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출생 ; 1887. 10. 6, 스위스 라쇼드퐁 |
사망 : 1965. 8. 27, 프랑스 카마르탱 |
국적 : 스위스/프랑스 |
요약
현대건축에 이론적 연구의 숨결을 불어넣은 선구자이자 도시 거주자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그는 라쇼드퐁의 장식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스승 레플라트니에로부터 배웠다. 그의 건축 디자인은 기능주의와 대담하고 조소적인 표현주를 결합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른바 국제주의 건축의 제1세대로서 수많은 저서를 쓴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건축에서 그 세대 기능주의자들의 열망과 표현주의적인 강렬한 감각을 결합시켰고, 금욕주의와 조소적 형태를 추구하는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기법으로서 거친 마감 콘크리트 사용을 연구한 최초의 건축가였다. 50여년 동안 활동하면서 중앙유럽, 인도, 러시아, 미국 등지에 건축물을 세운 그는 탁월한 도시계획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건축가, 디자이너
ⓒ Alonso de Mendoza / 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근대건축운동의 기능주의와 대담하고 조소적인 표현주의를 결합한 설계가 특징이다.
이른바 국제주의 건축의 제1세대로서 수많은 저서를 쓴 가장 유능한 주창자였다(국제주의 양식). 그는 자신의 건축에서 그 세대 기능주의자들의 열망과 표현주의적인 강렬한 감각을 결합시켰고, 금욕주의와 조소적 형태를 추구하는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기법으로서 거친 마감 콘크리트 사용을 연구한 최초의 건축가였다.
어린시절의 교육
그는 산으로 둘러싸인 스위스 쥐라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18세기부터 정밀시계의 세계적인 중심지였다. 이곳의 거친 자연환경과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적인 문화환경은 그의 전생애에 걸쳐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13세 때 초등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시계문자판 에나멜 세공을 배우기 위해 라쇼드퐁의 에콜데자르데코라티프(장식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훗날 그가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불렀던 샤를 레플라트니에에게서 미술사, 소묘, 아르 누보의 자연주의 미학을 배웠다.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친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고 갈 길을 정해주고 그 지역 건축계획 실무를 처음으로 맡겼던 사람은 바로 레플라트니에였다.
스승의 충고를 따라 그는 1907~11년에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은 독학으로 건축을 배운 그에게 교육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중부 유럽과 지중해를 두루 여행하면서 중요한 3가지 건축요소를 발견했다. 토스카나 지방의 갈루초에 있는 에마 수도원을 둘러보고 거대한 집단공간과 그의 주거건물 개념의 기초를 이룬 '개별적인 단위생활공간'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깨달았고,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에 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16세기 후기 르네상스 건축과 그리스의 고대 유적에서는 고전적인 비례를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와 발칸 반도의 민중건축을 통해 기하학적 형태를 발견했으며 빛의 처리와 건축적 배경으로서 조경(造景)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30세 때 파리로 이주했고 1년 뒤 그에게 세련된 현대예술을 소개해 준 화가 겸 디자이너인 아메데 오장팡을 만나면서 자신의 형식을 완성했다. 오장팡은 입체파의 난해한 추상개념을 거부하고, 일상적 사물이 가지는 순수하고 기하학적 형태로 되돌아간 자신의 새로운 회화미학, 즉 순수주의를 가르쳐주었다.
1918년 이들은 순수주의 선언인 〈입체파 이후 Aprés le cubisme〉를 함께 집필하여 출판했다. 1920년에는 시인인 폴 데르메와 함께 비판적 전위예술 평론지 〈에스프리 누보 L'Esprit Nouveau〉를 창간했다. 훌륭한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예술과 인간애를 지향한 이 잡지는 아돌프 로스와 헨리 반 데 벨데가 이미 표현했던 건축 및 도시계획의 개념들을 제시했고 구조와 상관없는 정교한 장식과 과거의 '양식'에 맞서 싸웠으며, 기능주의를 옹호했다.
오장팡과 손을 잡은 르 코르뷔지에는 화가이자 저술가로서 새로이 발을 내딛었다.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이때까지도 잔레라는 이름을 썼음)는 필명으로 〈에스프리 누보〉지에 여러 글들을 함께 발표했다. 오장팡은 할머니의 이름인 소니에를 선택했고 잔레에게 아버지쪽 조상 이름인 르 코르뷔지에를 쓰라고 권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이 잡지에 쓴 글은 한데 엮어져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나중에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Toward a New Architecture〉(1923)라고 영어로 번역된 이 책은 구어체로 씌어졌으며 이러한 문체는 오랫동안 논객(論客)으로 활동한 그의 특징이었다.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와 "구부러진 거리는 당나귀가 다니는 길이지만, 곧게 뻗은 거리는 인간을 위한 도로이다"라는 2가지 말은 그가 남긴 유명한 선언이다. 그의 저술들은 다음 세대 건축가들에게 하나의 성서 같은 역할을 했는데, 거기에 쓰인 사고의 본질적인 방향은 여행과 강연을 통해 생겨난 것으로서 45년간 거의 바뀌지 않았다. 유명한 저서로는 〈도시계획 Urbanisme〉(1925)·〈성당은 언제 흰색이 되었는가 Quand les cathédrales étaient blanches〉(1937)·〈아테네 헌장 La Charte d'Athènes〉(1943)·〈도시계획론 Propos d'urbanisme〉(1946)·〈3개의 인간시설 Les Trois Établissements humains〉(1945)·〈모듈러 Le Modular I〉(1948) 등이 있다.
그에게 〈에스프리 누보〉지는 실무를 시작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1922년에 사촌인 피에르 잔레와 함께 스튜디오를 열어 1940년까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이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준으로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그의 작품의 두 시기 가운데 첫번째 시기에 해당하며 두번째 시기는 1944년부터 1965년 죽을 때까지로 나뉜다.
제1기
1922~40년은 도시계획과 건축설계 계획안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온 시기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완공한 건물은 물론, 실행하지 않은 계획안들도 발표하자마자 곧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22년 '살롱 도톤'에 사회환경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고, 이 시기 모든 작품의 근본 사상을 담은 2개의 계획안을 출품했다. 이 가운데 하나인 '시트로앙 주택'은 5년 뒤 그가 근대건축의 개념이라 정의했던 5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즉 구조물을 받치기만 하고 건물 아래의 지면을 개방시키는 기둥, 주택에서 필수적이면서도 정원으로 바꿀 수 있는 테라스, 개방된 평면, 장식이 없는 정면, 구조틀과 독립적임을 나타내는 옆으로 긴 창이 모두 사용되었다. 내부는 개방된 스플릿 레벨(split-level:반 층마다 높이를 달리 한 것)의 거실공간과 셀 모양 침실이 전형적인 공간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출품한 한 도시의 축소모형은, 무리지어 있는 마천루의 기부(基部)에 있는 정원과 녹색공원 개념을 시대에 앞서 표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준(準)공식 전람회였던 '살롱 도톤'에서 시작했던 도시계획 개념을 발전시켜 1925년 파리의 장식미술 전시회 때 '새로운 정신(esprit nouveau)의 선언서'가 될 하나의 건축을 출품했다. 화가 페르낭 레제의 영향으로 내부 벽을 강렬하게 채색한 이 자그마한 복층 주거 안에 자신이 디자인해서 상업적으로 생산된 첫번째 가구들을 전시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르 코르뷔지에의 사회적 이념은 2가지 형태로 실현되었다.
하나는 1925~26년 한 실업가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이룩한 것으로, 보르도 근처의 페사크에 시트로앙 주택양식으로 40가구를 갖춘 노동자 도시 건설이었다. 그러나 이 주택단지는 지역전통을 경멸하고 관습을 벗어난 색채를 사용했기 때문에 시(市) 당국의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당국은 상수도 공급을 거절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페사크 주거단지에는 6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으며 르 코르뷔지에는 이 모욕을 잊을 수 없었다.
1927년 그는 미적으로 가치가 높은 기능제품 생산에 관심을 가진 여러 집단의 모임인 '독일공작연맹'이 개최한 국제 박람회에 참가했다. 이 박람회를 위해 슈투트가르트 실험 주거지역인 바이젠호프에 2채의 주택을 지었다.
비록 그는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위한 건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주로 개인주택을 의뢰했던 특권층 사람들을 위한 건물을 지었다.
그 주택들은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와 장식 없는 정면을 결합하여 기능적 디자인과 절제있는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1922년 오장팡을 위해 지은 주택을 비롯해 후에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재단(1968) 지부로 쓰인 스위스 수집가 라울 라 로슈 저택(1923), 야수주의와 입체파를 후원한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형제인 마이클 스타인 저택(1927), 푸르른 시골 풍경 속에 자리잡아 가느다란 콘크리트 기둥 위에 지어진 푸아시의 사부아 저택(1929~30) 등이 있다.
1927년 르 코르뷔지에는 제네바에 새 본부를 세우기 위해 국제연맹이 실시한 설계경기에 참가했다.
단열유리벽을 쓰도록 설계한 그의 계획안은 기능적 분석에 대한 건축가의 재능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한 예이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정치기구를 위한 건물로서 신고전주의적 신전 대신에 엄격한 기능 분석에 걸맞는 구조와 디자인을 한 사무용 건물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 계획안은 미래에 탄생할 국제연합(UN) 관계 모든 건물의 전형이 되었다. 아마 설계경기의 규칙대로 먹을 사용해 그렸다면 1등상을 차지했을 것이다.
페사크에서 좌절을 겪은 그로서는 보수적인 심사원들이 꾸민 음모임이 거의 분명한 이러한 결격조항 때문에 공식적인 건축계에 더욱 실망했다. 그러나 그의 낙선과 함께 떠돈 소문으로 그는 근대적 전위건축가라고 알려지면서 더욱 명성을 얻었다. 제네바 사건에 따른 즉각적 조처로서 무엇보다도 근대 전위건축의 가치를 옹호할 목적으로 1928년 스위스의 라사라즈에서 근대건축국제회의(CIAM)가 창설되었다.
1930년경 이미 이 기구는 도시계획이론을 지향했다. 프랑스 지부장이었던 르 코르뷔지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열린 5번의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제4차 회의에서 근대건축의 몇 가지 기본원리를 자세히 기술한 선언서를 채택하는 데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또한 제네바 설계경기에서 얻은 명성 덕택에 남아메리카에 강연차 여행을 떠나 이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과 도시계획의 기존 상태에 관한 소고 Précisions sur un état présent de l'architecture et de l'urbanisme〉(1930)를 썼으며 모스크바로도 여행하여 전위적인 구성주의 건축가들을 만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첸트로소유스 빌딩(1929~35) 설계경기에 당선했다.
그밖에 르 코르뷔지에는 이 기간에 2개의 주요건물을 건립했다.
하나는 파리의 구세군회관으로, 개방할 수 없는 유리면으로 인식되었던 벽에 공기조화장치를 설치해 '호흡하는' 유리벽을 시도했다(기술적·재정적으로 실패함). 또 하나는 파리의 '대학도시'에 있는 스위스 학생 기숙사(1931~32)이다. 스위스 학생 기숙사에서는 일반 서비스 영역을 별개의 건물에 지정함으로써 거주영역을 분리하고 이 두 부분을 하나의 계단실로 연결했다.
표면은 대부분 마감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으며, 육중한 지주는 처음으로 조소적 가치를 표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합리적 기능주의는 표현의 욕구와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1930년대말에는 알제 시 종합계획(1938~42)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종합계획(1938), 리우데자네이루의 교육보건부 청사(1936),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있는 필리프빌의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박물관(1938)과 같은 아주 유명한 계획안들을 내놓았다. 또한 당시 이미 명성을 얻은 미국으로도 여행을 다녀왔다(1935).
그가 펼쳤던 다양한 활동은 자신이 선택한 생활양식과 일치했다.
동료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교육자가 아니라 우두머리로서, 그는 혼자 자기 사무실에 파묻혀 일을 했으며, 협력자들은 사무실 밖의 기다란 작업장에서 작업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협력자들 중 몇몇은 나중에 유명한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오후에만 사무실에 나왔다. 1925년 오장팡과 헤어진 후에도 화가로서 활동을 계속했고 오전에는 언제나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 중반까지는 몇 안 되는 훌륭한 평생친구였던 페르낭 레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전쟁기간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으로 그는 건축활동과 여행을 중단하고, 그와는 달리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피에르 잔레와 20년에 걸친 협력관계를 마무리지었다.
비록 그는 비시에 세워진 임시정부에 협력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 건설중인 건물은 거의 없었고 그의 유일한 활동이라고는 그림그리기와 글쓰기, 그리고 깊은 사색뿐이었다.
그동안 그는 건축요소들을 인체에 비례하도록 하는 조화로운 치수의 척도인 '모듈' 개념의 첫번째 기초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1950년 마침내 이 이론을 완성하고 그때부터 건물들을 '인간적 척도'로 통합시키길 바라면서 모든 건물설계에 이 개념을 적용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르 코르뷔지에는 전통건축의 옹호자들이 그에게 퍼붓는 비난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대중들에게는 건축의 피카소였던 그가 건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근대성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제2기
르 코르뷔지에는 마침내 그의 계획이론들을 프랑스 재건설에 적용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1945년 생디에 시와 라팔리스로셸 시 계획안을 작성했다. 보주 산맥에 자리잡은 생디에 시 계획안에서는 파괴된 도시의 거주자 3만 명을 기능적인 5개의 마천루에 살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 계획안들은 거부당했지만 곧 전세계로 퍼져 하나의 교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는 쓰라림을 맛보았으며 더욱이 뉴욕의 국제연합 빌딩을 세우기 위해 설계를 직접 맡는 대신 그 건물 설계를 맡은 건축가들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 지명되자 실망이 더 컸다.
프랑스 정부가 무제한으로 후원해준 덕택에 드디어 그는 대규모 (개인) 주거단지를 건설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르세유에 사회적 환경에 대한 그의 이상을 실현할 주거단지 건설을 맡았던 것이다.
'위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으로 불리는 마르세유 계획안은 18층으로 된 수직 공동체 건물로 1,800명의 거주자들이 23개 유형의 복층(즉 스플릿 레벨) 아파트에 살도록 설계되었다. 일반 부대시설로는 건물 내부의 두 '거리'에 가게·학교·호텔 등이 있고, 옥상에 탁아소·유치원·체육관·야외극장이 있다.
선반 속의 병들처럼 콘크리트 틀 구조 속에 층층이 집어넣은 개별 '빌라'처럼 느껴지는 이 아파트는 1952년에 완공되었다. 그밖에 프랑스의 낭트와 브리에, 서베를린에도 이같은 아파트가 지어졌다.
그는 또한 〈종교예술지 L'Art Sacré〉의 창간자이자 도미니쿠스 수도회 창시자인 쿠튀리에 신부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2개의 종교건물을 지었다. 이 가운데 한층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롱샹의 노트르담뒤오 예배당(1950~55)은 그의 기능주의의 유명한 원칙을 만족시킨 건물이다.
시각 효과를 노린 벽은 2배나 두껍게 세웠으며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이는 지붕도 실제로는 수많은 기둥으로 받쳐진 것이다. 이보다 야수적이고 금욕적인 작품이 리옹 근처 이뵈쉬르아르브레슬에 있는 생트마리드라투레트 수도원이다. 정방형의 이 건물은 자연 속에 있는 콘크리트 요새를 연상하게 한다. 3층으로 된 유리창 면에 서정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먼저 창유리 세트를 '음악적인' 간격으로 배열했다.
그가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은 것은 1953년과 1962년 파리에서 열린 대규모 작품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국외에서 대규모 건물을 설계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이다. 1951년 인도의 펀자브 주 정부는 새 수도인 찬디가르 건설을 위해 르 코르뷔지에를 건축고문으로 지명했다. 생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도시계획 원리들을 거대도시 규모로 적용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지역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대법원, 국무부 청사와 의회의사당을 설계했다. 커다란 콘크리트 차양을 친 창문, 마감하지 않은 콘크리트, 조소작품 같은 정면, 급강하하는 지붕선, 기념비적인 경사로 등은 그의 건축의 주요요소였고, 곧바로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1960)과 하버드대학교의 카펜터 시각예술 센터(1964)를 세웠으며, 그가 죽은 뒤 세워진 취리히 박람회관(1964)을 설계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뒤늦게 인정받은 사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고독하고 박해받는 천재상을 더 좋아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계획안들, 즉 프랑크푸르트 예술관(1963), 밀라노의 올리베티 컴퓨터 센터(1963), 스트라스부르의 의회의사당(1964), 브라질리아의 프랑스 대사관(1964)을 설계했다. 그는 1965년 수영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스스로 자신의 시대에 많은 오해를 받았다고 생각한 르 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1968년에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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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 르 코르뷔지에의 생애및 작품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프랑스어: Charles-Édouard Jeanneret-Gris) 또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년 10월 6일 ~ 1965년 8월 27일)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작가이며 현대 건축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30대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현대 디자인의 이론적 연구의 선구자이며 밀집 도시의 거주자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그는 50여 년 동안 활동하면서 중앙유럽, 인도, 러시아에 자신의 건물들을 만들었으며, 아메리카에도 하나씩 건축물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도시 계획가이며, 화가, 조각가, 그리고 가구 디자이너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와 교육, 1887-1913[편집]
르 코르뷔지에는 스위스 서북부에 있는 뇌샤텔 주의 프랑스 국경에서 500km 떨어진 쥐라 산맥에 위치한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프뢰벨 교육법을 채택한 유치원에 다녔다.
르 코르뷔지에는 시각 예술에 매료되어 라쇼드퐁 미술학교에서 부다페스트와 파리에서 공부한 샤를 레플라트니에(Charles L'Eplattenier) 밑에서 공부하였다. 이 미술학교의 건축 교사는 건축가 르네 샤팔라(René Chapallaz)로, 르 코르뷔지에의 초기 주택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젊었을 때에 고향의 다소 지방적이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주 유럽 곳곳을 여행했다. 1907년경 그는 파리로 가서 프랑스의 철근 콘크리트의 선구자인 오귀스트 페레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1910년 10월과 1911년 3월 사이에는 베를린 근교에 있는 건축가 페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와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났으며, 일하면서 독일어를 익혔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경험은 나중에 그가 건축 실무를 함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1911년, 그는 발칸 반도를 여행하면서 그리스와 터키를 방문하여 자신이 본 많은 것들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 중에는 후에 그가 자신의 저서 《건축을 향하여》(1923)에서 그 형태를 칭송한 파르테논 신전을 그린 많은 스케치들도 포함되어 있다.
초기 경력: 주택들, 1914-1930[편집]
르 코르뷔지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모교인 라쇼드퐁 미술학교에서 강의했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파리에 돌아가지 못했다. 4년간 스위스에서 지내면서, 그는 현대적인 기술을 사용한 이론적인 건축 연구를 했다.[1] 그 중에는 "돔-이노" 주택(1914-1915) 계획안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 모형을 통해 최소한의 숫자의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이 모서리에서 지지하는, 평면의 한 쪽에서 각각의 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계단을 지닌 콘크리트 슬라브로 구성된 하나의 개방적인 평면을 제안한다.
이 설계안을 기초로 그는 이후 10년간 대부분의 건축 설계를 진행해 나간다. 곧 그는 사촌인 피에르 잔레(Pierre Jeanneret, 1896-1967)와 함께 건축 실무를 시작하였는데, 1940년까지 동업이 지속되었다.
1918년 르 코르뷔지에는 입체파 화가인 아메데 오장팡(Amédée Ozenfant)을 만나, 그의 작품에서 서로의 공통된 관심사를 알아보게 된다. 오장팡은 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하여, 그들 둘은 합동 작업을 시작한다. 그 둘은 비이성적이고 "낭만적"이라는 이유에서 입체주의를 버리면서 그들의 선언문인 《입체파 이후》(Après le Cubisme)를 출판하였고, 새로운 미술 운동인 순수주의(Purism)을 제창하였다. 오장팡과 잔레는 순수주의 잡지인 《레스프리 누보》(L'Esprit Nouveau)를 창간하였다. 그는 입체파 예술가인 페르낭 레제르와도 친분이 있었다.
필명을 갖다, 1920[편집]
1920년 샤를-에두아르 잔레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라는 이름으로 첫 기사를 작성하는데, 이 필명은 그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인 "르 코르베지에"(Lecorbésier)를 변형한 것으로,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재발명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이 필명은 "까마귀 같은 자"로 해석된다는 건축사학자의 주장이 있다.[2] 성명의 구분이 없는, 하나로만 된 이름을 갖는 것은 이 시기의 많은 영역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특히 파리에서) 유행이었다.
1918년에서 1922년 사이, 르 코르뷔지에는 아무 건물도 짓지 않고, 순수주의 이론과 회화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1922년, 르 코르뷔지에와 잔레는 파리의 세브르가 35번지(35 rue de Sèvres)에 작업실을 연다.[1]
그의 이론적 연구는 다양한 단일 가구를 위한 주택 모형들로 발전했다. 그 중 시트로앙 주택(Maison Citrohan)은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 시트로엥의 말장난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주택을 만들 때에 사용하라고 주장한 현대 산업의 방식들과 재료들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르 코르뷔지에는 두 층 높이를 지닌 거실과 2층에는 침실, 3층에는 부엌을 지닌 3층 구조를 제안했다. 지붕에는 햇빛을 쬘 수 있는 테라스가 있다. 건물의 외부에 르 코르뷔지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대지에서 2층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시기의 다른 설계안들처럼, 이 주택에서 그는 파사드(건물의 정면)에서 연속하게 늘어선 창문들이 넓은 공간 차지하도록 하였다. 이 건물은 직사각형 평면을 가지고 있는데, 외벽은 창문으로 채워지지 않고, 하얗게 색칠한 공간으로 되어 있다. 르 코르뷔지에와 잔레는 내부공간을 관 모양의 금속 틀로 만들어진 움직일수 있는 가구들로 미적으로 채웠다. 조명 설비들은 대부분 장식이 되지 않은 한 개의 전구를 사용했다. 내벽 역시 하얗게 만들었다. 1922년에서 1927년 사이, 르 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잔레는 파리의 건축주들을 위해 많은 개인 주택들을 설계하였다. 파리 근교의 불로뉴 비양쿠르(Boulogne-Billancourt)과 파리 16구에 르 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잔레는 리프시츠 주택, 쿡 주택(윌리엄 에드워즈 쿡 참고), 플라넥스 주택, 그리고 현재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 들어서 있는 라로슈/알베르 잔레 주택(Maison La Roche/Albert Jeannere)을 설계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1930년 프랑스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1]
도시계획에 관여[편집]
몇 년간 프랑스 당국은 파리에 빈민가의 해악이 늘어가는 것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고,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 주택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주거를 제공할 효과적인 방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롭고 현대적인 건축 형태가 하층 계급 사람들의 삶의 질을 끌어 올리는 데에 새로운 구조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의 Immeubles Villas(1922년)은 세포와 같은 공동 주택들이 모인 집합 건물을 제시한 기획으로, 이 평면은 거실, 침실, 부엌과 정원 테라스를 포함하고 있다. 몇 개의 주거 집합 건물을 설계한 뒤, 르 코르뷔지에는 전체 도시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돌렸다. 1922년 그는 300만명의 주민을 위한 "현대 도시"(Ville Contemporaine)의 계획안을 내놓는다. 이 계획안의 핵심은 십자 모양의 60층 고층 건물들의 집합체로, 각 건물은 거대한 유리의 커튼월로 둘러싸인 강철 뼈대 구조의 사무용 빌딩이다. 이 고층건물들은 직사각형 모양의 공원같은 넓은 녹지 안에 세워진다.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교통 중심이 있어, 각각의 층에 철도 역과 버스터미널, 그리고 고속도로 교차로가 위치하며, 맨 위에는 공항이 위치한다. 그는 상업용의 여객기가 거대한 고층건물들 사이에 착륙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가졌다. 르 코르뷔지에는 인도를 차도와 분리하여 교통수단으로서의 자동차의 사용을 찬미했다. 중앙의 고층건물들의 밖에는 더 낮은 층의 지그재그 모양의 집합주택들이 길에서 훨씬 뒤쪽의 녹지 중앙에 배치되어, 주민들이 살 수 있게 하였다. 르 코르뷔지에는 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미국식 공업 모델에서 채택한 테일러적이고 포드적인 전략을 가지고 프랑스의 정치에 관심이 있는 기업가들이 선구가 될 것을 희망하였다. 이론적인 도시 계획안은 계속하여 르 코르뷔지에를 사로잡았다. 1925년 그는 유명한 자동차 제조업체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부아쟁 계획(Plan Voisin)을 전시하였다. 이 계획에서 그는 센 강 북쪽 파리 중심부의 대부분을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직각의 도로 격자와 공원같은 녹지 위에 자신의 "현대 도시"에서 가져온 십자형의 60층 고층건물들을 배치할 것을 주장했다. 프랑스의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은 르 코르뷔지에의 디자인에 깔려 있는 테일러적이고 포드적인 발상들에는 호의를 갖고 있었으나, 그의 계획안에는 비판과 경멸을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안은 도시의 대부분을 둘러싼 비좁고 불결한 환경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담론을 불러 일으켰다. 1930년대에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도시계획에 대한 발상의 범위를 넓히고, 재공식화하여 이들 발상을 1935년에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라는 이름으로 출판한다. 주거는 이제 경제적 위치가 아니라, 가족의 규모에 따라 배정된다. 비시 프랑스 때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계획위원회에 들어가 알제와 다른 도시들을 위해 설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여러 위니테들을 프랑스 각지에 건설하여 작은 규모의 도시계획안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르세유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이다. 1950년대에 그에게 자신의 "빛나는 도시"를 거대한 규모로 이식시킬 특별한 기회가 왔는데, 인도의 펀자브 주와 하리아나 주의 새로운 주도인 찬디가르의 건설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앨버트 메이어의 계획안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사망[편집]
1965년 8월 27일 르 코르뷔지에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프랑스 로크브륀카프마르탱에서 지중해로 수영하러 들어갔다. 그의 시신은 수영하는 사람에게 발견되었고, 오전 11시에 사망을 진단받았다. 77세의 나이에 그는 심장 발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장례식은 1965년 9월 1일 루브르궁 안마당에서 치러졌다.
르 코르뷔지에의 사망은 문화와 정치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 세계적인 경의가 이어졌고,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그의 예술계의 적들도 그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 린든 존슨은 "그의 영향은 전 세계적이고 그의 작품들은 우리 역사상 매우 적은 예술가들만이 갖고 있는 영원한 특성들을 갖고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소련은"현대 건축은 가장 위대한 거장을 잃었다."라고 덧붙였다. 일본 TV채널은 추모식에 맞춰서, 도쿄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을 방송하였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미디어에 의한 오마주였다. 남프랑스의 로크브륀카프마르탱의 그의 묘지에는 매년 관광객들이 찾는다.
발상[편집]
도미노 (Dom-ino) 시스템[편집]
1차 세계대전이후 폐허가 된 도시에 적은 자본으로 효율적으로 집을 짓기 위해 르 코르뷔지에가 1914년에 고안한 시스템이다. 자동차 뼈대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발명한 것으로 얇은 바닥판, 판을 지탱하는 기둥(철근과 콘크리트),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을 집의 구조로 고안하여 간편하고도 실용적인 건축방식이다.[3]
건축적 개념[편집]
도미노 시스템은 얇은 바닥판(4m×4m×10cm의 콘크리트 슬래브)과 6개의 기둥(30cm×30cm) 그리고 한쪽은 고정되고 다른쪽 끝은 자유로운 들보(1m의 캔틸레버) 및 상하로 이동할 수 있는 계단으로 구성된다. 건물의 평면은 보통 3×3 베이의 평면 그리드(정사각형 격자로 구성) 내에서 움직이며, 한 개의 베이는 2.5m×2.5m의 크기로 구성된다. 콘크리트 기초 위에 바닥판이 얹혀 있고 각 층마다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4]
구조 방식[편집]
20세기 초 철근 콘크리트의 실용화 이후, 도미노 시스템은 기둥과 벽의 분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기둥과 벽의 분리는 열린 평면과 자유로운 입면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때의 평면은 3차원적인 입체성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구조, 외피, 간막이벽 등이 각각 다른 논리에 따라 존재하며, 서로에 대해 독립적일 수 있다.[5] 도미노 시스템은 표준화된 구조시스템으로서 빠르고 경제적으로 설치할 수 있고 구조체가 구축되면 내부에 공간을 정리하는 계획만으로 주택군이 빠른 시간내에 축조 할 수 있다.[6]
도미노 주택[편집]
도미노 주택(Maison Dom-Ino)은 주택 양산을 위한 물리적 플랫폼으로서의 원형이었다. '도미노'란 이름은 도미노 게임의 조각들을 합친 말장난(라틴어로 집을 의미하는 domus[7])으로 읽힐 수도 있다. 평면도가 도미노 게임과 비슷하고 유닛을 도미노처럼 직렬로 정렬하여 다른 패턴의 연립주택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8] 혹은, 르 코르뷔지에가 제품 디자인처럼 도미노를 형태나 조립 방식에서 하나의 설비로 보기를 원했던 것과 같이[9] 생산을 위한 기계적 장치로 볼 수 있다.[10] 도미노 주택은 1935년까지 르코르뷔지에가 작업한 대부분의 주택작업에 구조적 토대가 되었다.[11]
사례[편집]
- 시트로앙 주택(1922, 프랑스, 다쥬르): 집을 주택기계(자동차와 같은)와 같은 개념으로 대량생산 체계에 맞게 구성된 주택이다. 스팬은 5m×2.5m의 모듈로 기둥의 위치를 정했고, 평면의 가로세로 비는 1:2이다.
- 페삭 주거(1925, 프랑스, 페삭): 시트로앙 주택의 유형으로 건설된 노동자를 위한 주거 단지로 40호가 지어졌다. 시트로앙 주택과 같이 5m×2.5m의 모듈과, 가로세로 비가 1:2인 평면이 사용되었다.
- 쿡 주택(1926, 프랑스, 당페르-로슈로): 새로운 건축의 다섯 가지 요소(열린 평면, 옥상정원, 자유로운 입면, 수평띠창, 필로티)가 적용되었다. 5m×2.5m의 모듈과 1m의 돌출된 들보가 쓰였고, 도미노 시스템과 내력벽 방식을 혼합해 썼다.
새로운 건축의 다섯 가지 요소[편집]
르 코르뷔지에는 빌라 사부아(Villa Savoye, 1929-1931)에서 그가 잡지 "레스프리 누보"와 그의 저서 "건축을 향하여"를 통해 설명한, 1920년대에 걸쳐 확립한 개념인 건축의 다섯 가지 요소를 분명하게 종합한다. 첫째로 르 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 기둥인 "필로티"(pilotis)로 무게를 지탱하며 건축 구조의 대부분을 땅에서 들어올렸다. 필로티는 주택을 위한 구조적 지지물로, 그가 다음의 두 가지 요소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두 요소는 건축가가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도록 구조 기능을 갖지 않는 벽체로 이뤄진 "자유로운 입면"(façade)과 벽 필요 없이 바닥 공간이 방들로 자유롭게 배열된 "열린 평면"이다. 빌라 사부아의 2층은 넓은 건물 주변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길고 좁은 "띠 유리창"으로 그의 원칙에서 네 번째 요소이다. 다섯 번째 요소는 건물이 서기 전에 있던 녹지를 대체하는 옥상 위의 "옥상 정원"이다. 경사로는 지면 높이에서 3층의 옥상 테라스까지 연속해 있으며, 이 구조를 통해 건축적 산책로를 형성한다. 하얀 관 모양의 계단 난간은 르 코르뷔지에가 찬탄한 산업적인 "원양여객선"을 미적으로 연상시킨다. 반원형 통로를 가진 1층 주변의 차도는 1927년형 시트로엥 자동차의 정확한 회전 반지름에 꼭 맞아 떨어지는데, 이는 르 코르뷔지에의 현대 공업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모뒬로르(모뒬로) 체계[편집]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모뒬로르(Modulor) 체계에서 건축적 비례의 척도로 황금비를 사용했다. 그는 이 체계가 비트루비우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작업, 그 외에 인체의 비례를 건축의 외관과 기능을 개선하는 데에 이용한 사람들의 긴 전통의 연속이라고 보았다. 황금비 외에, 르 코르뷔지에는 인체 측정학, 피보나치 수와 두가지 단위를 시스템의 토대로 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비례의 황금비에 대한 제안을 극도로 받아들였다. 그는 인체 모형의 키를 배꼽에서 황금비를 따라 둘로 나누었으며, 나눈 구간들을 황금비에 따라 무릎과 목에서 다시 나누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황금비율을 모뒬로르 체계에 활용하였다.
르 코르뷔지에가 1927년 가르슈에 설계한 빌라 슈타인(Villa Stein)은 모뒬로르 체계가 적용된 예이다. 이 주택의 직사각형 평면, 입면, 그리고 내부 구조의 비례는 거의 황금비의 사각형과 비슷하다.[12] 그가 설계한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d d'Habitation) 또한 모뒬로르 체계가 적용된 건물중 하나이다.[3]
르 코르뷔지에는 조화와 비례의 체계를 그의 디자인 철학의 중심에 두었고, 우주의 수학적 질서에 대한 그의 믿음은 황금비와 피보나치 수열과 결합되었다. 그는 피보나치 수열에 대해 "[...] 눈에 보이면서 서로의 관계가 명료한 리듬들. 그리고 이 리듬들은 인간 활동의 근원이다. 리듬들은 인간 안에서 유기적인 불가항력에 의해 울려 퍼지며, 이 불가항력은 어린이, 노인, 야만인, 학자의 황금분할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13]
가구[편집]
르 코르뷔지에는 말했다.: "의자는 건축이고, 소파는 부르주아다."
르 코르뷔지에는 1928년 건축가인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청한 이후, 가구 디자인의 실험을 시작했다. 그의 사촌인 피에르 잔레 또한 많은 디자인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페리앙을 초청하기 이전,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설계안에 가구를 놓는 데에 토네트에서 생산한 간소한 제품들과 같은 기성품 가구에 의존했다. 토네트사는 1930년대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디자인을 생산했다.
1928년 르 코르뷔지에와 페리앙은 1925년 르 코르뷔지에가 자신의 책인 《오늘날의 장식예술(L'Art Décoratif d'aujourd'hui)》에서 윤곽을 그린 가구를 실제로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그는 유형으로서의 요구, 유형으로서의 가구, 인간의 수족으로서의 사물 이렇게 세 가지 가구 유형을 정의했다. 그는 "그것은 우리의 팔다리의 연장이며 인간의 기능들에 적합한 것이다. 유형으로서의 요구, 유형으로서의 기능이며 그러므로 유형으로서의 사물이면서 유형으로서의 가구이다. 선택, 섬세함, 비례, 조화에 의해 명시된 영속하는 좋은 취향이다."라고 인간의 수족으로서의 사물을 정의했다.
협력 작업으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세개의 크롬 도금한 관으로 된 강철 의자로, 그의 설계안인 파리의 라 로슈 주택(Maison la Roche)과 바르바라 앙리 교회(Barbara and Henry Church)의 별관을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이 가구는 르 코르뷔지에의 1929년 살롱 도톤에 출품작인 "주택을 위한 설비"에까지 사용되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 1964년, 밀라노의 카시나(Cassina S.p.A.)에서 그의 가구 디자인을 생산할 수 있는 전 세계 독점 계약권을 취득했다. 오늘날 많은 복제품들이 존재하나, 카시나는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 인가한 유일한 생산자이다.
정치[편집]
르 코르뷔지에는 1930년대에 프랑스 정치의 우파에 참여했다. 그는 조르주 발루아와 위베르 라가르델과 동조하여 생디칼리즘 잡지인 프렐뤼드의 편집에도 잠시 참여하였다. 1934년,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의 초대로 로마에서 건축을 강의했다. 그는 비시 프랑스|비시 정권의 도시계획 관련 공직을 알아보고 도시계획 연구 위원회에 임명되었으나, 알제와 다른 도시들의 재설계에 대한 그의 계획안은 거부당하였다.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정치에서 손을 떼었다.
라가르델과 발루아의 정책은 파시즘과 반유대주의, 초국가주의를 포함하고 있었으나, 르 코르뷔지에가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정확하지 않다. "빛나는 도시"에서 그는 경제행정의 관료정치가 정부를 대체하는 비정치적인 사회를 구상했다.[14]
르 코르뷔지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생시몽과 샤를 푸리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주요 작품[편집]
- 1905년 팔레 주택
- 1912년 잔레-페레 주택 [2]
- 1916년 슈보브 주택
- 1923년 라로슈-잔레 주택
- 1924년 에스프리 누보관
- 1925년 잔레 주택
- 1926년 쿡 주택
- 1927년 슈타인 주택 (파리 가르슈)
- 1927년 바이센호프 주택
- 1928년 사보아 주택
- 1929년 구세군 회관
- 1930년 스위스 학생회관
- 1930년 에라수리스 저택
- 1931년 소비에트 궁전 (계획안)
- 1933년 첸트로소유즈 (소련 모스크바)
- 1947년-1952년 위니테 다비타시옹 (프랑스 마르세유)
- 1949년-1952년 국제연합본부 (계획안)
- 1950년-1954년 롱샹 성당
- 1951년 사라바이 주택, 쇼단 주택 (인도 아메다바드)
- 1952년-1959년 인도 찬디가르 도시계획
- 1957년 국립서양미술관 (일본 도쿄)
- 1957년-1960년 라투레트 수도원
- 1961년 카펜터 시각예술센터
- 1967년 하이디 베버 박물관 (르코르뷔지에 센터, 스위스 취리히)
- 1969년 피르미니 성당 (사후 착공되어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2006년 완공)
주요 저서[편집]
- Après le cubisme (1918) 아메데 오장팡 공저
-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 1923) ISBN 89-7297-439-0
- 《도시계획》(Urbanisme, 1925) ISBN 89-7297-450-1
- La Peinture moderne (1925) 아메데 오장팡 공저
- 《오늘날의 장식예술》(L'Art décoratif d'aujourd'hui, 1925) ISBN 978-89-7297-527-4
- Premier clavier de couleurs (1931)
- Aircraft (1935)
-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 1942)
- 《아테네 헌장》(Charte d'Athènes, 1942) ISBN 2-00-091000279-6
- 《르 코르뷔제 : 학생들과의 대화》(Entretien avec les étudiants des écoles d'architecture, 1943) ISBN 89-88552-08-3
- Le Modulor (1948)
- Le Poeme de l'Angle Droit (1955)
- Le Modulor 2 (1955)
- Deuxième clavier de couleurs (1959)
- 《동방 기행》(Le Voyage d'Orient, 1966) ISBN 89-89348-80-3
인용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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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 나무, 콘크리트의 재료를 이용하여 집들과 궁전들을 만든다. 이것은 건설이다. 천재성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감동시키면 나에게 좋은 것을 해준 것이다. 나는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것이 건축이다." (건축을 향하여, 1923)
- "건축은 빛 안에서 덩어리들이 함께 펼치는 훌륭하고 위대하며 올바른 연극이다."
- "공간과 빛과 질서. 이것들은 빵이나 잘 곳만큼이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 (건축을 향하여, 1923)
- "오늘날 깨어져 버린 사회적 안정을 해결할 열쇠는 건물의 문제에 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 (건축을 향하여, 1923)
- "현대의 삶에는 집과 도시의 새로운 평면이 필요하고, 이를 기다리고 있다." (건축을 향하여, 1923)
- "'양식들'은 거짓말이다." (건축을 향하여, 1923)
- "건축이냐 또는 혁명이냐. 혁명은 피할 수 있다." (건축을 향하여, 1923)
각주[편집]
- ↑ 이동:가 나 다 Choay, Françoise, le corbusier (1960), pp. 10-11. George Braziller, Inc. ISBN 0-8076-0104-7.
- ↑ Gans, Deborah, The Le Corbusier Guide (2006), p. 31.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ISBN 1-56898-539-8.
- ↑ 이동:가 나 “그는 어떻게 아파트와 신도시의 아버지가 됐나”. 《중앙일보》. 2017년 1월 15일. 2018년 3월 24일에 확인함.
- ↑ 조성현; 김철규 (2004년 4월). “Le Corbusier의 주거건축에 나타나는 Dom-ino시스템과 비례체계에 관한 연구”. 《한국주거학회논문집》 (한국주거학회) 15 (4). 2022년 4월에 확인함.
- ↑ 현명석 (2002년 2월). 《르 코르뷔제 건축의 돔-이노 프레임과 규제선의 기율》 (학위논문).
- ↑ 조성현; 김철규 (2004년 4월). “Le Corbusier의 주거건축에 나타나는 Dom-ino시스템과 비례체계에 관한 연구”. 《한국주거학회논문집》 (한국주거학회) 15 (4). 2022년 4월에 확인함.
- ↑ Sennott, Stephen, ed. (Jan 1, 2004). Encyclopedia of Twentieth Century Architecture. Taylor & Francis. p. 366.
- ↑ 케네스 프램튼, (2017). 《현대건축: 비판의 역사》. 283쪽.
- ↑ 조성현; 김철규 (2004년 4월). “Le Corbusier의 주거건축에 나타나는 Dom-ino시스템과 비례체계에 관한 연구”. 《한국주거학회논문집》 (한국주거학회) 15 (4). 2022년 4월에 확인함.
- ↑ 케네스 프램튼, (2017). 《현대건축: 비판의 역사》. 283쪽.
- ↑ 케네스 프램튼, (2017). 《현대건축: 비판의 역사》. 280쪽.
- ↑ Le Corbusier, The Modulor, p. 35, as cited in Padovan, Richard, Proportion: Science, Philosophy, Architecture (1999), p. 320. Taylor & Francis. ISBN 0-419-22780-6: "Both the paintings and the architectural designs make use of the golden section".
- ↑ Ibid. The Modulor pp.25, as cited in Padovan's Proportion: Science, Philosophy, Architecture pp.316
- ↑ Fishman, 228
출 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3. 르 코르뷔지에 혁명적 '현대건축5원' 한눈에 보다
의사들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다면, 현대의사들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다면, 현대 건축에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가 창안한 '현대건축 5원칙'이 있다.
'필로티'는 건물 1층을 비워두는 방식으로 빛, 바람 등 여러 환경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비어 있는 1층은 보행 통로나 주차장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옥상 정원은 사람에게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휴식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또 물리적, 기능적 건축 면적을 넓힌다.
'빌라 사보아'는 '현대건축 5원칙'이 빠짐없이 적용된 사례다. 프랑스 파리 푸아시에 위치한 '빌라 사보아'는현대건축 상징으로 불린다.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국내 최초로 열린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는 2016년 12월 6일부터 2017년 3월 26일까지 약 4개월 간 'Le Corbusier 서울특별전'을 개최한다. 르 코르뷔지에가 구상한 건축 외에, 회화나 드로잉, 사진, 영상까지 500점이 넘는 작품 감상이 가능하다.
(글 출처 : 위키트리)
4. '아파트 창시자' 르 코르뷔지에, 그는 4평 오두막에 살았다
가장 유명한 담배 파이프는 1929년에 탄생했다. 화가 마그리트는 짙은 밤색 파이프를 그렸다. 실제 파이프를 묘사한 그림이다. 문제는 파이프 그림 아래 텍스트였다. 마그리트는 파이프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관객은 혼란에 빠졌다.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려 머리를 굴렸다. '왜 파이프를 파이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걸까?' 마그리트가 노린 건 혼란 그 자체였다. 사물 이름처럼 세상이 굳게 믿는 규칙에 균열을 내며 낯섦이라는 감각을 전하려 했다. 마그리트는 꾸준히 현실 공식이 사라진 그림을 그렸고, 초현실주의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파이프 그림 탄생 배경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마그리트는 한 건축가의 저서를 읽던 중 책 안에 실린 삽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미나무로 만든 파이프 그림이었다. 마그리트는 책 속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해 파이프를 그렸다. 초현실주의 예술의 대표작은 그렇게 태어났다. 마그리트가 탐독한 책 이름은 '건축을 향하여'다. 저자는 현대 건축 아버지 르코르뷔지에다.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염세적이었다.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그들은 인간이 쌓아 올린 이성과 합리성을 의심했다. 그래서 꿈, 무의식 등 현실 너머 불확실한 세계에 집착했다. 하지만 폐허 위에도 주춧돌을 올리며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초현실적인 비극 앞에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해답을 찾는다. 르코르뷔지에는 그런 사람이었다.
프랑스 파리 근교 푸아시에 있는 건축물 빌라 사보아는 르코르뷔지에가 자신의 건축 철학을 쏟아부은 작품이다. 이 건물은 하얀색 기둥 위에 직사각형 상자가 살포시 얹힌 형태다. 새하얀 외관과 군더더기 없는 형태 덕분에 미니멀리즘 예술품처럼 보인다. 빌라 사보아는 현대 건축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인류의 유산이다. 르코르뷔지에 이전까지 유럽 전통 집들은 벽이 모든 건물 무게를 지탱했다. 벽은 두꺼울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집 내부 공간은 협소해졌다. 창문도 크게 낼 수 없어 채광도 열악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5원칙'을 세웠다. ①필로티 ②옥상정원 ③자유로운 평면 ④가로로 긴 창 ⑤자유로운 입면. 빌라 사보아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빠짐없이 적용됐다. 르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해 기둥(필로티)을 만들었다. 기둥 위에 건물을 얹었다. 기둥이 집 무게를 지탱하기 때문에 벽은 자유를 얻었다. 빌라 사보아 외벽은 간결하고 가볍다. 창문도 크게 냈다. 집에서도 햇볕을 넉넉히 맞게 됐다. 전통 주택의 넓은 마당은 옥상정원으로 대체했다.
빌라 사보아는 2차 세계대전 중 크게 파손됐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겨우 형태만 유지한 채 창고로 쓰였다. 1960년엔 재건축 바람이 불어 빌라 사보아는 철거 위기에 놓였다. 전 세계 건축가들이 빌라 사보아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청원을 넣었다. 결국 빌라 사보아는 재건됐고,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빌라 사보아 외에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은 16개다.
르코르뷔지에는 시계 산업으로 유명한 스위스 라쇼드퐁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술학교에 들어가 시계 장식을 배웠다. 19세기 말 유럽은 산업화라는 뜨거운 엔진을 달고 미래로 질주했다. 공예보다는 공업, 토목, 건축의 미래가 밝았다. 미술학교 교사는 르코르뷔지에 재능을 알아보고 건축을 권했다. 스승의 설득으로 르코르뷔지에는 전공을 건축으로 바꾸며 190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오귀스트 페레 건축사무소 인턴 자리를 얻었다. 페레는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한 건축 양식을 개척한 인물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스승의 영향으로 콘크리트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년간 인턴 생활을 마치고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긴 여행을 위해 짐을 싼다. 반년 동안 보헤미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터키, 그리스 등을 방문해 생경한 문화와 건축을 관찰했다. 그리스에서 결정적 순간을 맞았다. 투명한 빛 아래 새하얗게 빛나는 파르테논 신전은 르코르뷔지에의 삶을 바꿨다. 단순하지만 견고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위엄을 휘감은 파르테논 앞에서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이상을 본다. 그는 며칠이나 아테네에 머물며 파르테논을 찾았다. 자신만의 파르테논 신전을 짓겠다고 다짐하며 여행을 마친다. 그는 스위스로 돌아가 건축 이론을 세우는 데 골몰했다. 30세가 되던 1917년 프랑스로 넘어가 그곳에 정착했다.
1920년대 파리는 예술가들의 둥지였다. 르코르뷔지에는 화가들과 어울리며 스위스에 있을 때처럼 미학 이론에 매달렸다. '퓨리즘(Purism·순수주의)' 운동을 창시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는데, 핵심은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기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건축뿐만 아니라 그림,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퓨리즘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퓨리즘은 '기계 미학'으로도 불린다. 당시 유럽은 과학 덕분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기계가 등장할 때마다 세상도 변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기계의 효율성, 명확성에 매료됐다. 건축도 기계 시대에 보폭을 맞춰야 한다고 여겼다. 명확함, 간결함, 기능을 전면에 내세운 '모더니즘 건축' 청사진을 견고하게 그렸다. 르코르뷔지에는 드디어 1922년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가인 동시에 이론가, 철학자, 사상가, 정책자,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치열하게 건축 철학과 이론을 정리하고, 이상적인 도시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르코르뷔지에가 남긴 저서만 50여 권에 달한다. 그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고 선언했다. 집 역시 자동차, 비행기, 철도처럼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기계라고 믿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쑥대밭이 됐다. 산업화로 대도시만큼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시골 농부들이 공장 노동자가 되려고 도시로 왔다. 파리 인구는 팽창했다. 주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도시 곳곳에 빈민촌이 형성됐다. 하층 계급 노동자들은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견뎠다.
르코르뷔지에는 하층민을 위한 집과 도시 모델을 고안했다. 그는 수직 도시 청사진을 그렸다. 내용은 이렇다. 파리 구도심에 60층 고층 오피스 빌딩들을 세운다. 빌딩 숲 한가운데 교통센터를 구축해 기차역, 버스터미널을 만든다. 수직으로 솟은 빌딩 덕분에 절약된 용지엔 녹지를 조성한다. 상업지구 인근엔 시청, 법원 등 공공기관을 세운다. 더 바깥엔 실용적인 형태의 공동주택을 조성한다. 상업, 공공, 주거지구가 계획적으로 분리된 이 청사진은 오늘날 현대도시와 닮았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의 구상은 거절당했다. 도시 개발 결정권자들은 가난한 유대인, 상경한 농민, 하층 노동자를 위해 파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르코르뷔지에는 낙담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도시 계획안을 업데이트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유럽은 또 폐허가 됐다. 르코르뷔지에에게 도시 재건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그는 적은 용지에 많은 사람이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주거지를 고안했다. 그렇게 1952년 마르세유에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세워졌다. 가로 137m, 높이 70m에 달하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337가구로 구성된 이곳엔 1600여 명이 살 수 있다. 건물 내부엔 상점, 세탁소 등 편의시설도 있다. 옥상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성인이 휴식할 수 있는 정원을 마련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로 평가받는다. 르코르뷔지에는 도시 주변부로 밀려난 서민들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아파트라는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 도시계획처럼 유니테 다비타시옹 역시 거센 공격을 받았다. '빈민층이 모여 사는 곳'이란 부정적인 이미지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깎아내렸다. 부르주아 계급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미친 건물'로 취급하며 당국에 철거까지 요구했다. 결국 르코르뷔지에가 꿈꿨던 아파트 유토피아는 서유럽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르코르뷔지에의 이상을 과감히 받아들인 나라는 한국이다. 1963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마포아파트가 준공했다. 한국 최초 단지형 아파트였다. 마포아파트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그대로 본떴다. 준공식에는 박정희를 비롯한 유력 인사가 참석했다. 아파트는 근대화 상징으로 위상을 떨쳤다. 마포아파트 이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현재,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이 됐다. 르코르뷔지에는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서울에서 오히려 인간이 기계다. 평범한 사람이 기계처럼 일해도 내 집 마련 꿈을 이루긴 쉽지 않다. 주택청약은 로또가 됐고, 아파트는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됐고, 집값 잡기는 정부 숙원 과제가 된 지 오래다.
아파트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을 잠시 접어두고 기능적으로만 생각해보자. 인구밀도 높은 서울에서 아파트보다 나은 주거 형태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파트는 다른 형태 주거지보다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다. 매달 일정한 관리비만 지불하면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생활을 누릴 수 있다. 주차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고, 채광과 환기 시스템도 뛰어나다. 기능이 전부는 아니다. 웬만한 신축 아파트 단지에는 산책로, 공원, 독서실, 어린이집, 카페 등 정신을 고양하는 편의시설이 가득하다. 르코르뷔지에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하며 꿈꿨던 세계는 현재 서울 대단지 아파트와 얼추 비슷할 테다.
한국 외에도 르코르뷔지에의 청사진을 받아들인 나라는 많다. 인도는 영국에서 독립한 직후 대규모 도시 개발로 국가 위상을 높이려 했다. 북서부 도시 찬디가르를 행정 도시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이 임무를 르코르뷔지에에게 맡겼다. 1951년부터 10년 넘게 찬디가르 개발을 맡은 르코르뷔지에는 국회의사당, 종합청사, 대법원 등 굵직한 건물을 지었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찬디가르 도시 전체를 디자인했다. 그는 인도 프로젝트를 마친 후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가 직접 지은 4평 오두막이 있었다. 르코르뷔지에는 여름휴가 때마다 이 오두막에서 지냈다. 그는 오두막을 '나의 궁전'이라고 말했다. 지중해 나라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미래를 설계했던 그는 결국 지중해 품속에서 여정을 마쳤다. 4평짜리 궁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르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루브르궁에서 치러졌다.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추도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끈질기게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그는 인간과 건축만을 위해 싸웠다." 르코르뷔지에는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두 번의 폐허를 목격했다. "집은 기계"라고 선언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은 기계를 선물하려 했다. 그의 시도는 종종 오해받고 모욕당했다. 하지만 기계처럼 묵묵히 전진하고 할 일을 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꿋꿋이 폐허 위에 주춧돌을 놨다. 오늘날 우리는 그 주춧돌 위에 피어난 세계에 산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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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le corbusier @ unité d'habitation, marseille, france,1952
2022. 7. 19. 22:12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북쪽에서 본 서측 파사드
남서측 전경
오늘은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갑니다. 지중해에 면해있는 항구도시로 파리 다음으로 큰 제2도시입니다. 거기서 르 코르뷔지에 (1887-1965)가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설계한 공동주택 유니테 다비타시옹 을 둘러봅니다. 고밀집 고층 공동주거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친 건물 입니다. 미노루 야마사키의 미국 세인트루이스 프루이트 아이고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추정됩니다.
2차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집을 잃어버린 시민들을 위해 지은 고층 집합주거입니다. "버티컬 가든 시티" vertical garden city 라고도 합니다. 빌라 라로슈 나 빌라사보아 등 주택설계는 익숙하지만, 이런 대규모 공동주택은 코르뷔에게도 처음입니다. 설계를 진행할 즈음에는 롱샹채플, 라투레트 수도원 등의 설계로 코르뷔지에는 전성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0세 전후 입니다. 코르뷔가 개발한 모듈러의 인체비례학이 적용된 휴먼스케일로 설계가 진행됐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거친 콘크리트마감을 사용하여 소위 브루탈리즘 brutalism 의 건축스타일을 야기시킨 건물입니다.
코르뷔지에 전성기 (60세 경)
_유니테 다비타시옹, 마르세이유, 1947-1952
_롱샹채플, 1950-1955
_라투레트 수도원, 1952-1960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마르세이유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5km정도 떨어져있다. 서쪽으로 지중해의 전망이 좋다. ( google map)
남남서측 전경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동측의 전면도로 미슐레 가에 상관없이 남북축에 따라 일자로 배치했다.( google map)
남서측 전경
빛나는 도시 cité radieuse
코르뷔지에는 고층의 단일건물에 주거는 물론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하고, 문화예술도 즐기고, 놀기도 하고, 운동도 할 수 있는 총체적 복합시설이 다 완비된 공간을 구상했다. 소위 도시 속의 도시다. 이 건물 내에서 모든게 해결되는 이상향의 집합주거를 계획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이다. 지상에 남은 널직한 대지는 순전히 녹지로 사용할 수 있다. 고층밀집주거의 이런 개념은 그가 주장하는 "빛나는 도시" cité radieuse 의 도시설계 개념과도 부합한다. 그래서 이건물을 그렇게도 부른다.
modulor 2
이런 원대한 유토피아에 자신이 개발한 "모듈러2"의 인체비례학 휴먼스케일을 적용했다. 인간이 편히 느끼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의 칫수는 물론, 그에 따른 건축재료도 규격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정의 높이는 손을 올렸을 때의 높이 226cm 이다. ( 당시 오리지널 "모듈러"에서 수정하여 최종적으로 "모듈러2"를 제안했었다.)
벽면에 음각으로 새긴 모듈러2
건축의 5원칙
이렇게해서 코르뷔가 파리에 상경해서 시작한 새로운 건축이 30년후에 유니테 다비타시옹 을 통해 이루어졌다. 빛나는 도시와 모듈러에 그의 건축5원칙 개념이 융합이 됐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건축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1층에 거대한 필로티를 구성해 시각적으로 터진 공간과 소통의 공공공간을 제공했다. 지붕 옥상에는 루프가든으로 사회적 공공공간을 제공했다. 아파트라서 단위세대 구분 칸막이벽으로 외피에 리본윈도우가 표현이 안됐지만 실제적으로는 리본윈도우가 형성됐다고 봐야할 것 같다. 건물 전체의 외피도 비내력벽인 만큼 자유롭게 구성됐다.
지중해 크루즈
젊었을 적 떠난 동방여행에서 체험한 지중해 크루즈에서 받은 감명과 인상적 느낌이 코르뷔의 일생 내내 나타난다. 빌라사보아에서처럼 유니테 다비타시옹 에서도 지중해유람선의 기억을 표현한다. 건물 자체가 지중해 바다 위에 떠있는 거대한 하나의 크루즈이다. 지붕의 환기탑은 갑판 데크 위에 솟아오른 스모크스택 smoke stack 이다. 동서측의 입면은 크루즈의 객실 외관이다. 실제로 장년이 되서도 코르뷔지에는 지중해 크루즈를 많이 즐겼다고 한다.
집대성 masterpiece
이렇게해서 유니테 다비타시옹 설계에는 당시 (60세 경) 그의 꿈과 이상향, 이론과 경험이 다 녹아들어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에 상경해서 30년 가까이 쌓아온 건축설계의 경험과 이론의 결정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의 매스터피스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에 이어 곧바로 롱샹채플과 라투레트 수도원이 계속되는 데, 건축적인 면에서 이들 건물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박영우)
남서측 view
main entry hall @ 서측
서측 입면도. 세대구분 칸막이벽이 있지만 리본윈도우(수평창) 개념으로 입면이 구성됐다.
서측입면 (정면)
주출입구가 있는 정면이다. 입구로비는 독립된 파빌리온 처럼 필로티 밑에 끼어있다. 그리고 필로티 위에 건물이 떠있다. 복층으로 구성된 단위세대로 층구별이 어려운 입면이다. 게다가 발코니 난간으로 쓰인 구멍난 콘크리트블록 위의 콘크리트 수평띠로 인해 더 힘들다. 왼쪽의 중간에 수직차양판이 있는 8,9층이 리테일층이다. 슈퍼, 레스토랑, 서점, 호텔 등 상업공간이 들어가있다. 프랑스판 주상복합이다. 왼쪽 북쪽 단부에 리테일층에서 내려오는 나선형 비상계단이 보인다. 지붕은 루프가든으로 카페와 보육원, 물놀이풀장, 체육관 그리고 조깅트랙이 마련되어있다. 높히 보이는 조형물같은 환기타워 (2개)와 물탱크/계단실타워 등이 '지붕위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이 루프가든에서 서쪽으로 파란 지중해의 수평선이 보인다.
partial elevation
바닥층의 굵은 수평띠와 거의 같아 보이는 발코니 난간대로 인해 층간구별이 힘들다. 거친 마감의 필로티며, 구멍이 숭숭 뚫린 조적조 난간, 그리고 수직차양판은 라투레트 수도원 설계 전의 습작처럼 보인다.
건물 공간구성
초록색의 수평띠가 공용복도다. 중간의 2개층이 호텔도 있는 리테일층이다.
북측 단부 비상계단
8층 리테일상가층에서 내려오는 북측 비상계단은 조형타워가 됐다.
환기타워와 체육관
탈모더니즘???
지붕 루프가든에서는 조형물같은 환기타워와 아라비안 스타일의 체육관이 자신이 시작한 카테시안 모더니즘에서 탈피하려는 듯 하다. 롱샹채플의 예고편을 보는 듯하다.
루프가든은 거의 지상의 광장같은 모임장소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많은 건물들이 따라했다.
지상의 모임공간을 대신한 루프플라자 roof plaza.
카페, 보육원 아래 물놀이 풀장
카페, 보육원 아래 물놀이 풀장. 오른쪽에 빌라사보아 에서 본 커브형태의 시팅이 보인다.
콘크리트 덩어리 on the roof. 이 덩어리는 라투레트에서 다시 나타난다. 모더니즘에 싫증이 났나보다.
건물 단면
건물 단면구성
건물 단면에서 복층의 단위세대 (보라색과 진보라색) 가 'ㄱ' 자와 'ㄴ'자형태로 3개층에 걸쳐 맞물려 있고 중간층에 공용복도(백색) 가 있다. 그래서 복도는 3개층마다 설치된다. 8, 9,층(적색)은 리테일층으로 식품점, 식당, 서점, 호텔 등의 상업공간이다. 입면에서 수직차양판이 있는 층이다. 지붕에는 놀이공간과 집회기능, 운동시설 등이 있다. 완전 도시 기능을 하는 주상락의 복합도시같은 단일건물이다.
한편 형태적으로는 건물 전체가 필로티에 의해 공중에 떠있다. 바다위에 떠있는 지중해 크루즈 유람선이다. 선박 측면으로는 객실이 웅장하게 나있고 지붕(갑판)에는 스모크스택 연통같은 조형물들이 솟아있다. 지중해 크루즈는 코르뷔지에가 평생 좋아한 이상향이다.
남서측 view(CG)
지중해 크루즈 유람선???
남서측 view
거대한 매스
주변 건물들에 비해 엄청나게 큰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건물 폭24m, 길이가 140m 나 된다. 높이는 56m로 18층이다. 기준층은 58세대로 구성되고 단위세대는 복층으로 되어있다. 단위세대의 한 층은 건물 끝에서 끝까지 24m를 모두 쓴다. 그래서 공용복도는 3개층마다 있다. 이 공용복도를 "스카이 간선도로"라고 표현두 한다. 세대수는 총 337개로 약 160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복합도시
이 하이라이즈 아파트 건물에는 주거기능 뿐 아니라 쇼핑, 슈퍼, 레스토랑, 카페, 편의점, 호텔 등의 상업기능과 갤러리, 도서실 등의 문화예술 기능, 조깅트랙, 물놀이시설, 체육관 등의 운동시설이 건물 전체에 포함되어있다. 특히 5층과 지붕층에는 집중되어있다. 버티컬 시티이다. 도시속의 도시이다.
공용복도. " 스카이 간선도로"
복층 단위세대
복층의 단위세대는 동, 서측 입면에서 보면 폭 3.6m로 매우 좁다. 대신 한 층에서는 3.6m×18m (양쪽 3m 발코니 제외)의 매우 길쭉한 평면이 된다. 가능한 한 세대수를 늘리려고 폭을 좁게하는 길쭉한 단위평면을 택했다고 한다. 3.6m 폭의 외벽으로 햇빛이 적게 들어오는 단점이 지적되지만 동서양측을 관통하는 자연통풍 cross ventilation 이 된다는 장점이 있다고 반박한다.
대부분이 동서축에 평행한 세대들이고 건물 남측단부에 다른 타입의 세대들이 남향으로 배치되어있다.
복층 단위세대 단면(상)과 평면. 복층의 단위세대. 공용복도는 매 3층마다 생긴다.
단위세대 단면
3개의 층을 두(2) 세대가 나누어 쓰고있다. 중간층의 공용복도 (a.k.a. 스카이 간선도로)에서 현관으로 들어가면 한세대는 위로, 다른 세대는 아래로 내려가야 침실층이 나온다. 단위세대 타입은 가족수에 따라 8가지의 타입으로 하고 23개의 변형플랜이 있다.
단위세대 평면의 길이는 양측의 발코니를 빼면 18m이고, 복도 폭은 5m에 가깝다.
건물 단면도
구조
처음에는 철골구조로 계획하였으나 예산 관계로 거대한 필로티 위에 올려놓은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했다고 한다. 마감은 거친 노출콘크리트이다. 당시 전쟁이 끝나구 시민들의 생활이 피폐해져있는 사회상이 반영됐다고 한다. 아마 콘크리트를 고집한 것은 콘크리트의 조형성에 익숙한 코르뷔지에 일 것으로 추정된다.(박영우)
아마 철골구조로 처음 계획한 이유는 당시 미국 쪽에서 미스 mies vdr 의 철골구조물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스가 철골조로 설계한 시카고의 프로몬터리, 레이크쇼어드라이브 아파트 등은 1946년에서 1951년 사이 지어졌다. 또한 공사가 빨리 진행된다는 장점도 있다. (박영우)
공용복도가 있는 기준층 평면도(상), 지붕평면도. (왼쪽이 북측)
기준층 평면
단위세대의 폭은 3.6m 이고, 통째로 쓰는 층에서는 길이는 18m이다. 양측 발코니까지 포함하면 24m 나 되는 매우 길쭉한 평면이다. 3개층마다 있는 공용복도(하늘의 간선도로)의 폭은 5m에 가깝다.
지붕 루프가든
지붕 루프가든에는 얕은 물놀이 풀장을 포함한 공용 놀이시설, 체육관, 카페, 카페테리아, 유아실, 보건실 등과 조깅트랙이 있다. 지상에 있었던 공간들을 하늘 위에 올려놓았다. 이 루프가든 개념은 후에 많은 건축가들이 따라했다.
배치도 (google map)
the sun
일자의 건물을 정북정남 축을 따라 배치했다. 그래서 서측과 동측의 세대가 똑같은 일조량을 받을 수 있게했다. 도시의 그리드를 무시했다. 그리고 남측 단부에 남향으로 5세대를 추가했다.
배치도 (왼쪽이 북측, 지상1층 평면)
배치계획: 태양이 최고
주변의 도시 그리드에서 빗겨서 배치했다. 일자건물을 남북축에 일치하게 배치하여 동쪽과 서쪽의 단위세대들이 비슷한 일조량을 갖도록 했다. 그리고 남쪽 단부에도 남향으로 몇 세대를 배치했다. 도시의 패브릭보다 태양을 우선시한 배치계획이다. 개구부가 작은 단위세대이다보니 태양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아졌다.
파빌리온 타입 주출입구 로비
결국 도시의 그리드에 빗겨서 보행로도 만들어졌다. 거대한 필로티 기둥으로만 채워져 공간이 터져있는 1층에는 중앙에 주출입로비만 파빌리온처럼 끼워넣었다. 직육면체의 큰 덩어리가 부담이 된 듯, 부메랑 모양의 캐노피를 가진 파빌리온 타입의 로비를 삽입하듯이 끼워넣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의 입구로비와 같은 매싱 massing 처리방법이다.
main entrance @ west
파빌리온 타입의 주출입구 로비. 이질적인 이동식 건물을 피로티에 끼워 놓은것 같다. 라투레트 입구 로비에서도 재현된다.
주출입구 파빌리온
주출입구 파빌리온 로비 입구
1층 주출입구 로비
1층 주출입구 로비
북동측 view . 오른쪽 상단에 지중해가 보인다.
roof garden
북동측 view
북쪽에서 본 동측 입면
남측에서 본 동측 파사드
남동측 view
필로티 @ 지상1층
pilotis
main entrance hall @ 서측
복도
지중해 유람선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지중해의 파란 바다에 떠있는 크루즈 유람선이다. 필로티로 공중에 떠서 바다물결을 헤치고 나아간다. 양쪽의 수평창들은 크루즈 객실의 창들이고 지붕의 환기탑과 구조물들은 스모크스택 등 크루즈 갑판의 모습들이다."(박영우)
환기탑과 아라비안 스티일 외관의 짐내지엄 @루프 가든
"루프 가든은 지중해 유람선 크루즈의 갑판이다. 여기에는 이국적인 아라비안 스타일의 체육관을 마련했다. 조형물의 환기탑은 크루즈의 스모크스택이다. 지붕에 올라오면 지중해 크루즈의 갑판에 올라 파란 바다를 가르는 여행이 시작된다." (박영우)
yahoooooooooooo !!!
아라비안 스티일 외관의 짐내지엄
체육관 입구@ 루프 가든. 멀리 지중해의 수평선이 보인다.
where am I?
코르뷔지에의 건축에서는 이런 예상치 못한 형태들이 자주 등장한다. 콘크리트 반죽 덩어리며 아라비안 건축물 같은, 주제에서 동떨어진 "깜짝쇼"가 벌어진다.
기이한 형태의 콘크리트 덩어리는 몇년후 라투레트에서 재현된다.
roof garden
어린이 물놀이터 @ roof
배기탑
main entrance hall 남측 면
삽입
1층 주출입구 로비는 본체 밑바닥에 끼어넣듯이 이질적 형태를 집어넣었다. 독립된 파빌리온 처럼 처리했다. 라투레트 수도원의 입구로비 큐비클 처리와 같은 태도이다.
주출입구홀 로비
스테인드 글래스
로비 한 쪽벽의 스테인드글래스는 얼마후 롱샹채플에서 본격적으로 재현된다.
브루탈리즘. 자연석의 랜덤 돌바닥 패턴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에신과 낙수장을 연상시킨다.
브루탈리즘
과감하게 거칠어진 노출콘크리트 마감은 롱샹채플, 라투레트 수도원과 인도 찬디가에서 다시 계속된다.
brutalism
거친 노출콘크리트 마감은 고의적이라고도 한다. 한때 유행으로 번졌다. 2차대전으로 피폐해진 당시 사회상을 표현했다구도 한다.
배치도(10시 방향이 북쪽)
배치: 태양
길쭉한 건물을 남북축 선상에 놓았다. 도시의 그리드를 무시하고 태양에 맞추었다. 동, 서측 세대에 똑같은 일조량이 떨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남측 단부에는 남향으로 몇 세대를 더 배치했다.
배치도 (google map)
공용복도
단위세대 거실. 폭이 3.6m.
단위세대 거실
폭이 3.6m 로 매우 좁다보니 세대간 벽체에 선반을 만들었다. 주방 옆의 벽은 두껍게 처리하여 배관공간을 확보했다. 그래서 이 아파트에는 별도의 전기/상하수도 배관 세프트 shaft 가 따로 없다.
길쭉한 침실
길쭉한 침실
폭 1.8m 침실
아파트 폭이 3.6m 이다보니 어린이 침실은 1.8m 의 폭으로 아주 길쭉한 침실이 된다. 많이 불편하다고 한다.
상가 리테일층 복도
상가층의 콘크리트 수직 차양판 브리스 솔레이.
ciao.
ywp07222022. updated 013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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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é d'habitation, marseilles, france, 1947-1952
*architect: le corbusier, paris, france with Charlotte Perriand as interior designer and jean prouvé as steel stairs 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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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orbusier
피카소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둘러보는 코르뷔지에. ca.1952
references
archdaily
dezeen
wikipedia
architectural review
naver
naver blogs
youtube
ZA건축숙(youtube)
fondation le corbu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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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s: This talk has been produced and written by Young Woo Park, aia, ncarb. The most of writing has been based on the reference materials above, u.n.o. Please email to the writer above (ywpark5293@gmail.com) in case of having questions or disagreements.
*Copy rights reminder: This talk can not be used or reproduced in other publications on-line or off-line, entirely or partially, without a written consent of the writer.
*Photo Credits: Photos and images are also from the reference materials above, u.n.o. Please email to the writer in case of having questions or disagreements.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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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plus on unité
ď habitation:
마르세유 건물이 지어지고 프랑스의 세(3) 도시와 독일 베를린에 거의 비슷한 건물들이 지어진다. 우선 외관상 피로티가 다르다. 물론 코르뷔지에의 디자인이다. 마르세유의 것이 원조 인 셈이다.
unité d'habitation of nante-rezé, 1955
unité d'habitation of berlin, 1957
unité d'habitation of briey, 1963
unité d'habitation of firminy-vert, 1965
유니테 다비타시옹, 베를린,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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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extra from ZA건축숙(youtube):
북측벽
huge pilotis
modulor
main entrance @ west
main entrance lobby
common corridors
entry door for a living unit
living room
자녀방
corridor at commercial floor
corridor at commercial floor
roof garden
child care center and cafe on the ro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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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 infos & images:
Daniel Buren's installations on the roof garden @ unité d'habitation marseille, 2014 (from dez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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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s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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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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