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에서 갈릴리호수까지 - 2
둘째 날 (8월10일) - 태양의 나라, 신의 나라
아침식사를 마치고 7시 반쯤, 기자의 피라미드를 구경하기 위해서 지난 밤 숙소인 피라미드호텔을
출발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컬러는 아이보리와 회색 톤이 섞여 있다. 사막에서 얻은 돌과 벽돌이
주요 외장재이고, 콘크리트 색깔이 가미되어서, 특색없이 밋밋하고 우중충해 보이지만, 고색창연한
천년도시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면도 있다.
시내를 막 벗어나려는데 차창가로 얼핏 피라미드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막 한가운데 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이렇게 시내 가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뒤에 알아보니, 카이로는 피라미드보다 약 2000년쯤 후대에 나일강변에 도시가 자리잡았고,
지금은 서쪽, 피라미드 방향으로 도심이 무분별하게 계속 확장되어서, 피라미드의 주변 환경을
위협하는 상태에까지 이른 듯하다.
현재 이집트에는 90개 정도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는데, 그중 나일강 서쪽에 있는, 쿠푸 왕과 그의
후계자인 카프라, 멘카우라 왕의 피라미드만이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붕괴하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파로스는 지진으로 해체되었으며, 아테네의 올림삐아 신전은
침략자들에 의해 약탈되었으나, 수학자이자 건축가인 임호텝이 만든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세계7대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제4왕조의 쿠푸 왕은 기자의 서쪽 5마일 지점, 서북쪽 구석에 최대 규모의 피라미드를 지었다. 그후
두 후계자도 같은 장소에 자신들의 피라미를 지었고, 이 세 피라미드가 세계에서 가장 큰 역사적
기념비가 된 것이다. 기자의 피라미드 들은 마스타바에서 시작된 건축이 진화한 것으로, 전체적인
건축군이 조세르왕 피라미드만큼 치밀하고 엄격한 통일성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거의 4배의 크기인
최대의 피라미드 군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가 230m에 5.29ha의 면적을 차지하고, 원래
높이는 146m 였다. 이집트를 주로 연구한 영국의 고고학자 페트리에 의하면, 돌 하나의 평균 무게가
2.5톤이고, 최고 15톤에 이르는 230만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나폴레옹은 이 석재들로, 프랑스 국경
전체에 담을 쌓을 수 있으리라 했다. (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창작과 비평사’ 에서 발췌)
여행의 목적이 ‘출애급의 땅’ 방문인지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구경하는데 할애된 시간은 2시간 남짓
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내부 관람과 주변 부속 건물과 박물관 관람, 그리고 밤에 펼쳐지는 '빛과 소리'의
레이저 쑈 등은 모두 생략되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다음이라는 것이,
가능보다는 불가능 쪽의 확률이 높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자꾸 뒤돌아보며 버스에 올랐다.
피라미드를 가까이에서 보면, 표면이 계단처럼 들쑥날쑥 요철이 있는데, 원래는 백색 석회암으로
미려하게 마감되어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건축자재로 뽑아가면서 표면이 이렇게 거치고 흉한 모습이
되었다 한다. 가운데 위치한 카프라 피라미드 상부에는 옛 모습의 일부가 남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쉽게 한다.
아울러,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회자되고 있지만, 대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건축하려면 연인원 10만 명이 3개월씩 20년 동안 공사를 해야 가능하리라고
전문가들이 추정하고 있다.
죽어서 신이 되고자 했던 이집트 역대 왕들의 도를 넘어 선 허황된 욕심때문에, 희생된 백성들의
피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의 끝은 어딘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건축의 목적이 정당해야 그 건축물의 가치가 더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념에 젖으며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피라미드의 거리'를 빠져나왔다.
카이로 시내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아기예수 피난교회’였다. 교회가 위치한 올드 카이로
(Old Cairo) 지역은 이슬람 국가내의 기독교 지역이라서, 입구에는 펜스가 설치되어있고 곳곳에 무장한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서 방문자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아기예수 피난교회’는 예수님 일행이 1개월간 피난생활을 하였던 동굴위에 건축되었으며, 이집트의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비밀회합을 가지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넓은 회중석과 2개의 긴 복도가 있고,
대리석 기둥은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와서 재사용하였고, 12개의 기둥 중에서 잘 다듬어지지 않은
화강암기둥은 가롯 유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님 일행이 피난하였던 지하 동굴은 현재 반쯤 물에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 번째로 들런 곳은 벤 에즈라 회당이다. ‘모세기념교회’라고도하는데, 모세가 이집트 공주에 의해서
물에서 건져 올려져 이곳에 뉘어진 곳이라는 이야기와, 모세가 출애급 직전 마지막으로 기도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외관은 마치 회교사원과 비슷하나 내부는 유대교당으로 꾸며져 있고,
교회 안에는 큰 대리석 석조물이 한가운데에 있는데, 모세의 기도장소라고 했다.
위의 두 건물은 모두 내부 사진촬영 금지였으나, 기록을 위하여 한두 장만 살짝 찍고, 미로와 같은
긴 골목길을 돌아서 전용버스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정오 무렵에,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고대유물 박물관으로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는,
카이로 박물관의 소장품들의 규모와 양은 과히 놀랄 만 했다. 워낙 보물들이 많다 보니까 웬만한
유물들은 구석에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고, 동물 형상을 한 신 들의 종류도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로 다양했다.
2층 전시실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투탕카멘 왕의 방은 명불허전, 과히 환상적이었다.
특히 황금마스크와 관의 아름다움은 관람객을 압도하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루 종일 돌아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박물관을 1시간 만에 빠져 나오면서 부러움과 아쉬움이
교차되었다.
부러운 점은, 훼손 위험이 적을 것 같은 석조 유물들은 관람객들이 직접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손때가 까맣게 뭍어있는 유물들을 보면서, 보존을 핑계로 지하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느 정도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 옳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고,
아쉬운 점은, 사진과 비디오 촬영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박물관 내부로 카메라 반입 자체를 아예
허용하지 않았다. 유럽의 박물관들이 사진촬영에 아주 관대한 것을 보고 신선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는데, 카이로박물관이 사진촬영을 금지한 것은, 유물의 보존보다는 일종의 상술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래도 관람객들은 넘쳐 나니까, 앞으로도 이 부분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은 나일강 위의 ‘펠루카’라는 유람선상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20명 정도가 탈 수 있고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무동력 돛단배인데,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고, 바람도 없는데 잘도 움직였다.
‘카이로 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 저녁식사였다면......’ 하는 욕심을 내보지만, 30분 정도의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카이로를 떠나야 하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다.
아랍어로 '승리'를 뜻하는 카이로는 이집트의 수도이자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서로 공존하는 수 천 년의 역사도시이다. 카이로는 나일 강 하류가 두 지류로 갈라지는
지점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며, 시가지의 대부분은 강 오른쪽에 조성되어 있다.
기후는, 낮에는 사막의 고온 건조한 바람이 불지만, 밤에는 나일강의 서늘함이 더위를 식혀 주고,
1년 중에 겨울철에만 일주일정도 약간의 비가 내린다.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나일강은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이자, 이집트 문명을 꽃피운 원천이었으며,
이집트의 젖줄이다.
서울의 한강보다는 폭이 조금 좁고, 비록 물빛은 탁한 쟂 빛이지만, 유구히 끊임없이 사막을 적셔서,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도시에서도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한, 생명의 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카이로를 벗어나서 동부 사막길로 한시간 반 정도를 달려서 수에즈 운하 남단 아흐마디 함디 터널에
도착했다. 수에즈 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터널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터널이고,
수에즈 운하 하부 37m 지점을 관통한다.
수에즈 운하를 지하로 통과한 버스가 다시 끝이 없는 사막길을 3시간 정도를 달려서 도착 한곳이
사막의 오아시스인 '마라'라는 곳이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동안 걸어서 도착한 곳인데, 모세가 쓴 물을 단 물로 바꾼
성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들이 수르 광야에서 사흘 동안을 걸었는데도 물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 마라에
다다랐지만, 그 곳 마라의 샘물은 쓰서 마실 수가 없었다. 모세가 주님께 호소하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고,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로 바뀌었다는 ‘마라의 샘’이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오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나무 한그루 없는 광야를 사흘동안
걸어왔다면, 수 많은 희생이 따랐을 거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현재, 이곳은 물 한방울 없이 말라붙어서, 오아시스로서의 기능은 상실했다. 가운데 있는 우물 바닥에는
약간의 물이 남아 있지만 식수로서의 사용은 불가능해 보였다. 종려나무의 무분별한 벌목이 낳은
결과라고 한다.
남아 있는 종려나무들 사이에는 베드윈족들이 노점을 설치해 놓고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고,
어린애들은 관광객들을 쫄쫄쫄 따라 다니며 손을 내민다. 측은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동시에
들지만,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과 삶의 판단 기준이 아닐 것이고, 하나님의 숨은 뜻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또다시 버스는, 자갈과 바위만 보이는 시내광야를 서너 시간 달려서, 밤늦게 시내산 아래에 도착했다.
시나이반도 사막 한가운데, 해발 15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는 캐더린 플라자가 오늘의 숙소이다.
주변에 다른 시설은 전혀 없고 호텔만 몇 채 있는, 시내산 순례자들을 위한 전용숙박시설이다.
방을 배정받아 짐을 옮기면서 보니, 호텔에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오후 내내 모래와 자갈만 구경하면서
차를 타고 온지라, 파란 물빛을 보니 갑자기 몸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새벽 1시 반에 일어나서
시내산을 올라가야 하기때문에, 눈으로 보는 걸로만 만족하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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