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의 중첩 > — 국립진주박물관
1. 2026년 진주, 세 거점이 그리는 하나의 파노라마
2026년 6월 15일, 경상남도 진주시는 도시 전역을 동시대 현대미술의 전위적 장으로 탈바꿈시키는 대규모 특별기획전 《이미지의 미래들―서사하는 기억, 채색화를 넘어》의 막을 올렸다. 8월 25일까지 72일간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진주시가 202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개최해 온 《한국 채색화의 흐름》 시리즈를 잇는 연장선에 놓여 있으면서도, 전통 채색화라는 명확한 장르적 뿌리에서 출발해 회화와 조각, 설치와 미디어를 아우르는 다원적 현대미술로 그 지평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결을 달리한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시각예술의 실험을 이끌어 온 김기라 작가가 예술감독을 맡아 기획의 중심을 잡았고, 이강소·신학철·김윤신·심문섭 등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어 온 원로 작가부터 이수경·권오상·정연두 등 중견 작가, 이우성·장종완·이재석 등 1980년대 이후 출생의 젊은 작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35명의 작가가 참여해 회화와 조각 132점, 미디어 16점 등 총 148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 6월 15일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 앞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조규일 진주시장을 비롯해 이강소, 강애란 등 참여 작가와 문화예술계 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오랜 작품활동으로 진주를 알려 온 진주 출신 오수환 작가에게 감사패가 수여되었고, 전시의 기획과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헌신한 김기라 예술감독에게는 ‘진주시 명예 시민증’이 수여되어 그 의미를 더했다. 아날로그 소년과 정세원 밴드의 식전 공연으로 문을 연 개막 행사는 개막 선언, 예술감독의 전시 소개, 세 거점 전시장 투어 순으로 이어지며 이번 전시가 단순한 미술 행사를 넘어 도시 전체가 참여하는 문화적 사건임을 예고했다.
이번 전시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진주의 도시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세 곳의 이질적인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하나의 서사로 엮어냈다는 데 있다. 동양적 정신성과 서양의 조형미를 융합한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에서는 ‘내면의 풍경’이, 근대산업 유산으로서 노동의 궤적이 아로새겨진 철도문화공원 차량정비고에서는 ‘광장의 기억’이, 그리고 유물적 맥락과 동시대적 사유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무대인 국립진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시간의 중첩’이 각기 다른 미학적 질문을 던진다.









2. 유물의 전당에서 열리는 현대미술 — ‘시간의 중첩’이 놓인 공간의 의미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서, 도자기와 전통 회화, 불상과 서예 작품이 놓일 법한 진열장과 벽면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는 공간이다. ‘시간의 중첩’은 바로 이 지점, 즉 유물이 전시되어야 마땅한 자리에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대신 배치함으로써 관람객으로 하여금 익숙한 박물관적 시선 자체를 되묻게 만든다. 백자와 청자가 놓일 법한 진열장에는 도자기 파편을 금박으로 이어 붙인 작품이 자리하고, 불상이 안치될 법한 자리에는 반짝이는 스팽글로 제작된 현대적 불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이러한 배치는 단순한 병치를 넘어, 과거의 유산이 동시대 작가의 손을 거쳐 미래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흐름을 시각적으로 증언한다.
기획진은 이번 특별전 전체를 ‘사유·공유·향유’라는 세 층위의 플랫폼으로 구조화했다고 밝힌 바 있다. 작가 개인의 경험과 역사적 기억을 담론화하는 ‘사유의 공간’, 그 담론이 예술로 전환되어 공론의 장으로 파고드는 ‘공유의 공간’, 그리고 공공의 장소가 필연적으로 담론의 장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향유의 공간’이 그것이다. 이 구조 안에서 국립진주박물관의 ‘시간의 중첩’은 특히 ‘사유’와 ‘공유’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유물이라는 압도적인 시간의 무게를 지닌 공간 안에서, 참여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전통이라는 고정된 시간 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그 결과물은 관람객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전통은 살아 재해석되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3. 박생광에서 시작되는 전시의 서사 축
‘시간의 중첩’ 전시의 문을 여는 것은 다름 아닌 박생광(1904~1985)의 강렬한 무속적 채색화다. 진주 출신이자 현대 채색화의 지평을 연 선구자로 평가받는 박생광의 회화는, 이번 전시 전체가 표방하는 ‘리컬러링(re-coloring)’의 미학―세상을 바라보는 관성적인 시각 자체를 다시 색칠한다는 기획 의도―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출발점 역할을 한다. 무속과 토속 신앙에서 길어 올린 원색의 강렬한 붓질은 전통 채색화가 결코 박제된 과거의 양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어 온 살아 있는 조형 언어임을 증명한다.
이 박생광의 회화 옆에는 참여 작가 가운데 최연소인 1989년생 이재석의 이색적인 풍경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세대 차이가 뚜렷한 두 작가의 작품이 한 공간에 마주 놓인 이 장면은 전시 전체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즉 채색화라는 전통이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건너뛰어 여전히 젊은 세대의 조형 언어 안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생광으로부터 출발한 서사는 13명의 작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호흡을 맞추며 이어 나간다.








4. 전통을 다시 쓰는 13인의 작가들
‘시간의 중첩’에는 박생광을 포함해 모두 13명의 작가가 참여하며, 이들의 작업은 재료와 매체, 세대를 가로질러 전통이라는 고정된 시간 축을 해체하고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한 서사로 재구성한다.
원로 세대를 대표하는 이강소는 한국 실험미술의 궤적을 이끌어 온 작가로서, 여백과 기운을 조형화하는 특유의 화법을 통해 공간 탐구의 깊이를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원로 세대에 속하는 김윤신은 나무와 스테인리스를 넘나들며 반세기 넘게 천착해 온 대표작 연작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을 통해, 둘이 하나가 되고 다시 나뉘는 순환적 세계관을 이번 전시장에 펼쳐 놓는다. 목재의 물성과 조각의 시간성이 만나는 이 작업은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품은 유구한 시간의 층위와 공명한다.
중견 세대의 작업은 한층 다채롭다. 노상균은 반짝이는 스팽글이라는 대중적이고 장식적인 재료로 불상의 형상을 빚어내는 ‘시퀸 불상’을 통해, 신성한 도상과 세속적 재료 사이의 긴장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드러낸다. 강애란은 빛을 매개로 한 설치 작업, 이른바 ‘빛나는 책’ 연작으로 지식과 기억이 물성을 얻어 발광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수경은 깨어진 도자기 파편들을 금박으로 접합해 완전히 새로운 형상으로 재탄생시키는 ‘번역된 도자기’ 연작을 통해, 파손과 봉합이라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이는 일본의 킨츠기(金継ぎ) 전통과도 맞닿아 있으면서도, 도자 문화의 본향인 한국적 맥락에서 파편화된 전통을 다시 봉합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권오상은 사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사진 조각’ 작업을 선보이며, 평면과 입체,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정연두는 현실의 시공간을 뒤틀고 변주하는 특유의 화법으로 동시대적 시공간 감각을 이번 전시에 이식하며, 유승호는 한자와 산수화의 전통적 도상을 재조합한 ‘문자 산수’ 연작을 통해 문자와 이미지, 텍스트와 풍경이 겹쳐지는 지점을 탐구한다.
이세현은 붉은 색조로 뒤덮인 산수화 연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통 산수화의 구도를 차용하되 이를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임으로써, 분단과 냉전이라는 한반도의 특수한 역사적 시간성을 풍경 속에 은유적으로 새겨 넣는다. 김은진은 전통 민화의 도상을 차용하면서도 그 안에 잔혹하고 세밀한 서사를 정교하게 그려 넣어, 민화라는 장르가 지닌 장식성과 그 이면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정배와 이진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간과 사물, 기억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통해 전시장 곳곳에서 관람객의 시선을 붙든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1989년생으로 참여 작가 중 최연소인 이재석은 이색적인 풍경화를 통해 다음 세대가 전통 채색화의 유산을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5. ‘시간의 중첩’이 던지는 질문 — 유물적 맥락과 동시대적 사유의 충돌
‘시간의 중첩’이라는 전시명이 함축하듯, 이 전시의 핵심은 서로 다른 시간대―유물이 속한 고고학적·역사적 시간과 동시대 작가들이 속한 지금 이 순간의 시간―가 하나의 물리적 공간 안에서 겹쳐지며 발생하는 긴장과 대화에 있다. 박물관이라는 제도는 본래 시간을 정지시키고 과거를 보존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 정지된 시간의 자리에 살아 움직이는 동시대미술을 삽입함으로써, 박물관이라는 공간 자체를 하나의 담론적 실험장으로 전환시킨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소재로 삼는 것과는 다르다. 참여 작가들은 도자기, 불상, 산수화, 민화, 서예와 같은 전통적 도상과 형식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함으로써, 전통이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갱신되고 있는 살아 있는 언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이수경의 파편적 봉합, 노상균의 세속적 재료로 빚은 신성한 형상, 이세현의 역사를 물들이는 붉은빛, 김은진의 민화 속 그로테스크는 모두 전통이라는 공통의 출발점에서 뻗어 나온 서로 다른 갈래의 응답인 셈이다.
아울러 이러한 시도는 국립진주박물관이라는 국가기관의 성격과도 긴밀히 맞물린다. 임진왜란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간대를 전문적으로 다루어 온 이 박물관이 스스로의 전시실을 동시대 작가들에게 내어 준 것 자체가, 역사와 예술, 보존과 창작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실험적 태도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관람객은 임진왜란기 유물을 감상하던 동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현대미술 작품과 마주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전통은 이미 완결된 과거’라는 통념은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유물과 동시대 작품이 나란히, 때로는 같은 진열장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 독특한 전시 방식은, 지역 국립박물관이 단순한 유물 보관소를 넘어 담론 생산의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실험이자 선례로 평가될 만하다.














6. 진주가 그리는 현대미술의 미래
《이미지의 미래들―서사하는 기억, 채색화를 넘어》는 진주시가 축적해 온 전통 예술의 자산을 토대로 미래를 향한 ‘현대미술의 씨앗’을 새롭게 심는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국립진주박물관의 ‘시간의 중첩’은 세 거점 가운데서도 유물과 동시대미술이 가장 첨예하게 마주하는 공간으로서, 전통과 현대의 관계를 사유하게 하는 가장 상징적인 장소로 기능한다. 미술계에서는 이번 대규모 기획전이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진주가 동시대 현대미술을 선도하는 새로운 발신지로 자리매김하며 향후 ‘국립현대미술관 진주관(가칭)’ 건립과 같은 지역 미술계의 오랜 숙원을 실현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생광의 무속적 채색화로부터 시작해 이재석의 젊은 풍경화로 이어지는 ‘시간의 중첩’의 서사는, 결국 전통이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매 세대가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쓰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임을 증언한다. 8월 25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진주라는 도시가 논개와 진주성으로 대표되는 역사도시의 이미지를 넘어 동시대 미술의 실험적 무대로 확장해 나가는 여정의 이정표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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