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Adolph) Gropius
출생 - 독일 베를린, 1883. 5. 18 |
사망 - 1969. 7. 5, 미국 보스턴 |
국적 - 독일 |
요약 - 독일의 건축가·교육자.
개요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지내면서(1919~28) 근대건축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공동작품이 많으며 대표작은 바우하우스 학교 건물 및 교직원 주택(1925~26),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센터, 아테네의 미국대사관 등이 있다.
청년기와 초기 훈련과정
건축가의 아들인 그는 뮌헨(1903~04)과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1905~07)의 공업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04년 베를린의 건축사무소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1904~05년에 군복무를 했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 첫 작품으로 포메라니아에 농장노동자 숙소를 지었으며(1906), 그뒤 일년 동안 이탈리아·스페인·영국을 여행하고, 다시1907년 베를린에 있는 페터 베렌스 건축사무소에 들어갔다.
그로피우스는 베렌스와 함께 일한 경험과 독일 아에게(AEG)회사건물을 설계하면서 겪었던 설계상의 여러 문제들 때문에 건축과 예술의 상호관계와 진보적 건축에 일생동안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1910년 베렌스에게서 독립해 1914년까지 조직과 예술에 대한 이상을 증진시키기 위한 뚜렷한 의식과 재능을 키워나갔다.
1911년 그는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 회원이 되었다. 독일공작연맹은 창조적 디자인과 기계 생산방식을 연결하기 위해 1907년 발족되었다. 그로피우스는 건물의 부분들을 공장에서 생산하고 현장에서 조립하는 건축기술을 주장했다.
그는 기계화의 불가피성과 한계를 잘 알고 있었으나 "기계로 만든 죽은 생산물에 영혼을 불어넣는 일"은 예술적으로 단련된 설계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에서 모방·속물근성·독단적 교리를 반대했고 생산물의 기능이 그 형태를 결정한다는 견해 같은 지나친 단순화에 대해서 경고했다.
그의 지적인 지도력은 아돌프 마이어와 함께 2개의 중요한 건물―알펠트안더라이네에 있는 파구스 공장(1911)과, 공작연맹 박람회에 출품한 콜로뉴의 사무실과 공장건물군 모델(1914)―을 공동설계함으로써 더욱 보강되었다.
파구스 공장은 베렌스의 공장보다 더 대담하게 넓은 유리벽들과 그 사이에 노출되어 보이는 강철지주가 특징으로서, 허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건물이다. 콜로뉴 건물군은 이보다 더 정형화된 것으로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서 영향받았다고도 한다.
이 두 건물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로피우스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설계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기병장교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하다 부상당했고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910년 그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인 알마 말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1915년 미망인이 된 그녀와 결혼했다. 휴가 때만 만날 수 있는 전쟁중의 결혼생활이었으므로, 부인이 독일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관계를 맺자 문제가 복잡해졌고 1919년 이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알마 마논은 1935년에 죽었다.
바우하우스 시절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이마르 시에서는 예술교육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로피우스를 찾았다.
1919년 4월에 그는 작센 대공 미술공예학교, 작센 대공 미술아카데미, 작센 대공 미술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이 세 학교는 곧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 Weimar)로 통합되었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예술·정치·행정의 실용적 세계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디자인 교육 방법을 개발했고 이 바우하우스는 전세계적인 본보기가 되어 200년 전통을 지닌 프랑스 에콜데보자르의 명성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에서 실시한 교육의 요체는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재료 및 제조공정에 숙달되도록 실제적인 기능훈련을 경험하게 한 점이다.
이 프로그램은 포괄적으로 계획되었으나, 예산 제약으로 단 1개의 공작실만 운영되었다. 그때만해도 바이마르에는 공식적인 건축교육과정이 하나도 없었다. 예술과 공업을 결합하려는 초기 공작연맹의 원칙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활동은 요업·직물업·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과 같은 수공예 분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서는 폴 클레, 리오넬 파이닝거, 바실리 칸딘스키,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그리고 그 뒤에 온 라슬로 모호이 노디와 요제프 알베르스 등과 같은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교수로 활동했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예술가들이었다.
어쨌든 예술가들이 응용디자인을 가르친다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스위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요하네스 이텐이 디자인 원리에 대한 개론으로서 '예비과정'(Vorkurs)이라는 입문과정을 개발했고, 이것은 바이하우스 교과과정 중에서 가장 널리 반복전수되는 과목이 되었다. 학생들은 철사·나무·종이 등과 같은 여러가지 단순한 재료를 써서 2차원, 3차원적인 디자인을 탐구했다. 형태, 색채, 질감에 대한 심리적 효과에서도 훌륭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학교 강사들도 재능이 있었지만 이 새로운 교육적 실험이 가능했던 것은 그로피우스의 집념 덕분이었다.
역사가들은 초기 바우하우스의 성격을 서로 다르게 보고 있다.
1912~22년에 학생들이 자신의 예술에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하도록 허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따라서 개인주의적이며 표현주의적인 성향이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전쟁 전에 예술은 근대사회의 경제적 특성과 합리적인 질서를 따르면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전쟁 전의 신념은 예술의 위대함이란 실용성을 고려한 바탕 위에 확립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신념 속에 흡수되었다.
여러 논쟁 끝에 1922년 바우하우스에 전환이 일어났다.
이텐이 학교를 떠나자 더욱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접근방법이 사용되었다.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기계 생산을 위한 원형이 되었으며 몇몇 디자인들은 상품화되었다. 그들은 기하학적 형태와 매끈한 표면, 균형잡힌 외관, 원색, 근대적 재료들을 강조했다. 이 모든 요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몰개성화한 예술로 받아들여졌으며 바우하우스 양식의 특징을 가진 마지막 산물로 인정되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과 디자인이 언제나 그 시대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보았으며 건축가의 임무는 통합적인 시각환경을 포괄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도 가구, 기차, 자동차를 설계했으며 주거건축과 도시계획, 사회학의 유용성 및 전문가로 구성된 팀의 활용을 강조했다.
1925년에 바우하우스는 보수적인 바이마르 사회에서 적대감이 커짐에 따라 도피를 겸해 더 나은 재정지원을 약속받은 데사우로 옮겼다. 그로피우스는 데사우에서 학교건물과 교직원주택을 설계했다(1925~26). 바로 이 학교가 근대건축에서 기념비적 초석이 되는 건물이며 그로피우스 작품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다.
동적(動的) 구성, 비대칭 평면, 수평으로 늘어선 창이 나있는 희고 평평한 벽체, 평지붕 등은 1920년대 이른바 국제주의 양식과 관련된 특징들이다. 그는 1928년 바우하우스의 교장직을 사임하고 베를린에서 건축가로서 개인활동을 시작했다. 1929~30년에 베를린지멘슈타트에 주택단지 일부를 설계했다. 똑같은 방향으로 규칙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정면(facade)은 지나칠 정도로 획일적인 해결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로피우스 자신도 후에 자책했다.
하버드대학 시절
나치 체제에 동조할 수 없었던 그로피우스는 1923년 결혼한 두번째 부인 이제 프랑크와 함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를 거쳐 1934년 영국으로 망명했고 히틀러 정권은 1933년 바우하우스를 폐쇄했다.
영국에서 맥스웰 프라이와 함께 일하면서 중요한 공동작품인 캠브리셔 임핑턴의 빌리지대학을 만들었다.
1937년 2월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도착해 하버드대학의 건축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학과장이 되었고, 1952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 그 자리를 맡았다. 1944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도 바우하우스 디자인 철학을 교과과정에 도입했으나 공작실 교육은 할 수 없었으며 교과과정에서 건축사를 없애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가 펼친 근대적 디자인 운동은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고, 하버드대학에서 보여준 개혁은 곧 미국의 다른 건축학교에 펴져 비슷한 교육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역사적 양식을 모방하는 건축에 종지부를 찍는 시발점이 되었다.
교육경력 이외에도 옛 바우하우스 제자이자 1937~40년에는 동료교수로 일했던 마르셀 브로이어와 함께 일했던 경력이 있다. 이들이 설계한 건물 가운데는 매사추세츠의 링컨에 있는 그로피우스의 저택이 있는데 흰색 페인트칠이 된 목재와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써서 뉴잉글랜드의 전통을 근대적 의미로 되살렸다.
이 집을 비롯한 여러 공동작품들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두 사람은 생전에 자신들의 이상이 인정받는 것을 보았다. 1942년 조립식 주택을 생산하는 제너럴패널사의 부사장이 되자, 그로피우스는 건물을 공장 생산하는 것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52년에 그 직을 사임했다.
1946년에는, 하버드 제자 6명과 함께 케임브리지에 본부를 둔 티에이시(The Architects Collaborative/TAC) 를 결성했다.
이 협회는 미국 및 외국에서 여러 설계를 위탁받았다. 그중 하나가 기숙사 건물군과 공동식당이 있는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센터(1949~50)이다. 이 작품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건물을 연상시키지만 그만큼 강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밖에 티에이시 작품으로는 아테네의 미국대사관(1960)과 바그다드대학교 등이 있다. 그로피우스는 86세가 되어 죽을 때까지 티에이시 회원으로 계속 활동했다.
1933년 그가 죽은 지 이틀 뒤, 그의 요청대로 애도 분위기가 아닌 축제 분위기로 치러진 장례식에서는, 케임브리지의 동료 70명이 모여 그를 회고하면서 샴페인을 들었다.
평가
그로피우스에 대한 많은 평가는 건축가라기 보다는 교육자와 작가로서 이룩한 일을 중심으로 내려지고 있다.
비현실적인 열정과 실천적인 야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예술을 개혁하고 관리하는 데 일생을 바친 그는 목표를 충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적·주관적인 면을 버리고 더 광범하고 사회적으로 절박한 문제를 지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임무를 바꿨다. 그의 가장 중요한 사고 가운데에는 건물·도시설계·의자 디자인 등 모든 디자인은 본질적인 면에서는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즉, 필요와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옛 형태나 양식을 모방하지 않고 근대적인 건축자재와 기술을 사용하여 디자인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건축은 라이트나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 갖는 감각적인 매력은 없지만 그의 일생에 걸친 건전하고 실용적인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항상 논란과 비판이 있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개성적 정신의 활력과 삶 자체의 자발성을 심어주었다. 신사복 차림에 베레모를 쓰는 그의 습관은 아마 그가 연결하고 싶어했던 '사업가와 공학자의 엄격한 정신과, 창조적인 예술가의 상상력이라는 두 세계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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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다음백과
2. 발터 그로피우스의 경력과 주요 작품
경력
1903년 뮌헨 공과대학에서 건축학 공부를 시작하지만 중간에서 1906년 베를린 공대로 전학. 1908년 학위를 받지 않고 중퇴. 같은 해에 친지 칼 에른스트 오스트하우스Karl Ernst Osthaus의 중재로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의 설계사무소에 입사한다. 칼 에른스트 오스트하우스는 재산가로서 미술품 수집가, 예술 후원자로 베를린 문화계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베를린의 유지 그로피우스 가문과는 친분관계에 있었으며 그로피우스를 여러 모로 후원했다. 그로피우스는 그림과 제도 솜씨가 형편없었다. 본인 말에 따르면 건축학과 수업에서 요구하는 높은 스케치 수준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중퇴했다고 한다. 그로피우스는 “아주 간단한 것조차 그려낼 수 없는 실력이라 페터 베렌스 소장은 나를 현장 감독으로 내보내거나 기타 다른 업무를 시켰다.” 고 회고했다.[1] 그로피우스의 천재성은 다른 곳에 있었으므로 늘 그의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표현해 줄 동료가 필요했다.
페터 베렌스의 설계사무실에서 그로피우스는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게 된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세 거장이 한 동안이라도 같은 스승 밑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2년 뒤 1910년 그로피우스는 개인설계사무실을 열고 스스로 산업디자이너 & 건축가로 칭했다. 같은 해에 역시 칼 에른스트 오스트하우스를 통해 독일공작연합에 가입. 독일공작연합의 성공으로 인해 산업디자인과 공예에 관심이 생긴 오스트하우스를 위해 그로피우스는 1912년 산업디자인 작품 중 우수작들의 설계도를 수집해 준다.
1911년 그로피우스의 첫 건축작품이 탄생한다. 알펠트에 위치한 파구스 공장 디자인을 의뢰받았는데 그로피우스는 동료 아돌프 마이어Adolf Meyer와 함께 철강과 유리를 이용한 새로운 디자인을 내어놓았다. 여기서 후에 모더니즘 건축이라 일컫게 되는 새로운 건축개념이 결정되었다고 평가된다. 1920년대부터는 “신건축양식” 혹은 “신즉물주의”라는 개념들이 자리잡아 갔다. 파구스 공장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14년 독일공작연합 주최로 쾰른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그로피우스는 다시 아돌프 마이어와 함께 공장 모델을 만들어 제출했다. 이 역시 모더니즘 건축의 매우 중요한 유산으로 여겨진다. 이 건축에서 특이한 점은 유리로 외피를 만든 계단실이다. 이 아이이어는 뒤에 동료 건축가 에리히 멘델존Erich Mendelsohn이 수용하여 자주 적용했다.
같은 해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참전. 4년 서부전선에서 복무하며 중상을 입어 무공훈장을 받는다. 일차 대전 종전 직후, 1918년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 제국이 붕괴하고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그로피우스는 혁명 예술가들로 구성된 그룹에 합류한다. 이들은 건축우선주의를 내걸고 전쟁기념물을 모두 철거하라고 외쳤다. 그로피우스는 예술을 통해 사회를 혁신할 수 있다는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1919년 앙리 반 데 벨데가 추천하여 바이마르의 공예학교 교장으로 부임한다. 그로피우스는 공예학교라는 명칭을 버리고 <바이마르 국립바우하우스>로 개명하고 1928년까지 바우하우스를 이끈다.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하네스 마이어는 불과 2년 뒤인 1930년 나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바우하우스를 떠나 소련으로 이주했다. 이후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가 바우하우스를 이끌다가 결국 나치스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3년 문을 닫는다.
그로피우스는 1926년 부터 도시설계적 해법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얻고 그 해답은 대량 주택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를 위해 건축을 합리화해야 한다고 주장. 1929/30년 <새로운 프랑크푸르트> 라는 타이틀로 진행 된 도시계획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피나무 마을 Am Lindenbaum>이라는 주거단지를 설계한다. 이후 데싸우, 담머슈톡, 베를린의 지멘스 시티 등 수많은 주거단지가 탄생한다.
1928년 바우하우스에서 퇴임한 그로피우스는 베를린으로 돌아 와 다시 설계사무실 문을 열고 활동하는 중 나치스가 정권을 잡아 바우하우스를 <막시스트들의 성당>이라고 비난하며 압박을 가해 오자 1933년 바우하우스는 폐교되고 그로피우스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영국에서 잠시 체류하다가 1937 미국의 캠브리지로 가서 하바드 대학의 대학원 교수로 부임한다. 1941년에서 1948년 사이 콘라드 박스만 Konrad Wachsmann과 함께 작업한다. 콘라드 박스만은 독일 카푸트에 아인슈타인 자택 등을 설계한 것을 계기로 하여 프리랜서로 경력을 시작한 젊은 건축가였다. 둘은 건축 패널시스템을 개발한다.
1946년 젊은 건축가 그룹 <The Architects Collaborative, Inc. (TAC)>를 설립하고 이끈다. 이 그룹을 결성함으로써 그는 팀워크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고자 했다. 이 팀에서 함께 구현한 프로젝트가 캠브리지의 하버드 대학 대학원 건물이다. 그의 저서 <건축 – 시각적 문화로의 길>이 출간된다. 창의력과 팀웍을 가지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메시지였다.
말년에 그로피우스는 자주 베를린을 찾는다. 1957년 서베를린 한자 구역Hansa Viertel에서 개최된 국제건축박람회(Inter Bau)에 참가하여 9층 아파트를 설계한다. 건물 전체가 활처럼 약간 휘고 1층이 오픈된 양식으로 지었으며 후기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1960년대 초에 그로피우스는 당숙 마틴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베를린 공예미술관의 보존을 위해 힘쓰고[2] 바우하우스의 유산, 공예작품, 도서, 문헌, 사진 등을 보존할 아카이브 건물을 설계한다. 바우하우스 아카이브의 건설은 순탄치 못하게 진행되어 그로피우스 사후 1970년대 말에 비로소 베를린에 세워졌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69년 보스톤에서 사망했다.
수상 경력
- 1929년 하노버 공과대학 명예박사
- 1958년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 1959년 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 금메달
- 1963년 베를린 자유대학 명예박사
- 1999년 그로피우스 이름을 딴 소행성
주요 작품
- 1911/1912 알펠트의 파구스 공장, Alfeld 1
- 링컨에 지었던 발터 그로피우스 자택. © Public Domain/Jack E. Boucher
- 1914 비텐베르크 주거단지
- 1921 바이마르의 좀머펠트 단독주택
- 1922 예나 시립극장
- 1922-1924 알펠트의 농기계 공장
- 1924 예나의 펠릭스 아우어바흐 박사 단독주택
- 1925/1926 데싸우 바우하우스 본관
- 1925/1926 데싸우 마이스터하우스
- 1926-1928 데싸우-퇴르텐의 주거단지
- 1927-1929 데싸우 노동청 건물
- 1927 슈튜트가르트 바이쎈호프 주거단지에 집합주택 두 채
- 1927-1929 예나에 테레제 축커칸들 단독주택
- 1928-1929 베를린 레빈 가족 단독주택
- 1928/1929 칼스루에의 담머슈톡 주거단지
- 1929/1930 베를린 지멘스 신도시
- 1937 그로피우스 하우스, 링컨 메사츄세츠
- 1948-1950 Harvard University Graduate Center
- 1957 바그다드 대학
- 1957 베를린 국제건축박람회 인터바우 9층 아파트
- 1957-1959 뉴욕 맨해튼 팬암 빌딩(현 메트라이프 빌딩)
- 1960 베를린 그로피우스 신도시
- 1977-1979 베를린 바우하우스 아카이브(사후에 구현됨)
평가
산업건축, 합리적 미학의 대표자로서 신소재 철과 유리를 이용한 새로운 건축기법을 성공시켰다. 바우하우스 시대에 탄생한 작품 들은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증명한다. 후기에 주택문제,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립식 건축과 서민 고층아파트 등을 고안하고 널리 적용하여 한편 주거문제를 해결하는데 분명 일조한 것은 사실이나 저렴한 아파트와 대형 위성도시를 탄생시켜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거주자들의 편의 보다는 합리성의 원칙을 지나치게 고수하여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세기의 석학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그의 에세이 <노숙자의 망명>이라는 에세이에서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형식주의를 비판한 바 있으며 2차 대전 이후 또 다시 국토 재건이 시작되었을 때 어떤 건축 양식을 적용하는 것이 옳은 가에 대한 담론이 벌어지며 바우하우스 형식주의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증가했다. 특히 보수성향의 건축가 루돌프 슈바르츠가 전문 잡지에 비평기사를 실어 바우하우스 스타일에서 벗어 나 전후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그로피우스와 지면을 통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로그아웃
2대, 3대 교장을 지낸 한네스 마이어나 미스 판 데어 로에와는 달리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망명함과 동시에 <바우하우스> 를 자신의 브랜드처럼 내세웠다.
(출처: LEMO Lebendiges Museum Online https://www.dhm.de/lemo/biografie/walter-gropius)
3. 현대 디자인의 시초가 된 학교 건축의 집 -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 설립의 핵심적인 목표는 과거에 구속되지 않고 근본적 변혁을 원하는 것이었다. 모든 예술의 통일성을 반영하기 위해 물질세계를 창의적으로 재상상하는 것이었다.
그로피우스는 하나의 창조적인 표현으로 건축, 조각, 그림 그리기를 결합하는 유토피아적인 공예 연합을 설명하는 바우하우스 선언(1919)을 했고, 이 선언에서 예술과 디자인의 결합을 위한 비전을 설명했다. 응용 예술과 제조를 재결합하고, 교육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와 각 분야 사람들과의 협력이 가장 중요한 창조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순수 예술가들이 세속적인 상업적 공예가를 인정하고, 종교·문화가 다른 가치관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피우스는 삶의 새로운 체제에 적합하고, 유용하고 아름다운 대상을 창조할 수 있는 장인과 디자이너를 양성할 수 있는 기술적인 기반이 되는 교육 과정을 개발했다. 바우하우스는 미술, 산업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인테리어 디자인, 건축을 포함한 모든 예술 매체의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교육을 수행하는 학교 건물은 나중에 철골 공사, 유리 커튼 월을 포함하는 현대 건축의 특징이 된 많은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그로피우스는 학교 건물을 디자인하면서 최대 효율과 공간적 논리를 통하여 적절한 스튜디오, 강의실 및 관리공간을 분배했다.
바우하우스는 미술 및 디자인 교육 모두의 요소를 결합하고 있다. 교과 과정은 예비 과정부터 시작했으며, 예비과정은 사회적, 교육적 배경이 다른 다양한 지역에서 온 학생들에게 재료, 색상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하게 했다.
전문적인 연구를 시작하기 위한 공식적인 준비로서 학생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예비과정으로부터 교육을 시작했다. 이 예비 과정에는 시각 예술가들도 참여하여 진행되었는데, 교수진으로 바실리 칸딘스키(Vasily Kandinsky), 조셉 알버스(Josef Albers) 등이 참여했다.
바우하우스 이론에 따라 학생들은 금속 가공, 가구 만들기, 직물, 도자기, 조판, 그리고 벽화를 포함하는 전문 작업장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수행했다.
바우하우스 창설의 동기는 기계적 제조 및 제품에 예술적인 영혼이 없음에 대한 불안으로 사회적 목적 대비 예술적 손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창의력과 제조업은 서로 떨어져 표류하였는데, 바우하우스는 그들의 결합을 목표로 창설됐다.
바우하우스는 미술 교육의 오래된 학문적 전통 정신의 많은 부분을 포기했지만, 지적 및 이론적 추구에 강점을 유지하면서 중세 길드 시스템의 실용적인 기술, 공예 및 기술에 중점을 두고 이러한 연계를 추진했다. 또한 미술 및 공예의 결합에는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 해결 목표도 함께 주어졌다. 이 과정에서 바우하우스는 효과적으로 예술의 고전 계층을 만들었는데, 조각과 회화 등 예술과 어울리는 수준의 공예를 배치하고, 20세기 후반에 영감을 많이 준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로 많이 포장했다.
바우하우스의 실험과 문제 해결에 대한 노력은 예술 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에 대하여 엄청난 영향력을 주었다. 건축, 그림, 조각 미술은 ‘시각 예술’로 생각되었으나, 연구 과학, 문학이나 역사 등은 인문학의 부속으로 상대적으로 적게 고려됐다.
그로피우스 초기의 목표는 기술을 통한 예술의 통일이었지만, 이 방법의 특징은 경제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었다. 1923년 바우하우스의 목표를 재배치하였는데, 기술에 중점을 유지하면서 대량 생산을 위한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바우하우스 학교의 슬로건으로 ‘산업에 예술을’을 채택한 것을 보면 그 목표의 의미를 알 수 있다.
2개의 중간 링은 2개의 3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은 형태와 관련된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는데, 기술공예 숙련도를 강조하는 실제적인 작업 교육이었다. 학급들은 새로운 디자인이 쉽게 재현될 수 있도록 단순화되었으며, 기하학적 형태를 통하여 기능주의를 강조했다.
교육 과정의 중심으로 기술적 제조업에서 잃어버린 공예 및 세공기술에 중점을 두었는데, 기술 재생을 통해서 실용성과 필요성을 추구하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건축 공사 전문 과정을 실시했다.
기본 교육적 접근 방식은 서로 경쟁하려는 경향을 제거하고 개별 창조적인 잠재력과 공동체 의식 및 공유의 목적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제작자들은 그로피우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엄청나게 재능 있는 교수들이었다. 아방가르드 화가 요하네스 이튼(Johannes Itten)과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그리고 조각가 게르하르트 막스(Gerhard Macks)는 그가 첫 번째로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요하네스 이튼은 특히 중요했다. 그는 창조의 중심이었고, 표현주의에 있어서 그의 배경은 기술을 강조하고 중세 정신을 포함하는 것으로, 학교의 초기 교풍이 대부분 그의 이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하네스 이튼의 아방가르디즘(전위주의)과 그로피우스의 사회적 관심은 곧 불화를 만들었다. 1920년대 초반에, 결국 요하네스 이튼은 학교를 떠났고, 기술을 포용하고 사회의 사용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개혁한 라즐 모홀리 나기로 대체됐다.
그는 유태인으로 바우하우스에서 예술적 실험과 사회적 실천을 계속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향후 나치를 피해서 도피한 미국에서도 연장했고, 디자인교육과 예술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신념을 학교와 산업 디자인 영역에서 추구했다.
1925년, 바우하우스는 가장 번성한 시기에 독일의 산업 도시인 데사우(Dessau)로 이동했다. 그로피우스는 학교를 위해 새로운 건물을 설계했는데, 이 건물은 이후 현대 기능주의 건축의 획기적인 건물로 간주됐다. 예술의 결합을 전제로 한 학교 시설에서 눈에 띄게 부족했던 건축 부서를 새로운 학교에서는 만들게 됐다.
그 이후 그로피우스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 1928년 사퇴했다. 학교의 지배권은 스위스 건축가인 하네스 마이어(Han nes Meyer)에게 넘겨졌다. 마이어는 건축부서를 지휘했는데 그는 적극적인 공산주의자로서, 학생 조직과 학급계획을 통해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혼합시켰다. 학교에 대한 강화 구축은 지속되었지만, 마이어에 의한 마르크스주의의 성장에 대한 비판으로 결국 그는 1930년에 교장에서 물러나게 됐다.
1932년 같은 해, 학교는 베를린으로 옮겨가서, 기능주의의 옹호자인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에 의해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게 됐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전 교장인 하네스 마이어의 정치성향, 그의 지지자, 그의 건축 방식을 거부했다. 그로피우스의 ‘필수 연구’ 및 사용자 요구 사항에 대한 마이어의 접근 방식은 사용자의 요구를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설계 솔루션을 개발하는 것이었던 것과는 달리, 미스 반 데어 로에는 효과적으로 자신의 미학의 채택을 의미하는 ‘지적 결정의 공간 구현’을 주장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교장이 된 이후 자원과 교수의 부족과 싸웠고, 학교의 정신에서 정치를 제거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결국 나치가 1933년 집권한 이후 학교는 무기한 폐쇄됐다. 참여 예술가의 대부분은 나치 정권으로부터 추방되거나 도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는 폐쇄 이후 수십 년간 서유럽, 미국, 캐나다, 이스라엘 예술과 건축 동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 예로 2004년까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는 1933년부터 건립된 바우하우스 형식의 건물이 4000여 개가 되어 UN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 계속 일했으며,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 일리노이 공과 대학에서 건축 계획 및 설계를 담당하는 건축과 주임교수가 되어 20년 동안 많은 건축가를 배출했다.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근대 건축의 4대 거장에 속할 만큼 영향력이 크고 넓었다.
조셉 알버스(Josef Albers)는 노스캐롤라이나 블랙 마운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라즐 모호리-나기(Moholy-Nagy)는 시카고의 디자인 연구소에서 일을 했으며,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었던 맥스 빌(Max Bill)은 독일 울름에서 디자인 연구소를 개설했다.
이들은 바우하우스의 철학을 확산시키는 데 모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즐 모호리-나기와 조셉 알버스는 시장 지향적인 문화 속에서 현대적인 연구중심 대학의 환경에 적합한 철학을 재정립하는 데 특히 중요했다. 맥스 빌은 전 세계에 걸쳐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우하우스 정신에서 나온 작품은 충분한 토의를 통하여 나온 산출물이기에 창조적이었고, 혁신적인 디자인과 기능을 제공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사회와도 지속적으로 소통하여 사회성과 경제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 건축문화의 혜택은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정신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수많은 예술가 및 건축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부단한 노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동기 한미글로벌 엔지니어링 실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8호 (2016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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