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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건축가 -011. 미스 반 데어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

 

1.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출생  : 1886. 3. 27, 독일 아헨
사망  : 1969. 8. 17, 미국 시카고
국적  : 독일/미국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 Deutsche Bundespost Berlin/wikipedia | Public Domain

 

우아하면서도 단순한 그의 직선적 건축양식은 1920년대말에 등장한 국제주의 양식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건축사에 혁명적 공헌을 했던 미스의 중요한 초기 작품들 가운데 프리드리히가 사무용 건물(1919)과 유리 마천루(Glass Skyscraper:1921)는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그 도면이 남아 있다.

후기 작품으로는 필립 존슨과 함께 설계한 뉴욕 시의 시그램 빌딩(1958)과 그의 마지막 작품인 베를린의 20세기 미술관(1968 준공)이 있다.

초기생애

루트비히 미스(그는 건축가로 기반을 잡았을 때, 어머니의 성인 반 데어 로에를 이름 뒤에 덧붙였음)는 유럽에서 가장 큰 역사적 도시의 하나이며 한때 카롤링거 왕조의 문화 중심지였던 독일의 아헨(또는 엑스라샤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으로 작은 가게를 갖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다양한 건조물 제작에 참여했으므로 재료의 성질에 대한 감각과, 건축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숙련된 기능을 갖게 되었다. 미스는 정식 건축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 그는 이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 듯하다.

15세 때 아헨의 여러 건축가들의 견습공이 되어, 벽에 꽂아놓은 커다란 갈색 종이에 르네상스 장식을 목탄으로 스케치하는 일을 맡았는데, 석고제작자들은 그 스케치를 바탕으로 석회 장식벽을 만들었다. 미스는 이것을 힘들어했지만 덕분에 드로잉 솜씨가 늘었고, 이 솜씨는 결국 그당시의 가장 훌륭한 건축도면들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19세가 된 미스는 베를린의 한 건축가 밑에서 일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는데, 이 건축가는 목조 건축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목재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을 느낀 미스는 곧 그 일자리를 그만두고 당시 아르 누보 양식으로 작업하던 가구 디자이너인 브루노 파울의 견습공이 되었다. 2년 뒤에 미스는 첫번째 주문을 받았다. 전통적인 교외 주택을 설계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이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진보적인 건축가였던 페터 베렌스는 그의 완벽한 솜씨에 깊은 인상을 받고, 21세의 미스를 자기 사무실에서 일하게 했다.

그무렵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도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막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베렌스는 독일공작연맹의 주요회원이었기 때문에, 미스는 그를 통하여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옹호하던 예술가와 장인들의 단체인 이 연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독일공작연맹은 윌리엄 모리스와 존 러스킨에 의한 영국 미술공예 운동에 자극을 받아 창설되었다.

그러나 모리스가 산업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거부감에서 중세의 장인정신을 되살리려고 애쓴 반면, 독일공작연맹은 역시 똑같이 낭만적인 열정으로 우상을 숭배하듯 과학기술을 환영했다. 필요한 것은 기계로 만든 물건(또는 건물)에 형태와 의미를 주는 것뿐이라고 독일공작연맹의 대변인은 선언했다. 산업시대에 걸맞게 새롭고 '기능적인' 이 구상은 결국 '총체적 문화'(Gesamtkultur), 즉 완전히 개혁된 인위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범세계적 문화를 낳게 되었다.

끊임없이 그리고 종종 이상화되어 논의된 이 개념은 계획이라기보다는 이상이자 신념이었다. 이 신념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건축의 '근대화' 운동을 이끌었다. 건축사가 헨리 러셀 히치콕과 건축가 필립 C. 존슨은 1932년에 출판한 〈국제주의 양식 International Style〉이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건축양식을 '국제주의 양식'이라고 이름 지었다.

베렌스는 감각적인 물결 모양의 아르 누보가 독일공작연맹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고 아르 누보 대신 19세기초의 독일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순수하고 대담하며 단순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강철과 유리로 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베를린 모터 공장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독일 대사관(1911)을 비롯한 베렌스의 많은 작품들이 미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총체적 문화'의 건축을 추구하는 미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사람은 베렌스가 아니라 싱켈이었다. 미스는 평생 동안 싱켈의 건축이 갖고 있는 우아한 명쾌함이야말로 인간이 새로 이룩해야 할 환경의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또 한 사람은 네덜란드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헨드리크 페트루스 베를라헤였다.

베를라헤는 유럽 전위 예술가들을 그토록 감동시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미국 주택을 실제로 목격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베렌스는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인 H. E. L. J. 크뢸러 부인의 대저택을 짓기 전에 나무와 범포로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모형 주택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미스를 네덜란드 헤이그로 보냈고, 미스는 그곳에서 베를라헤를 알게 되었다.

미스는 거기에서 1년을 머물렀는데, 그것은 크뢸러가 베렌스의 설계에 만족하지 못하여 미스 자신의 설계를 새로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베렌스의 것보다 우아한 미스의 설계도 역시 건설되지 않았지만, 미스는 네덜란드에서 지내는 동안 베를라헤의 작품과 철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베를라헤의 작품은 미스에게 벽돌에 대한 애착을 불러일으켰고, 네덜란드 거장의 철학은 미스에게 '건축의 본질'과 '구조적 정직성'에 대한 신념을 불어넣었다.

나중에 미스는 시카고에서 건축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건축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건축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고 말하곤 했다. 미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구조의 정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눈에 띄게 드러나거나 극적으로 과장된 기둥이 아니라 실제로 건물을 떠받치는 구조물을 자기 건물의 중요한 특징으로 삼았다.

중기생애

독일 제국에서는 대학 졸업자만이 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미스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병으로 복무하면서 발칸 반도에서 다리를 놓거나 도로를 포장하는 일을 했다.

그가 1918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근대화 운동에 저항한 독일 제국은 패전으로 무너져 있었고, 나라는 온통 굶주림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혁명의 혼란 속에는 새로운 희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희망은 모든 예술가와 지식인을 사로잡아 새로운 창조력의 거대한 폭발을 불러일으켰다. 바우하우스(바이마르에 갓 설립된 조형예술학교)의 선언문에 따르면 건축·그림·조각은 새로운 표현양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좀더 다양하고 국제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림과 조각이 건축에 그토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적은 일찍이 한번도 없었다. 건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허무주의적이고 성상파괴적이며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시각예술 및 문학운동이었던 스위스 취리히의 다다이즘, 직4각형과 원색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기하학적 추상운동인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 그리고 러시아의 그림과 조각 분야에서 일어난 비구상적 추상 운동인 구성주의와 절대주의 등이 있다.

미스는 이같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별로 사교적은 아니었지만, 11월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11월의 그룹). 이 그룹은 1918년 11월에 일어난 독일혁명을 기념하여 이름 지은 것이다. 그는 근대 건축의 개념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애쓰는 체너 그룹에 가입했으며, 〈G〉(독일어로 '조형'이라는 뜻의 'Gestaltung'의 머리글자)라는 잡지의 창간에 참여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많은 이론적 계획안을 이 잡지에 발표했으며, 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실제로 짓기 위해 설계된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이 시기에 그가 설계한 중요한 건조물인, 살해당한 공산주의 지도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헌정된 표현주의적 기념물(1926)은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시기에 미스가 설계한 주요작품들은 건물로 설립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련의 도면과 스케치에 묘사된 이론적 설계안들은 그의 후기 작품의 전체적 범주를 미리 잘 보여준다. '프리드리히가 사무용 건물'은 유리로만 이루어진 건물을 짓기 위한 최초의 계획안이며, 미스는 이를 통해 '뼈대와 외피뿐인 건축'의 원칙을 확립했다.

'유리 마천루'는 이 개념을 곡선 형태에 적용하여, 건물 정면이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설계도들은 둘 다 극단적인 단순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밖의 이론적 설계안들은 콘크리트와 벽돌 건축의 가능성과, 데 스테일의 형식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개념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탐구하고 있다. 실제로 지어지지 않은 채 도면에만 남아 있는 작품들 가운데 그만큼 착상이 다양하고 건축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은 거의 없다.

이 영향은 1927년 독일공작연맹이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바이센호프에서 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미스는 그무렵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이 되어 있었는데, 이 전시회는 미스가 설계한 시범주택단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를 비롯한 유럽의 주도적인 근대주의자 16명이 이 시범주택단지를 위해 총 33채의 다양한 주택과 아파트 건물을 설계했다. 무엇보다 바이센호프 전시회는, 전쟁 직후에 생겨난 다양한 건축학적 조류가 이제는 하나의 운동으로 통합되어 국제주의 양식으로 탄생했음을 보여주었다. 국제주의 양식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양식이었고, 그 영향으로 유럽의 상류층은 갑자기 현대적 저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미스가 체크의 브르노에 지은 투겐트하트 저택(1930)도 그중 하나였다.

저택을 지을 여유가 없는 지식인들은 미스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마르셀 브로이어, 디자이너인 마르트 슈탐이 전시한 새로운 철제가구와 실내장식품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독일공작연맹의 사회적 목적을 촉진하는 데에는 거의 이바지하지 못했다. 값싼 조립식 주택과 공장에서 생산하도록 설계된 작품 가운데, 실제로 조립되거나 대량생산된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설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식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부족한 데에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산업은 '양에서 질로, 양적 팽창에서 질적 내실 쪽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하면 '산업과 과학기술이 사상 및 문화의 힘과 결합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과학기술과 문화는 '독일 전시관'('바르셀로나 전시관'이라고도 함)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 전시관은 사실상 품질과 사상 및 문화의 건축학적 진술이라고 묘사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이 전시관은 독일 정부가 1929년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국제 박람회를 위해 주문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로 53. 6m, 세로 17m인 트래버틴(온천 침전물로 만든 건축 재료) 바닥 위에 크롬으로 도금된 강철 기둥을 세워, 일부는 얇은 지붕을 덮고 일부는 지붕이 없이 노출시킨 연속적인 멋진 공간을 이루는 전시관 자체만이 전시되었다. 공간은 벌꿀 빛깔의 마노와 초록빛 티니아 대리석 및 서리무늬의 판유리로 이루어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는 게오르크 콜베가 조각한 누드상을 놓은 풀장 하나와 미스가 이 전시관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유명한 의자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바르셀로나 의자). 이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며, 게다가 평범한 예술이 아닌 사치스러운 예술이었다.

1930년 미스는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바우하우스는 원래 바이마르에 있었지만, 1925년에 그로피우스가 데사우로 옮겨왔다. 밖에서는 나치가 공격해오고 안에서는 좌익계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와중에 학교는 언제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스는 행정가의 재능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엄격하면서도 훌륭한 스승으로, 곧 학생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한 학생은 집에 보내는 편지에, "미스는 우리를 훌륭한 건축가로 만들지는 않는다 해도, 최소한 훌륭한 건축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것입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나치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학교들을 폐쇄하자, 미스는 베를린의 비어 있는 전화 공장에서 개인적으로라도 학교를 계속 운영하려고 몇 달 동안 애썼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국가에서의 근대적 디자인은 정치적 자유와 마찬가지로 설 자리가 없었다. 미스는 나치가 학교를 폐쇄하기 전에 스스로 바우하우스의 종말을 선언했다.

후기생애

미국에서의 활동

그후 4년간 많은 설계도를 그렸으나 실제로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37년에 미스는 미국으로 갔다. 바우하우스에서 미스를 만나 열렬한 옹호자가 된 필립 존슨의 주선으로, 그는 와이오밍 주에 교외 주택을 설계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설계도 역시 도면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제 건축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미스는 미국으로 이주한 직후, 시카고 아머 학교(나중에 일리노이공과대학이 됨) 건축학부를 이끌 사람을 찾고 있던 건축가 존 홀러버드를 만났다. 미스는 건축학부를 맡는 조건으로 '완전한 재량권과 연봉 1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는 재량권은 얻었지만, 연봉은 요구한 것보다 적게 받았다. 1958년 그가 은퇴할 무렵, 이 학교는 미스가 직접 설계한 캠퍼스뿐 아니라 잘 통제된 교육방법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교의 다양한 용도에 맞게 쓰일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건물의 특징은 입체적 단순함이었다. 드러나 있는 철재 골조물, 교정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커다란 유리창, 그리고 황갈색 벽돌 등이 이 건물에 사용된 기본 재료였다.

미스가 정년 퇴직한 해에, 필립 존슨과 공동으로 설계한 뉴욕 파크가의 시그램 빌딩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외부가 유리와 청동 및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초고층 사무용 건물이었다. 국제주의 양식은 이 건물로 인해 절정에 이르렀고, 미스는 국제주의 양식을 선도하는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재료와 과학 기술의 진보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것은 옛날 독일의 '총체적 문화'라는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졌다. 불과 8년 전만 해도 〈하우스 뷰티풀 House Beautiful〉이라는 잡지는 미스가 미국에 온 직후에 지은 건물들(특히 일리노이 주 플레이노에 에디스 판스워스를 위해 지은 집)을 미국 생활방식에 대한 사악한 위협이라고 비난하여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당혹감을 대변했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주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빈정대기까지 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타임 Time〉지와 〈라이프 Life〉지 및 〈포춘 Fortune〉지의 발행인 헨리 루스는 이제 "20세기 건축 혁명이 완수되었고, 그 혁명은 주로 미국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했다. 미스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구상한 설계도를 대부분 실현한 유리상자형 건물이 미국 전역을 넘어 세계 전역에 잇따라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과 취향의 흐름은 곧 방향을 바꾸었다. 강철 골조와 유리벽은 더이상 건축학적 독창성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종말처럼 여겨졌다. 젊은 세대의 근대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앞날이 촉망되는 에로 사리넨은 "우리는 우리 건축의 지평을 탐구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르 코르뷔지에와 겸손하게 손을 잡고,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배척한다. " 미스의 충실한 제자였던 필립 존슨마저도 오로지 단순함만을 추구하는 스승을 떠나 좀더 낭만적인 역사주의 쪽으로 돌아섰다.

 

후기 활동

미스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1920년대에 전개한 신념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 신념에 따른 아름다운 건물들을 창조하느라 평생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가 후기에 설계한 작품으로는 시카고 아파트 건물(1949, 1951), 디트로이트의 주택단지인 라페이에트 파크(1956~63), 볼티모어의 사무용 건물인 원 찰스 센터(1963), 휴스턴의 박물관(1958), 시카고의 페더럴 센터(1964), 워싱턴 D. C. 의 공립도서관(1967) 등이 있다. 그러나 모든 건물 가운데 미스의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서베를린에서 1968년에 준공된 20세기 미술관(나중에 신국립미술관으로 개명)이었다.

큰 몸집으로 관절염을 심하게 앓게 된 미스는, 그의 전기를 쓴 피터 블레이크가 표현했듯이, 그 자신을 기념하여 제작된 화강암 조상처럼 보이게 되었다.

1930년에 이혼한 그는 시카고의 미시간 호 근처에 있는 낡고 널찍한 아파트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 그의 사무실은 집 근처의 낡은 창고 건물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파울 클레의 그림들을 아꼈고, 값비싼 여송연을 피웠으며, 우아한 옷을 입었고, 독일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그는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그가 친절하고 조금도 잘난 체하지 않으며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즐겨 회상하곤 한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건물들이 차갑다는 비난에 대해, "우유라면 차갑거나 따뜻할 수 있지만 차가운 건물이나 따뜻한 건물은 있을 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는 '월요일 아침마다 새로운 건축을 창조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건축에 대한 개개인의 주장, 즉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기념비에 불과한 모든 양식을 경멸했다. 미스는 인간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건물을 짓고자 했다. 또한 건축이란 "한 시대의 의지가 공간으로 옮겨진 것으로 그러한 공간은 살아 있고 항상 변화하며 새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미스는 자신을 그 의지를 수행하는 도구 이상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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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탐구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출처 : 위키백과

근대 건축의 개척자

모더니즘의 아버지, 미스 반 데어 로에

르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더불어 20세기 건축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극적인 명확성과 단순성으로 나타나는 주요한 20세기 건축양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의 건물을 "피부와 뼈(Skin and bones)"건축으로 불렀으며, 최소한의 구조 골격을 포함한 거침없는 열린 공간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을 설계하기 위해 위해 노력했다.

성장과정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아버지는 석공이었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부친의 공방에서 돌을 가지고 놀며 성장했다. 이런 그에게 돌과 자연은 매우 친숙한 존재였으며, 이 시기에 그는 기와나 벽돌을 정확히 쌓는 방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순수한 형태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집착과 재료 사용에 대한 신중한 배려는 이러한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독일 문명의 최고 중심지인 아헨(Achen)에서 성장했다. 아헨은 네덜란드의 국경에 가까웠고, 주민들 역시 네덜란드인 특유의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미스 반 데어 로에도 이와 같은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것을 뒤바꾼 1차 세계 대전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정규적인 건축 교육은 받은 적이 없으며, 스투코 장식, 목조 건축, 가구의 직공 일을 배우며 1907년에 독립했다. 이후 초창기 근대 건축의 거장인 페터 베렌스의 스튜디오에서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르 꼬르 뷔지에 역시 페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점차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으며, 어엿한 건축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초기 건축은 전통적인 독일식 양식으로 설계한 고급 주택이 주를 이루었다.

베르너 하우스, 베를린 1913. 출처: LDA

전통적인 주택들을 설계하면서도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전위적인 사상을 계속 접하고 있었던 그를 바꾼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 역사적 큰 사건을 겪은 후 그는 고전 양식을 버림과 동시에 새로운 이론과 형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강철과 유리라는 새로운 재료와 공법에 대해 연구하게 된다. 이러한 건축 사상들이 지금 우리가 아는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는 당시 복잡했던 건축 양식의 벽돌과 장식들을 제거하여 단순한 구조의 건축물을 설계하고자 했고, 이는 단순함과 간결함이 극대화된 현대 건축 양식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바로 아래 사진인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이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출처: 나무위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위 건축물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해 있으며,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 박람회에서 독일관으로 개관했던 곳이다. 이 건축물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던지, 박람회가 끝나고 철거되자 이 특이한 건축물과 관련된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전설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후 1986년 건축사적 의의를 인정받아 바르셀로나에 다시 복원되어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어쩔 수 없는 미국행

1929년에 시작되어 1939년까지 이어진 전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인해 일감이 점차 줄어들자.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친구이자 경쟁자인 발터 그로우피스의 요청으로 1930년 바우하우스의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집권 후 그의 양식이 '독일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으며, 나치당의 정치적 압박이 계속되어 1933년 바우하우스는 문을 닫게 된다.

1937년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게 되고, 그를 받아준 곳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엄청난 환대를 받았으며, 시카고의 아머 공과 대학(현재는 일리노이 공과 대학, 이하 ITT)의 건축학부장을 맡게 되었고,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음과 동시에 독일 국적을 버리게 된다(그가 ITT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한국에서 건축을 배우러 유학을 간 학생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맨 마지막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그는 재직 기간 동안 크라운 홀이라는 건축물을 짓게 된다. 크라운 홀 내부 공간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고, 외벽에만 8개의 기둥이 있는 구조이다. 이 건축물은 미스 반데 로에의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들 하지만 공간이 지나치게 커서 냉난방을 하는데 매우 비효율적이며, 통유리를 통해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게 되는 등 실용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크라운 홀, 출처: 위키백과

이후 그는 형이상학적 건축의 완결판이라고 칭송받는 주택, 판스워스 하우스를 짓는다. 이 건물은 철과 유리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재료로 건축적 미학을 완성했으며, 건물의 구석구석을 잘 다듬어 완벽하게 탈물질화된 구조를 만들었다.

판스워스 하우스, 출처:핀터레스트

또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 주택에서 완성한 철과 유리의 미학을 통해 건축, 나아가 향후 세계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게 된다. 1958년 완공된 뉴욕의 씨그램 빌딩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최초로 건물 전체를 유리로 덮는 시도를 한 커튼 월 방식으로 지은 건물이며, 현대적 고층 건물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다.

시그램 빌딩, 출처: 위키백과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이론은 근대건축운동에 있어서 매우 광범위하게 응용되었으며, 현대건축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공간에 생명을 주려는 그의 끊임없는 열망은 그를 점차 건축적 표현에 몰두하도록 만들었고, 모든 형태가 극도의 순수성을 성취하도록 했다. 그의 유명한 문구인 "Less is more(적을수록 좋다)"이 말해주듯 그는 미니멀리즘의 대표자로서 평생 건축의 기초적 진리를 추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순수한 형태와 비율을 표방했다. 오랜 세월이 흐린 지금도 그의 작품은 단순하지만 절제된 미를 보여주며, 많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반 데어 로에가 ITT에 재직 중일 때 머나먼 한국에서 유학을 간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이자 건축 역사에 초석을 놓으신 김종성 선생님이다.

1956년 크라운 홀 앞에선 김종성.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김종성 기증)

 

그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특히 <라이프>와 같은 미국의 간행물을 통해 미국의 교육제도와 생활, 사고방식을 느끼며,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외국 서적을 파는 책방에서 건축과 관련된 책을 뒤적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ITT의 학과장으로 영입되었다는 소식부터, 그가 디자인한 첫 건물인 금속 연구동의 사진을 보게 된다. 이후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에 매료되어 ITT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실천으로 옮겨졌고, 머나먼 타국에서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교육 방식에 놀라며, 열심히 학업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대학원 진학과 동시에 미스 반데 로에의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학업과 실무를 병행하게 된다.

김종성은 건축의 기본과 본질을 중시하는 스승의 건축 철학을 소화하여 단순한 형태, 절제된 비례, 섬세한 디테일을 구사하며 시간이 흘러도 질리지 않는 건축의 표준을 보여줬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9년에 완공된 SK 서린사옥이다. 160m 높이의 이 사무용 건축물은 외관이 단순해 보이지만 내부를 보게 되면, 낭비되는 공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창문 크기와 배열의 비례가 매우 안정적이라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클래식한 멋을 보여준다.

SK서린빌딩. 출처: 나무위키

이와 같이 높은 건축물을 흔히 '마천루'라고 한다. 현대 사회에서 마천루의 이미지는 네모반듯한 형태로 높게 솟아 있고, 건물 전체 유리로 감싸진 모습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마천루의 형태의 원형이 바로 앞서 설명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 빌딩'이다. 이러한 마천루 스타일은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면서 '도시의 풍경을 획일화하여 모든 도시를 똑같이 보이게 했다'라며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는 모더니즘에 입각한 초고층 건물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보편적일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네이버 지식백과 미스 반 데르 로에

· 나무위키 미스 반 데르 로에

· 윈디의 세상보기 블로그

https://blog.naver.com/cc1989/220658072478

· 라페스탕 블로그

https://blog.naver.com/drawdesign_00/222795849059

· 윈디의 세상보기 블로그

https://blog.naver.com/cc1989/220658072478

· 고정희의 서양정원사 백과

https://garden-history-lexicon.com/

· 태이불교 디자인 건축이야기 블로그

https://blog.naver.com/shim4707/222412995867

· 디자인프레스 [Oh! 크리에이터] #242 건축가 김종성 vol.2 1935년생, 미국과 미스를 만나다

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2590161498

· 191204. 겉면에 두른 유리, 네모난 모양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시작, 전종현 디자인 건축 저널리스트 컬럼

 
출처
 
디자인 스튜디오 LAB904
 
 
 
 
 
 
 

 

 

3. 바르셀로나 바빌리온 주택 설계자료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이하 미스)"가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 박람회 독일관으로 설계한 건물입니다.

 


현재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몬주익 매직분수(Magic Fountain of Montjuïc) 좌측 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미스는 "Less is more"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보통 '미니멀리즘'이라고 말하지만 "Less is more"라는 말 자체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최소한의 것만으로 배치된' 그의 작품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미스는 다양한 기록을 남겼는데요.

"우리는 진리의 핵심을 알아야 한다.
사물의 본질을 묻는 질문만이 의미가 있다.
한 시대가 이 질문에 대해 찾은 답이
곧 그 시대가 건축에 할 수 있는 기여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 1961년

 


미스가 남긴 이 말을 단편적으로 이해한다면 미스가 추구한 것은 이런 것이 되지 않을까요?
건축의 "본질"만을 남긴 최소한의 것들이 표현해내는 것들이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파빌리온은 최소한의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평한 지붕과 지붕을 받치는 8개의 크롬 기둥 그리고 7개의 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파빌리온 평면도(출처 : 건축사신문 http://www.anc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923)


아래 사진은 광장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조금 더 다가가 보겠습니다.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건축가인 가우디는 "자연에는 직선 따위는 없다"는 말로 극단적인 자연주의를 추구했다면 미스는 어쩌면 가우디와는 전혀 다르게 최소한의 직선을 선택합니다.

 가우디와 아치
 가우디 - 카사 바뜨요(Casa Batlló)
 가우디 - 카사 밀라(Casa Milà)

미스는 전원에 있는 건물은 흰색, 도심 속의 건물은 흑색 계열로 거의 통일해서 사용합니다. 아마 자연속에 있는 건축물은 흰색을 사용하는 것이 계절이 변화면서 나타나는 풍부한 느낌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미스가 최소한의 본질적인 것만 남겨 놓는 미니멀리즘의 성격이지만 남겨 놓은 최소한의 것들은 빼어난 디테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입구에서 보이는 청록색의 대리석도 그렇지만 내부에 보이는 크롬 기둥도 그렇습니다.

 


내부에 사용된 크롬 기둥은 십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냥 사각형 기둥이었다면 밋밋했을 기둥이 빼어난 디테일로 건축미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십자형 크롬 기둥의 디테일
 

 


 건축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 : 벽
건축에서 최소한의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미스는 아마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방으로 트인 공간이라면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이 무한대일 것이고 어떤 질서도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무한의 공간에 벽을 대고 막으면 인간의 행위는 그 벽으로 인해 가능성의 제한이 생깁니다. 그리고 공간에 질서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차단하는 벽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벽을 열어서 개구부를 낸다면 공간이 새로 열리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겠죠.

지붕도 하나의 벽밉니다. 벽과 같이 차단하는 것이 되니 미스는 이 벽들의 조합으로 생성되는 공간의 가능성을 보고자 한 것이겠죠?

 

 

 


그런데 사방을 벽으로 막아버리면 우리가 기존에 익히 알고 있는 상투적인 공간이 됩니다. 그런데 파빌리온은 막혀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벽으로 막은 부분이 있지만 항상 열려 있습니다.

 

 

 

 


여기서 프리츠의 해석을 빌리면 미스가 추구한 새로운 성격의 건축공간은 “열린 공간 조형”입니다. 프리츠의 언급을 인용하겠습니다. 꾸밈없는 언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 프리츠 노이마이어 지음/ 김영철·김무열 옮김/ 동녘


"
 “열린 공간 조형”은 “가두는 공간이 아닌 보호하는 공간”의 창조였다. 이 공간은 자유와 은신을 동시에 원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미스는 이 공간 개념을 바르셀로나 파빌리언에 이은 투겐타트 주택에서 순수하게 이상적으로 표현했다. 1931년 발터 리츨러는 투겐타트 주택이 “전형 새로운 유형의 공간을 발전시켰다”고 하면서, 이 공간은 “한눈이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어떠한 기본 형식도,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어떠한 경계도” 없다고 했다. 이 주택의 공간적인 특징은 개방과 폐쇄라는 모순된 공간의 속성을 균형 있게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간의 체험에 있어서 이 두 방향 모두를 지향하여 각각 개방성이나 폐쇄성을 고유한 공간의 가치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공간의 대립적인 가치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공간 구조의 비밀은 각각의 원형이 갖고 있는 양의성에 있다. 미스는 투겐타트 주택에서 주택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시도했다. 여기에서 주택은 하나의 방이면서 동시에 세계였고, 은신을 위한 보호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계를 향해 열린 장소였다.
"

선뜻 이해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지만 내부의 어느 곳에서는 내부공간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외부벽체와는 달리 내부벽체에는 황갈색의 줄마노 석재의 색상이 인상적입니다.

 

 

 

 

 


뒷뜰에서 뒤편을 바라본 전경입니다.

 


내부에서는 큰 창으로 외부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사진의 계절이 겨울이라 나무들이 앙상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면서 자연은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럼 최소한으로 배치된 열린 공간은 자연과 함께 더 풍부한 감흥을 만들어 낼 수 있겠죠. 이것이 "Less is more"의 한가지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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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티스토리 - 건축저장소 © Magazine Lab

 

 

 

 

 

 

 

4.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독일 에서 태어났습니다
미스의 아버지는 석공이였고
그 덕분에 어린시절부터 시골의 작업장에서
돌을 만지며 놀았다고 해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건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베를린으로 이주 한 뒤
근대 건축가 페터 베렌스의 스튜디어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이나 학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재능은 인정받았고 곧 뛰어난 건축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미스는 초기에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사상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통적인 주택들을 설계하는데
그쳤다고 해요
 
이러한 미스의 건축양식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것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이였다고 합니다
 
이 세계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던 낡은 사상은
빠르게 진보적인 사상으로 채워지게 되었고
이는 곳 미스의 건축 양식에도
큰 변화를 불러 일으킨 것 입니다

 

 

 

때문에 미스는 지금까지 사용했었던
고전적인 양식들을 버리면서
단순히 새로운 이론과 형태만을 생각한 것이 아닌
강철과 유리라는 새로운 재료 그리고 공법을
폭 넓게 연구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은 미스가 1920년대 제시한
빌딩의 모형 입니다

 

 
 

1920년대의 다른 고층빌딩과 비교해 본다면
정말 충격적인 비주얼이 아닐수 없죠??      

 

 
 

이 건축물은 철골구조 만이 서있는 듯한 투명함
그러면서 주변을 반사하여 새로운 물질감을 나타내는 유리면
기존의 육중한 건물과 비교하면 무게가 없는 듯한
이 계획안은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미스의 이름이 순식간에 유명해지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이러한 그의 새로운 건축 양식
무게가 없고 투명한 공간 은 그의
새로운 사상과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 입니다
 
 그는 [문화적 진화라는 것은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로부터
무의미한 장식을 제거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며
순수한 공간 자체를 창조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건축양식은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 박람회에서
지어진 임시 건물인 독일관에서
실현되었어요

 

 

1929년 지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정도로
현대적인 건축물 인데요

 

 
 

어느 방향이든 뚫려있는 공간에
벽은 너무나 얇아 보여서 단순한 벽이 아닌                                                                 
방향성을 가진 면 으로 인식이 되고
빛나는 크롬 재질의 기둥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붕이 날아가지 못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어요

 

 

이 건물이 당시 얼마나 큰 쇼크로 다가 왔는지
박람회가 끝나고 이 건물이 철거된 이후
사진으로만 남은 시기에 이 건물에 대한 소문이 눈덩이 처럼 불어나서
거의 전설로 여겨질 정도 였다고해요
 
미스는 이 건물로 건축기 형이상학적 존재
라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서
미스에게 건축을 맡기는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의 건축양식이 독일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독일에서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1937년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미스는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요
독일에서의 상황과는 완전히 반대로
미국은 미스를 엄청나게 반겨주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1944년 미스는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그는 미국에서
형이상학적 건축의 완결판이며
건물로 한 편의 시를 썼다고 칭송받는 주택
판 스워스 하우스를 짓게 됩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뽑는 건축물 인데요
 
그는 이 건물로 철과 유리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재료로
완벽한 건축적 미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 받습니다

 

 

하지만 실제 이 곳에 살았던
건축주에게는 최악의 집 이였던 것 같습니다
 
우선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볼트 와 너트는 사용하지 않았는데요
이 때문에 시간과 돈이 몇배로 들어갔고
또한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단열도 엉망이고 비가오면
집안으로 다 새는등

 

 

이 건물을 모더니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판스워스 하우스가 가지고 있는 현대건축사에서의
의미는 결코 무시할수 없어요

 

 

이 주택에서 그가 완성한 철과 유리의 미학은
이후 미스의 건축뿐 아니라 전세계의 도시 모습을
바꿔놓게 됩니다
 
이 대표적인 사례로
뉴욕의 시그램 빌딩이 있는데요

 

 

 

고층 사무용빌딩 최초로
건물 전체를 유리로 덮은 유리 커튼월 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지금까지 많은 건축물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축 양식이죠

 

 

이러듯 미스 반 데어 로에 가 가지고있는
현대 건축의 의의는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에 비례해서
비난도 많이 받고 있는데요
그의 건축철학으로 도시는 끔찍하게 지루해졌고
전세계를 똑같이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실제로도 현재 많은 건물들이
유리 커튼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데요
이는 대부분 미스 반 데어 로에에게 영향을 받은 것
이라고 볼수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비판과는 반대로
현대 건축에서의 미스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건축 양식은 현대 사회에 맞게
매우 실용적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근대 건축의 대표주자 라고 불리는 것 이겠죠?

 

 

 

디자인메이지미술학원 의정부점

 

 

 

 

 

 

 

 

 

5. 미스 반 데어 로에의  판스워스 하우스

 

 mies van der rohe @ farnsworth house, near chicago, illinois, 1951

 

 

이번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불후의 명작중 하나인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근교의 작은 마을 플레이노 plano 에 있는 판스워스 하우스 를 찾아갑니다. 

 

 

판스워스 하우스

남측 정면

 

미스가 독일 나치의 등살에 못이겨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1938년 시카고에 새둥지를 틀고 IIT 건축대학장이 됩니다.  IIT 캠퍼스 마스터플랜을 진행중이던 1945년 (당시 59세) 에 설계가 시작되어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51년 완공된 숲 속의 유리집 입니다. 시카고 여성닥터 에디스 판스워스 edith farnsworth 의 단층 주말별장으로, 준공후 70년 가까이 모더니즘의 상징처럼 사랑을 받아 온 "less is more" 의 주인공 입니다. 미스의 건축철학이  온통 담겨있는 미니멀리즘의 대표작입니다. 홍수 등의 피해로 경매에 부쳐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0년대 초 미국 국가지정 역사문화재 (NHL)로 선정되었습니다. 현재는 뮤지엄으로 사용되며 미시언 miesian 건축의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less is more.

 

남측 정면

 

 

판스워스 하우스는 미스가 유럽을 떠나기전 체코의 브르노 brno 에 설계한 투겐트하트 tugendhat 하우스 에서보다 더 추상화된 몇 안되는 단독주택 작품중의 하나이다. 스틸 프레임의  완전 글래스박스이다. 당시 시카고의 매우 발달된 철강산업도 한 몫을 한것 같다.

farnsworth house

 

남측 현관 입구 진입테라스 데크

 

평면도 (위가 북쪽)

개념적으로 지면에서 띠운 2개의 바닥데크와 지붕데크, 즉 3개의 수평면(plane)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본채를 형성하는 2개의 큰 수평면, 바닥과 지붕을 8개의 노출 철골기둥 아이빔 (I beam) 이 옆에서 잡고있다. 진입 테라스를 구성하는  작은 수평면  데크는  그루터기 같은 낮은 말뚝 아이빔 들이 잡고있다.

 

스틸프레임 접합

스틸아이빔 I-beam 과  씨채널 C-channel 로 구성된 노출 철골구조이다. 상기 엑소노메트릭애서 아래 그림의 왼쪽은 건물본채 바닥데크의 가장자리 C채널을 아이빔 기둥이 측면에서 잡고 있다. 오른쪽은 테라스 데크의 C채널을 그루터기 말뚝 아이빔이 옆에서 잡고있다. 미스의 홀마크 프레임 접합방식이다.

 

less is more.

 

지면에서 160cm 정도 띠운 북측 건물 바닥데크가 주거공간 본채가 된다. 동,서측의  캔티레버 부분과 세(3) 베이로 구성된 본채는  양쪽에서 여덟(8) 개의 철골기둥이 바닥데크와 지붕데크를  측면에서 잡아주고 있다. 미스 건축의 홀마크 중의 하나이다. 매우 특이한 구조 형식으로 이 노출 철골 아이빔 (I-beam) 기둥과 노출 보(C- channel) 들이 판유리 글래스월과 함께 외관을 구성한다.  매우 간결하고 단순해 보이는 글래스박스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박스가 아니다. 많은 생각이 응집된 작품이다.  완전 추상화된 조형물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less is more.

pure geometrical forms. absolute universal design. comprehensive details. less is more.

그래서 모더니즘의 영원한 교과서가 되었다. 미스의 이러한 디자인 철학은 후속작 IIT 캠퍼스의 크라운 홀, 뉴욕 맨해턴의 시그램빌딩, 베를린의 뉴내쇼날갤러리 등에서 계속된다.

 

지면에서 띄우기

 

60cm 정도 지면에서 띄운 남측 진입데크는 입구 테라스 마당 역할을 한다. (우연이겠지만, 우리의 전통 한옥구조를 연상케한다.) 이 데크도 낮은 말뚝기둥 들이 본채처럼 옆에서 잡고 있다. 부지는 숲이 울창하고, 남측 전면 가까이에 작은 강(fox river)이 흐르는 홍수범람지역이다.

 

Google map

 

Google map

 

배치도 (위가 북쪽)

 

판스워스 하우스(적색)는 홍수범람지역의 강가 (fox river) 에 가까이 면해있어 자주 물에 잠기곤 한다. 플레이노 plano 는 시카고에서 남서서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인구 1만명 정도의 시골동네 이다.  부지 진입은 주변 리버로드의  동측 진입로로 들어와 건물 남동측 공지에 주차한다.

 

플레이노 plano, 일리노이 (Google map)

 

Google map

 

판스워스는 플레이노 plano 마을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져있다.

 

2008년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

 

farnsworth house

 

from aia.org

 

 

 

아이빔 기둥은 지붕 씨채널 스팬드럴보 중간에서 멈춘다.

 

아이빔 I-beam 기둥은 지붕 씨채널 C-channel 스팬드럴보 중간에서 멈추며 측면지지로 건물을 지탱한다. 철골조 측면지지 구조방식은 미스의 홀마크 중의 하나이다. 

 

진입 데크 테라스를 옆에서 잡고있는 노출 철골 말뚝기둥. 여기서도 측면지지방식을 사용한다.

 

말뚝기둥 top view

 

진입데크에서 본 주택 주출입구 포치

 

 

남측 진입데크 테라스에서 본 주택 주출입구 포치

 

북측데크는 전부 다 주거공간의 실내로 사용하지 않고 일부를 외부 포치 porch 로 처리했다. 진입부의 처리가 매우 흥미롭다. 판스워스의 백미인 것 같다.

진입은 계단, 띄운 테라스 데크, 계단, 그리고 지붕만 있는 주출입구 포치 porch 데크 의 순서가 된다.

 

 

평면도 (위가 북쪽)

진입데크는 정말 비워 놓은 것 같은데 공간이 형성된다. 바닥만 형성이 되도 공간을 크게 느끼게한다.

움직이는 공간

진입축도 건물의 서쪽으로 치우쳐 들어가게 해놓고 테라스 데크에서는 계단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뭔가 움직인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공간의 변화를 만들고 있다. 북측 포치 데크에서는 90도를 틀어 동쪽으로 실내 현관입구가 있다. 실내로  들어갔다 나오면 360도 사방의 숲속 경치를 다 보게된다.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생각이 녹아있다.

 

포치 porch

 

 

현관 포치 porch    

트래버틴 바닥과 하얀 플라스터 천정 사이에 터진 공간이다. 바닥과 천정의 두 평면 plane 만 있다. 벽은 사라졌다. outside in. inside out.

farnsworth

 

서측 외관

 

 

 

less is more.

 

북측 배면.      

왼쪽으로 주방이 보인다.

 

현관 리셉션

 

오픈 플랜   

평면구성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보여준 오픈 플랜이다. 입구에서 남쪽 시계 반대방향으로 현관 리셉션. 리빙룸. 베드룸. 키친. 다이닝 현관 의 오픈된 공간으로 중앙 벽난로화장실 코어를 중심으로 한바퀴 흐른다.

open plan. flowing space.

시카고에서 일하는 닥터 판스워스의 주말별장으로 이곳에 오면 바이올린 연주와 시낭송 등을 한다고한다.

 

트래버틴 바닥과 우드 캐비넷 @ 현관 리셉션

 

남쪽 단풍나무와 남쪽 강가를 보며...

 

북측 식탁을 보고...

 

동측 거실을 보고

 

거실

미스의 가구로 채워진 거실. 벽난로는 숨어있다. 

 

거실에서 서측 현관쩍을 보고...

living room with a fireplace.

 

 

거실과 침실

오픈 플랜이다.

 

 

침실 BR    

바르셀로나 체어 스툴 stool 이 보인다.

 

주방       

북측 글래스월을 따라 계획된 주방. 멀리 바우하우스 스틸 체어의 식탁이 보인다.

 

travertine floor

 

 

travertine 

oak-panel

steel &

glass

 

서쪽에서 본 북측데크 포치와 남측데크 테라스. 그 사이에 30cm 폭의 철골 아이빔 기둥이 있다.

 

 

트래버틴 travertine 바닥의 두(2) 데크 사이의 철골기둥 아이빔 (W 300).

 

185cm 튀어나온 캔티레버 @동측 단부.  바닥슬래브는 지면에서 160 cm 정도 띄웠다.

 

 

 

외장마감으로도 쓰인 구조재 스틸아이빔 steel I beam 과 씨채널 C channel

 

exploded axonometric

 

현관 출입문 단면상세.

God is in the details.

Steel. Glass. Travertine.

 

steel. steel. steel. 

   외장재로 쓰인 구조재 C채널 @ 지붕파라펫 과 바닥의 단면상세. 

   

 

바닥데크와 지붕데크 모두 구조재 C채널로  외장 노출마감하였다. ( 필립존슨의 '글래스하우스'는 판스워스 도면을 본 후 설계했다. 비슷해 보이지만 구조개념부터 모든 게 다르다. 디테일 없이(?) 만든 짝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엉성한 유리집이다. 미스가 한번 방문한 후, 핫도그 스탠드 같다구 흉보듯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ㅋㅋㅋ )

 

 

 

 

* numbers

건축면적.    330 sqm (테라스데크 포함)

지붕면적.    200 sqm (약 23.6m×8.5m)

실내면적.    142 sqm (약 16.0m×8.5m)

22 feet (6.71m) per bay

33"×22" per grid of a travertine floor slab.

천정고.    2.9 m

*마감

외부 마감은 하얀색 도장을 한 노출철골 기둥과 보, 매끄럽게 처리한 판유리 이다. 내부는 이태리산 트래버틴 바닥, 하얀 도장의 플라스터 천정이고, 목재마감은 거실, 침실 등 주요부위는 티크이고, 나머지는 프리마베라 이다. ciao

ywp07152018, updated 06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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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nsworth house, plano, illinois, usa,1945-1951

architect:     mies van der rohe, chicago, Illinois, usa

 

mies at his Chicago office

 

note: please see also the "barcelona pavilion"  below for more info on mies vdr.

 

 

mies looking at his own character bust (from IIT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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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wikipedia

pinterest

flickr

google

YouTube

dezeen

archdaily

farnsworthhouse.org

valogianni.blogspot.com

 

*Credits: This talk has been produced and written by Young Woo Park, aia, ncarb. The most of writing has been based  on the reference materials above, u.n.o. Please email to the writer above (ywpark5293@gmail.com) in case of having questions or disagreements.

*Copy rights reminder:  This talk can not be used or reproduced in other publications on-line or off-line,  entirely or partially,  without a written consent of the writer.

*Photo Credits:  Photos and images are  also from the reference materials above, u.n.o. Please email to the writer in case of having questions or disagreements. Thanks.

 

plusplus

 

모형을 관찰하는 미스

 

이 중간데크는 건물의 다른 이미지를 제공한다. 

 

 

travertine 계단.       두께가 50mm 은 되어 보인다.

 

 

A giant and gorgeous black maple tree standing in south front, casting huge shades on the house in summer time. Mies saved it. (주: 이 단풍나무 없는 남측입면 사진들은 사후처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thanks for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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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plus

 

현장 살펴보는 미스

 

 

 

계단에서 휴식을 취하는 미스(C)

 

미스와 에디스 판스워스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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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please go to livemodern.com and connectingthewindycity. com for more info on farnsworth house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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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과학기술대학교 도서관, main library @GCST, near seoul, 2003

안녕하세요. 제 사무실 박영우건축(P&A)을 시작하고 몇년 안되서 2003년에  설계한  경기도 시화산업...

m.blog.naver.com

 

 

 

 

 

 

 

 

 

6.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9> 獨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입력 :2014-08-20 

비움을 담아 자연에 닿다

 

■ 線…씨줄날줄 엮듯 절제와 균형의 미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의 각축장이나 다름없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됐던 포츠다머광장 주변은 1991년 수립된 종합개발계획에 렌조 피아노, 리처드 로저스, 헬무트 얀 등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해 21세기 최첨단 도시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했다. 그런데 이들 최첨단 빌딩을 제압하고 베를린에서 최고로 꼽히는 건축물이 있으니 바로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데어로에의 신국립미술관이다. 엄격하리만치 단순한 구조,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경이로운 비율, 주변의 풍광까지 끌어들인 우아함 등 1968년 완공된 이 미술관이 지닌 궁극의 아름다움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빛나는 모습으로 많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 미스 반 데어 로에가 평생 ‘단순함’의 모범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 건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신국립미술관 건물은 궁극의 아름다움을 지닌 20세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 신국립미술관에서 ‘전장의 확장’이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는 기획전에 소개된 베르너 튀브케의 작품을 한 관람객이 진지하게 감상하고 있다.



 

▲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보편적 공간의 개념을 구현한 지하 전시실.

2차 대전 후 베를린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박물관섬 등 유서깊은 건물들이 모두 동베를린에 편입되자 서쪽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문화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과거 왕실의 사냥터에서 공원으로 바뀐 티어가르텐 남쪽에 문화포럼 단지를 조성했다. 전쟁과 분단으로 상처입은 시민들에게 예술을 통해 위안을 주는 일이 시급하기도 했고 동독 지역의 역사적 건물과 비교할 수 없도록 모더니즘 건축의 걸작들을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우선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전용극장인 필하모니홀이 한스 샤룬의 설계로 1960~63년 지어졌다. 다음으로 서베를린에 남겨진 19세기 회화작품과 20세기 걸작들을 전시하기 위한 새 미술관 건물이 필요했다. 베를린시에서는 이 임무를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세계적 명성을 쌓은 미스 반데어로에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미스 반데어로에(1889~1969)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르 코르뷔지에(1887~1965)와 더불어 모더니즘 건축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건물은 1968년 완공됐고 동베를린에 있는 국립미술관과 구별하기 위해 신국립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결과적으로 미스 반데어로에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된 미술관에는 그가 일생동안 일관되게 추구해 온 건축 철학과 기술력이 총집결돼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절제되고, 수평과 수직의 아름다운 균형이 시적이며, 많은 것을 담아 보일 수 있는 거대한 공간. 신고전주의 건축의 엄격한 질서와 단순함을 철과 유리를 통해 표현한 이 미술관은 미스 반데어로에가 미국 망명 30년 만에 모국에 남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20세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 明…빛을 담은 유리상자, 소통의 공간

건물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크기의 유리로 사방의 벽을 이룬 정방형 홀 위에 묵직한 강철 평지붕을 얹은 모양이 인상적이다. 기단 위에 널따란 테라스를 만들고 그 한가운데에 정방형 유리 상자를 세운 형상이다. 강철로 된 가로·세로 65m 길이의 사각 평지붕을 각 면에서 두 개씩 8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을 뿐 건물 내부에는 기둥이 없다. 유리 상자의 벽은 강철지붕의 추녀 끝에서 7.2m 안으로 후퇴시켜 놓았다. 기자의 신국립미술관 취재에 동행한 재독 건축가 신이도씨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기단이 있고 지붕을 기둥이 떠받치며 기둥과 유리벽 사이를 따라 길을 만든 것 등 현대적인 건축물이지만 고대의 신전과 철저하게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절제된 외형이 강철의 무게감을 상쇄시키는 구조적 완벽함을 볼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보자. 포츠다머 대로에서 보면 기단 위에 지어진 단층 건물 같지만 완면한 경사지에 들어선 미술관은 2개 층으로 이뤄져 있다. 당초 구상이 국립회화관과 베를린시립 20세기미술관 등 두 곳의 미술관에 있는 수집품을 통합한 미술관을 짓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시공간을 크게 특별기획전시와 소장품의 기획전이 열리는 공간으로 구분해 놓았다. 특별 전시를 위한 1층의 대형 전시공간의 내부는 기둥이 없이 좌우대칭으로 매끈하다. 이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작품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천장은 8.4m로 높아서 거대한 공간이 필요한 설치미술 등 기획전시가 가능하다. 사방이 유리로 개방되어 있어 자연광을 최대한 받아들이며 외부와도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느낌이 든다. 단단한 직사각형 지붕 아래로 실내조명이 들어오면 내부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여 신전의 성스러움까지 느껴진다. 지하층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구성되는데 전시실의 한쪽 면은 외부 조각공원과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완만한 경사를 살려 내부에 자연광과 외부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차경(借景)을 시도했다.

■ 合…전쟁의 상처 씻은 동·서 화합 컬렉션

신국립미술관에서는 20세기 현대미술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야외 테라스에 설치한 알렉산더 콜더의 조형물을 비롯해 로베르 들로네, 파울 클레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회화작품들은 물론 바우하우스 작가들과 사실주의, 표현주의 등 독일 현대미술 컬렉션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전쟁으로 파괴된 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오토 딕스와 게오르게 그로스, 막스 베크만 등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시기에 활동한 독일 현대미술 거장들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다. 여기에 동베를린 국립미술관에 있던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오토 뮬러,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에리히 헤켈 등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의 걸작들과 베르너 튀브케, 베른하르트 하이지그 등과 같은 분단시절 동독지역서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이 더해지면서 독자적인 소장품 리스트를 자랑하고 있다.


글 사진 lotus@seoul.co.kr
서울신문  2014-08-20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