건축을 남겼다.
그는 1932년 자서전 를 발간하면서 출생 연도와 학력, 성장 배경, 일과 관련해 지어낸 이야기들을 교묘하게 섞어놓았다(그가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문서 보관소’가 문을 열고, 학자들이 그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자서전의 허와 실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축사에 남긴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신화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가면을 쓴 셈이었다. 그의 사생활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생계를 꾸려가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사치품을 수집한 그였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1993년 퓰리처상 수상 시인 폴 멀둔 Paul Muldoon이 대본을 쓴 오페라 <빛나는 이마>가 되었고, 2000년에는 한 편의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2000년 미국건축가협회에서는 ‘20세기 10대 건축물’을 선정했는데 그중 4개가 라이트의 건축물이었다. 낙수장,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 로비하우스, 존슨 왁스 빌딩이 그것이다. 올해로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이 설립 50주년을 맞이했다. 1943년에 설계하기 시작한 이 건축물에서 라이트는 수년 동안 자신을 사로잡았던 ‘조각과 같은 건축’을 구현해보았다. 이 건축물은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91세의 나이로 서거한 지 6개월 뒤에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탈리에신 주택. 프레리 주택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한쪽은 라이트의 집으로 한쪽은 스튜디오로 사용했다.
유니티 교회. 당시만 해도 실험적인 건축 자재였던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교회이다. 라이트 특유의 기하학 형태와 패턴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프뢰벨 블록으로 터득한 조형 원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기하학적이다. 컴퍼스・직선자・삼각자를 도구로 원, 사각형, 삼각형, 육각형 등의 패턴을 표현했다. 어린 시절 프뢰벨(독일의 교육가로 세계 최초로 유치원을 세워 유아교육에 앞장섰다)의 나무 블록으로 3차원 구성체를 만들며 조형 감각을 키운 덕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임신한 순간부터 방 안에 영국 대성당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아들에 대한 애정이 지나쳤던 어머니는 라이트의 일탈과 잘못을 눈감아주고 죽을 때까지 그를 곁에 두고 함께 살기를 바랐다. 반면 용모가 뛰어난 음악가이자 웅변가이며 설교자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어린 라이트에게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열심히 들려주었을 뿐이었다. 라이트는 그런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잘생긴 외모에 독서와 그림 그리기, 음악 감상, 물건 만들기에 소질이 있으며 잡동사니 수집가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읽고 모으고 탐닉했다. 지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낯선 것에 대한 흡수도 빨랐다.
대학에 다니던 그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현장에서 직접 배우겠다는 각오로 기회의 땅 시카고로 떠났다. 1871년 발생한 대화재로 도시의 70%가 불에 타버린 시카고에서는 재건 공사가 한창이었다. 1886년 무렵의 시카고는 건축을 실험하기 위한 세계적 중심지였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폼 잡기를 좋아한 라이트에게 시카고는 도전과 기회의 땅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몇몇 건축사무소를 전전하다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본격적인 건축 실무를 배웠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아름다움은 기능이나 형태에 내재된 것이다’ 같이 기능주의를 주창한 루이스 설리번. 라이트는 그의 사상에 ‘자연’이란 요소를 결합해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유기적 건축 organic architecture’이다. 자연과 하나 되는 건축이 진정한 건축임을 강조한 것. 이는 프랑스 모던 건축의 선구자 르코르뷔지에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이론과 대립했다.
위스콘신 주의 제이콥스 하우스.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이론을 대표하는 프레리 주택 양식을 이어받은 유소니언 주택.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제이콥스 하우스이다.
‘멋쟁이’ ‘바람둥이’ ‘천재’ 건축가의 오류 세기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범한 첫 번째 오류는 바로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스스로의 어두운 기억을 교묘하게 바꾸어놓았다는 것. 두 번째 오류는 무책임한 가장이었다는 것이다. ‘아빠’라는 소리를 싫어한 그는 자신이 가정적인 남자인 모습을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도 빚을 내어 스스로를 가꾸고, 미술품을 수집하고, 고급 자동차를 몰며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 아낌없이 썼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던 라이트는 항상 스카프, 중절모, 지팡이 등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그리고 건축 설계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유행에 휩쓸리는 법 없이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연출했다. 세 번째 오류는 사회적 통념이나 일반인이 생각하는 도덕성과 다른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1909년 마흔둘(그가 자서전에 기록한 나이로는 ‘마흔을 넘기지 않은 시점’)의 라이트는 생활고 속에 가족을 버려두고, 한때 클라이언트였던 사람의 아내와 함께 유럽으로 도주했다. 그는 이런 부정을 정당화하며 “결혼은 인간의 굴레가 아니다. 사람이 개인적 자유와 결혼 생활의 노예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 간통은 세상과 맞서는 진실이다”라며, 사회의 위선적 태도가 진정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언변은 거침이 없었다. 도전을 받을 때면 위험을 감수하고 쇼맨십을 발휘했다. 경제적 고비 앞에서는 능구렁이 같은 화법으로 대처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면 화려한 미사여구로 길게 서정적인 묘사를 하고, 근사한 약속들을 늘어놓아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겼다. 건축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던 시절 그는 숱한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녔다.
그런데도 세상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최고의 건축가, 건축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미국 대도시(특히 뉴욕, 시카고, 보스턴)의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데 기초를 닦은 루이스 설리번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손안에 든 좋은 연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라이트는 설리번에게는 열정적인 학생이었으며, 빠른 속도로 기술을 익혀 설리번의 특징적인 장식을 자신의 언어로 변형하기까지 했다. 설리번은 라이트에게 주택 설계를 일임했고 1890년부터 1892년까지 여섯 채의 주택을 지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국 주택 역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존의 미국 주택 양식을 전면 거부하고 파괴했다. 대신 휴먼 스케일에 입각해 각각의 공간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집을 지었다. 이것이 그가 말한 유기적 건축이었다.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이 오픈하던 날의 사진. 1959년 4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 후에 문을 열었다. 세계 박물관 건축의 기념비적 디자인으로 기록되는 작품이다.
(왼쪽)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 내부 모습. 전시장은 건물의 벽면을 따라 나선형으로 설계했다.
라이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내려오면서 작품을 감상하도록 설계했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지었다.
(오른쪽) 세 차례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던 탈리에신 주택. 그는 1952년 마지막 공사를 하며 여기에 극장을 만들었다.
20세기 오가닉 건축의 탄생 1911년 위스콘신 주 스프링그린에 지은 ‘탈리에신 Taliesin 주택’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유기적 건축론이 반영된 주택이다. 자연이란 유기체가 전체와 부분의 균형을 이루듯 땅과 환경 그리고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는 것, 그래서 마치 일체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유기적(오가닉) 건축이다. 탈리에신 주택에서 그와 제자들은 자연의 풍요를 누리며 주말이면 목초지에서 소풍을 즐겼다.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노동의 피로에서 해방되는 시간을 가졌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폐쇄된 공간을 싫어했다.
그의 유기적 건축의 출발점은 1900년대 초반에 지은 프레리 주택이었다. 프레리 주택에는 수입이 적은 사람을 위한 기본적이고 표준화된 주택, 좀 더 좋은 재료로 좀 더 특별하게 지은 주택, 고가의 맞춤형 모델로 완전히 수공으로 내부 장식을 한 주택의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프레리 주택은 1930년대의 유소니언 주택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제이콥스 Jacobs 하우스’가 있다. 단일 가족을 위한 주택으로 복제 가능한 설계에 건축비가 적당해 어떤 장소와 상황에도 맞춰서 지을 수 있다. 유소니언 주택은 미국 사회와 가정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수용해 중산층에서도 교육을 잘 받은 전문직 고객에게 인기를 얻었다. 유소니언 주택의 백미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건축한 에드거 카우프만의 여름 별장 ‘낙수장(Fallingwater House)’이다.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이 집은 자연과 최대한 가까이 살아야 한다는 거주자의 철학을 담아 계곡 위에 캔틸레버 cantilever 구조로 지었다.
그는 1949년과 1950년 두 해 동안 6백 건이 넘는 건축 설계를 의뢰받았다. 그의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는 1957년에 설계한 캘리포니아 주 산라파엘의 마린 주 청사였다.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그의 독특한 건축은 이렇게 세계 건축의 역사 속에 남았다. 한 건축평론가는 그가 시대에 맞지 않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고 평한다. 21세기가 되어서야 논란이 되고 있는 건축의 화두를 20세기 모더니즘의 초기부터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비평가는 불완전했을지라도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만 살아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건축계의 돈키호테’라 부른다.
탈리에신 웨스트. 애리조나에 지은 집으로 서쪽에 있는 탈리에신 주택이란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라이트는 1939년부터 매년 겨울을 이곳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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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국 건축의 아버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글 브루스 브룩스 파이퍼, 사진 마이클 프리먼, 폴 로쉴로, 옮긴이 이종인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보통 근대 건축의 4대 거장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로에, 알바 알토라고 한다.
"알쓸신잡"의 스타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그의 최근 저서 "어디서 살 것인가" 에서,
위 4강전에서 굳이 결승전을 만든다면 단연코, 라이트와 르 코르뷔지에 두 명이 올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확연히 다른 건축 스타일을 보여주는 이 두 거장의 진검승부에서 유현준 교수는 라이트의 손을 들어준다.
적어도 우리나라 건축, 인문학, 예능계를 아우르는 저명인사의 평가에 따르면 라이트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선정된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867~1959
물론 건축의 스타일이란 것은 개인적인 선호도의 문제도 있어, 저마다 지향하는 건축적 가치에 따라 그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의 평가는 건축물이 대지의 환경과 에너지를 얼마나 잘 이용하고 있는지를 검증한 결과였다.
유현준 교수는 건축물 자체를 바라보는 건축가의 태도(철학)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들 두 거장이 설계한 대표적인 "주택"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모든 건축의 줄기세포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주택"이고, "주택"은 한 건축가의 건축철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택에서 방을 늘린 것이 호텔이고, 거실을 확장한 것이 미술관, 혹은 전시장이 되는 개념이다.
낙수장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폭포와 어울리는 집 "낙수장"
VS.
물리학 법칙 같은 집 "빌라 사보아"
빌라 사보아 / 르 코르뷔지에 사진) 못된 건축 / 이경훈
두 건축가를 대표하는 위 주택 중 건축물이 자리한 대지와 더할 나위없이 어울리는 주택은 단연코 라이트의 낙수장이다.
빌라 사보아는 시·공을 달리해 다른 장소에 배치된다 해도 현재와 큰 차이가 없겠지만, 낙수장은 그렇지 않다.
낙수장이 계곡과 어우러진 폭포 위가 아닌 다른 장소에 건축된다면 건물의 기능과 디자인, 분위기, 무엇보다 낙수장이란 그 이름 차체가 어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빅 매치에서 낙수장의 승리는 라이트의 건축 철학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자연과 건축을 대하는 태도, 일종의 건축 철학의 승리같은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라이트의 건축 철학... 내가 라이트에 관한 책을 읽게된 계기였다.
집 주변에 자연이 펼쳐져 있다면,
집이 땅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게끔 만들고 주위 환경과 어우러지게 하라.
만약 주위에 자연이 없다면,
자연이 있었더라면 했을 법한 노력을 기울여 집을 조용하고, 튼튼하고, 유기적으로 만들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The Architect and the Machine" 1894.
이 책은 라이트의 건축작품을 시기적으로 5단계로 나누어 생생한 사진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건축주의 요구에 라이트의 건축철학이 융합하면서 유럽 건축과 다른 새로운 주택의 스타일이 정립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곧 미국의 건축이 되어갔다.
시카고 학파의 거장, 루이스 설리번에게 영향을 받으며 주택설계를 시작한 그의 초기 작품들부터 34명의 펠로우쉽을 이끌고 탤리에신 웨스트를 건설한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설계한 대표적 작품 25점이 수록되어 있다.
라이트의 주택은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거대한 조각이나 요새처럼 느껴진다.
웅장하면서도 편안하고, 단순하면서도 무척 정교하다.
주택 내부의 가구 디자인이나 창과 그 문양에 대한 디자인도 아름답고 정교하기가 놀라울 정도이다.
(라이트는 자연의 빛으로 내부 공간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창의 계획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잘 알려진 그의 대표적인 작품, 낙수장( 에드거 J. 카우프만 저택 / 1935~1939)은 4. 유소니아편에 소개되어 있고,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1943~1959)은 5.만년편에 소개되어 있다.
라이트의 건축을 느낄수 있는 내용과 사례를 몇가지 소개해 본다.
프레리 시절
1899 ~ 1910
라이트는 1867년 6월 8일 위스콘신 남서부의 작은 마을, 즉 중서부 프레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위스콘신의 대도시인 매디슨으로 이사하여 생활하다 잠깐의 시카고 생활을 거쳤지만, 1889년부터는 교외인 오크 파크에 정착하여 중서부 프레리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단순함 그 자체인 프레리를 본능적으로 사랑했다.
서로 대비되어 잘 어우러지는 나무, 꽃 하늘은 감동 그 자체였다.
프레리에서는 얼마 안 되는 높이도 실제보다 더 높아 보인다.
프레리에서 높이가 얼마나 심하게 확장되어 보이는지, 그리고 너비는 얼마나 축소되게 보이는지 주목하라.
<1936년 7월 라이트의 회상>
개인 사무실을 연지 6년 만에 라이트는 새로운 건축을 개발했고 그것은 주택 디자인을 확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주거의 새로운 패턴을 창조했다.
이 혁명적 디자인(프레리 스타일)을 바탕으로 지어진 오크 파크 인근의 십여 채 가옥들은 해마다 수천 명이 건축 매니아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38P)
주택 건축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라이트는 프레리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길고 낮은 선들로 이루어진 건축을 추구했고, 이는 특히 프레리에 잘 어울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하실과 다락방을 없애고 지붕의 라인을 고즈넉하면서도 우아하게 만들었다.
돌을 쌓는 매스를 넓고 넉넉하게 디자인하여 난방용 벽난로와 연도(굴뚝 길)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게 했다.
대좌(Stylobate)나 빗물돌림띠 위에 건물 일층의 벽을 바로 연결했는데, 이로 인해 거실이 지층보다 높이 위치하게 되었고 주택의 윤곽을 아주 분명하고 뚜렷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라이트는 어떤 주택이든 아늑한 대피소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낮게 옆으로 퍼진 지붕, 처마가 튀어나온 낮은 박공*, 전반적으로 낮고 평평해 보이는 구조를 고안하게 되었다.
(* 여기서는 박공지붕(지붕면이 양쪽방향으로 경사진 지붕/ gable) 의 약칭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땅과 평평하게 설계된 건물들은 땅과 일체감을 갖게 되었고, 건물이 자연스럽게 땅에 소속되게 도와준다.
수평적인 디자인이 강조된 윌리츠 저택
라이트가 설계한 프레리 주택들은 수평적인 디자인이 특히 강조되는데, 윌리츠 저택이 좋은 사례이다.
넓은 대지에 평평하게 자리잡은 이 저택은 건물의 수평성이 강조되면서 안정감있게 서있다.
대지와 견고하게 밀착되는 기단부(Stylobate)는 마치 건축물과 대지를 용접해 놓은 듯 견고한 인상을 준다.
외벽과 지붕사이에 클리어스토리(연속된 고창)를 설치함으로써 대지에서 올라오는 벽과 지붕이 맞닿는 곳에 완충공간을 형성한다.
완만한 경사로 길께 빼낸 박공 지붕은 보는이에게 편안함과 아늑함을 준다.
이른바 프레리 스타일의 대표작이다.
라이트의 공간을 채우는 빛(light)
공간을 채우는 햇빛을 중요하게 생각한 라이트는 클리어스토리를 사용하여 다양한 광원을 확보하려 애썼다.
광원이 단 하나뿐이어서 실내가 어둡게 되면 아름다운 공간을 창조한 노력이 쓸모없게 되기 때문이다.
(Clearstory : 지붕 밑에 한층 높게 창을 내어 채광하도록 된 창치, 중세 교회에서 유래하여 공장, 학교 따위에 쓴다.)
이 클리어스토리는 채색 유리를 통하여 낮에 햇빛을 보내 준다.
멋진 유리 창문을 갖춘 두 개의 식당 구역은 라이트 주택의 가장 멋진 특징 중 하나이다.
보인튼 저택의 경우, 아침 식사 알코브의 창문들 이외에도 꼭대기 조명 혹은 간접 천장 조명이 대형 식당 테이블 위로 빛을 보내 주고, 동시에 클리어스토리들도 더 많은 빛을 제공한다. (70P)
보인튼 저택
라이트가 디자인한 창문과 가구
식당 / 라이트가 디자이한 가구
낙수장 / Fallingwater - House for Edgar J. Kaufmann
1935 펜실베이니아 주 밀런
모든 위대한 건축가는 필연적으로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순간과 나날과 시대의 독창적인 해설가여야 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에드거 J. 카우프만 저택, <낙수장> 1935 펜실베이니아주 밀런
라이트의 대표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은 주택은 역시 낙수장이다.
자연과 어우러져 한 폭 그림처럼 폭포위에 지어진 집이라는 외관상의 경이로움도 크지만,
내리치는 폭포의 역동성과 물소리를 음악적으로 형상화 한 듯 엇갈리게 설치한 테라스와 발코니의 리듬감도 멋지다.
낙수장을 이곳에 짓기 전, 건축주인 카우프만씨의 가족들은 이곳 계곡으로 자주 소풍을 왔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한때 즐겨 올라 햇빛을 받던 폭포수 위 커다란 바위를 실내로 가져와 벽난로의 돌로 삼았다.
기존 폭포를 이루고 있는 바위와 조화되는 재료를 건축물의 외벽 재료로 사용하였고 내부에도 동일한 재료로 시공하였다.
낙수장의 이 모든 디자인들은,
자연을 존중하고 그 땅에 어울리는 유기적 건축을 지향하는 라이트의 철학을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낙수장 내부 / 자연의 바위를 벽난로 앞으로 끌어오다
낙수장 남쪽 입면
구겐하임 미술관 / 뉴욕
1943~1959
라이트는 "어떤 건물을 자신의 걸작, 최고 작품으로 꼽는가? "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꼭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다음 작품"
하지만 여러면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은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개념의 극치이며, 건축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평가할 것이다.
이 건물은 콘크리트와 강철을 창의적으로 사용하여 21세기의 건축을 미리 알리는 예고편이 되었다. (156P)
책 표지를 장식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시
구겐하임은 늘 라이트를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6년 후인 1949년 구겐하임이 사망하면서 미술관 디자인은 결정타를 맞았다. 미술관 재단 이사들은 그 건물의 아이디어에 불만이 많았고 레바이 다음으로 들어온 새 관장은 이 디자인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마침내 시공에 들어가기까지 라이트는 13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투쟁했다.
시공단계 - 1956년부터 1959년 그의 사망 시(개관 6개월 전)까지 - 에서도 그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오늘날 뉴욕시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은 1944년의 초창기 드로잉과는 아주 다르다.
건물의 전반적 개념 - 하나의 연속적인 램프 - 은 그대로 이지만, 부지 옆에 새로운 부동산을 사들이고 또 미술관 프로그램이 변경되면서 다른 건축 솔루션들이 도입되었다.
마침내 일곱 부의 완벽한 작업 도면이 완성되어 1956년 8월 16일에 기공식이 있었고 이어 건설공사에 들어갔다.
착공되기까지 무려 16년이나 질질 끈 이 공사는 라이트의 작품 중 가장 까다롭고 가장 시간이 많이 들어간 프로젝트였다.
1916년에서 1922년 사이에 태평양을 여러 차례 오가며 지은 일본 도쿄의 데이코쿠 호텔 공사 때에도, 건축가의 방식대로 건물을 짓기 위해 이처럼 투쟁, 분투하지는 않았다.
구겐하임은 자신이 좋아한 건물이 시공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떴다.
라이트 또한 이 건물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167P)
라이트의 입단면 스케치 / 트레이싱지에 연필과 색연필
나선형으로 연결되어 있는 내부 경사로
구겐하임 미술관은 관람객이 건물 안에 들어서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램프(경사로)의 제일 꼭대기로 올라가 천천히 편안하게 아래쪽으로 내려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램프를 따라 내려오는 그 어느 지점에서도 방문자는 자신이 아까 어디에 있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램프를 오르내리는 것이 싫으면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다시 갈 수가 있다.
실내의 서점에 들를 수도 있고, 아니면 카페에 갈 수도 있지만, 이미 걸어온 길은 다시 지나지 않아도 된다.
라이트는 건물의 벽들을 약간 뒤로 기울여 세우도록 설계했는데, 이는 벽에 걸린 그림들이 화가가 이젤 위에 올려 놓고 작업중인 그림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156P)
사무실 달력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
과천 현대미술관 /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램프를 옮겨왔다 사진) 못된 건축 / 이경훈
예술가의 사랑 / 다른 이야기
이름난 예술가의 여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 몹쓸 일인 것 같다.
이 책의 내용은 아니지만 라이트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이트는 결혼 생활중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인과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그의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예술가의 삶...
단지 삶에서 우연히 전개되는 병행사건인지도 모르지만, 예술가들은 사랑을 그들이 가진 예술성과 창조성의 원천으로 삼는 듯하다.
말년에 알게된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작품 세계가 더욱 풍성해지고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인류의 문화예술사적 측면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용량이 정해져 있는 프린터 카트리지 같다. (비판이 아닌 느낌)
작품 하나에 사랑 하나, 작품 둘에 사랑 셋... 인쇄를 계속 하기 위해서는 바닥난 잉크를 교체해 주어야 한다.
어쩌면 그들은 예술의 연장(롱런)을 위해 본능적으로 사랑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가끔 들곤 한다.
스마트폰이 항상 와이파이 네트웍을 찾는 것처럼...
피카소, 이응노, 라이트...
그리고 특이하게 그 반대적 입장의 괴로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리다 칼로 까지.
상황은 좀 다르지만 묻어둔 첫사랑으로 잉태된 백남준 선생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기사도 인상적이다.
포스팅 마지막 사진에 그의 작품이 보여 기사를 링크해 본다
출 처 : 프롭매니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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