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고려제강기념관 ( 키스와이어 센터 ) ㅡ 와이어로 지은 기억
부산광역시 수영구, 고려제강 본사와 복합문화공간 F1963이 자리한 산업단지 한켠에는 땅속으로 낮게 몸을 낮춘 독특한 건축물이 있다. 고려제강기념관이다. 1945년 설립되어 와이어로프와 특수선재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고려제강이 2014년 건립한 이 기념관은, 회사의 역사를 전시하는 사료관을 넘어 '와이어'라는 소재 자체를 건축적 언어로 번역해낸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받는다. 다리와 자동차, 엘리베이터와 피아노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든 와이어의 쓰임을 소개하는 이 작은 기념관은, 전시 내용 못지않게 건물 자체가 하나의 전시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고려제강기념관은 2016년 개관한 F1963보다 앞서 조성되었으면서도, 대중적으로는 오히려 F1963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건축계 안에서는 이 작은 기념관이 오히려 더 순도 높은 건축적 실험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옛 공장을 그대로 살려낸 F1963이 '보존'의 문법을 보여준다면, 완전히 새로 지어진 이 기념관은 '신축'을 통해 같은 건축가의 철학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된다.









1. 건물 개요
고려제강기념관은 단일 건물이 아니라 기념관(뮤지엄), 레지던스, 러닝센터 세 개의 건물이 하나의 부지 안에서 유기적으로 배치된 복합단지, 이른바 '키스와이어 센터'의 일부로 조성되었다. 부지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오래된 산업단지 안에 위치하는데, 설계는 이러한 입지가 지닌 이중적 성격, 즉 거친 산업지대이면서 동시에 탁 트인 자연 조망을 지닌 특성을 동시에 살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세 동의 건물은 야외 원형극장과 반사연못, 훈련시설 등과 함께 일렬로 나란히 배치되어 부지 전체에 시각적 통일감을 부여한다.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형 속에 건물을 파묻듯 앉힌 배치 방식에 있다. 기념관과 러닝센터가 자리한 본관은 차량과 보행자를 위한 출입구만을 지상에 노출한 채 건물 대부분을 땅속에 묻는 방식으로 조성되어, 언덕 자체와 건물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새로운 건축물을 도드라지게 세우기보다 기존 대지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려는 의도로 읽힌다. 반면 직원들이 연수를 위해 머무는 레지던스 동은 의도적으로 낮은 높이로 설계되어, 언덕 위 본관이 지닌 조망을 가리지 않도록 배려했다.
기념관 내부로 들어서면 기둥이 거의 없는 개방된 원형 홀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 홀을 가득 채우는 것은 완만하게 휘어 오르는 나선형 경사로로, 관람객은 이 경사로를 따라 오르내리며 와이어의 역사와 쓰임에 관한 전시물, 서가, 부속 공간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지붕은 프리캐스트 포스트텐션 콘크리트 공법으로 시공되어 완만하게 기울고 휘어진 곡면을 이루는데, 이는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와이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있는 곡선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건물의 구조와 형태 자체가 기념관이 다루는 주제, 즉 '와이어'라는 소재의 물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려제강기념관은 전시 내용과 건축이 서로를 설명하는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2. 설계 개요
고려제강기념관을 설계한 것은 건축가 조병수가 이끄는 조병수건축연구소(BCHO Architects Associates)다. 공교롭게도 그는 2016년 완공된 인근의 F1963 리노베이션 역시 설계한 인물로, 결과적으로 고려제강이 소유한 두 개의 대표적 건축 자산, 즉 옛 공장을 재생시킨 F1963과 신축된 기념관 모두가 한 건축가의 손을 거치며 하나의 건축적 세계관 아래 놓이게 되었다. 조병수는 절제된 형태와 재료 본연의 물성을 강조하는 미니멀리즘 건축으로 국내외에서 널리 알려진 건축가로, 자연과 대지, 기존의 맥락을 존중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해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제강기념관 설계의 핵심 개념은 '와이어의 구조적 가능성을 시험하는 건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병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와이어를 단순한 전시 소재가 아니라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 부재로 직접 사용했다. 나선형 경사로를 떠받치는 것 역시 와이어이며, 이 와이어들은 벽을 관통해 건물 외부로까지 이어지는 대담한 구조로 설계되었다. 와이어를 구조에 도입함으로써 두꺼운 기둥이나 보 없이도 넓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기념관 내부는 시야를 가리는 요소 없이 탁 트인 원통형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이는 건축주인 고려제강이 지닌 핵심 기술, 즉 와이어의 강도와 유연성이라는 제품 특성을 건축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동시에, 관람객들이 공간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와이어의 잠재력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장치이기도 하다.
지붕 역시 이러한 구조적 실험의 연장선에 있다. 완만하게 기울고 휘어진 지붕은 프리캐스트 포스트텐션 콘크리트 공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공법 또한 콘크리트 부재 내부에 강선, 즉 와이어를 미리 긴장시켜 넣는 방식이다. 와이어가 당겨지는 힘에 의해 지붕은 마치 가볍게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며, 이는 건물 전체에 걸쳐 와이어라는 재료가 시각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건물이 대지 속으로 낮게 가라앉은 형태 역시 이러한 절제의 미학과 궤를 같이한다. 화려한 파사드나 눈에 띄는 외관 대신, 설계자는 건물 스스로를 낮추어 주변 산업지대 및 자연 경관과 조용히 공존하는 길을 택했다.











3. 기존의 도시 맥락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고려제강기념관이 지니는 가장 큰 미덕은 기업 사사관(社史館)이 빠지기 쉬운 상투성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많은 기업 기념관이 연혁을 나열하는 전시 패널과 상징적인 조형물을 배치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과 달리, 고려제강기념관은 건물의 구조 자체를 통해 기업이 다루는 소재의 본질을 체험하게 만든다. 관람객은 벽에 걸린 설명문을 읽기 전에 이미 나선형 경사로를 오르내리며, 그리고 와이어로 지탱된 공간 속을 거닐며 와이어가 지닌 강인함과 유연함을 몸으로 먼저 느끼게 된다. 이는 콘텐츠와 건축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보기 드문 성취이며, 건축이 단순한 전시 용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될 수 있음을 실증하는 사례다.
동시에 이 건축물은 절제와 겸손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기업 기념관은 흔히 회사의 위상과 성취를 과시하기 위해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을 지향하기 쉽다. 그러나 고려제강기념관은 오히려 건물을 대지 속으로 낮추어 감추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은 건축주가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 오래된 산업단지와 주변 경관에 대한 존중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같은 건축가가 설계한 F1963이 옛 공장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끌어안았던 태도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즉 고려제강기념관과 F1963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기존의 맥락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이라는 동일한 철학을 신축과 재생이라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구현한 한 쌍의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4. 기업의 역사와 정체성을 건축적 언어로 번역
다만 아쉬운 지점도 있다. 고려제강기념관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인지도 면에서도 바로 옆의 F1963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 뛰어난 건축적 성취에 비해 일반 시민들의 접근성과 인지도는 아직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상태다. 산업 소재를 다루는 기념관이라는 특성상 대중적인 흥미를 끌기 어려운 주제라는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점이야말로 고려제강기념관이 지닌 가치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화려한 마케팅이나 유행에 기대지 않고도, 건축 그 자체의 완성도만으로 건축상을 수상하고 부산건축제의 무대에 오를 만큼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작은 기념관이 지닌 건축적 밀도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고려제강기념관은 기업의 역사와 정체성을 건축적 언어로 번역해낸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조병수 특유의 절제된 미니멀리즘이 와이어라는 산업 소재의 구조적 가능성과 만나 완성된 이 작은 건물은, 화려함 대신 진정성으로, 과시 대신 겸손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바로 옆의 F1963이 오래된 공장의 기억을 문화공간으로 되살렸다면, 고려제강기념관은 그 기업이 만들어온 소재의 본질을 새로운 건축으로 빚어낸 셈이다. 두 건축물을 함께 둘러볼 때, 방문객은 부산이라는 산업도시가 자신의 역사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 즉 보존과 창조를 동시에 목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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