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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스크랩 - 세계의 건축가

세계의 건축가 -004. 익티노스 Iktinos

 

1. 건축가 익티노스 Iktinos

 

요약 BC 5세기경에 활동한 그리스의 건축가.
Ictinus라고도 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엘레우시스에 있는 신비 신전, 바사이에 있는 아폴로 에피쿠리오스 신전을 지은것으로 알려진 아테네 출신의 유명한 건축가이다.

익티노스는 칼리크라테스와는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공동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한 것이 아니라 칼리크라테스가 시작한 작업을 익티노스가 이어받았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10서 The Books on Architecture〉 가운데 제7서 서문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이 함께 파르테논을 설계했다고 한다.

 

익티노스는 또한 코로이보스·메타게네스·크세노클레스와 함께 엘레오시스에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전의 텔레스트리온 홀 재건과 확장작업에 참여했다. 엘레오시스의 신비의식을 집행하던 텔레스트리온 홀은 바위를 깎아 만든 좌석이 있는 4각형 홀이었다.

 

익티노스는 파르테논 신전을 끝마친 얼마 후인 BC 430년경에 엘레오시스에서 일한 것으로 보인다. 피갈리아 부근

아르카디아의 바사이에 있는 아폴로 에피쿠리오스 신전은 펠레폰네소스 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 신전의 기둥 대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은 바사이의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이오니아식 프리즈의 조각 부분은 대영박물관의 보물로 손꼽힌다.

(글출처 : 다음백과)

 
 
 
 
 
 

2.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 Athens; 1987)

 

 

 

 

 

 

 

 

 

 

 

 

 

아티카 주[Prefecture and Region of Attica]에 속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그곳의 기념물은 고전주의의 정신과 문명의 보편성을 상징하며, 고대 그리스가 세계에 남긴 가장 위대한 건축과 예술의 복합체로서 칭송받고 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민주주의를 성립시키면서 고대의 도시 국가 사이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아테네에 사상과 예술이 융성하자 탁월한 예술가들은 아테네의 위정자 페리클레스(Pericles)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에 이르렀다.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는 뛰어난 영감을 발휘하여 이곳의 바위 언덕을 사상과 예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기념물로 탈바꿈시켰다. 이 시기에 세워진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익티노스(Ictinus; Ikinos)가 세운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 므네시클레스(Mnesicles)가 설계한 기념 조각 형태의 아크로폴리스 신전 입구인 프로필라이온(Propylaea), 그리고 작은 규모의 아테나 니케(Athena Nike) 신전 등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건축이 자연의 현장에 적응된 최상의 표현물이다. 기원전 5세기에 건축된 일련의 완벽한 걸작들은 완벽하게 균형 잡힌 장엄한 구조물의 웅장한 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면서 기념비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념물들은 지중해 세계에서 모범적인 모델로 간주되었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신화로부터 관습화된 숭배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 종교에 대해 정확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독특한 증언을 해 준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에 대한 전설이 생긴 신성한 신전으로서 1,000년 이상에 이르는 그리스 문명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15세기의 왕궁과 최초의 요새인 펠라스기 성벽[Pelasgian walls]에서부터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서기 161년에 세운 음악당, 오데움(Odeum)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독특한 공공 기념물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공간 가운데 하나에 건설되고 보존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일리소스(Ilissos) 계곡에 있는 높이 156m의 바위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부지 면적이 3가 채 안 되는 이곳은 기원전 제2천년기부터 왕궁과 제사 장소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였다.

고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은 펠라스기의 성벽에 의해 보호되었다. 그 성벽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시작된 도리아 인의 아테네 침공 이전에 존재했다.

기원전 514년 제1대 참주인 히파르코스(Hipparchos)에 이어 기원전 510년에는 제2대 참주인 히피아스(Hippias)의 정권이 무너진 후 아크로폴리스는 재건축되었다. 저주를 받았다는 델포이(Delphi)의 신탁에 의해 펠라스기 성벽은 파괴되었다. 성벽의 보루가 없어지자 그 위쪽에 자리 잡은 도시는 약화되었으며, 기원전 480년에는 크세르크세스 1(Xerxes I)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신전을 불태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기원전 480년 아크로폴리스가 약탈당한 것이 오히려 고대 그리스의 가장 훌륭한 조각 작품들을 보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성벽의 보루는 기원전 472~기원전 471, 아테네와 그 외항인 피레우스를 둘러싼 긴 성벽[Long Walls]’과 같은 시기에 파괴되었다. 기원전 5세기는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아테네 민주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기원전 447~406년의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여러 건축물이 세워졌다.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주신전인 파르테논 신전, 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us) 성문을 대신해 고대 왕들의 성채에 이르는 입구 가운데 한 곳에 세워진 기념비적인 입구인 프로필라이온, 아테나 니케 신전,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 등은 그리스 고전 예술의 4대 걸작이다.

끔찍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기원전 4044월 스파르타의 아테네 점령으로 긴 성벽이 파괴되었지만 아크로폴리스의 건축물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았던 기념물이 서 있는 아테네의 성스러운 언덕은 페르가몬(Pergamon)카파도키아(Cappadocia)이집트 등의 군주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Claudius)하드리아누스(Hadrianus) 같은 로마의 황제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개인 교사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 같은 부유한 개인 등 당대의 권력자들에 의해 꾸준히 미화되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념비적 유적을 손상시킨 최초의 사건은 267년에 있었던 헤룰리(Heruli) 족의 침공이다. 이후 오랫동안 비교적 평온했지만 유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손상을 입었다.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신전을 교회로 바꿨으며, 그곳에 있던 예술 작품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 1204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아테네는 유적에 대해 별로 무관심한 프랑크 왕국 제후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1456년 터키 인(오스만 제국)이 아테네를 점령하자 그곳은 모스크가 되었고,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종종 터키 총독의 후궁이 머무는 처소로 이용되곤 했다.

1687년에는 최악의 일이 벌어졌다. 모로시니(Morosini)의 베네치아 군대가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하자 터키 인의 화약고로 사용되던 파르테논 신전에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19세기에는 오스만 정부에 파견된 영국 왕의 대사인 엘진(Elgin) 경 토마스 브루스(Thomas Bruce; 1766~1841)가 술탄으로부터 공식적인 허락을 받고 신전의 대리석 부분을 가지고 감으로써 약탈은 끝났으며, 엘진이 가져간 유물은 1815년 이래 대영 박물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1세기에 걸친 발굴과 현장의 개선 이후, 아크로폴리스는 이제 심각한 대기 오염의 영향을 받아 온 대리석 부분의 안전한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가장 혁신적인 야외 보존 기술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글 및 사진 출처 : 다음카페 <대한민국약초세상  https://cafe.daum.net/sansam1119/O3O7/566?svc=cafeapi>



 

3. 아크로폴리스 여행

 

 
 
그리스, 튀르키예(터키) 패키지여행 (아테네 : 아크로폴리스 -> 아테네의 상징이자 랜드마크)

 자유로운 영혼 
 2022. 12. 15. 21:03



그리스 여행에서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써 아테네의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입니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어로 '높은'을 뜻하는 아크로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가 합쳐져서 생긴 표현인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언덕이라 아테네 시내 전역에서 볼 수 있으며 고대시대에는 신전을 두었고 유사시에는 요새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 아테네의 바위지대에 있는 성채이며, 건축학적,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대 건축물들의 유적지가 있으며 이 중에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대시대에는 최초의 아테네의 왕이라 여겨지는 전설속의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뱀인 케크롭스1세의 이름에서 붙여진 케크로피아(Cecropia)라고 알려졌습니다.


아크로(Acro, 높은) 폴리스(Polis, 도시국가)는 고대 그리스 전역에 세워졌는데 그 도시의 주신(主神)의 신전을 짓고 고대 그리스 도시의 방어용 요새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인해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델로스 동맹을 맺고 그 중심 역할이 아테네로 이동하면서 방어와 종교적 중심축인 신전을 이곳 아크로폴리스에 건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거대한 화강암 벽 위에 성채로 둘러싸여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위투성이 언덕에 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위해 지어졌는데 기원전 5세기에 페리클레스 부터 파르테논 신전, 프로필라이아,에레크테이온,아테나 니케 신전 등을 포함한 현재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유적지들의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파르테논 외에 다른 건물들은 모레아 전쟁 기간 베네치아군의 1687년 포위 공격 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은 성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프로필라이아, 아테나 여신을 모신 신전이며 델로스 동맹의 보물 창고인 파르테논, 농업의 신들(특히 에릭토니오스)의 신전인 에레크테이온, 그리고 도리스족과 이오니아족이 아테네 정부 치하에서 화목하게 사는 것을 상징한 건축인 아테나 니케 신전 등입니다.



 
 

이번 아크로폴리스 여행에서는 볼레의 문을 통해 올라갔으며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와 아크로폴리스의 대표적인 4대 건축물이라고 할수 있는 아테나 니케신전, 프로필라이아,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순으로 차례로 관람한 후에 디오니소스 원형극장 및 아테네 시가지를 조망하였습니다.
 
 


 

[ 아크로폴리스 요약 ]


아크로폴리스는 해발 150m 높이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아테네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이며 아크론(ἄκρον, 가장 높은)과 폴리스(πόλις, 도시)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도시'라는 뜻입니다.
아크로폴리스의 시초는 프리 파르테논(Pre-Parthenon) 신전으로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친 마라톤 전투(BC490) 이후 대규모 신전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완공되기도 전인 BC480년 페르시아인들의 침략으로 불타버리고 말았으며 이후 아테네인들은 이중 성벽을 쌓아 아크로폴리스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황금기인 정치가 페리클레스(Περικλῆς, Pericles, BC495~429) 시대부터 아테나를 위한 새로운 신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장엄한 구조물들은 페이디아스, 익티노스, 칼리크라테스(Callicrates)가 세운 파르테논 신전(447~432), 므네시클레스가 설계한 프로필라이온(437~432), 므네시클레스와 칼리크라테스가 설계한 아테나 니케 신전(448~407), 그리고 406년 완성된 에레크테이온 등으로 기원전 5세기의 완벽한 걸작 시리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기원전 404년 4월 스파르타의 아테네 점령으로 ‘긴 성벽’이 파괴되었지만 아크로폴리스의 건축물은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았던 기념물이 서 있는 아테네의 성스러운 언덕은 페르가몬(Pergamon)·카파도키아(Cappadocia)·이집트 등의 군주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Claudius)·하드리아누스(Hadrianus) 같은 로마의 황제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개인 교사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 같은 부유한 개인 등 당대의 권력자들에 의해 꾸준히 미화되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념비적 유적을 손상시킨 최초의 사건은 267년에 있었던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발칸반도로 이주한 게르만족의 일파인 헤룰리(Heruli) 족의 침공이였으며 이후 유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손상을 입었습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은 신전을 교회로 바꾸었고 그곳에 있던 예술작품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으며 1204년 제4차 십자군에게 동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하고 라틴제국이 성립되면서 아테네는 프랑크 왕국 제후들의 수중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1456년 오스만 제국이 아테네를 점령하자 파르테논 신전이 튀르키예(터키)군의 총사령부로 사용되고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사령관의 하렘으로 이용됐습니다. 그후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벌어졌던 모레아 전쟁(Morean War) 중 1687년 화약고로 사용되던 파르테논 신전은 화약이 폭발하며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모스크로 사용되면서 첨탑이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1801~1802년에는 오스만 제국에 파견된 영국의 외교관이였던 엘진(Elgin) 경이 파르테논과 아테나 니케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벽 장식 등 유물 등을 불법으로 영국에 반출하였는데 1815년 이래 대영 박물관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리스에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1821~1829년 그리스 독립전쟁을 겪은 후, 1830년에서야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인들의 품에 돌아왔으며 이후 여러 번의 대규모 보수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으며 현재도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아크로폴리스와 주변의 유적현황>



 




현재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볼수 있는 대표적인 4대 건축물은 프로필라이아,파르테논 신전, 아테나 니케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이며 아래쪽에는 대표적인 건축물로써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과 디오니소스 원형극장이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와 주변






볼레의 문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아테네 니케 신전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4. 유네스코 로고가 알고보니 파르테논 신전 왜?

<박경귀의 ad greece> 페르시아 전쟁 승리의 보답 아테네 여신에 바치는 최고의 봉헌물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 또는 아테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파르테논 신전일 것이다. 아테네 중심에 높이 솟은 아크로폴리스 정상에 2500년의 역사의 무게가 얹어진 고색창연한 대리석 기둥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전란에 파괴되고 세월에 풍화되어 지붕은 완전히 사라졌다. 기둥과 내부도 상당부분 부서진 모습이다. 하지만, 아직도 웅장하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찬탄을 저절로 이끌어낸다.

인류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건축물인 파르테논 신전의 이미지는 유네스코의 로고로 상징화되어 세계인의 뇌리에 새겨졌다. 파르테논 신전이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 가운데 우뚝 선 이유는 단지 건축미 때문만은 아니다. 신전이 품고 있는 수천 년의 스토리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을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 아닐까. 파르테논 신전에는 신을 숭배하던 아테네인의 경건한 정신이 담겼다. 나아가 전쟁의 참화를 겪은 사람들의 평화에 대한 간절한 비원이 담겨있다. 이런 파르테논 신전이 탄생된 배경과 역사를 살피면 파르테논이 주는 감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정문 모습이다. 아크로폴리스 입구의 반대쪽인 동쪽이다. 그리스의 신전들은 거의 동향 건물이었다.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신전 전면은 피라고라스의 황금비율이 적용되어 자연미를 더해 준다 ⓒ박경귀
 

유네스코 로고(사진 왼쪽)와 유네스코 문화유산 로고.
 
 
 

BC 13세기 경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전이 아니라 왕궁이 있었다. 켈롭스, 판디온, 에렉테우스, 아이게우스와 그의 아들 테세우스 왕이 대대로 살던 거주지였다. 물론 신을 모시는 소규모의 성소들도 함께 배치되었을 듯싶다. 3천 년 전 당시에는 오늘날에 보는 것과 같은 거대한 신전은 없었다. 왕궁과 부속 건물, 그리고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위한 소규모의 성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파르테논 신전이 놓인 자리인 중앙의 남쪽 영역이 바위 바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아크로폴리스가 본격적으로 신들의 터전으로 바뀌게 된 것은 영웅들의 왕정이 끝나고 귀족정으로 이어진 BC 8세기경부터일 것 같다. 3차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한 BC 480년에 이르러서는 아크로폴리스 내에 많은 신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신전, 승리의 여신 니케 신전, 풍요의 신 아르테미스 신전, 판디온 성소 등이 함께 있었다.

또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 자리에는 현관의 기둥이 6개로 기둥 8개인 현재 파르테논 신전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신전이 있었다. 대리석보다 재질이 약간 떨어지는 석회암, 즉 포로스(poros)로 만든 신전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여러 신전이 가득했던 아름답고 경건한 아크로폴리스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런 아크로폴리스가 신성한 성역으로 아테네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심장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BC 480년경의 아크로폴리스 전경이다. 앞부분에 새로 건축 중인 파르테논 신전이 있고, 뒤에 온전한 형태로 서있는 건물이 아테나 신전이다. 이 외에 서너 개의 신전과 성소가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BC 480년에 페르시아 군이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자 모든 신전과 부속 건축물을 불태우고 파괴했다. ⓒ박경귀
 
 
파르테논 신전 옆에는 BC 480년경 이전에 있었던 구 파르테논 신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게시하고 있다. 아울러 페리클레스 시대에 건축된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했던 조각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의 상징이자,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신전이 가득한 그리스의 꽃이기도 했다. 하지만, BC 480년에 페르시아 대군이 침공하자 아테네는 백척간두에 몰렸다.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를 수호하기 위해 옥쇄를 각오하고 농성할 것인가, 아니면 아테네를 버리고 후퇴할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당시 신의 뜻에 따라 국가 대사를 결정하던 관습에 따라 사절단을 델피의 아폴론 신전으로 보내 신의 뜻을 물었다. 퓌티아 사제가 내려준 신탁은 아테네인을 경악시켰다. 이 암담했던 상황을 헤로도토스는 '역사'에 남겼다.

“가련한 자들이여, 왜 여기 앉아 있는가? 그대들은 집과, 그대들의 도시로 둘러싸인 높은 언덕들을 떠나 대지의 끝으로 도망쳐라. 머리도 몸도 굳건하게 버티지 못할 것이며, 아래쪽의 두 발과 두 손과 그사이에 있는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불과 쉬리아의 전차를 타고 질주하는 날카로운 아레스가 모든 것을 끌어내리리라.

그는 그대들의 성채뿐 아니라 다른 성채도 수없이 파괴하리라. 그는 수많은 신전을 파괴적인 불에 넘겨줄 것인즉, 신전들은 지금 벌써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서서 두려움에 떨고, 지붕에서 검은 피를 쏟고 있으니,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예견했기 때문이니라. 자 그대들은 이 신전에서 나가 마음속으로 실컷 슬퍼하라!”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 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모든 성채와 신전이 불태워지리라는 신탁에 아테네 사절단은 절망했다. 참담한 신탁을 갖고 아테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더 나은 신탁을 내려주지 않으면 죽어도 성소를 떠나지 않겠다며 탄원자로서 애원했다. 그러자 퓌티아의 두 번째 예언이 내려졌다.

“케크롭스 언덕과 신선한 키타이론 산골짜기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지만 트리토케네이아(아테네 여신의 별명)여, 멀리 보시는 제우스께서는 그대에게 나무 성벽(teichos xylinon)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주게 되리라. 그대는 대륙에서 기병과 보병의 대군이 다가오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등을 돌려 도망쳐라. 언젠가는 적군과 맞설 날이 다가오리라. 신성한 살라미스 섬이여, 데메테르가 씨를 뿌리거나 수확할 때, 너의 여인들의 자식들을 죽이게 되리라.”

줄행랑, ‘주위상(走爲上)’ 역시 36번째 계책이 될 수 있다. 신의 계시는 페르시아 대군과 맞서지 말고 도망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희망을 주었다. “나무 성벽”이 도와주리라는 것이다. “너의 여인들의 자식들을 죽이게 되리”라는 참담한 계시도 빠뜨리지 않았다. 신의 신탁은 늘 모호하게 표현되었다. 신탁의 해석을 놓고 인간들은 머리를 싸매야 했다. 제대로 해석하면 행운을 누렸지만, 아전인수식으로 잘못 해석하게 되면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신탁으로 인해 희비가 엇갈린 다양한 사례는 델피 기행 편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의 터전이다. 지진과 전쟁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거대한 기둥 6개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리스인들은 이곳의 신탁을 가장 영험한 것으로 믿었다. ⓒ박경귀
 
 
 

그리스인들은 영험하기로 유명했던 델피의 신탁이 참담하긴 했지만 분명 혜안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국가 멸망의 위기에서 어떻게 해서든 솟아날 구멍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해석이 더욱 중요했다. 아테네인들은 신탁의 계시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는 “나무 성벽”을 ‘목책’으로 해석하여 아크로폴리스에 목책을 치고 결사항전하자고 주장했다.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이 위기를 현명하게 이끌었다. 그는 “나무 성벽”을 ‘배’로 해석했다. 그는 육전을 포기하고 해전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이 “신성한 살라미스 섬”이라고 말한 대목에 주목했다. 틀림없이 살라미스 섬이 승리와 연관되는 계시를 담고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그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군사력에서 엄청난 열세인 아테네가 지상전으로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칠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해군력만큼은 붙어 볼만 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혜안의 덕분이었다. 3년 전에 라우리온 은광이 발견되자 갑자기 국고 수입이 늘어났다. 이 때 시민들은 고르게 분배하자고 했다. 자기 주머니 먼저 채울 궁리를 했던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국방력 강화에 써야 한다며 반대했다. 당시 아테네의 숙적이자 강한 해군력을 갖고 있던 아이기나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며 함선 200척을 건조하는데 투입하도록 설득하여 관철시켰던 것이다. 아이기나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건조한 3단노선 등 전투 함선들은 살라미스 해전에 투입되어 맹활약했다.

아테네의 강점을 극대화할 줄 알았던 테미스토클레스의 통찰력과 결단이 페르시아 전쟁의 승전은 가져왔다. 나아가 이후 아테네가 해군력을 토대로 그리스의 맹주로 부상하는 계기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비해 거북선과 함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하여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통찰력이 연상된다.

아테네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전 주장을 받아들여 아티카 전역의 시민들을 소개(疏開)시키기로 결정한다. 눈물을 머금고 아크로폴리스를 포기해야 했다. 아테네 유사 이래 최악의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아티카 전역의 아테네 시민들은 모두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살라미스 섬으로 향하는 아테네인들의 엑소더스 행렬이 줄을 이었다. 물론 ‘목책’이 승리의 관건이라고 믿은 수백 명의 아테네인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잔류하여 아테나 여신을 지키며 끝까지 항전하다 전멸 당했다.

아테네 해군을 주축으로 한 그리스 연합 함대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연이어 BC 479년에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주축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군을 물리침으로서 3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된다. 초반에 그리스 대부분의 국토를 유린당했다가 막판의 반전에 성공했던 것이다. 물론 승전의 전기를 만든 일등공신은 아테네 해군이었다.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치고 본토로 귀환한 아테네 시민과 군대는 쑥대밭이 된 아테네 시가지와 모조리 불타버린 신성한 성역 아크로폴리스의 처참한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사실 아테네 시민들은 신들을 버리고 달아난 죄책감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돌보지 못한 아테나 여신의 절대적인 가호에 의해 아테네가 승리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아테나 여신에 대한 감사의 봉헌이 마땅히 있어야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만행을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며 완전히 파괴된 아크로폴리스를 30년이 넘도록 폐허 상태로 방치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 어려움을 감안한 명분이었을 것 같다. 신앙심이 두터운 아테네인들이 더럽혀진 신의 성역을 얼마나 빨리 복원하고 싶었겠는가. 사실 바로 재건하려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다시 국력을 회복하기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당장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신전과 여러 신전들을 복원하는 데 드는 천문학적인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우선 파괴된 주택을 재건하는 일이 급선무였을 듯싶다. 잘라져 버린 올리브 나무와 포도나무를 다시 가꾸어 내는 일도 중요했을 것이다. 당시의 아티카 경제는 농촌의 자급 자족에 크게 의존했었기 때문이다.

불타버린 파르테논 신전이나 아테나 신전보다 더 웅장한 신전을 지어 신들에게 감사드리고 승리를 기념하는 일은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만개시킨 페리클레스가 등장할 때까지 무려 한 세대를 더 기다려야 했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 종전 후 33년이 지난 BC 447년부터 BC 432년까지 무려 16년이나 걸려 아테네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대리석 신전을 다시 건축할 수 있었다. 에렉테이온 신전과 부속 건물들도 연이어 재건되었다.
 

동북쪽에서 바라본 파르테논 신전 모습이다. 지금도 크레인을 이용하여 프리즈 및 벽체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박경귀
 
 
 

페리클레스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이 높던 페이디아스를 총감독으로 선임하여 파르테논 건축의 성스런 대역사를 맡겼다. 페이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을 성공적으로 건축해냈다. 게다가 상아조각상에 황금으로 도금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아테나 여신상을 조각의 거장인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신전 내부의 아테나 성소에 안치했다. 이 아테나 신상의 화려함과 섬세함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아크로폴리스를 찾는 모든 그리스인과 외국인들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소실된 점이 아쉽다. 페리클레스와 페이디아스가 없었다면 파르테논신전의 건축은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990년에 미국 현대 조각가 아란 리퀴르(Alan LeQuire)가 페이디아스가 조각했던 아테나 신상을 실물 크기로 복원했다. 현재 미국 테네시 주 네슈빌 시 센테니얼 파크의 파르테논 신전 내에 있다. 페이디아스의 작품성을 얼마나 복원했는지는 미지수지만 당대의 조각이 얼마나 장대하고 화려했었을 것인가 짐작하게 해준다. 파르테논 신전 안에 안치된 아테나 신상에 일출의 햇살이 비칠 때 신상을 경배하던 아테네인들이 느꼈을 경이와 감동을 상상하면 전율이 느껴진다.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 있던 페이디아스가 조각한 아테나 신상을 실물 크기로 복원한 것이다. 미국 현대 조각가 아란 리퀴르(Alan LeQuire)가 1990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옆에 당당히 서있는 사람이 조각가다. 페이디아스라면 감히 아테나 여신의 옆에서 저런 포즈를 취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미국 테네시 주 네슈빌 시 센테니얼 파크의 파르테논 신전 내에 설치되어 있다. 페이디아스의 작품성을 얼마나 복원했는지는 미지수지만 당대의 조각이 얼마나 장대하고 화려했었을 것인가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Athena_Parthenos_LeQuire.jpg?uselang=ko
 
 
파르테논 신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건축물의 세부 구조마다 신과 영웅들의 활약상과 아테네인의 찬미를 숱하게 조각해 넣은 종합예술품이었다. 건물 외부를 장식한 조각품들은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기에 손색이 없는 봉헌물로 채워졌다. 이 모든 걸작을 만들기 위해 건물 기둥에 홈을 내는 기술자는 물론, 프리즈, 메토프, 페디먼트에 부조와 조각을 새겨 넣는데 수백 명의 조각가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신전 건물을 장식하던 예술품은 다음 회에 소개할 예정이다).

질 좋은 대리석을 채석하고, 이를 고지의 아크로폴리스까지 운반하는 데에도 수천 명의 국가노예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현대 기술과 기계를 사용해도 이런 대역사를 만들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든 것을 인력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당시의 건축이 얼마나 힘든 노역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많은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상상하기 힘든 노역을 감내하게 했을까? 승리를 가져다 준 신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가장 성스럽고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경건한 마음이었을까? 당시 야만족으로 여긴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친 자유의 승리와 환희를 영원히 기념하고픈 열망이 이들을 고무했을까?

당연히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건축가도 총동원되었다. 건축 설계는 익티노스, 건축 시공은 칼리크라테스가 맡았다. 조각가로 더 유명했던 페이디아스가 총감독을 맡았던 것은 신전 건축에서 예술성을 얼마나 중시했는가 알게 해준다. 그 힘든 건축 환경에서도 이들은 건축물을 넘어 하나의 완결된 예술품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3단의 기단 위에 대리석 기둥이 정면 6개, 측면 17개의 직사각형 건물로 총 46개의 기둥이 거대한 신전을 떠받치고 있다. 기단 부분이 동서로 69미터, 남북으로 25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신전이다. 파르테논의 건축적 가치는 사실 규모보다 디테일에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평면도. 아래쪽이 동쪽으로 난 정문이다.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Parthenon-top-view.svg
 
 
도리아식의 간결한 기둥머리 양식과 기둥에 연이어 파인 타원형의 세로 홈은 대리석 기둥의 웅장함과 힘찬 수직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아크로폴리스 정문인 프로필라이를 넘어서는 순간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면 잠이 숨이 턱 막힌다. 많은 상흔을 안고 있지만 장중한 아름다움이 아직도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수학적 황금비율이 적용된 점도 건축미를 더욱 비범하게 만들어준다. 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신전 정면의 양쪽 기단 모서리와 삼각 지붕의 꼭지점 부분을 수평선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직사각형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1:1.618이라고 한다. 인간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끼는 비율이란 의미로 황금비율(golden ratio)로 불린다. 피타고라스가 자연의 질서에서 발견한 수학적 원리가 신을 경배하는 신전에 적용된 것이다. 자연과 일체가 될 때 인간이 가장 안온해 질 수 있음을 건축가들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파르테논 신전 건축의 백미는 건물 구조에 적용된 정교한 기술이다. 수직의 여러 기둥이 빈 공간에 나열될 경우 기둥 중간 부분이 가늘게 보이는 착시 현상을 고려하여 기둥 중간 3분의 1 부분을 조금 부풀어 오르게 하는 엔타시스 기법(entasis) 기법을 썼다. 하지만 기둥 높이의 600분의 1 정도여서 눈으로 실감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 건축에서 사용한 ‘배흘림 공법’이 이에 해당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이나 세종문화 회관의 외관 기둥에 배흘림 공법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서양 중세에서 엔타시스를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한국 건축물에서 나타나는 배흘림 공법은 인간의 착시 보정을 필요로 하는 구조가 아닌 상황에서 굳이 미학적 관점에서 과장되게 표현된 경우가 많다. 실제로 기둥이 벽체에 묻혀 있는 경우 착시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회랑의 빈 공간을 만들어 내던 그리스 신전의 외부 기둥의 기능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건물 전체가 강직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건물 전체에 곡선의 미학이 적용되었다는 점도 놀랍다. 기단부의 경우 중간 부분이 모서리보다 17cm나 높여 미세하게 볼록한 타원형을 이루도록 했다. 지붕과 맞닿는 부분 역시 중간 부분을 조금 더 높여 긴 건물의 중간이 쳐져 보이지 않도록 고려했다고 한다. 기둥의 직경 역시 가장자리 기둥보다 중간 부분의 기둥의 직경도 조금 작다고 한다.

이런 건축적 해석은 건축가들의 분석에 의한 것이지, 실제 육안으로 느끼기 어렵다. 그렇게 두드러지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예술적 건축미를 찬탄하게 만든다. 더구나 모든 건축 부재의 크기와 높이, 각도를 정교하게 조정하여 건축하는 것은 현대의 기술로도 구현하기 어려운 기술이라고 한다. 그리스 건축 기술의 과학성과 탁월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파르테논 신전이 2500년 동안 서양 건축의 전범(典範)이 된 것은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복원 상상도이다. 프로필리아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ParthenonRekonstruktion.jpg

 

 

파르테논 신전 건축은 페르시아 전쟁의 승전을 안겨다 준 것으로 믿었던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봉헌물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전쟁과 평화를 동시에 상징했던 아테나를 경배하는 신전을 세움으로써 다시는 아테네가 전란에 휩싸이는 재앙을 당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영원한 평화를 갈구하는 아테네인들의 간절한 소망과 아테나 여신에 대한 인간의 최고의 숭배와 예찬의 상징물을 담고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 건축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통해 그리스의 패권 국가로 올라서면서 축적한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축적한 동맹의 기금 일부를 파르테논 신전의 재건에 유용했다. 동맹국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는 파르테논 신전의 재건을 통해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정신적 구심을 다시 세우고, 동맹국들에게 아테나 여신이 수호하는 제국의 수도 아테네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의 황금기의 산물이다. 하지만 웅장한 신전이 만들어낸 찬란한 위용은 그 빛의 강렬함만큼이나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아테네를 융성하게 했던 민주주의 속에 숨어있던 오만의 그림자였다. 페르시아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아테네가 동족인 그리스 동맹국들의 자유를 서서히 앗아가는 일그러진 제국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의 상징은 아닐까. 아테네의 융성이 절정에 이르는 동시에 그리스의 분열과 아테네의 몰락의 싹이 자라고 있었던 셈이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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