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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05. 칼리크라테스

 

 

1. 건축가 칼리크라테스

Callicrates

 

 

국적 아테네, 그리스

요약 BC 5세기에 활동한 아테네의 건축가.

Kallikrates라고도 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아테나 니케 신전을 설계했으며, 익티노스와 함께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평화 협정을 맺은 BC 449년의 기록에 따르면, 아테네 원로원이 칼리크라테스에게 '날개 없는 승리의 여신'으로도 알려진 아테나 니케 여신에게 바칠 신전을 아크로폴리스에 만들도록 위탁했다.

 

그는 아크로폴리스 남서쪽 귀퉁이 능보를 부지로 정하고 펜텔리콘산() 대리석을 재료로 하여 이오니아식 오더를 사용한 작은 신전을 설계했다. 이 신전은 BC 427년에 착공되어 BC 424년 완성되었다. 또한 익티노스와 함께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큰 도리아식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다. 건물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BC 447년에 착공했다고 한다. 이 신전은 BC 438년 완공되었고,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4년마다 아테나 여신을 기리며 벌인 축제인 파나테나이아 축제 때 봉헌되었다.

 

아테네 일리소스 강 유역에 세운 작은 이오니아식 신전(1778 파괴)은 양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아테네 사람들이 델로스 섬에 세운 도리아식 아폴로 신전도 그의 작품인 듯하다. 리스 카펜터는 저서 파르테논의 건축가 The Architects of the Parthenon에서 헤파이스티온, 수니온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 아카르나이에 있는 아레스 신전, 람노스 신전 역시 칼리크라테스가 건립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출처 - 다음백과)

 

 

 

 

 

02. 니케 신전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승리의 신 니케를 모시는 신전.

BC420년경에 건축가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에 의해 건축되었다. 로필레아 오른쪽에 위치한 니케 신전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남서단, 니케 피르고스에 있는 이오니아식 소신전으로 5.4X8.3m 규모이며 고대에는

니케 아프테로스(Nike Apteros, 날개없는 니케) 신전이라고도 불렀으나, 사실은 니케 신전이 아니고 승리의 여신

아테나 신전이다.

이 신전 역시 1686년 터키에 의해 분해되어 입구에 거대한 대포가 놓여져 있었다. 1836~1842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1936년에 플랫폼이 다시 붕괴되어 재복원하였다. 전면, 배면 모두 4주의 전주식. 설계자는 카리클라테스로 추측되며,

완성은 니키아스의 강화(講和, B.C. 421) 이후로 보이나, 원주 등은 옛 것으로 보이며 신전의 삼면, 보루의 부조가

유명하다

(출처- http://cafe.naver.com/firenze/1573443)

 

 

 

 

 

니케 신전

 

 

 

 

니케 신전

 

 

 

 

 

03. 신을 만나러 넘는 문 '프로필라이아'

<박경귀의 ad Greece⑧>속세와 신역의 경계, 영욕의 역사 서린 ‘신의 문'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아테네의 심장 아크로폴리스는 신들의 공간이다. 아테네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경배의 신역(神域)이다. 파르테논 신전, 에렉테이온 신전, 아테나 니케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에는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와 포세이돈, 그리고 아르테미스가 안치되었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에 거주하는 신들은 인간의 숭배와 경외를 받는 만큼 그들에게 가호와 은총을 베풀었다. 아테네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신들의 공간 아크로폴리스는 산 아래 인간의 공간 어디에서 바라보든 성스럽고 위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살인죄, 반란죄 등 사형에 처할 위중한 국사범을 재판했던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바라보면 아크로폴리스의 서쪽에 위치한 유일한 관문, 프로필라이아(Propylaia)가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성수기엔 밀려올라갈 정도로 늘 관광 인파가 붐비는 곳이다. 바닥 대리석이 숱한 발자국에 닳고 닳아 반들거리고 미끄럽다. 자칫 부주의 하면 넘어지기 쉬울 정도다. 그래서인지 중앙 건물의 통로에는 나무 바닥을 깔았다. 사람들이 새까맣게 오르내리는 프로필라이아를 바라보노라면, 고대 아테네 시절의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판아테나이아 축제 때 수많은 시민들이 기쁨에 차서, 그리고 승전의 전리품을 봉헌물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병사들이 보무당당하게 오르내리지 않았을까.


아레오파고스의 바라 본 아크로폴리스의 관문 프로필라이아 ⓒ박경귀
 

아크로폴리스 복원 모형도이다. 앞쪽의 여섯 개의 기둥이 있는 건물과 좌우의 흰 대리석 건물들이 프로필라이아를 구성하고 있다. ⓒ 박경귀
 

프로필라이아의 상상 복원도이다. 오른쪽 4개 기둥의 작은 건물이 아테나 니케 신전이다. 왼쪽 뒤쪽에 보이는 거대한 동상은 아테네 수호신 아테나 여신의 동상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German encyclopedia(1891)편
 
 

프로필라이아는 규모와 건축미에 있어 파르테논 신전 못잖은 걸작품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최고의 건축가 사인방의 합동 작품이다. 총감독을 맡았던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는 파르테논 신전을 신을 찬미하는 예술작품으로 가득 채웠다.

익티노스(Ikinos)는 파르테논 신전과 에렉테이온 신전을 실질적으로 설계하고 건축했다. 프로필라이아 건축은 므네시클레스(Mnesicles)가 주도했다. 그는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와 함께 아테네 니케(Athena Nike) 신전도 설계하고 건축했다. 이들 네 명의 위대한 건축가들은 페리클레스의 후원 아래 20여 년 동안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수많은 아테네의 석공과 조각가, 그리고 건축 기술자가 참여했음을 물론이다. 석공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도 참여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아쉽게 프로필라이아는 미완성 작품이다. BC 480년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군에 의해 아크로폴리스는 불타버리고 쑥대밭이 되었다. 폐허로 방치된 지 한 세대가 지나서야 파르테논 신전은 BC 447년부터 432년까지 16년에 걸쳐 건축된다. 프로필라이아, 니케 신전, 에렉테이온 신전도 비슷한 시기에 연이어 건축된다. 하지만 5세기 걸작 건축물 가운데 프로필라이아만 완공되지 못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주축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양분되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프로필라이아는 중앙의 대문 역할을 하는 건물과 양쪽의 회랑 건물, 오른쪽의 니케 신전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집합 건축물이다. 중앙의 주 건물을 좌우에서 외호(外護)하는 건축양식은 이후 서양 건축에서 자주 모방되는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독일 뮌헨의 프로필라이아가 대표적인 모방 작품이다. 가운데 여섯 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다른 기둥보다 사이를 좀 더 넓게 해 만든 중앙 통로, 양편의 회랑식 건물 배치가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라이아를 빼닮았다. 양편의 건물의 위치와 구조에 변화를 준 점은 다르다. 물론 평탄한 대지 위에 건축했다는 점에서 건축의 난이도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 같다.


뮌헨 프로필라이아, 레오폰 클렌체(1784~1864)의 1846~1850년 작,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와 달리 양편의 건물을 중앙 건물과 동일 선상에 배치하고 2층으로 구성하는 등 구조에 변화를 준 게 특징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만든이 Snapshots Of The Past
 
 

프로필라이아는 수평의 건물을 건축하기 어려운 급경사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건축 기술적으로도 탁월한 작품이다. 파르테논 신전도 바위투성이 위에 지어진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바닥을 고르기 어느 정도 용이한 아크로폴리스 정상 위에 지어졌다.

반면 프로필라이아는 건축 자체보다 육중한 대리석 건물을 든든하게 바치는 수평적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 매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프로필라이아 기둥을 받치기 위해 경사각을 메우고 있는 바위 위의 석축이 인상적이다. 두 동(棟)이 맞댄 형태의 프로필라이아 중앙 건물 중 앞 건물의 이오니아식 기둥 양식이 보수되어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의 약간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프로필라이아 건물이다. 앞부분은 미완성 기둥만 남아 있고, 뒷 건물의 지붕이 거의 다 소실되었다. 이오니아식 기둥 장식이 보수되었다. ⓒ박경귀
 

프로필라이아 기둥을 받치고 있는 석축, 경사를 메우기 위해 상당히 많은 석재를 쌓았다. 왼쪽 상단에 이오니아식 기둥장식이 보인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로 들어서는 프로필라이아의 마지막 기둥이다. 뒤에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어른 세 명이 팔을 벌려야 품을 수 있을 듯싶다. ⓒ박경귀
 
 

프로필라이아의 마지막 열주를 통과하는 순간 아크로폴리스의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으리라. 두 시 방향으로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이, 11시 방향으로 에렉테이온 신전이 보였을 것이다. 또 오른쪽으로 파르테논 신전 못 미쳐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를 모신 신전(Sanctuary of Artemis Brauronian)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에렉테이온 신전이 뒤로 바라보이는 왼쪽에는 거대한 아테나 프로마코스(Athena Promachos, ‘앞장서서 싸우는 자'를 뜻함) 청동상이 있었을 것이다. 9미터가 넘는 거대한 아테나 청동상은 아테네인들에게 무한한 자신감과 전투적인 기상을 심어주었을 것 같다. 그리스 최고의 천재 조각가인 페이디아스(Pheidias)가 만들었으니 그 위용과 아름다움이 얼마나 대단했었겠는가.

프로필라이아 오른쪽 뒤 거대한 청동상이 아테나 프로마코스, 왼쪽 파르테논 신전 앞의 작은 신전이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추정된다. 출처: wikimedia commons, Leo von Klenze91784-1864)의 1846년 작품
 
 

아크로폴리스 위에는 지금은 많이 손상된 파르테논 신전과 에렉테이온 두 신전만 서 있다. 게다가 보수를 위해 모아놓은 파손 대리석이 즐비하여 웬만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대 아테네인들이 느꼈을 당시의 경외감과 감동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아크로폴리스의 걸작품들이 최초로 파괴된 것은 로마 지배 시기인 267년에 있었던 헤룰리(Heruli) 족의 침공 때다. 하지만 파괴에 결정타가 된 것은 화약과 포 기술이 사용된 전쟁이었다. 1687년 투르크 군의 화약고로 사용되던 파르테논 신전이 베네치아 군의 포격을 받아 폭발하면서 아크로폴리스 대부분의 건물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아테네 땅에서 인류의 보배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전쟁 통에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연중 보수 중이다. 보수를 위해 대기 중인 신전의 파손 건축 자재들 ⓒ박경귀
 
 
 

프로필라이아 역시 너무나 많이 파손됐다. 온전하게 보존되었다면 도리아식 기둥 건물과 이오니아식 건물이 잇대어 있는 중앙 건물의 웅장미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프로필라이아는 파르테논과 마찬가지로 바닥에서 지붕까지 전체를 최고급 흰색의 대리석으로 건축됐다. 신들에게 최고의 작품을 봉헌하기 위해서였다.

프로필라이아 건물의 지붕조차 대리석으로 얹다 보니 그 무게를 줄이기 위해 중간 기둥에 얹어지지 않는 부분의 장방형의 공간을 얇게 깎아내고 단청 무늬를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 서까래 역할을 하는 중간 기둥 사이를 꽉 채운 아름다운 장방형 문양은 건물의 정숙함을 고조시켰을 것 같다.

기둥의 상단과 맞닿은 프리즈 부분에 단청이 된 단아한 신전형 정문의 아름다움을 상상해 보라. 물론 상상을 도와줄 작품이 있다. 이걸 보고 나면 프로필라이아의 아름다움을 조금은 연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19세기에 건축된 아테네 학술원의 천정 장식과 에렉테이온 신전의 포세이돈 성소의 천청 대리석 장식을 통해 프로필라이아의 천정 장식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885년 덴마크 건축가 테오필 프라이헤르 폰 한센에 의해 건축된 신고전주의 건축의 걸작품 아테네 학술원의 기둥 및 건축양식은 프로필라이아 건축 양식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필자는 고개가 아플 정도로 한동안 천정 장식을 바라보기도 했다. 신고전주의 건축물들은 파르테논 신전과 프로필라이아 건물의 양식에서 얻은 영감을 멋지게 구현해냈다. 이 작품을 통해 고전기 프로필라이아의 아름다운 건축미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대리석에 채색한 기술도 탁월하지만 금색, 보라색, 하늘색 삼색의 어울림이 단순하면서도 고귀한 느낌을 준다.

프로필라이아는 파르테논 신전과 포세이돈 신전 등에 사용된 건축 양식을 그대로 구현함으로써 단순한 성문이 아니라 신을 알현하러 가는 신전의 예비 회랑 역할을 했던 셈이다. 신의 공간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위해 프로필라이아 좌우의 내부 계단을 한발 한발 오르는 동안 이미 신을 대하는 경건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프로필라이아의 도리아식 건물 양식이 웅장미와 정제미를 높여준다. 뒤에 에렉테이온 신전이 보인다. 천정의 빈 공간은 채색된 지붕역할을 하는 장방형의 대리석으로 덮여있었을 것이다. ⓒ박경귀
 

에렉테이온 신전의 포세이돈 성소의 대리적 천정 장식이다. 장방형 대리석에 채색된 흔적이 2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이오니아식 기둥 상단 역시 채색되어 있었다. ⓒ 박경귀
 

바로 이 모습이다. 아테네 시내에 있는 아테네 학술원 건물의 천정이다. 천정과 이오니아식 기둥 상단 장식이 고상하고 단아하게 채색되었다. 포세이돈 신전과 프로필라이아 건축 양식을 재현한 19세기 신고전주의 건축의 걸작품이다. ⓒ 박경귀
 

19세기 신고전주의 건축의 걸작품이다. 아테네 학술원 건물의 단청이 된 이오니아식 기둥이다. 프로필라이아의 이오니아식 기둥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 박경귀
 
 
 

프로필라이아의 오른쪽에 위치한 작은 신전 아테나 니케(Athena Nike) 신전은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성소로 아담하지만 균형미를 갖춘 걸작품이다. 이 신전에는 날개 없는 아테나 니케 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날개는 니케의 트레이드 마크인데 날개 빠진 니케?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원래 니케(Nike)는 승리의 여신이 아닌가? 맞다. 하지만 ‘아테나 니케’는 ‘승리를 가져다주는 아테나’라는 뜻으로 부르는 아테나의 별칭이다. ‘아테나 파르테노스(Athena Parthenos)가 ’처녀신 아테나‘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 준 아테나 여신이 아테네에 영원이 머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니케의 상징인 날개를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승리와 평화를 희구한 그 마음이 애틋하다. 니케 여신과 ’아테나 니케‘는 분명 다르다. 아테나는 굳이 날개 없이도 그 존재 자체가 승리를 상징하는 여신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테나는 바로 전쟁의 여신, 지혜의 여신이 아닌가.


니케 신전의 모습을 가장 잘 포착한 사진이다. 필자는 보수 중인 시설물들에 가려 제대로 찍지 못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Marcus Cyron 사진
 

아테나 니케 신전에 안치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상이다. 앞으로 전진하는 듯 바람결에 흩날리는 옷주름의 섬세한 물결이 아름답다. 날개의 흔적은 분명 없는 듯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국립 고고학 박물관 소장, Dorieo 사진
 
 
 

프로필라이아의 왼쪽 회랑 아래쪽에 큰 사각 구조물이 우뚝 서 있다. 전차를 탄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BC 62~BC 12)의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사실 아테네의 상징 아크로폴리스의 관문 앞에 아그리파 동상이 서 있었다는 것은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다.

이곳은 신역으로 가는 신성한 공간이다. 아테네의 어떤 영웅도 자신의 동상을 세울 수 없었다. 아네테의 실질적인 국가체계를 세운 영웅 테세우스조차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한 민주주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당연히 참주로 지탄받을 까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아그리파 동상은 아마 그가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로마의 제정 시대를 연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닐까? 아니 그리스 북서부의 안부라키아만 반도 앞에서 벌어진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 BC 31)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물리친 전공을 그리스인 세계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튼 하필이면 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정문인가? 아마 당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가 되고 장차 후계자로 지명될 지도 모른다고 여길 정도로 막강한 2인자 권력을 누리던 그에게 누군가가 아부하기 위해 유구한 역사와 신성한 의미를 가진 아크로폴리스 앞에 세웠던 건 아닐까?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은 없다. 어떻든 아그리파의 동상이 자존심 강한 아테네인들에게 오만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로마 지배기 동안 아마 눈엣가시처럼 여겼을 것 같다. 로마가 힘을 잃어가는 어느 순간 아테네인들에게 파괴되었음에 틀림없다. 로마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가 아니었을까?
 


아그리파의 동상이 있던 좌대 ⓒ 박경귀
 

아그리파의 흉상이다. 아그리파는 미술 공부를 한 사람들에겐 비너스, 줄리앙과 함께 석고 소묘에서 지겹도록 마주한 모습일 듯싶다. 이목구비의 윤곽이 뚜렷한 아그리파의 얼굴은 소묘 연습에 제격이기 때문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사진 무명
 

프로필라이아로 오르기 전에 먼저 통과해야하는 성벽과 문이 있다. 불레 문(Boule Gate)이다. 프로필라이아를 보호하기 세운 내성(內城)과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과 문은 로마시대에 보강하고 재건된 것이라 한다. 아크로폴리스 방호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프로필라이아는 신의 공간으로 가는 신성한 문이었다. 한편 외적을 방호하는 최후의 방호벽이 되기도 했다. 절벽 위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는 공성전을 하기에 꼭 적합한 천혜의 성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로지 서쪽 정문이 있는 프로필라이아만이 사람과 물자가 오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당연히 일차적인 공격루트가 되는 곳도 이곳이다. 결국 이곳을 굳게 지켜 내는 것이 아크로폴리스를 방어하는 관건이 되는 셈이다.

BC 480년 페르시아 대군이 아크로폴리스로 몰려왔을 때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 사수를 포기하고 전 아테네인들을 살라미스 섬 등으로 소개(疏開)시켰다. 살라미스 해전으로 승부를 결판내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목책’과 아테나 여신이 지켜 주리라는 희망을 안고 수백 명의 아테네인들이 피난을 거부하고 아크로폴리스에 남아 농성했다.

그 때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아레오파고스에 진을 치고 전투를 지휘했다. 궁수는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댔다. 이어 수만 명의 보병이 프로필라이아 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며칠 동안 공격해도 돌파할 수 없자 페르시아군은 프로필라이아 공략을 포기했다. 대신 가까스로 아크로폴리스 북쪽 절벽의 바위틈을 찾아내 몰래 성벽을 넘어서 아크로폴리스를 가까스로 점령했다. 비록 천연의 절벽으로 둘러쳐진 철옹성이라 방심했던 곳이 뚫려 아크로폴리스를 점령당했지만, 프로필라이아의 대문을 굳게 닫고 공성할 경우 철옹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보통 평지에 있는 성채를 공략할 경우 충각기구를 밀어부처 성문을 부수는 방식이 사용된다. 하지만 아크로폴리스의 유일한 성문인 프로필라이아는 급경사면에 설치되어 충각기구나 사다리 부대의 활용이 불가능하다. 프로필라이아는 이런 장점을 일차적으로 활용하면서 적 보병의 공격마저 저지하기에 유리한 이중의 장치를 만들었다.

프로필라이아의 아래 평면도를 보라. 중앙 정문 앞으로 오르는 길을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 식으로 만든 것이다. 이럴 경우 좌우의 회랑에서 지그재그의 길을 따라 올라오는 적들을 제압하기 유리해진다. 공격군의 측면이 방어군에게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프로필라이아는 유사시에 아크로폴리스를 방어해 내는 최후의 방벽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던 것이다. 아테네인들의 공성전을 위한 시설 배치의 지혜가 돋보인다.

훗날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건축십서'에서 이런 제시를 했었다. “적이 공격해 올 때 성벽으로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접근로는 가파른 절벽에서 우회시키면서 성문에 도달하도록 하고, 도로의 흐름도 곧바르게 하지 않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구불구불하게 접근하도록 계획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졌을 경우, 적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공격해 올 때 방패로 가리지 못한 적군의 오른쪽이 아군측 성벽에서 공격하기에 안성맞춤이 되기 때문이다.”

비트루비우스가 제시했던 방법은 아테네인들이 먼저 프로필라이아에서 활용한 것이 아닌가. 선진 건축의 전범(典範)이 가득했던 아테네와 아크로폴리스를 비트루비우스가 와보지 않았을 리 없다. 프로필라이아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프로필라이아로 오르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불레 문, 현재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내리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문이다. ⓒ박경귀
 

 


 

프로필라이아의 평면도이다. 기둥 여섯 개 사이가 중앙 통로다. 건물 안쪽은 직선으로 건물 밖 접근로는 지그재그식으로 만들었다. 출처 : wikimedia commons, 만든이 Tusculum
 
 

아크로폴리스의 외벽, 다양한 석재와 여러 가지 축성 방식이 겹겹이 쌓인 모습이 3천여 년 전부터 조성된 아크로폴리스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박경귀
 
 

프로필라이아가 군사적 기능도 수행했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역시 종교적 기능이었다. 프로필라이아는 신과 인간의 경계였다. 아테네인들은 프로필라이아를 넘어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갈 때 경건함과 안온함과 얻었을 것이다. 또 ‘신의 세계’로 올라 신을 경배하고 나오면서 용기와 기쁨을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평소 ‘신의 세계’를 아무 때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나라의 특별한 제사를 수행하는 일부의 사람들이나, 희생제를 지내거나 승전의 봉헌을 위한 경우 등 아주 제한적인 경우에만 가능했다.

아테네인들은 인간과 신의 소통을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래 갖고 싶어 했을 것이다. 판아테나이아(Panathenaia) 축제를 주기적으로 열었던 것도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온 시책이 아니었을까. 축제기간에는 누구나 ‘신의 세상’에 오를 수 있었다. 축제기간에는 프로필라이아의 대문이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아테네인들은 매년 7월경에 해당하는 헤카톰바이온(Hekatombaion) 달에 아테나 여신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를 거행했다. 이 축제는 8일 동안이나 열렸고 아테나 여신의 탄신일로 여겨진 그 달의 28일째 되는 날에 절정을 이루었다.

매 4년마다는 대(大) 판아테나이아 축제라 하여 평소보다 더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렀다. 판아테나이아 축제의 프로그램은 다양했다. 페플로스(peplos)라 불리는 옷을 파르테논 신전 내에 있던 거대한 아테나 신상에 헌납했다. 그 이전에는 아테나 신전에 있던 목상(木像)의 옷을 갈아입히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또 다양한 운동경기를 하고 승자에게는 ‘판아테나이카’ 암포라에 올리브유를 가득 담아 시상하기도 했다.

평소 먹기 힘든 고기를 마음껏 맛볼 수 있는 기회도 이 축제기간이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쪽의 희생제단에서 100여 마리 이상의 짐승을 희생하여 제를 지내고 시민들에게 고기를 나누어주었다. 헤카톰베(hekatombe)가 바로 고대 그리스에서 제물로 소 100마리를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일컬었던 말에서 유래했다.

시민들은 국가가 공금을 사용하여 축제를 주도했으니 부담 없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아테네 시민들과 외국인은 물론 평소 집 밖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여성들도 자유롭게 축하 퍼레이드에 참여하거나 행렬을 관람할 수 있었다. 아테네 북서쪽의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지역에서 출발하여 아고라(Agora), 프로필라이를 거쳐 아크로폴리스(Akropolis)로 들어갈 수 있었다.

축제는 역시 볼거리가 있어야 대중의 흥미를 끈다. 판아테나이아 축제의 인기 프로그램은 역시 청춘 남녀의 가두 행렬이었다. 아테나 여신에게 입힐 페플로스를 만들어 호송하는 일은 엄선된 젊은 여성들이 맡았다. 머리에 화관을 쓴 아리따운 처녀들의 행렬을 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들이 앞장서고 젊은 청년들이 뒤따랐다. 아테네 시민들은 아름답고 늠름한 딸과 아들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 행렬을 따라가면서 “저 애가 올해 입대한 우리 아들이야”, “머리에 화관을 쓴 내 딸이 얼마나 예쁜가요?”하며 서로 자랑하지 않았을까. 행렬의 처녀 총각 역시 아테네 시민들의 환호에 뿌듯했을 것이다.

아테네에서는 18세에 군대에 입대하여 20세까지 군사훈련과 군사 임무를 수행해야만 비로소 투표권을 갖는 ‘아테네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이 훈련기간의 청년을 에페보스(ephebos)라 불렀다. 축제 행렬은 아테네의 미래의 기둥이자 꽃다운 청년들이 맡았다. 이들이 에페보스의 말을 따고 여성 행렬을 따라갔다.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나라를 지킬 전사로서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들 선남선녀들의 가두 행진과 프로필라이아를 통과하는 아크로폴리스 입성과정은 행사의 직접 참여자나 관람자를 가릴 것 없이 아테네인 모두에게 일체감과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었을 것 같다.

아테네인들은 축제에서의 에페보스의 아름다운 행렬을 파르테논 신전의 북쪽 프리즈에 조각으로 새겼다. 신들이 새겨진 박공과 신들의 위대한 전투 장면과 함께 이들 미래의 전사들을 새겨 아테네의 번영과 영광을 기원하고자 했을 것이다. 에페보스의 맨 앞에서 왼손을 번쩍 들어 지휘하며 행렬을 이끄는 청년의 늠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몸 뒤에 휘날리는 짧은 망토 클라미스(chlamys)가 행렬의 지휘관으로서의 위엄도 보태주는 듯하다. 뒤따르는 긴 행렬의 에페보스에게서 20세 청년의 당당하고 앳된 모습들이 주목을 끈다.


판아테나이아 축제의 에페보스 행진을 이끄는 선두 에페보스가 새겨진 프리즈, 대영박물관 소장 ⓒ박경귀
 

판아테나이아 축제에서 행진하는 에페보스의 긴 행렬이 새겨진 프리즈, 대영박물관 소장 ⓒ박경귀
 

군사훈련을 받는 에페보스의 모습, BC 470~450 BC 경 제작된 도기 출처 : wikimedia commons, Marie-Lan Nguyen 사진
 
 

프로필라이아를 넘나든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아테네의 영광을 노래하고 신을 찬미하는 환희의 행렬도 있었다. 승전의 기쁨을 신께 고하는 당당한 아테네 군도 있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군, 로마 군, 헤룰리 군, 투르크 군, 베네치아 군의 군화 발에 짓밟히기도 했다. 프로필라이아는 삼천년 아테네 역사에서 갖가지 영욕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관광객이 무심히 오르는 프로필라이아의 6개의 기둥 중 가운데 2개의 기둥 사이 조금 더 넓은 통로는 고대에는 인간들이 밟을 수 없는 ‘신성한 길’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신의 길’ 비켜서 그 양옆의 통로로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을 만나고 경배하며 그들의 영감의 가르침을 얻었다.

오늘날 우리는 ‘신의 길’을 걸어 아크로폴리스에 오른다. 신들이 머물 수 없을 정도로 거룩했던 신전은 파괴되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곳엔 우리를 반겨줄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테네인들이 신을 숭배하고 찬미하기 위해 창출해 낸 예술미 넘치는 걸작의 유산들을 만난다. 고대인이 품었던 경건한 마음과 애정 어린 관찰력을 가지면 무한한 감동과 갖가지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새롭게 느낄 때 이미 ‘신’은 내 안에 있는 게 아닐까?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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