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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갤러리 ■/문화.미술 전시회

< 광장의 기억 > ㅡ 장소가 기억을 읽는 방식 ( 진주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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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의 기억 > ―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

 

1. '이미지의 미래들' ― 채색화를 넘어선 실험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과 국립진주박물관, 그리고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까지 진주 시내 세 곳의 문화 공간을 잇는 대규모 기획전 '이미지의 미래들서사하는 기억, 채색화를 넘어'가 열리고 있다. 작가 김기라가 예술감독을 맡은 이 전시는 2022년부터 세 차례 이어져 누적 관람객 20만 명을 기록한 '한국 채색화의 흐름'의 성과를 현대미술의 지평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이강소, 신학철, 김윤신, 심문섭 등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어 온 원로 작가부터 이수경, 권오상, 정연두 같은 중견 작가, 그리고 이우성, 장종완 등 1980년대생 젊은 작가까지 서른다섯 명의 작품 백마흔여덟 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인구 30만의 중소도시가 광역자치단체도 아닌 기초자치단체의 힘으로 이만한 규모의 전시를 꾸린 데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유치하려는 진주시의 오랜 구상이 자리하고 있다. 진주성 안에 있는 박물관을 철도문화공원 부지로 옮기고,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기존 박물관 건물을 국립현대미술관 진주관으로 활용하려는 밑그림이다. 이번 전시는 그 구상을 향해 원도심과 진주성, 이성자미술관을 현대미술의 무대로 다시 배치해 보는 실험이기도 했다. 새로 제작된 신작을 앞세우기보다, 기존 작품들을 각 공간의 장소성과 맞물리게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길어 올리는 방식을 택한 점이 이 전시의 독특한 태도였다.

 

 

 

 

 

 

 

 

 

 

 

 

 

 

 

2. 차량정비고 안의 '광장' ― 열여덟 작가의 서사

세 개의 전시 공간 가운데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에 자리한 '광장의 기억'은 노동의 궤적이 새겨진 근대산업유산을 무대로, 열여덟 명의 작가가 세대와 화법을 넘나들며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참여 작가의 면면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신학철·서용선·오원배·윤동천은 역사적 격랑 속 인간의 실존을 굵직한 서사로 증언하는 화가들이며, 정현·박치호는 저항적 물성으로 그 서사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최수앙·권오상·이동욱·이용백·김기라·유근택·이우성·이재석·문경원·전준·장종완·박미라는 일상의 풍경과 규격화된 질서 속에 숨겨진 개인의 서사,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사유를 저마다의 언어로 파고든다. 원로에서 젊은 세대까지 세 겹으로 쌓인 이 구성은 정비고라는 한 공간 안에서 시대를 가로지르는 대화를 만들어낸다.

 

붉은 벽돌과 목조 트러스가 그대로 드러난 정비고 내부에 들어서면, 먼저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신학철의 '비상탈출'이 시선을 붙든다. 화면 밖으로 뛰쳐나올 듯한 기세로 그려진 인물은 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을 사실주의적 화폭에 담아 온 작가의 오랜 작업 세계를 압축해 보여준다. 그 맞은편에는 강렬한 색채와 거친 선으로 인간의 실존을 그려온 서용선의 회화가 자리한다. '기총소사', '젊은 죽음들' 같은 작품은 과거의 상흔을 현재의 화면 위로 소환하며, 그 곁에서 어딘가를 응시하는 나이 든 남성의 눈빛은 다가올 무언가를 예감하는 듯하다. 오원배와 윤동천의 작업 역시 이 흐름 속에서, 격변하는 현대사를 겪어낸 인간의 몸과 표정을 굵은 붓질과 조형 언어로 증언한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전시장 한가운데, 걸개그림처럼 드리워진 이우성의 대형 천 회화 '해질녘 노을빛과 친구들'에 닿는다. 함께 어깨를 걸고 선 동시대 청년들의 모습은 과거의 기억을 넘어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신학철에서 서용선, 오원배, 윤동천을 거쳐 이우성에 이르는 이 동선은 사회적 기억과 개인의 실존이 교차하고, 마침내 공동체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이 서사에 물성으로 무게를 더하는 것이 조각가 정현의 작업이다. 정현은 철로 밑에 깔려 오랜 세월 열차의 무게와 비바람을 견뎌 온 침목(枕木), 그리고 석탄과 아스팔트 콘크리트, 콜타르처럼 용도를 다하고 버려진 산업 재료를 전기톱과 도끼로 잘라내고 찍어내어 인간의 형상을 빚어 왔다. 그는 침목 하나하나를 '잠자는 사람'에 비유하며, 철로 밑에 눕혀 있던 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라 말한 바 있다. 정비고 야외에 설치된 그의 조각은 그런 점에서 이 장소와 더없이 깊게 공명한다. 실제로 기차를 떠받치던 재료의 물성을 빌려 인간의 형상을 세우는 그의 작업은, 이 건물이 겪어 온 노동과 정비의 역사를 침묵 속에서 되비추는 듯하다. 근대산업유산인 옛 정비고의 낡은 벽과 그를 둘러싼 오늘의 도시 풍경이 정현의 거친 조각과 맞물리면서, 관람객은 재료에 새겨진 시간의 결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저항적 물성을 다루는 박치호의 작업 또한 이와 나란히 놓여, 산업 재료가 품은 무게와 상흔을 조형 언어로 드러낸다.

 

반면 이동욱의 인체 조각은 같은 인간의 형상을 전혀 다른 결로 풀어낸다. 스컬피(sculpey)라 불리는 점토와 화석, 대량생산된 공산품 같은 사적인 수집물을 재료 삼아 손바닥만 한 인물상을 빚어내는 이동욱은, 그 작은 형상들을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에 대한 예리하고도 유머러스한 관찰을 담아낸다. 통조림 통 속에 구겨진 채 쌓여 있는 인간의 모습처럼, 그의 조각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정현의 침목 조각이 역사와 노동이라는 거대한 시간을 증언한다면, 이동욱의 인체 조각은 그 거대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낱낱의 개인, 규격화된 질서 속에 갇힌 미시적 존재를 비춘다. 최수앙과 권오상, 이용백, 전준, 장종완, 박미라 등의 작업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러한 개인의 서사와 동시대적 사유를 펼쳐 보이며, 회화 중심의 큰 서사와 조각·설치가 담아내는 미시적 관찰이 한 공간 안에서 교차하도록 만든다.

 

결국 '광장'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저마다 다른 시대와 언어로 발언해 온 열여덟 작가의 목소리가 한 공간 안에서 만나 새로운 대화를 나누는 자리 그 자체다. 회화가 증언하는 역사의 굵은 서사와 조각이 빚어내는 물성의 기억,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개인의 미시적 시선이 겹겹이 쌓이면서, 옛 정비고는 이 다성적인 목소리들을 하나의 서사로 꿰어내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배경이 되어준다.

 

 

 

 

 

 

 

 

 

 

 

 

 

 

 

 

 

 

 

 

 

 

 

 

 

 

 

 

 

 

 

 

 

3. 장소가 기억을 읽는 방식

'광장의 기억'이 특별한 것은 무엇보다 작품과 장소가 맺는 관계의 방식에 있다. 이 전시는 동시대 미술의 최첨단 주제를 다루지도, 화려한 신작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이미 존재하던 작품들을 정비고라는 구체적 장소 속에 옮겨 놓음으로써, 작품이 원래 지녔던 의미 위에 이 공간이 품은 노동과 이산, 전쟁과 재건의 기억을 겹쳐 놓는다. 관람객은 총탄 자국이 남은 벽돌 벽 앞에서 민중미술의 화폭을 마주하고, 기관차가 오가던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연대를 그린 그림을 만난다. 지역의 장소성을 작품을 읽는 단서로 삼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이러한 구성은, 미술관이라는 중립적 공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밀도 있는 독해의 경험을 선사한다.

 

옛 진주역 차량정비고가 걸어온 백여 년의 시간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굴곡진 시간이야말로 오늘의 '광장의 기억'을 가능하게 한 토양이다. 폐역이 된 공간을 허물지 않고 문화의 거점으로 되살린 선택, 그리고 그 안에 사회적 발언의 역사를 지닌 작품들을 들여놓은 기획은, 한 도시가 자신의 기억을 다루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옛 것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포개는 일그것이야말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길임을, 이 낡은 정비고는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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