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에서 갈릴리호수까지 - 4
(삼육대학교 교수 성지연수를 다녀와서)
넷 째 날 (8월12일) - 약속의 땅
어제 시내산 등정의 여파로 다리 근육이 뭉쳐서 걷는 것이 불편했다. 아들 녀석이 ‘허약체력’이라고
김 선생을 놀리기에, 나는 애써 괜찮은 척 똑바로 걸어 다니느라 하루가 정말 길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능선을 올라 도착한 곳은, 맛사다 였다. 이스라엘 남부의 광활한
사막 위로 사해를 굽어보면서 우뚝 선, 천연 암벽을 깍아서 만든 요새가 맛사다이다. 그런데, 이 요새는
이스라엘인들의 국가적 자긍심과 민족정신이 깃든 곳으로, 단순한 유적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 의하면,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이스라엘은 로마 제10군단에
의해 완전히 짓밟히고 말지만, 어린이와 아녀자를 포함한 967명의 이스라엘인들은 맛사다에 남아서
끝까지 저항한다. 맛사다는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라서, 3년간을 이곳에서 버텼지만,
결 국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요새의 지도자였던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연설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한번 죽습니다. 이는 겁쟁이 이든, 용감한 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손에 붙잡혀 노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아내가 능욕을 당하고 우리 자식들이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손 안에 자유가 있고, 우리 손 안에 칼이 있을 때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죽음을 결행합시다. 서둘러야 합니다. 적에게 승리의 기쁨을 넘겨주지 말고,
결연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리의 시체를 넘겨줌으로써, 영원한 명예는 우리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맛사다에 남아있던 967명의 이스라엘인들은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여 어린이 5명과 부녀자 2명을
남기고 모두 자결하고 만다.
그들이 마지막 남긴 말은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였다고 한다.
이로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 뒤, 3천 년간 영화를 누리던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하고,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은 2천 년간 나라 없이 떠돌게 되었다.
맛사다의 비장한 역사는, 오늘날 이스라엘인들의 정신적 버팀목과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이스라엘
군대의 신임장교들의 임관식도 이곳에서 열린다. ‘맛사다의 맹세’로 알려진 ‘맛사다는 다시 정복되지
않는다!'를 외친다고 한다.
이러한 맛사다의 정신이,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를 세운 후, 불과 500만 남짓한 인구로,
1억이 넘는 아랍 적대국들 사이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건축에 능통했던 헤롯 대왕이 건설한 이 맛사다에서는, 왕궁, 창고, 회당, 목욕탕, 군사용 시설물,
물저장고 등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북쪽궁전이 압권이다.
북쪽궁전은, 광활한 사막너머의 사해와 여리고, 요르단까지 조망이 가능하고, 사막의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에 자리잡아, 완벽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궁전은 세 단의 계단식으로 축조하여, 제일 아래층은
기둥과 프레스코로 장식된 벽으로 이루어진 연회장이 있고, 중간층에는 ‘톨로스’로 알려진 휴게용
원형건물이 있는데, ‘사방으로 막힘없이 탁 트인 시야와 탁월한 전망, 그리고 시원한 바람은,
지상 최고의 궁전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고 건축과 교수님들이 입을 모았다.
내려오는 길은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내려왔다.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오늘도 절벽을 올라가고 있는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가끔 시야에 들어 왔다. 우리는 맛사다 박물관 휴게소에서 땀을 식힌 후,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으로 출발했다.
사해의 북서쪽에 있는 쿰란은 사해사본을 기록한 에세네파 사람들의 주거지였다. 사해사본은
주전 1~2세기 사이 쿰란공동체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1947년 양치기 소년들에
의해서, 쿰란지역의 동굴 속에서 발견됐다.
이들 중 약 1/4이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주석, 신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들로써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피루스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놓았다. 사해 구약사본은 현존하는 구약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에스더서만을 제외하고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성경이 기록된 이후 최대의 고고학 발견으로 평가된다는 사해사본이지만,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종교적, 역사적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새로운 숙제를 안고 유적지를 돌아 나왔다.
쿰란 유적지 입구에는 현대식 건물의 기념품점이 있었다. 이번 연수중 유일하게 들른 곳인데,
여성분들은 사해의 진흙화장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나는 맛사다 관련 책 1권과 사해바다에서 쓸
타올을 한 장 구입했는데, 나중에 김 선생에게 빼앗겼다. 남자들은 옷으로 쓱쓱 닦으면 된다나......
점심식사를 도시락으로 해결하기 위해 정차한, 휴게소는 사해 체험이 가능한 곳이었다. 사해에서의
해수욕은, 우리나라의 유명 해수욕장처럼 대단할 거라고 상상했는데, 한적한 소도시의 마을 해수욕장
같은 분위기 였다.
잘 알려진 대로, 몸이 물에 가라앉지 않고 둥둥 뜨지만, 뒤집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자칫 방심하다 눈에 바닷물이 들어가면, ‘눈알이 빠질 정도로’ 매우 고통스럽다고, 윤 목사님께서
여행 중 유일하게 농담을 하셨다.
염도가 일반 바닷물에 비해 4~5배가량 높기 때문에 어떤 생물체도 살 수없는 죽은 바다이지만,
사해의 진흙은 미네랄 성분이 매우 풍부해 화장품과 비누의 재료로 인기가 높다한다.
1시간 정도의 해수욕과 머드 팩의 사해체험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베다니라는 곳에 들렀다.
베다니
베다니는 성서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형제와 문둥병 환자 시몬의 마을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날 묵었던 곳이며, 부활 후 승천할 때 제자들과 헤어진 곳이기도 한데,
현재는 이슬람 지역에 속한다.
나사로의 무덤을 구경하고 나오다가, 오렌지를 팔고있는 노점의 이슬람 소녀들을 만났다. 사진을
찍어도 좋다며 먼저 포즈를 취해 주었다. 티 없이 맑은 미소에서 종교와 인종의 벽은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사진만 찍고 오렌지 하나를 팔아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았다.
예루살렘
드디어 예루살렘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자, 검문소와 무장한 군인들도 같이 눈에 띄었다. 산을
가로지르는 대규모의 콘크리트 방호벽과 철조망도 보였다.
예루살렘이 기독교의 성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역사와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나는 잘 알지 못했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은 헤브루어로는 예루살라이며 회교도 들은 성지라는 뜻의 엘 쿠드스라
부른다......
기원전 1800년에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왔다. 기근이 심하게 들었을
때 아브라하의 후손인 야곱의 가족들은 이집트로 가서 살았다. 그 후 기원전 1230년 모세에 의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이집트를 탈출한다.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오펠산 언덕에 다윗의 도시를 세우고 십계의 궤를 도시 안으로 옮겨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땅의
중심으로 만든다.
솔로몬 시대에는 도시중심지가 오펠산에서 지금 신전의 언덕인 모리아 산으로 옮겨졌고,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었던 왕국은 기원전 586년 바빌론에 점령되고, 유태인들은 바빌론으로
유배된다. 50년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나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은
헬레니즘의 세계에 편입된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침입을 받아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머물게 된다.
헤롯이 왕으로 등극하나 예루살렘은 완전히 로마의 행정권에 들어간다. 로마에 대항하여 유태인이
두 번의 전쟁을 일으키나 실패로 돌아가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고 로마의 군사식민지가 된다. 이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 시가지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예루살렘 시가지는 점차 로마양식으로 변모
되었으며 이름도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뀐다.
그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예루살렘에 유태인들의 출입이 허용되며,
예수와 제자들의 발자취가 담긴 유서 깊은 성전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곳곳에 세워진다. 페르시아군의
침입과 아랍인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은 회교도의 도시로 변모하고 많은 기독교 성전은 파괴되거나 아니면 회교사원으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칼리프 말리크가 예루살렘 대성전 자리에 회교 대사원과
반석위의 돔을 새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99년 십자군이 되찾았으나 살라딘에 의해 다시 회교의 도시가 되었다. 오랜 혼란기를 거치다가
오스만 터키에 의해 예루살렘은 물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전역이 4백 년 동안 회교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1917년부터 영국의 신탁통치하에 있다가 1948년 비로소 독립하고 1967년 6일전쟁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이스라엘의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 2세가 1539년 재건한 그대로이다. 높이가 평균 17미터인 성벽의 둘레는 약 4킬로미터이며 구시가지의 모체였던 다윗의 도시와 기독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시온산은 성벽 밖에 위치하고 있다.
...... 성서의 도시에 오면 시간과 공간이 다르게 느껴져 온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공간은 시간 사이를 부유한다.
3천 년 도시의 시간과 공간이 도시 도처에 쌓여 있다.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 - 김석철, 해냄)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이자, 세계문화유산을 간직한 찬란한 역사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지금의 이스라엘을 세움으로써, 중동의 회교권 국가들과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경외심과 민족의식의 원천이며,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마호메트가 말을 타고 승천한 이슬람교 제3의 성지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인들에게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승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에 처음 입성하여, 예루살렘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감람산으로 향했다. 감람산 정상의
히브리 대학교의 외곽을 돌아서, 성전산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과 그 역사위에 세워진
교회들을 차례대로 방문했다.
승천당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감람산 위로 가셔서 축복을 하시고 승천하신 장소로 알려져 있다. 4세기에
교회가 세워지고, 7세기에 페르시아 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2세기에 십자군들이 또 교회를 세웠다.
현재의 예배당은 십자군 때의 것으로서, 예수께서 승천 당시 발자국이 남아있는 바위가 안에 보존되어
있다.
단촐한 8각형의 단일 건물로, 승천을 상징하는 지붕이 없는 건물이었는데, 후에 모슬렘들이 바깥에
벽을 쌓고 사원형태의 둥근 모양의 돔지붕을 얹어서, 현재와 같은 기형적인 형태로 바뀌게 되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 건물이다.
주기도문교회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조금 더 내려오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주기도문 교회가 있는데, 이 주기도문은 세계각지의 언어로 교회 벽에 쓰여 있다. 우리나라 것으로는
천주교식과 개신교식의 두 개의 주기도문이 한글로 각각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의 교회는 1874년에 프랑스 건축가 기예르메가 설계한 건물로, 회랑이 잘 발달되어 있고
동선과 단위공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건물이다.
눈물교회
감람산 오른쪽의 산중턱에는 곧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우셨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눈물교회가
있다. 눈물교회 제단 밑에는 새끼를 품는 암탉의 모습이 모자이크 되어있는데,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으려했었던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다 한다.
현재의 교회는 옛 수도원의 잔해 위에 1955년에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르루치가 설계하여
완성한 건물이다. 지붕의 형태는 예수께서 흘린 눈물모양을 상징하고 있다 하는데,
돔구조의 천정과, 성전산과 예루살렘을 향한 큰 원형 채광창이 인상에 남는 건물이다.
겟세마네 동산 교회
겟세마네는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으로서, 예수께서는 가끔 제자들과 이 동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특히 겟세마네는 예수께서 죽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제자들과 함께
올라 슬픔과 고뇌에 찬 최후의 기도를 드린 동산이고,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된 극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 교회는 고뇌교회, 만국교회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세계 각국의 성금모금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당 내부의 반구형의 천장이 유달리 높고, 짙은 청색 계통의 모자이크 벽화들이 엄숙하고
장중한 실내 분위기를 연출한다. 건물 외부의, 기둥 주두장식의 과장됨과 화려한 벽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통곡의 벽
통곡의 벽으로 가기 위해서 감람산을 내려와서, 성벽 입구의 까다로운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성지인 통곡의 벽은, 헤롯 대왕의 제2성전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쪽 벽의 일부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쫓겨난 이후로,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곳에서 통곡을 하며 그들의 메시아의
강림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1967년 6일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어,
1800년 만에 도시전체가 유대인의 관할이 되었다.
통곡의 벽으로 들어 갈 때는 꼭 모자를 써야하고 , 없으면 ‘키바’라는 모자를 빌려준다. 기도장소도
남녀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나오는 길에 웨딩 기념 촬영 중인 유대인 청춘남녀를 만나서, 너무나도 스스럼 없이 같이 사진을 찍고,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그날, 우리가 구경을 못하고 나와서 지금도 무척 아쉬운데, 통곡의 벽 성벽 뒤에는 '엘 악사' 회교
대사원과 반석위의 돔이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누인 바위위에 이슬람의 황금사원이 건립되어, 오늘날에도 끊임없는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곳이다.
예루살렘의 숙소는 도심 외곽의 독특한 현대식 호텔이었다. 지역사회의 쇼핑센터와 병원이 함께 있는
복합용도의 건물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상업적인 주상복합이나, 멀티플렉스 건물과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공익시설(병원)이 가미된 것이 특색이 있었다.
저녁예배 후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왔다. 쇼핑센타를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호텔 밖으로
나가려니,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했었다. 번거러워서 주변 동네 산책은 포기하고, 호텔 테라스로
돌아왔다. 저멀리 언덕너머, 예루살렘 시가지의 불 빛들이 한가롭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오늘 낮에 본, 오렌지 가게 이슬람 소녀들, 갓 결혼한 유대인 신혼부부, 통곡의 벽에서 기도 중이던
세계 각국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 일행 모두에게 평화와 안식의 밤이 되기를......
3천 년 성서의 도시, 예루살렘의 밤은 그렇게 조용하게 깊어 갔다.
.
'■ 사는 이야기 ■ >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일강에서 갈릴리호수까지 - 6 (0) | 2010.10.11 |
---|---|
나일강에서 갈릴리호수까지 - 5 (0) | 2010.09.30 |
나일강에서 갈릴리호수까지 - 3 (0) | 2010.09.19 |
나일강에서 갈릴리호수까지 - 2 (0) | 2010.09.15 |
나일강에서 갈릴리호수까지 - 1 (0) | 2010.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