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08. 안토니오 가우디 Antoni Gaudi

 

1.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2,000만 명. 해마다 스페인의 항구 도시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 수다. 도시 인구 300만 명보다 훨씬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요인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1883년부터 짓기 시작해 124년이 넘도록 공사가 진행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ília)에서 가로등까지 가우디가 설계한 작품이 즐비하다. 도시 전체가 '가우디의 건축 백화점'으로 불릴 정도다.

1852년 6월 25일 대장장이 출신 구리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디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소년 시절을 보냈다. 다섯 살부터 시작된 관절염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수업을 자주 빼먹어 성적도 좋지 않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해 대부분의 시간을 '관찰'로 보냈으며 바르셀로나대학 이공 학부도 학점이 안 좋아 간신히 마쳤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시립 건축 전문학교 시절부터. 대담하고 혁신적인 설계로 과제물마다 논란을 일으켰다. '천재 아니면 미치광이'라는 평가 속에 아슬아슬한 점수로 학업을 마칠 무렵 가우디는 평생의 후원자를 얻었다. 부유한 은행 가문 출신의 건축가 구엘(Palau Güell)을 만난 것.

그의 천재성을 간파한 구엘의 도움으로 돈 걱정이 사라진 뒤부터 가우디의 아파트에서는 대학 건물, 교회 등 명작들이 쏟아졌다. 1883년부터 선배의 뒤를 이어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대성당)의 설계와 공사를 맡으면서도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놓은 듯한 6층짜리 아파트 카사밀라, 기묘한 창문으로 유명한 카사 바트요, 후원자 구엘을 기념하기 위한 구엘 공원 등도 잇따라 선보였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사생활이 곧 건축이었던 가우디는 낡은 침대 하나만 남기고 192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지만 건축 작품은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에 마르지 않는 샘처럼 영원한 풍요를 선사하고 있다.

(출처 - 99%의 롤모델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2. 안토니 가우디의 생애와 작품

최근 수정 시각: 2023-01-18 21:49:40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í
본명
안토니 플라시트 길렘 가우디 이 코르네트
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i Cornet
출생
스페인 카탈루냐 레우스 (혹 리우돔스)
사망
1926년 6월 10일 (향년 73세)
국적
직업
묘소
종교
대표작
카사 밀라
구엘 공원
카사 바트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1. 개요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21세기인 지금도 바르셀로나를 빛낸 건축가이자, 스페인 건축학의 아버지이다. 일반적인 천재와는 다르게 생전에 이미 대성공한 건축가로서 스페인의 아르누보 건축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며, 스페인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본명은 카탈루냐어식으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지만 카스티야어(스페인어)식 이름인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í)'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캄 데 타라고나(Camp de Tarragona) 바시 캄(Baix Camp)의 레우스(Reus) 혹은 리우돔스(Riudoms)라는 마을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우디의 아버지 프란세스크 가우디 이 세라(Francesc Gaudí i Serra, 1813~1906)와 어머니 안토니아 코넷 이 버트란(Antònia Cornet i Bertran, 1819~1876)은 주물 장인 집안이었다.[1]

전기에 따르면 애늙은이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어렸을 적부터 류마티스를 앓아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또한 고향 근처의 옛 유적을 복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은 그의 사후 함께 복원을 꿈꾸었던 친구인 토다가 이뤄낸다.[2] 1살 위인 둘째 형 프란세스크[3]와의 관계가 각별했는데 건장했던 그가 몸이 약했던 가우디를 많이 업고 다녔다고 한다. 훗날 이 프란세스크의 존재와 그의 이른 죽음이 가우디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적도 좋지 못하고 몸도 허약했던 가우디는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게 그가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25세에 건축사 자격을 딴 후[4] 시청 산하의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 받으면서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다. 본격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가면서 수입도 늘게 되고 허약했던 몸도 많이 건강해졌다는데, 혈기왕성한 청춘의 시기였다 보니 밤이면 밤마다 거리를 누비며 놀러다녔다고. 대신 술은 약해서 주로 미식을 즐겼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카페의 단골이었는데, 본인이 좋아서 가는 것도 있었겠지만 이제 막 활동하던 시점이라 인맥을 넓혀 좀 더 큰일을 맡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다.[5]

1878년 카사 비센스[6]를 건축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7] 그 후 카탈루냐의 명문가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83년에는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으며[8] 이 시점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한다.[9] 이것은 아메리카와 직물산업을 기반으로 한 구엘 가문의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 와중에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10] 건축가답게 다양한 수주가 들어왔으며 구엘 가문과 관련된 작품들 외에도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게 된다.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11]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1883년부터는 평생 동안 설계한 '성가정[12]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이런저런 재정문제 등으로 완공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우디 본인도 성당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완성되리라곤 장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슬프게도 나는 내 손으로 이 성당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후손들이, 다음 건축가가 이 건축물을 완성시키고 이곳에 빛을 내려주리라"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고 한다.[13]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카탈루냐 법원 인근의 대로를 건너다 노면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전차의 운전사는 가우디를 지저분한 노숙자로 여겨 그냥 길가에 끌어다 놓은 뒤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고를 목격한 행인들이 가우디를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으나, 볼품없는 차림새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경찰관의 도움을 받아 4번째 택시 운전사가 겨우 운전하여 산 파우 병원(Hospital de Sant Pau)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도 그를 노숙자로 여긴 의사가 크게 다친 그에게 기본적인 치료만 해 주었다. 이후 가우디와 친분이 있던 주임 신부 모센 길 파레스(Mosén Gil Parés, 1880~1936)가 사고 소식을 듣고 가우디를 찾아 병원에 방문하였는데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그를 알아보고선 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닥달한다.

하지만 이 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14]며 치료를 거부한 후 그대로 남았고, 결국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를 죽게 만든 노면 전차 운전사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거부한 택시기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기사 3명과 그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2일 사실상 반(半)국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가정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장례식, 1926년 6월 12일

 

ANTONIUS GAUDI
CORNET
REUSENSIS
ANNOS NATUS LXXIV
VITAE EXEMPLARIS VIR
EXIMIUSQUE ARTIFEX
MIRABILIS OPERIS HUJUS
TEMPLI AUCTOR
PIE OBIIT BARCINONE
DIE X JUNII MCMXXVI
HINC CINERES TANTI HOMINIS
RESURRECTIONEM MORTUORUM
EXPECTANT
안토니우스 가우디
코르네트
레우스 출신
향년 74세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위대한 예술가이며
경이로운 이 교회의
건축가
1926년 6월 10일
바르셀로나에서 세상을 떠나다
이 위대한 인간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기대하노라
 

세상을 떠나고 불과 10년이 지난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성가정 대성당의 지하묘지가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었고 가우디의 무덤도 훼손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우디의 제자로 일한 적이 있는 만화가 리카르드 오피소(Ricard Opisso, 1880~1966)가 간신히 막았다. 하지만 오피소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의해 무덤 안에 공화파의 무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파헤쳐지고 만다. 그나마 관뚜껑까지 뜯겨나가는 참극은 면했지만 무덤은 파헤쳐진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대가 1939년 바르셀로나를 점령한 후에야 비로소 무덤을 다시 봉인할 수 있었다.
 
 
 
수난의 파사드에 설치된 조각상
 
 
 
2000년대 초엽에는 그를 복자 시복할 것을 건의하는 운동이 있기도 하였다. 성가정 대성당의 수난의 파사드 부분을 맡은 조제프 마리아 수비락스 이 시자르(Josep Maria Subirachs i Sitjar, 1927년 3월 11일 ~ 2014년 4월 7일)는 이미 가우디를 성인으로 간주하여, 성상 사이에 가우디의 옆모습을 본따 끼워 넣어 두었다.

하지만 당시 가우디의 친구들은 고인이 보면 비웃을 일이라면서 이런 걸 불쾌하게 여겼고, 후손들도 반기지 않고 있다. 일단 시복시성 청원은 교황청에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판정해서 심사 절차를 개시했지만, 복자 내지 성인으로 인정받는 데 필요한 기적 등의 조건을 충족시킬 근거, 사례가 없다보니 실질적인 진전은 없는 상황이다.
 
 

3. 성향

거대한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영향을 받아왔던 것일지도.

또한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였다. 젊었을 적에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교회 관련 건축 일을 하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을 때엔 성당 내 사무실에서 살 정도였다.

건축 성향은 카탈로니아 전통 복고주의 + 아르누보 정도로 대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의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취향과 건축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소화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등등 서양 전통뿐만 아니라 인도 문명, 이집트 문명, 중국 문명, 마야 문명 잉카 문명, 역사 이전의 석기시대 건축들, 오컬트 신비주의, 심지어 곤충이나 식물 및 동물들의 형태에서까지 모티브를 따와 건축물에 반영하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나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거기에는 기존 서양건축에서 고전건축을 리바이벌할 때 나타나는 엄격한 절차나 규칙이 무시되어 가우디만의 독특한 원칙에 의해 배치되었는데, 이건 사실 탈권위성이 강한 아르누보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우디의 건축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재발견되어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주류였던 모더니즘을 벗어난 완전 독자적인 외딴 섬같은 건축이었고, 후대에 계승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가우디의 양식은 가우디만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며, 카탈로니아의 전통 건축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양식으로 만든 것 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재 건축가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그러한 독특함 속에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 역시 가지고 있다. 일견 멋으로만 보이는 둥근 천장과 나무 같은 기둥들은 무게, 즉 힘의 흐름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며, 효율적인 구조가 아름다운 구조라는 개념을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채광이나 환기와 같은 건축물의 기능 역시 충실하게 설계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 한마디로 예술적인 감성과 치밀한 공학을 조화시킨 점에서 진정 천재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게다가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무에서도 직접 미장공이나 타일공을 섭외하고 부르는 등 자신의 건축물이 지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 쓰는 건축가로 유명했다.
 
 

4. 기타

가우디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현란한 색감의 타일아트는 그의 독창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제자이자 동료였던 조제프 마리아 주졸 이 지베르트(Josep Maria Jujol i Gibert, 1879~1949)와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가우디 본인은 색을 배합하는 능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실제로 그와 같이하지 않은 가우디의 작품에는 그러한 타일 장식이 없다.

조제프 마리아 주졸은 단순히 가우디의 제자가 아닌 독립된 건축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성가족 대성당 같은 큰 프로젝트는 끝내 맡지 못했다. 대공황에 따른 건축 경기 불황 탓에 1932년을 마지막으로 교회나 주택 같은 자잘한 건물 보수만 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15]

을 잘 못마시는 대신 줄담배를 피웠다는데 골초였던 듯하다. 함께 일하던 조각가 로렌소가 "연기 때문에 모형이 뿌옇게 보인다"라고 말했을 정도.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는지, 41살에 단식으로 생명이 위태롭던 시기에도 담배만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던 사람이 50살 무렵 친구인 토라스 신부와 함께 담배를 끊었다고 하니, 사람일은 참 알 수가 없다.

일하던 현장에서 처음 만난 '페피타'[16]라는 여성[17]을 사모한 적이 있는데 5년 동안 매주 일요일이면 늘 그녀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한참 만나던 시기 그녀는 이혼조정 중이었는데, 이혼이 성립된 때에 가우디가 청혼을 했으나 페피타의 손엔 이미 다른 남자가 끼워준 약혼반지가 있었다 한다. 실연의 충격이 상당했던 것인지 이후 가우디가 어떤 사람과도 연애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데뷔 당시 신인이다 보니, 어쩌다 들어오는 일이라고는 점포장식이 고작이었다 한다. 인맥의 중요성을 느낀 그는 카탈루냐주의 과학적 탐방협회[18]라는 업계 모입에 가입, 협회 임원에도 입후보하며 내키지 않는 집필활동과 행사에도 매번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 결과 회원 중 경제계의 거물들이 그에게 큰 프로젝트를 맡기기 시작하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가로 지명받았으며, 카페의 내장 디자인으로 점포 디자인상까지 수상하게된다. 가우디 같은 거장도 한때 그런 시기가 있었으니 그때도 지금 못지않게 인맥이란 게 상당히 중요했었던 듯.

화끈하게 놀고 일욕심에 바쁘게 지낸 청춘이 간 뒤 그 10년의 세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19], 이후 36세부터 그는 경건한 가톨릭 신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주변엔 한때 200여 명에 달하는 장인들이 있었다 한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물품들이 추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이셨던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말년엔 성가정 대성당 건설에 매진하여 두문불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늙은 모습이 찍힌 사진도, 어떤 행사 중에 우연히 찍힌 옆 모습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로 인해 가우디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사망 당시 본인이 밝히기 전까지 모두가 일개 노숙자로 알았던 걸로 보인다.[20]
 
 
 

 5. 작품

5.1.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작품

  • 카사 비센스(1879~1888)
  • 구엘 별장(1884~1887)
  • 구엘 궁전(1886~1889)
  • 성 테레사 수녀원 학교(1888~1890)
  • 카사 칼베트(1890~1898)
  • 벨예스구아르드(1900~1909)
  • 구엘 공원(1900~1914)
  • 미라예스 농장
  • 카사 바트요(1904~1906)
  • 카사 밀라(1906~1910)[26]

5.2. 카탈루냐의 가우디 작품

  • 구엘 술창고(보데가 구엘)
  • 몬세라트 성지 보수공사
  • 팔마 대성당 보수공사
  • 구엘 성지(성당)(1887~1918)[27]

5.3. 스페인의 가우디 작품

  • 엘 카프리초 별장(1883~1885)
  • 아스토르가 주교관(1887~1893)
  •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1892~1893)
 

[1] 아버지는 프랑스계 가우디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코르네트 가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판 장인이었는데, 가우디는 아버지가 구리냄비를 만드는 과정을 줄곧 지켜봐왔다고 한다.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난 뒤 바로 귀가하지 않고 아버지의 작업장에 죽치며 질리지도 않는지 하루 종일 구경했다고 한다.[2] 에두아르트 토다 이 궬(Eduard Toda i Güell, 1855년 ~ 1941년), 조제프 리베라 이 산스(Josep Ribera i Sans, 1852년 ~ 1912년), 가우디 이 세 동기는 현재는 세계 문화유산이지만 당시 황폐해져 있던 포블레트 수도원을 보곤 소년시절부터 복구 도안을 그렸다고 한다. 그 도안은 가우디가 17세에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토다가 그린 것이란 말도 있다. 여담으로 이 셋은 학창시절 '엘 아를레킨(El Arlequín)'이라는 기관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3] 워낙 늠름하고 명석했던지라 부모의 기대가 굉장히 컸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4] 가우디가 건축학교를 졸업할 당시, 학장은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바보에게 주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오직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학장이 이런 말을 남긴 이유는, 가우디가 예전에 한번 그의 건축물을 비난해서 가우디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번은 그를 낙제시켰으나 가우디의 재능을 알아본 한 교수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고 가우디가 그것을 완성시켜서 마지못해 졸업장을 준 것이다.[5] 스페인은 광장 문화에다 야행성이기에 나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겨울을 제외하고 낮에는 고온건조한 날씨 때문에 다니기 힘들다. 시에스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6] 타일을 베이스로 한 아랍식 저택으로 사적인 건물이라 출입불가였으나, 바르셀로나시에서 일부를 매입하여 2017년부터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7] 그리고 이때부터 가우디는 낭비 전문 건축가라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당시에 타일이란 꽤나 고가였는데 가우디는 당시 건축주가 타일공장을 경영해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왜곡되어 소문으로 퍼진 듯.[8] 바로 이 해부터 가우디는 성가정 대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당 건립을 진행하고 있던 교구에서 원래 고용했던 건축가를 가우디로 교체한 것.[9] 대표적으로 핀카구엘. 가우디의 후원자인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에게 처음 의뢰받았던 일로 구엘 백작이 가족과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지은 별장이라고 한다. 지금은 북쪽 문주변만이 남았다. 문을 장식하는 주철로 만들어진 큰 용이 꽤나 인상적인 작품.[10] 꼭 그렇다고 보긴 어렵지만, 언론에서 가장 자주 언급한 건축가인 것은 분명했다.[11] 특이하게 돌을 쌓아올린 다음 깎아서 곡선 형태로 지은 건물. 그의 후기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두 작품 모두 좋아한다고 한다. 두 곳 다 고급아파트로 이용되었다.[12]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성 요셉[13] 원래 구엘이 후원하다가 아들의 사업을 돕기도 해야 하고 너무 돈도 많이 들어가 중간에 빠졌다. 워낙 거대한 규모의 설계를 하였다는 게 문제겠지만, 성가정 대성당이 속한 교구가 유지되려면 일정 규모의 거대한 성당은 반드시 필요했다. 전혀 터무니없이 무리한 규모로 설계,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성가정 성당은 착공 당시부터 공사기간을 200년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속죄 교회로서 후원금으로만 지어질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14] 물론 가우디는 파레스가 그를 보았을 때 이미 치료를 받아 회생하기에는 너무 늦었으며, 그가 한 발언도 확실한 것은 아니고 썰이라고는 하지만, 이 사람의 성격상 충분히 이렇게 말하고도 남았을 법도 하다.[15] 만화 갤러리 페이크에 보면 가우디와 지베르트에 관한 에피소드도 나온다.[16] 'pepita'란 말엔 과일 열매라는 의미도 있다 한다. 슬램덩크 배가본드의 작가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화가인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그녀의 이름을 창조의 pepita를 찾는단 의미로 가우디의 흔적을 찾아 떠난 스페인 여행기를 담은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가우디의 동경의 대상이란 의미도 포함했다고.[17] 금발에 키가 큰 상당히 멋진 여성이었다고 한다. 결혼을 총 3번 했다고. 마성의 여인[18] 회원은 건축가뿐만이 아니라 저명한 문화인이나 종교 관계자, 경제계의 거물 등 대단한 인물도 많았다 한다.[19] 당시 자료인 사진상으론 머리도 밀고 옷차림도 비교적 후줄근해졌다.[20] 생각해보면 노숙자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한 것도 상당히 씁쓸한 사실이다. 특히 피해자가 가우디라서 운전자나 승차와 입원을 거부한 택시기사들, 병원들이 처벌을 받은 것처럼 보여서 더 그렇다.[21] 2005년 등록확장[2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5] 가우디가 살아있을 때 완성된 부분은 지하제실, 탄생의 파사드, 4개의 탑 정도에 불과했다. 가우디는 2082년 완공을 상정했으나 현재는 그보다 훨씬 짧아진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이는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2026년에서 훨씬 늦어질 듯하다.[26]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현재는 지붕과 일부 방들을 관람할 수 있다. 카사 밀라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카사 바트요에 도달한다.[27] 원래는 성당을 지으려 했지만 지하제실 공사에서 멈추었다. 사실 성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주거단지를 짓는 것이 목표이기도 했다.
 
 
 

안토니 가우디 - 나무위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

namu.wiki

(출처 - 나무위키)

 

 

 

 

 

3.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 Basílica de la Sagrada Família


안토니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아〉

ⓒ Canaan

주소 : Carrer de Mallorca 401, Barcelona
대중교통 : 지하철 마요르카(Mallorca), 사르데냐(Sardenya) 역
개관 시간 : 10월-3월 오전 9시-오후 6시, 4월-9월 오전 9시-오후 8시
휴관일 : 1월 1 · 6일, 12월 25일 오후 · 26일
입장료 : 13.5유로(학생, 18세 미만 11.5유로, 10세 이하 무료)
홈페이지 : www.sagradafamilia.cat


아마도 가우디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건축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즉 성가족 성당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그 규모가 워낙 크고 계획도 현대 건축물답지 않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1-2년이면 건물을 ‘뚝딱’ 짓고 삼십 년 된 아파트는 당연히 헐어 버려야 마땅한 퇴물 취급을 하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럽의 성당 중에는 짓는 데 몇 백 년이 걸린 곳이 허다한데,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1883년, 한 독실한 가톨릭 단체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신자들의 모금으로 가우디에게 성당 건축을 맡겼다. 한 해 전에 다른 건축가가 처음 설계를 시작했던 것을 이어받았는데, 이 작업은 가우디가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는 다른 건축가들이 넘겨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의뢰 받은 다른 일과 함께 진행해 오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만 매달렸으며, 심지어 성당 옆에 숙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일하며 살기까지 했다. 가우디는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성당 건축이 마무리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성당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 않다. 난 늙을 테지만 내 뒤를 다른 사람들이 이어갈 것이다. 작품의 정신은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세대의 것이다.”

1926년, 그는 전차에 치여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3일 후에 사망했다. 그가 눈을 감은 병원은 루이스 도메넥 이 몬타네르라는 또 다른 모데르니스모 건축가가 설계한 산타 크레우 이 산트 파우 병원(Hospital de la Santa Creu i Sant Pau)이었다. 이곳은 가우디가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 그의 유해는 성당 안에 묻혔으며 병원에서 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도착하면 누구나 높이 솟은 탑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직육면체도 원통형도 아니고, 꼭짓점이 뾰족하지도 않은, 타원형을 아주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탑이다. 예수의 열두 사도들에게 봉헌되는 열두 개, 복음서 저자들을 위한 네 개,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씩 해서 모두 열여덟 개의 탑이 지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의 동쪽, 그러니까 연못이 있는 공원 쪽에 가까운 곳이 가장 먼저 지어 올리기 시작한 ‘예수 탄생’ 파사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오는 수태고지 장면, 예수 탄생 장면, 동방박사와 목동이 경배하러 오는 장면 등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파사드 위의 탑 네 개 중 우리가 보기에 가장 왼쪽에 있는 탑이 성 베르나베(사도행전의 바르나바)에게 봉헌된 탑인데, 가우디가 살아 있을 때 유일하게 완성된 탑이라고 하며 높이는 100미터에 이른다.

 

 

‘예수 탄생’ 파사드의 모습

ⓒ Chris Haikney

 

 

‘예수 탄생’ 파사드에는 예수가 태어난 장면의 조각도 있다.

 

성당의 서쪽은 ‘예수 수난’ 파사드다. 예수의 수난 장면을 재현해 낸 사람은 조세프 마리아 수비락스(Josep Maria Subirachs)라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조각가로, 1987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을 맡았다. 예수의 수난, 고통, 죽음, 희생이라는 주제를 다룬 조각은 서쪽 하늘에서 해가 질 때 점점 어두워지는 풍경과 드라마틱하게 어울린다.

 

 

‘예수 수난’ 파사드의 모습

ⓒ Bernard Gagnon

 

 

 
‘예수 수난’ 파사드에 있는 조각들

ⓒ Rp22

 

 

가우디는 고딕 양식의 라틴 십자가형 플랜(한쪽이 나머지 셋보다 긴 십자가 모양의 도면)에서 시작하여 기하학적인 형태와 자연의 모티프를 사용해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성당을 설계했다. 가우디가 1926년에 사망한 뒤, 1930년에 ‘예수 탄생’ 파사드와 종탑이 완성되었다. 스페인 내전 중에 가우디의 작업실에 화재가 일어나 설계도와 각종 사진, 자료 등이 불탔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계속 이어졌고, 내전이 끝난 1939년 이후에는 속도는 느리지만 공사가 재개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사에 사용된 기술도 현대의 기술로 바뀌었다. 시멘트도 활용하지만 가우디 특유의 모자이크(트렌카디스(trencadÍs) 기법이라고 한다. 색유리나 도자기 등을 깨뜨린 후 붙이는 방식으로, 곡면에 모자이크를 제작하기가 좋다) 제작 방식은 계속 이어진다. 2010년에는 성당의 내부가 완성되어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가 집전하는 봉헌 미사가 거행되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마치 키가 큰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가 사망한 지 백 년 되는 해인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1990년대에 이곳을 처음 봤을 때는 과연 그때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십 년 조금 넘게 기다리면 완성된 성당을 볼 수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성당 내부 공사 중인 모습

ⓒ GNN Free Documentation License

 

 

 
성당 안 가우디의 무덤

 

출처

스페인 미술관 산책 | 최경화 | 시공아트

"예술의 나라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국립카탈루냐 미술관,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등에 소장..펼쳐보기

 

 

 

 

 

4.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물

 

바르셀로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가우디가 만든 건축물들이다. 1852년 6월 25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에서 주물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들어간 바르셀로나의 건축 학교에서도 가우디에 대한 교수들의 평가가 갈릴 정도로 개성이 강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의 모든 작품은 자연을 모티브로 삼았고, 직선보다는 곡선의 디자인을 중시했으며, 소재의 선택에서도 남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가우디의 마지막 작품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붕은 기암절벽으로 유명한 카탈루냐의 성지인 몬세라트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되었으며, 가우디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이러한 가우디의 건축을 사랑하고 평생토록 후원한 이가 바로 구엘 백작으로, 가우디는 그의 후원 아래 자신의 역량을 아낌 없이 발휘하여 구엘 궁전, 구엘 공원, 구엘 저택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구엘 공원은 원래 대규모의 주택 단지로 계획되었으나 구엘이 사망하면서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총 3채만 분양되었고, 결국 완공되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훗날 구엘 가족들이 이곳을 시에 기증하면서 지금은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는 시민들의 공원으로 오픈되어 있다.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에서 공통적으로 남겨진 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평생 독신으로 살아갈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1883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을 맡아 40여 년을 열정을 쏟던 가우디는 1926년 6월 7일 산책길에 나섰다가 전차에 치었는데, 당시 가우디의 행색이 너무 초라하여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가우디는 친구들 품에서 1926년 6월 10일 세상과 작별을 했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지하 납골묘에 안치되었다. 그의 건축물 중 7개의 건축물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 Cornet)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라시아 거리 가로등 벤치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보도 블록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우디 투어

스페인 건축계의 거장 가우디의 건축물을 따라 바르셀로나를 둘러보자. 바르셀로나에는 대규모의 건축물들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가우디의 디자인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누구나 밟고 다녔을 보도 블록, 그라시아 거리의 가로등 벤치, 그리고 가우디가 대학 시절 디자인한 레알 광장의 가로등까지, 바르셀로나에는 가우디의 흔적이 가득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건축물에 담긴 천재성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모여들고 있다.

 
1. 카사 바트요
 
카사 바트요

가우디가 건축물에 남긴 십자가 모양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2.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에서 카사 밀라까지는 도보로 5분 정도 소요된다.

 

 

카사 밀라

가우디가 건축물에 남긴 십자가 모양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3. 카사 비센스

카사 밀라에서 카사 비센스까지는 22번 버스로 5분 정도 소요된다.

 

 

카사 비센스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4. 구엘 공원

카사 비센스에서 구엘 공원까지는 24번 버스로 25분, 구엘 공원 후문에서 하차한다.

 

 

구엘 공원

가우디가 건축물에 남긴 십자가 모양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5.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까지는 구엘 공원 후문에서 92번 버스로 25분, 에비뉴 가우디(Av. Gaudi) 하차 후, 도보로 10분 또는 19번 버스로 환승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6. 레이알 광장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레이알 광장까지는 메트로 2호선으로 15분, Sagrada Família 역에서 메트로 3호선으로 환승, Liceu 역에서 하차한다.

 

 

레이알 광장

가로등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7. 구엘 저택

레이알 광장에서 구엘 저택까지는 도보로 2분 정도 소요된다.

구엘 저택

ⓒ 넥서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출처
 
ENJOY 유럽 | 문은정 외 | 넥서스

미리 만나는 유럽! 유럽 주요 도시부터 근교 도시까지 12개국 70개 도시의 최신 정보를 담았다. 인기 명소 정보와 생생한 현지 사진까지 나만의 특색있는 유럽 여행을 ..펼쳐보기

 

 

 

 

 

 

 

5. '140년째 건설 중' 가우디 파밀리아 성당, 중앙탑 6개중 3개 완공

등록 2022.12.15 11:30:20

  •  

가우디가 세운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 가족 성당)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의 평생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2026년 그 모습을 완전히 갖출 예정이다.

13일(현지시간) 외신 리버플리카(República), 성가정성당 공식 홈페이지 등에 따르면 140년 넘게 공사가 중인 이 성당의 중앙탑 6개 중 3개가 완공됐다고 전했다.

성당 측은 '성 루카 복음사가 탑'과 '성 마르코 복음사가 탑'의 완공을 기념해 16일 성탄콘서트를 열고 17일부터 2023년 1월8일까지 조명을 밝힐 예정이다.  

나머지 '성 요한 복음사가 탑'과 '성 마태오 복음사가 탑'은 2023년까지 완공되고 안토니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까지 가장 높은 172m에 달아는 본당 '예수 그리스도 탑'이 완공될 예정이다.

성당은 2026년까지 이 대성당을 완공하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공사가 지연되어 왔다. 성 요한 복음사가 탑과 성 마태오 복음사가 탑은 지난해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1년 미뤄졌다.
138m 높이로 이 성당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성모 마리아 탑은 지난해 12월 완공됐다. 

1882년 시작된 이 성당 건설은 처음에는 건축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델 비야르(1828-1901)의 프로젝트였다. 그가 사임되고 다음 해 가우디가 이를 넘겨 받았다. 그는 1926년 사망하기 전까지 이 성당 건축에 전념했다. 개인의 기부금으로 건축되어 온 이 성당은 1926년까지 전체의 25% 밖에 완성되지 못했다.
(출처 - 이수지 기자. 공감언론 뉴시스 suejeeq@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