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축가 요른 웃존
예른 오베르 웃손(Jørn Oberg Utzon, 1918년 4월 9일 ~ 2008년 11월 29일)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건축가로 유명한 덴마크의 건축가이다.
생애
예른 웃손은 코펜하겐에서 선박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덴마크에서 자랐다. 1957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설계 경기에서 그의 첫 국외 설계이며 출품작이 설계 기준에도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당선되었다. 그가 제출한 디자인은 예비 드로잉보다 약간 나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은 그를 "천재"로 묘사하면서 다른 어떤 선택도 양도할 수 없다고 했다. 반면에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는 그를 무시해버렸다.
여러 해 동안 웃손은 그의 원래 개념적인 설계에서 차차 주요한 변화들을 이끌어냈으며, 점차 두 개의 홀을 덮는 거대한 껍데기를 건설하는 방법을 개발해냈는데 원래의 타원형의 껍데기를 구의 복잡한 부분들에 기초를 둔 디자인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웃손은 자신의 설계가 오렌지의 껍질을 벗기는 단순한 행위에서 따왔다고 했는데, 건물의 14개의 껍질은 다 결합하면 완벽한 구의 형상이 될 것이었다.
비록 웃손이 이 홀들의 실내에 대해 눈부신 계획을 갖고 있었더라도, 그는 그 디자인의 이 부분을 실현시킬 능력이 없었다. 1965년 중반에 로버트 애스킨(Robert Askin)이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로 당선되어 자유당 주정부가 들어섰고, 웃손은 새 공공부문 장관인 데이비스 휴스(Davis Hughes)와 갈등을 겪었다. 공사비용 초과를 억제하려고 했던 휴스는 웃손의 디자인, 스케줄, 예상비용 등에 의문을 가졌고 결국은 웃손에게 돈을 대는 것을 중단했고, 1966년 2월 수석 건축가에서 사퇴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웃손은 며칠 뒤 비밀리에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페라 하우스는 결국 완공되었고, 1973년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개방되었다. 그러나 건축가는 행사에 초대받지 못했고, "예른 웃손"이란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다.
2003년 웃손은 시드니 대학교에서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디자인으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웃손은 자신이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여행하기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이 학위를 수락했다. 웃손은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명예 훈작(Companion of the Order of 오스트레일리아) 작위와 시드니 시의 열쇠를 받았다. 웃손은 또 2000년에 한 계약에서 오페라 하우스(특히 리셉션 홀을)를 재설계하는데 참여하기로 했다. 또한 2003년에는 건축에서 최고의 영예인 프리츠커 상을 받았다.
2006년 3월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웃손이 1966년 이래로 오스트레일리아에 머무르지 않은 마지막 몇 년간 웃손에 의해 건설된 서쪽의 열주(늘어선 기둥들) 증축부분을 개방했다. 웃손의 아들인 얀(Jan)은 개관식에 대신 참석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먼 여행을 하기에는 지금 너무 늙었지만, 그는 오페라하우스에 살고 숨 쉬고 있으며, 창조자로서 그는 그것을 보고 눈을 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7년 6월 29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2008년 11월 29일, 웃손은 일련의 수술 후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결국 그는 완성된 오페라 하우스를 직접 보지 못한 채 별세했다.
건축 작품
완공된 주요 프로젝트들:
- 워터타운, 덴마크 본홀름 스바네케 , 1949-1951
- 건축가의 자택, 덴마크 Hellebæk, 1950-1952
- Middelboe house, 덴마크 Holte , 1953-1955 image
- Kingohusene, courtyard housing, 헬싱괴르(Helsingør), 1956-1960 image
- Elineberg Housing, 스웨덴, 헬싱보리(Helsingborg), 1954-1966. Built by Swedish partners Erik and Henry Andersson image
- Planetstaden housing project, 스웨덴 룬드(Lund), 1956-1958. Built by Swedish partners Erik and Henry Andersson.
-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1956-1973
- Fredensborghusene, 마당 주거, 덴마크 프레덴스보리(Fredensborg), 1959-1965 image
- Melli 은행, 이란 테헤란, 1959-1960 archnet page
- Hammershøj care centre, 덴마크 헬싱괴르, 1962-1966. Built by Birger Schmidt. image
- Semtex Brynmawr, 1967-2001.
- Bagsværd 교회, 덴마크 Bagsværd, 1968-1976 image
- Espansiva building system, 조립식 독신가정 주택들, 덴마크, 1969
- Can Lis, 건축가의 자택, 스페인 마요르카, 1971-1973 image
- 쿠웨이트 국회, 쿠웨이트 쿠웨이트시티, 1972-1984 archnet page
- Paustian 가구점, 덴마크 코펜하겐, 1985-1987 image
- Can Feliz, 스페인 마요르카, 1991-1994
지어지지 못한 프로젝트들:
2. 요른 웃존의 시련과 영광의 대서사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Sydney Opera House by jorn utzon,1957-1973
요른 웃존의 시련과 영광의 대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Sydney Opera House by jorn utzon,1957-1
요른 웃존의 시련과 영광의 대서사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Sydney Opera House by jorn utzon,1957-1973
요른 웃존의 시련과 영광의 대서사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Sydney Opera House by jorn utzon,1957-19
2018. 4. 24. 19:31
1956년 에로 사리넨이 심사위원이었던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NSW 주정부 주관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국제설계경기에서 덴마크의 신예 건축가 요른 웃존 Jorn Utzon 의 안이 당선된다. 당시 38세. 바다를 가르는 배의 돛을 디자인 모티브로 삼았다. 1957년 웃존이 설계를 시작하고 일부 저층부 포디움공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구조엔지니어 오브 아룹 Ove Arup경 이 독특한 지붕형태로 야기된 지붕설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위해 웃존과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함께 한다. 결국 웃존의 오랜 스터디 끝에, 구 sphere 의 조각들이 돛지붕이 되는 개념으로 귀착된다. 지붕 조각들의 구조는 갈비뼈 모양의 뼈대가 있는 "리브드 프리캐스트" ribbed precast 콘크리트 판넬로 정한다. 하지만 이런 지붕구조 개념 답안을 구해내는데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지붕 모양을 해결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SOH) 서측 전경. 붉은 색의 포디움 위에 돛 모양의 본체가 떠있다. 왼쪽이 콘서트홀과 오페라 씨어터의 본체이고, 오른쪽의 작은 덩어리는 정면 입구의 인트로 intro 역할을 하는 파빌리온 형태의 레스토랑이다.
그사이 공사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공기가 늘어나자 여론이 심하게 나빠졌다. 언론에서는 세금 먹는 하마라는 등 건축디자인까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NSW 공공사업장관 데이비드 휴즈는 1966년 웃존의 디자인 경력, 설계비 산정, 공기 관리 능력등에 의심을 품고 웃존이 제출한 지붕공사 합성목재 전문업체 사용 요청을 거절한다. 이에 그동안의 마찰과 불만이 폭발하면서, 웃존이 사무실을 닫고 시드니를 떠난다. 휴즈는 호주의 건축가 피터 홀 Peter Hall 을 책임건축사로 임명하여 공사를 계속 진행시킨다. 디자인건축가로 위촉하겠다고 달랬지만, 웃존은 다시는 시드니에 오지 않겠다면서 호주를 떠난다. 웃존이 없어지자 수많은 디자인변경이 용이해지고, 일사천리로(?) 공사가 진행되어, 1973년 드디어 준공하게 된다. 웃존은 개관식에 초청이 되지 않았다. 이름 조차도 언급되지 않았다. 웃존도 올 의향이 없었다.
프로젝트 초기 만면에 미소를 띤 요른 웃존. ca.1960
요른 웃존 (1918-2008).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왕립미술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아버지는 유명 요트회사의 선박제조기술자로 웃존에게 선박디자인도 소개하기도 했다. 잠시 스웨덴의 건나 애스플런드 와 핀란드의 알바 알토 사무실에서 일했다. 북아프리카, 멕시코, 미국, 일본, 중국, 호주 등을 여행하였다. 미국에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찰스 임스도 만났다. 멕시코에서는 마야문명의 피라미드에 크게 감동했다. 1956년 시드니오페라하우스(SOH) 국제설계경기에서 뜻밖에 당선되자 1957년 시드니로 거처를 옮겼다.
프로젝트 초기의 요른 웃존 (왼쪽)
SOH 초기 행복한 시절. all smiles.
북측 전경. 시드니 다운타운이 뒤로 보이고 왼쪽의 숲이 식물원이다.
북측 전경. 높은 돛의 오른쪽이 콘서트홀, 왼쪽이 오페라씨어터.
핑크빛 PC판넬 포디움 위의 콘서트홀
지붕공사 그리고 이별
SOH 는 3단계로 나누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포디움공사, 돛지붕 건축공사, 실내공사 이다. 포디움은 웃존의 설계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돛지붕 공사는 웃존과 구조엔지니어 오브 아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설계가 끝나지않아 공기지연의 원인이 되었다. 돛지붕의 구조형태와 지붕 마감처리가 시간을 끌었다. 결국 웃존의 책임건축사 지위가 취소되고 프로젝트에서 완전 떠나게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1966년 2월이다. 이후 NSW 주정부의 휴즈장관이 지명한 피터 홀이 돛지붕 잔여 공사를 마감하고 3단계 실내공사를 계속 진행시킨다. 웃존이 없어지자 디자인변경이 다반사가 되었다. 웃존룸을 제외하고는 웃존의 실내디자인은 모두 삭제되었다.
1966년 3월, 웃존의 복귀를 주정부에 촉구하는 건축학과 대학생들.
웃존의 고별 기자회견
darkest moment. 휴즈장관은 웃존에게 설계비 지급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웃존은 9년여 동안의 시드니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호주를 떠났다. 시련의 계절이었다. 1966년 3월이었다. 웃존에게는 최고의 사랑과 영원히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웃존이 사라지자 휴즈장관은 피터 홀을 이용하여 많은 설계변경을 시도했다. 실내공사는 웃존의 안을 무시하듯 다 바꿔버렸다. 공기단축과 공사비절감이 이유였다. 높은 돛지붕의 큰 덩어리를 차지했던 다목적 오페라/콘서트홀은 전용 콘서트홀로 변경되었다.
배치도( google map). 하늘에서 보면 시드니오페라하우스는 세(3) 덩어리 처럼 구성되어있다. 진입부 계단 맨앞의 작은 덩어리가 레스토랑, 중앙의 제일 큰 덩어리가 콘서트홀, 오른쪽 덩어리가 오페라씨어터 이다.
south view
남측 전경
상기 남측 전경에서 왼쪽 덩어리가 레스토랑, 중앙이 콘서트홀, 오른쪽이 오페라씨어터 이다. 왼쪽의 작은 덩어리는 SOH의 건축적 인트로 역할을 하는 파빌리온 타입의 레스토랑이다.
웃존이 1950년대 멕시코를 여행하면서 꼭대기에 신전이 있는 마야문명의 웅장한 계단식 피라미드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SOH는 거대한 신대륙 계단 위에 세워진 20세기 신전인가보다.
south
SOH 남측 진입광장의 스케일없이 광활하고 거대한 계단 마운튼.
남측 진입광장
진입광장 계단에서 베네롱 레스토랑을 보고...
진입광장에서 서측을 바라보고...
콘크리트 뼈대 위에 입힌 세라믹타일 pc판넬의 지붕.
SOH의 생명 '돛지붕'
리브드 프리캐스트 ribbed precast concrete 로 구성된 지붕구조체 프레임 위에 세라믹타일 마감의 pc판넬로 돛지붕을 구성하였다. 건축 텍토닉 면에서 SOH의 하이라이트이다. 부모가 덴마크인이고 덴마크공대를 나온 아룹 경은 훗날 당시 지붕의 형태는 구조설계의 극한점에 와 있을 정도로 어려웠다고 회상하면서 덴마크 태생의 23년 후배인 웃존은 천재라고 칭찬하였다.
돛지붕. SOH의 건축적 텍토닉 하이라이트.
같은 곡면반경의 조각들.
spherical solution
돛지붕들의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하나의 구(공, sphere)에서 가져온 조각들이다. 그래서 조각 판넬들의 곡면 반경이 모두 똑같다. 쉘구조의 리브드 PC판넬 제작이나 판넬에 붙이는 세라믹타일 조각의 접착이 모두 동일하게 진행될 수 있게 됐다. 10년 여에 걸쳐 이루어낸 답안이었다. 웃존이 아룹과의 오랜 연구 끝에 해결한 방법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10년 넘게 시간을 보내고 웃존은 도중에 시드니를 떠나야했다.
no ribbed pc panels, no SOH
스웨덴의 기술로 제작된 세라믹타일 pc지붕판넬. 굵은 선이 판넬 조인트.
세라믹 타일 조각
세라믹타일 PC판넬이 지붕 외피가 됐다. 타일조각은 크기가 12cm로 하얀색과 크림색의 거의 반사끼가 없는 매트 피니시 matte finish 로 두(2) 가지로 구성했다. 스웨덴 회사의 기술로 3년동안 제작되었다. 빛의 각도와 양에 따라 매우 다양한 색감을 제공한다.
"시드니 콘서트홀"
"시드니 콘서트홀"
웃존의 원래 디자인은 높은 돛의 큰 덩어리에 오페라와 콘서트의 다목적홀을 두기로 하였으나, 호주방송(ABC)의 요청으로 공사중 전용 콘서트홀로 변경되었다. 작은 덩어리로 간 오페라는 대형 공연이 어려워 불만이 높아졌다. 시드니오페라하우스가 아니라 시드니콘서트홀이 되었다. 휴즈장관의 아이디어 이다. 웃존이 떠나자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지경이 되었다.
북쪽 로비
콘서트홀 북측 로비
북측 로비에서는 바다와 하버브리지의 전망을 즐길 수 있다.
Bennelong Restaurant
진입광장에 있는 조그만 덩어리의 파빌리온 베네롱 레스토랑. 노출된 돛지붕 구조체 리브드 프리캐스트 ribbed precast 패널의 뼈대가 천정을 이루고 있다.
Bennelong Restaurant
베네롱 레스토랑. 남쪽 시내 다운타운의 조망을 즐길 수 있는 진입광장의 파빌리온 타입 인트로 레스토랑이다.
시련의 지붕공사
돛지붕의 형태와 구조설계, 지붕외피 마감공사 방법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보낸다. (설계 초기 웃존은 당선작에서 제안한 지붕형태가 어렵지 않게 설계되리라고 본 것 같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결국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제 구조엔지니어들의 의구심에 가득 찬 질문들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웃존과 오브 아룹의 엄청난 콜라보였다. 건축디자인과 구조 엔지니어링, 공사기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결국 공사비 증액과 공기 지연으로 이어진다. 공사비는 처음 예상공사비 700만불에서 1억불로 14배 가까이 올라갔다. 그리고 11년을 지붕공사 하는 데만 보냈다. 여론이 극도로 나빠졌다. 심지어 디자인에까지 비난이 번졌다. 결국 웃존이 프로젝트에서 사임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진다.
요른 웃존의 설계경기 당선작, 1956
SOH 지붕형태에 관해 얘기하는 웃존과 아룹 경. circa1957.
웃존과 아룹경
Danish Connection
웃존은 1918년생으로 덴마크의 왕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아룹경은 1895년 덴마크인 부모 밑에서 영국에서 태어나 덴마크공대에서 콘크리트 구조학을 전공했다. 핀란드 출신의 미국이민자로 심사위원이었던 에로 싸리넨은 당시 절정의 표현주의 건축을 구사하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게이트웨이 아치와 뉴욕 케네디공항의 TWA 터미널 등이 대표적이다. 어찌보면 표현주의 건축인 웃존의 SOH 안이 싸리넨의 마음에 들었나보다. 실제 심사위원들이 지붕형태의 시공성때문에 여러번 검토를 했다고 한다. Scandinavian connection? 후에 지붕 세라믹타일 판넬은 스웨덴 회사에 의해 제작된다.)
peter rice @ ove arup
1950년대말 오브아룹에 입사한 아일랜드 출신의 피터 라이스 peter rice는 시드니오페라하우스 SOH의 말썽많은 지붕구조를 해결하는데 투입된다. 몇년후 1960년대초 아예 시드니로 옮겨 지붕공사를 완성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와 연계된 컴퓨터 프로그램도 만든다. 거기서 7년을 일한다. 이어서 퐁피두센터에 참여하면서 렌조피아노와 리차드로저스와 함께 작업한다. 엔지니어지만 디자인에도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얘기들한다. 영국왕립건축가협회 RIBA 로 부터 골드메달을 받는다. 구조엔지니어가 이 상을 받은 건 오브아룹경 다음으로 두번째이다. 뇌종양때문에 57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1992년.
peter rice
공사중인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너머로 하버브리지가 보인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에서 하버브리지까지는 직선거리로 500m정도 떨어져있다. (google map)
Butcher's rack 푸줏간 시렁
지붕 외피로 쓰인 쉐브론 스타일의 세라믹타일PC판넬 현장플랜트 양생과정. 도살장 시렁 butcher's rack 이라고도 했다.
Shell Vault 의 포스트텐션 PC 프레임 위에 세라믹타일 마감의 리브드 ribbed PC 판넬을 얹히고 있다. 부채꼴의 휘어진 패널은 구(공)의 일부분이다.
top view
GRAND OPENING 개관식 날 아침.
온갖 시련을 딛고 드디어 1973년 10월 20일 영연방 수장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개관식이 거행된다. 공사 착수 14년만이다. 시드니 시민과 호주 국민의 잔칫날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인 건축가 요른 웃존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SOH에 쏟아지는 찬사에도 웃존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웃존 룸 Utzon Room. 웃존이 유일하게 인티리어 디자인 한 방.
프리츠커상 수상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2003년 요른 웃존이 SOH를 대표작으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한다. 심사위원이었던 프랭크 게리는 SOH가 시드니는 물론 나라 전체의 이미지를 바꿔 놓았다고 극찬했다. 세계 건축계가 그를 인정했다. 그리고 SOH는 2007년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다. 피라미드, 파르테논 신전 등의 반열에 오른다. 세계건축사에 길이 남을 20세기 현대건축의 걸작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2008년 웃존은 결국 SOH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채 91세로 눈을 감는다.
2010 Utzon Lecture Series at UNSW
SOH는 그 사이 세계 8대 불가사의에도 오르고 전세계인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엄청난 관광수입으로 NSW주 경제의 효자 노릇도 하고 있다. 시드니 시민과 호주 국민의 자긍심이자 자랑거리다. 2004년 웃존이 실내디자인한 유일한 방을 웃존룸 Utzon Room으로 명명해 위대한 건축가에게 충분히 표현 못했던 존경과 경의를 늦게나마 진지하게 표했다. 이때 시드니 사람들에게 영광이라고 멀리서 전하면서 모든 걸 용서했다. 86세다. 2008년 웃손이 작고하자 다음해 SOH는 성대한 추모 음악회를 콘서트홀에서 열어, 다시한번 용서를 구했다. 또한 시드니의 NSW대학은 2010년부터 웃존 렉쳐 시리즈를 출범시켜 그를 기리고 있다. 건축가인 아들 얀 Jan 도 참석했다. 그래서 웃존은 다시 시드니의 달링이 되었다. ciao.
ywp04262018. updated 09192022
요른 웃존
시드니를 용서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웃존룸 명명식에도 아들 얀을 보내야했다. 2004년 작고하기 4년전이다.
*Sydney Opera House, Sydney, Australia, 1957-1973
*architect: Jorn Utzon, Denmark
*structural engineer: Ove Arup & Partners, UK
(substitute architect: Peter Hall,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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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s: This talk has been produced and written by Young Woo Park, aia, ncarb.
* References: The most of writing has been based on AD Classics of Archdaily and Wikipedia even though some are from independent sources such as YouTube, the Guardian, Arch2o, Architect magazine, UNESCO whc,
and Google. Please email to the writer (ywpark5293@gmail.com) in case of having questions or disagreements.
*Copy rights reminder: This talk can not be used or reproduced in other publications on-line or off-line, entirely or partially, without a written consent of the writer.
*Photo Credits: Most photos and images are from Archdaily. Some are from UNESCO whc, Getty Images, Alamy, Pinterest, Flickr, Dezeen, Google, Google Image, the Guardian, sydneyoperahouse.com and Wikipedia unless noted otherwise. Please email to the writer in case of having questions or disagreements.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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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 plusplus:
배치도를 보면, 오페라하우스는 크게 세(3) 덩어리로 구성되었다. 왼쪽 서측 큰 덩어리가 2,800석의 콘서트홀, 오른쪽 동측이 1,500석의 오페라씨어터. 남측 전면 진입광장 계단에 걸쳐있는 조그만 덩어리는 베네롱 레스토랑이다.
콘서트홀 평면, 입면
콘서트홀의 맨 왼쪽 돛은 테라스라운지 A4, 두번째는 홀 청중석 A3, 제일 높은 세번째 돛은 무대부분 A2, 오른쪽 제일 낮은 돛은 진입공간 A1 이다. 하부 포디움은 각 종 제2의 뮤직/예술 공연 공간과 리허설, 연습실 등과 각 종 레스토랑 등 편의시설이 들어찬 광대한 지하공간이다.
콘서트홀 단면
'큰 돛' 을 차지한 콘서트홀
서쪽 덩어리는 높은 돛 지붕으로 인해 무대천정공간이 높고 커서 원래 오페라/콘서트홀로 계획했으나 공사중 호주방송(ABC)의 요청으로 2800석 전용콘서트홀로 변경되었다. 무대천정공간이 낭비된 셈이다. 대신 작은 덩어리에는 오페라/발레 극장이 들어섰다. 최근 대형 오페라 공연에는 무대공간이 협소하다고 비난이 높다.
오페라씨어터 단면.
'작은 돛' 으로 쫓겨난 오페라씨어터.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가 아니라 시드니 콘서트홀 이 되었다.
트램거치장으로 사용하던 공사전 부지 현황.
설계심사하는 에로 싸리넨 (중앙), 1956
웃존의 설계경기 제출안(당선작) 1956.
당선안 컨셉 스케치 (후에 지붕공사가 이렇게 어려울거 라고는 생각 못했다.)
구의 일부가 된 지븡.
spherical solution
웃존의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의 결과로 구 sphere 표면의 일부분이 SOH 돛지붕이 되는 해결책에 드디어 귀착했다. 돛지붕 조각은 각각 크기가 다르지만 하나의 구에서 나온다. 반경이 다 같다. 아룹 엔지니어들도 노력을 했지만, 결국 해결해 낸 것은 웃존이었다. 지붕 타일 PC판넬 제작과 설치에도 이제는 문제가 없었다. 이제 골치아팠던 큰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주정부는 빗발치는 공사비증가와 공기지연의 비난과 책임에 웃존을 희생양으로 삼아야했다. 웃존은 1957년 당선이 되자 호주에 가족까지 데리고와 머물고 있었다. 휴즈장관이 설계비 지급을 중단하고 대체 책임건축사를 임명하자 웃존은 1966년 3월 호주를 영원히(?) 떠난다. 호주의 유명건축가들과 건축학도들이 웃존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NSW주정부에 항의 시위를 했으나 웃존은 다시는 SOH를 보지 못했다. 휴즈는 프로젝트 디자인건축가로 다시 초대한다고 화해를 시도했으나 마음이 떠난 웃존은 응하지 않았다. 최악의 순간이었다.
Danish Connection. 덴마크인 부모를 둔 오브 아룹 경은 SOH 지붕 구조설계로 더욱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파리의 퐁피두센터 구조설계에 참여하면서 세계적인 구조설계 엔지니어 명성을 얻는다. SOH는 웃존과 함께 아룹경이 참여하면서 덴마크와 인연이 많아진다.
공사 현장의 웃존. 1957년 설계가 시작되자 가족과 함께 덴마크에서 시드니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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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extra :
지붕 PC 립rib 은 세그먼트로 제작, 현장에서 포스텐션으로 조립 설치되었다.
돛지붕 프리캐스트 립(부채살)이 결집하는 지면과의 접합부 디테일.
대체건축사 피터 홀이 지붕 PC립 (부채살)의 결집 접합부분 목업을 점검하고 있다. c.1966. 웃존이 떠난 후에도 지붕공사는 계속되었다.
14년 전체 공기중에 지붕공사만 11년을 보내고, 1973년 10월 엘리자베스여왕에 의해 드디어 개관되었다.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엄청난 관광수입으로 시드니는 물론 세계 최고의 관광지중의 하나가 되었다. 세금 먹던 하마로 비난받고 건축가와도 결별을 해야했던 쓰라린 경험의 SOH는 시드니 시민들의 달링으로 영광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웃존은 완성된 SOH를 직접 보지못한채 결국 2008년 타계했다. SOH는 웃존룸을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다.
준공을 앞두고 휴즈장관이 애스킨수상에게 현장 설명을 하고있다.
2010년 진입광장에서 5,200명이 참가한 누드 퍼포먼스 " the base". 미국 사진작가 스펜서 투닉의 작품.
공연과 행사가 1년 365일 끊이질 않는 SOH는 시드니의 문화예술 심장이자 넘버원 관광 명소이다. 공사 중에 투입된 초과비용은 세발의 피일 정도로 경제효과도 엄청난 시드니의 기둥이다. 무엇보다도 호주 의 대표적 국가이미지가 되었다. 한마디로 당시 예술과 엔지니어링의 한계까지 쫓아갔던 웃존의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Viva Utzon!!!
ci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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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상환의 문화이야기] 시드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 이상환 전 국립오페라단 지휘자, `베토벤 아저씨` 저자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세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오페라하우스 뒤편으로 보이는 하버브리지의 고풍스러운 다리 모습과 오페라하우스 주위의 삼면에 펼쳐진 해수와 그 고혹적인 자태는 진정 아름다움의 절정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다.
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20세기 최고의 건축물이라는 영예를 안고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오렌지 껍질을 깎아 세워 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지붕은 여러 개의 타일을 붙이는 특수공법으로 제작되었다. 지붕을 덮은 타일의 수만도 100만 장이 넘고, 또 이것은 특수 제작된 것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는다고 한다.
객석 규모는, 오페라 극장 1,547석과 콘서트홀 2,679석으로 되어있다. 또 건물 내에는 영화극장, 스튜디오, 갤러리 등이 있어 관광객에게뿐 아니라 시드니를 대표하는 전문 복합문화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가 세워진 데에는 호주 국민들의 오랜 숙원과 음악예술에 대한 큰 갈망이 있었다. 호주는 1900년대 초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이 건축물이 세워지기 전만 해도 시드니는 음악예술의 전성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또 나라를 대표할 만한 공연장도 없을 때였다.
결국 정부는 국민들의 숙원을 담아 정부예산에 복권기금까지 조성해 세계적인 공연장을 세우기로 한다. 그리고 막대한 예산을 투자했다. 건축 기간도 1955년 디자인 공모로부터 1973년 완공 때까지 무려 18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말하자면 이 오페라 하우스는 온 국민의 염원과 모든 기대가 다 담겨 탄생한 건축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디자인이나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색다르고 뛰어나야만 했다. 그것은 자국민에게 만족과 자부심을 줄 뿐 아니라 세계 속의 랜드마크로 세울 야심찬 계획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기의 건축물을 짓는 디자인 공모에도 세계적인 건축설계사들을 포함해 2백여 점의 작품들이 지원했다. 결국 그중에서 가장 독창성이 뛰어난 덴마크의 젊은 건축가 요른 웃존(Utzon)이 설계한 디자인이 최종 선발되었다.
그 당시 수많은 기라성 같은 세계의 건축가들이 공모에 참여했다. 하지만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젊은 웃존의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뽑히게 되었다.
이 디자인은 마치 돛대가 바람을 가득 담고 항해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오페라하우스 주위와도 잘 어울렸을 뿐 아니라, 외관 자체만으로도 멋과 생명력이 느껴졌다.
당시로서는 이런 독창적인 디자인과 건축 스타일은 그리 흔한 것만은 아니었다. 또 그런 시험적인 용기를 가진 건축가들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발상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시대였다.
실제로 그런 이유에서 웃존의 디자인은 첫 심사에서는 탈락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끝내 시드니 시민들은 독창적이고 매혹적인 웃존의 디자인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마도 다른 나라였다면 예산이나 건축의 난해함으로 인해 그의 설계가 배제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라의 미래를 걸고 모험을 감행한 시드니 시민들에게는 그 모험적이고 독창적인 그의 디자인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말았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시드니 시민들이 한 결정은 참 잘한 것 같다. 한 사람의 음악인으로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보면 왠지 자부심도 그리고 부러움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집 거실에 아름다운 고급가구가 하나만 새로 들어와도 집안 분위기는 확연히 바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시에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처럼 독창적이고 예술성있는 랜드마크 건축물이 새롭게 세워진다면, 아마 그 도시의 이미지도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4. 오페라 하우스 설계한 웃존 세기의 건축가, 90세로 생 마감 ‘지병인 심장병이 원인’
호주의 상징물인 오페라하우스를 설계, 건축 디자인에 큰 획을 그은 거장 웃존은 이날 코펜하겐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졌다.
이름없는 새내기 건축가였던 웃존은 1956년 우연히 건축 잡지를 뒤지던 중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설계 공모광고를 보고 도전을 했다.
평소 일생의 역작이 된 이 건물의 영감을 접시에 잘린 오렌지에서 얻었다고 그는 말했다.
오페라 하우스 설계자 웃존은 이듬해인 1957년 시드니로 건너와 건설의 지휘를 맡게 되지만 거듭되는 공사 지연과 예산 문제로 주정부 당국자와 마찰을 겪으면서 5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다시금 덴마크로 간다.
그 후 웃존은 시드니하우스는 물론 호주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을 정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나 2006년 시드니하우스의 새 날개를 디자인하는 작업에는 아들 잔(Jan)과 함께 참여했다.
웃존은 알바 알토(Alvar Aalto) 메달을 포함해 프랑스 명예훈장(Legion of Honour)을 받았으며 2003년에는 오페라하우스의 설계에 대한 공로로 ‘건축가들의 꿈’이라 불리는 퓨리쳐상을 받았다.
호주의 시드니오페라하우스 측은 30일 날개에 단 조명을 평소보다 낮춰 웃존의 죽음에 대한 조의를 표할 예정으로 전해졌다.
/박재영기자 pjy0028@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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