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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시간과 건축

[시간과 건축-013] 2026 합천, 무주 & 함양 건축문화답사(5) - 함양 일두 고택 (정여창 고택, 202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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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건축]  2026년 제1차 건축문화답사

- 전통의 숨결과 현대적 재해석을 찾아서

 

 

▶ 일 시 : 2026년 04월 10일(금) ~ 04월 11일(토)

▶ 장 소 : 합천 ( 해인사 ) - 무주 ( 무곡, 무주창고 ) - 함양 ( 남계서원, 정여창고택 )

▶ 인 원 : 7 명

 

 2026년 제1차 건축문화답사 자료집

 

26년1차 답사.pdf
5.62MB

 

 

 

 

 

 

 

 

 

원래,  <시간과 건축>의

2026 제1차 합천, 무주 & 함양 건축답사 일정 계획에는,

함양 일두고택(정여창 고택)은 없었는데

함양 남계서원 답사현장에서 조정되어, 이번 2026년 제1차 답사의 피날레를 맡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함양 정여창 고택은 2004년 첫 고건축답사 이래로

약 10차례 정도의 방문이 있었으니,

이제는 내 동네, 내 나와바리 같은 정겨움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나는 30년 가까이 틈틈이 전국의 고건축답사를 다녔는데,

약 10년 전부터는 답사 테마를 주거건축인 한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근래에는 '선비의 꽃', 매화에 미쳐서

한동안 건축답사에 소홀했었지만,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통해서

조상이 남긴 소중한 유적과 유물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지혜를 재활용할 수 있는 경이로운 경험은 고건축답사 기행의 매력이자 묘미이며,

큰 보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한옥에는 이 땅에서 2천 년을 살아온 선조들의 삶의 흔적과

철학이 오롯이 배여 있다

주변 자연환경과 이웃을 결코 거부하지 않고 조화롭게 대처하고

적응하면서 슬기로운 삶을 이어 왔다

그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우리 주거문화의 결정체가 바로 한옥이다

그래서 그 결정체는 우리의 삶을 항상 진실 되고 정의롭게 이끌었고

마침내 선비정신이라는 문화양식으로 태어났다.

 

수 년 동안의 한옥 답사를 통하여

우리 한옥의 건축적인 우수성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 담긴 선조들의 심오한 철학과 정신세계를 배우게 되었고

미처 몰랐던 그 놀랍고도 존경스러운 정신세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 ‘3가지의 철학’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나누며 산다’는 정신이다.

배고픈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실천한 구례의 <운조루>,

신분의 격차를 넘어서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한 남원의 <몽심재>,

대문을 열어서 배고픈 도둑까지 살폈던 나주의 <홍기응 가옥>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과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했었던 ‘나눔의 철학’이 있었다.

 

둘째는 ‘조금 좁게 산다’는 정신이다.

조선시대 한옥의 기본형태는 ‘초가삼간草家三間’을 표준으로 하였다.

큰 방, 작은 방 그리고 부엌이 각각 1칸의 규모에 짚으로 지붕을 이은 고작 3칸의 미니 주택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선비들은, 글 읽는 선비에게 초가삼간이면 족하다고 보았고

분수를 지키며 살고자 했었다.

논산 <명재 고택>의 윤증 선생은 제자와 자식들이 힘을 모아 넓은 새 저택을 지어드렸지만,

자신의 분수에 맞는 집은 초가삼간(유봉영당)이라면서 죽을 때까지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한다.

 

셋째는 ‘조금 불편하게 산다’는 정신이다.

요즘처럼 아파트 문화에 익숙한 세대들은 한옥의 가장 큰 단점으로

생활의 불편함을 종종 꼽는다.

모든 생활의 중심이 실내의 거실이 아니라, 앞마당이다 보니

동선이 길고 실내외를 넘나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항상 따른다.

 

일반적으로 몸이 편하고 익숙해지면

정신은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기 마련이이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고 몸이 불편하면 정신은 긴장하고 깨어나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사유의 뜰은 넓어지고 철학은 깊어지게 된다.

고로 ‘조금 불편한 삶이 건강한 삶!’이라는 지혜가

아주 오래전부터 삶의 일부가 되어서

우리의 한옥에 스며들게 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으로,

서양에 기사도 정신, 영국에 신사도 정신, 일본에 사무라이 정신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선비정신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우리 선비들은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그 청빈淸貧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고,

세상에 이로운 학문과 덕을 닦으며 염치와 예의를 알고,

지조와 명예를 지키는 '선비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며 살았다.

 

현재, 우리나라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은

전국에 약 140채 정도가 남아 있다.

나는 그 중에서 1차로 30채를 선정하여 약 10년에 걸쳐서 건축답사 기행문을 작성하여

회사 블로그( (주)건축사사무소 아라가야 )에 틈틈이 올려왔었다.

그 중에서 이번에 <시간과 건축>의 2026년 건축답사 일정의 마지막 코스,

경남을 대표하는 '선비의 집', 함양 정여창 고택(2019년 7월 작성)을

일부 보완하여 소개드린다

 

 

 

                                                                                                                      2026.04.16.

 

 

                                                      

 



 

 

08. 함양 일두 고택一蠹 古宅 (정여창 고택)

- 백세청풍百世淸風 , 맑고 푸른 선비정신을 이어 간다 -

 

 

 함양군은 경상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군으로지리산을 비롯해 고산준령이 많은 산지 지역이며 남덕유산에서 남강이 발원한다함양군 서쪽에는 소백산맥의 고산 준령이 많고 덕유산·기백산·지리산 등 높은 산이 솟아 있으며서쪽에는 팔량치(520m)·육십령(640m)의 고개가 있어 전라도와 연결된다  

 

 선비와 정자의 고장, 경남 함양咸陽은 한때, ‘내륙의 섬’이라 불릴 만큼 교통이 불편한 산간 오지였었다. 서쪽엔 백두대간, 남북으로는 지리산과 덕유산이 첩첩이 벽을 두르고,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지리적 여건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연보호와 전통 계승의 기회로 지혜롭게 활용한 함양은, 오늘날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청정지역이자, '백세청풍'의 푸른 선비정신이 도도히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좌 안동 우 함양, 좌 퇴계 우 남명’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안동이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고, 낙동강 서쪽에서는 함양이 그러한 땅으로서, 퇴계 이황에 필적하는 대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함양에 있다는 자긍심과 자랑이 듬뿍 담긴 말이다. 


 그런데, 남명 선생보다 시대를 앞서서 ‘우 함양’의 학문적 기틀을 확립하였고, 선비문화를 여기에 함양涵養시킨 분으로서, 조선시대 동방오현東方五賢 중의 한 분으로 추앙 받았던 일두 정여창 선생이 계셨다. 

함양이 단순한 지방 고을을 넘어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을 필두로 한 걸출한 학자들이 이 땅에서 배출되고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함양 출신인 정여창 선생은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깊이 익혀 조선 전기 도학道學의 정수를 체현한 인물로, 사후 문묘文廟에 종사되는 최고의 영예를 얻은 분이다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2015년에 복원된 함양 화림동 계곡의 농월 (2016. 10.22.)

 

  화림동 계곡의 거연정


 

 

 일두 정여창 선생은 세종 임금 때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나 김굉필 선생과 함께 영남사림의 거두인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섰던 선생은, 세자에게 강론을 하는 시강원 설서를 지냈고, 고향 안의현감으로 부임해서는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연산군 시절에 무오사화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함경북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고, 함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뒷날 후학들이 선생을 기려서 신축한 남계서원이 근처의 수동면에 남아 있는데, 이 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영주의 소수서원 다음으로, 남한에서 2번째로 건립된 역사와 전통이 깊은 서원일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경남에서는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서원이다. 그리고 이 남계서원은 근래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서원 뒷산에는 선생의 산소가 모셔져 있다.

 

 

 

         일두 선생을 모신남계서원 전경 (2016. 10.22.)
 

 
  마을 앞으로 남계천이 흐르는 도숭산 자락의 지곡면 개평마을은 하동 정 씨와 풍천 노 씨 그리고 초계 정 씨의 집성촌으로 일두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원래는 경주 김 씨가 마을의 주축을 이루고 살았었는데 14세기경에 일두 선생의 증조부가 처갓집인 이곳으로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했고, 곧이어 풍천 노 씨 역시 혼인으로 개평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남명 선생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던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일두 정여창 선생과 옥계 노진 선생이 이 마을에서 배출됨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 사대부 마을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마을의 젖줄인 옥계천을 따라서 일두 고택을 비롯해 풍천 노 씨 대종가, 하동 정 씨 고택, 오담 고택, 노 참판 고택 등 60여 채의 고택들이 전통마을을 이루고 있는 개평마을은, 신분별, 문중별로 그 위치와 구성 영역이 확연히 구별되는 씨족공동체 마을로서, 이 마을의 가장 높고 중심적인 위치에 일두 선생의 고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정여창 선생이 돌아가시고 약 100년쯤 뒤, 그 생가 터에 후손들이 고쳐 지은 ‘일두 고택一蠹 古宅’은 집터만 3천여 평이 넘는 대저택이다. 그렇지만, 전체 공간을 크게 다섯 영역으로 나누고 각 부분들을 샛담으로 알맞게 구획하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그리 큰 느낌이 집 내부에서는 들지 않는다.

 밖으로부터 대문간채, 행랑채, 아래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곡간채, 안사랑채 등과, 거기에 딸린 마당이 조화롭게 잘 자리 잡은 일두 고택은 경남을 대표하는 정통 상류주택의 한옥으로서, 각 영역은 완전히 구분되지 않고 각 모서리 부분을 적절히 틔어 놓아서, 안마당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간이 리드미컬하게 서로 연결되는 유기적인 공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개평마을 옥계천 언덕에서 본  일두고택 전경 (2018.11.07.)

 

 

 

 일두 고택의 정문인 솟을대문에는 특별한 조형물이 하나 붙어 있다. 바로 붉은 홍살문으로서, 효자와 충신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려패旌閭牌가 무려 5개나 홍살문 높이 걸려있다. 한 명만 받아도 가문의 크나큰 영광인데, 이 집안은 충신과 효자를 5명이나 배출했으니 그 대단한 명예와 존경 그리고 지역사회의 입지는 능히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다. 
 

 

  5개의 정려패가 함께 걸린 솟을대문 (2007. 07.07.)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우측으로 높은 축대위의 의젓한 사랑채가 나타난다. 동쪽 방향으로 자리를 잡은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앞뒤로 툇마루가 붙어있는 겹집구조로 되어 있다. 그 앞으로 기품 있는 누마루가 사랑방 앞으로 돌출하여 붙어서 전체적으로 ‘ㄱ’자형 평면구조를 이룬다. 이 집의 누마루는, 맑은 날이면 이곳에서 지리산 천왕봉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탁 트인 시야와 훌륭한 조망이 가능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 전면의 축대가 필요 이상으로 높아진 이유는 조망뿐만 아니라, 뒷면 안채의 마당과 바닥 레벨을 동일하게 맞추기 위해서 자연스레 높아졌고, 이 다소 높은 사랑채 건물을 기준으로 안채영역과 사랑채영역으로 두 공간의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사랑채의 방 들은 양쪽 마당 모두를 향해 완전히 열려 있어서 비교적 개방적이면서 조망과 출입이 가능한 아주 절묘한 위치에 사랑채가 자리를 잡고 있다. 
 
 

 

    대문간에서 본 기품있는사랑채 모습 (2004. 08.21.)
 



 처마가 아주 날렵한 사랑채의 누마루에 오르면, 바로 앞마당에 작은 동산처럼 꾸며놓은 석가산石假山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느 고택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이 고택의 명물이다. 석가산은 동양 전통의 신선사상을 조형물로 나타낸 것으로서, 외부의 자연을 집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돌을 쌓아 산수를 축소한 형태로 꾸민 석가산은 규모는 작지만 산과 바위, 물과 나무 등 모든 자연이 그 속에 압축되어 들어 있는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본 석가산 모습  (2008. 07.27.)

 

 

 

 

그러나 일두 고택의 석가산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변형되어 애초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그 원형을 짐작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인근 지역인 경남 함안군 무기리에 가면, 석가산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조선시대 4대 민간정원으로 알려진 <무기연당>이라는 아름다운 연못을 만날 수 있다.  

 

  경남 함안군 칠원면 주씨고가에 있는 조선시대 연못 <무기연당>.  연못 가운데 석가산이 있다 (2012. 12.22.)
 
 
 “무기연당은 연못과 하환정何煥亭, 풍욕루風浴樓 등 2개의 정자와 최근에 지은 충효사와 영정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당은 장방형(20M x 12.6M)의 연못으로, 가공하지 않은 투박한 자연석으로 2단의 석축을 쌓고 연못의 중간에 석가산을 섬처럼 배치하여 양심대養心臺라 하였다.

네모난 연못에 원형의 석가산을 쌓아 도교에서 말하는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이라 이름 짓고,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을 추구하였다. 
 석가산의 북측과 서측에는‘백세청풍百世淸風’과 ‘양심대養心臺’라고 쓴 괴석을 배치하여, 의연하게 세상을 등지고 절의를 지킨 백이와 숙제를 본받고자 하는 정신과 어진 마음을 함양하고자 했던 선비의 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출처 : 블로그 -  주거건축-030. 함안 무기연당 - 학처럼 살다 )

 

벼슬과 부귀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 하고자 하였던 경남지방 선비들의 욕심 없는 삶과 세계관이 이 석가산에 잘 투영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사랑방에서 내다본 '충효절의' 글씨가 걸린 사랑채  툇마루 공간 (2007. 07.07.)

                      
 

 추사 김정희 선생과 흥선 대원군도 장기간 머문 적이 있었다고 하는 일두 고택 사랑채에는 온갖 진귀한 글씨와 시로 가득 채워져 있다. 누마루에는 ‘탁청재濯淸齋’라는 편액이 있고, 사랑대청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커다란 편액이 걸려있다. 중국의 백이숙제 사당에서 따 왔다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은 글을 읽는 선비들이 가장 좋아하는 글귀로서 ‘맑은 바람처럼 오래도록 높고 푸른 가풍을 유지하여 후세에 모범이 되는 삶과 인격체’를 뜻 한다고 한다.
 그리고 툇마루 안쪽 벽에는 대문짝만 한 크기와 힘찬 필체로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이 쓰여 있는데, 주변 분위기를 압도하는 문자향이 느껴져서 한순간 옷깃을 여미게 된다. 온갖 정쟁과 사화로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대대손손 푸른 정신과 맑은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일두 선생 가문의 선비정신과 함께, 학자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는 이 집의 격조 있는 가풍을 함께 느끼게 된다.

 

 

 

 사랑채 좌측의 일각문과 중간마당 모습(2007. 07.07.)


 


 사랑채 좌측으로 조그만 일각문이 하나 있다. 이 일각문을 들어서면 앞이 담으로 막힌 작은 마당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 진입 공간은 안채로 가는 중간마당이자 일종의 보안영역이다. 그래서 안채는 이 마당을 거쳐서 또다시 중문을 통과해야만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소담스러운 중간마당의 의미와 성격에 대하여 예리하고도 유려한 분석이 있어 소개한다.

 

“사랑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간 영역에 작은 마당이 있다. 사랑마당에서 보면 황톳빛 흙벽의 고방(창고) 옆모습과 단이 진 기와 얹은 흙담, 자연스레 경사져 오르는 문간 바닥과 바닥돌, 그리고 흙담을 배경으로 서있는 키 작은 꽃나무들이 아우러진 그림 같은 자그마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흔히들 전이공간이라 이름 붙이는 곳이다. 이는 대문에서의 출입 방향을 안채로 꺾어 주는 교통공간이면서 시선을 자연스레 받아주고 또한 차단하는 여유공간이다. 
그리고 남자가 쓰는 사랑마당과 안주인의 안마당을 이어 주면서도 완충시켜주는 중간영역이고, 지대가 낮은 사랑채 부분과 그보다 높은 안채 부분의 높이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주며 연결하는 매우 다목적 공간인 것이다. 또한 보기에도 훌륭하니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하나 된 기막힌 공간이다. 현대 주택의 설계에도 기꺼이 응용할 수 있는 멋들어진 전통공간 구성 기법이다.
정여창 고택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러 채의 한옥과 그에 딸린 마당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공간들의 변화와 표정에 감탄하게 된다. 여러 마당과 한옥들이 서로 만나기도 하고 다시 나누어지면서 사람의 움직임과 눈의 흐름을 잡아주기도 하고 또한 다른 공간으로 자연스레 이끌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여창 고택은 교과서 같은 사대부 집이다."(글 출처 : http://www.hamyang.org/jengyuchangkotak.htm)



 

아래채 쪽에서 본 안채 전경 (2012. 07.15.)

 

  안채 마당 모습  (2008. 07.27.)

 

 

 안채는 약 300여 년 전에 이 집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향한 사랑채와는 달리 남쪽을 향하여 틀어서 자리를 잡았다. 호방하게 전면이 열린 동쪽보다 햇살이 잘 들고, 아늑한 언덕과 냇가가 있는 남쪽인 옥계천 방향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채는 고택에서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으로, 여성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사랑채 뒤편에 위치하며, 중문(中門)과 담장으로 사랑채 영역과 구분되어 있어 외부의 시선이 직접 미치지 않는다.

안채의 처마와 기단 높이, 그리고 마당의 비례는 사랑채에 비해 다소 낮고 아늑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는 외부를 향한 공적 표현보다는 내부의 생활 편의와 안온함을 우선한 설계 의도를 반영한다. 안마당은 사랑마당보다 규모가 작고 사방이 건물과 담장으로 에워싸여 있어, 깊고 조용한 내밀감을 형성한다.


  ‘一’ 자형의 평면구조로 정면 7칸, 측면 1.5칸 규모의 안채 본채는 중앙에 두 칸짜리 대청마루를 두고 왼쪽으로 두 칸의 안방과 한 칸 반의 부엌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넌방을 두었다. 대청과 안방의 뒤쪽에는 툇마루를 길게 달아서 여성 전용의 별도의 후원을 조성하였고 그곳의 양지바른 곳에 장독대를 두었다. 
안채 마당은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ㅁ’ 자형의 공간과는 달리 4면의 모든 모퉁이 공간을 여유 있게 열어 놓아서 답답하지 않으면서 상당히 개방적이다. 안채 좌측 앞으로 조그만 대청이 딸린 아래채가 직각으로 자리 잡았고, 전면의 곳간채와 우측의 사랑채로 둘러싸인, 튼 ‘ㅁ’ 자형의 정갈한 안마당은 언제나 밝고 화사한 햇빛이 가득하다.  

 

 

 

   화재로 피해를 입었던 안채의 아래채 모습 (2004. 08.21.) 

 

 

 그런데 안채의 아래채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2003년도에 아래채의 일부가 불에 타는 방화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말끔하게 보수가 되었지만 2004년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아래채는 시커멓게 그을린 상태로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 당시, 함양에서는 방화로 추정되는 일련의 문화재 훼손 사건들이 있었다. 2003년 가을 화림동 계곡의 농월정이 완전히 불탄 데 이어, 2004년에는 안의에 있는 허삼둘 가옥이 두 번이나 상당한 화재 피해를 입었다. 일두 고택의 방화는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아래채만 일부 피해를 입고 신속히 진화된 적이 있었다.

 

2008년에, 국보 1호 숭례문과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서도 방화 사건이 있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우리의 긍지와 자존심이 한순간에 한 줌의 재로 날아갔다. 일부 몰지각한 개인의 소행이었지만, 문화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몰이해와 무관심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숭례문이 화재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TV로 지켜보던 그 날의 참담함이 지금도 생생한데, 벌써 우리의 관심 속에서 잊혀 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이다. 조상이 남겨 준 문화유산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선진국 진입을 운운하고 새 문화 창조를 외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고, 모래성을 쌓는 일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문화재란 그 시대의 생활과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정신과 기억을 송두리째 말살하는 방화 행위야말로 무엇보다도 중대한 범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반드시 일벌백계로 엄히 처벌하고, 다시는 이 땅에 문화재를 방화하는 어처구니없는 후진국형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적극적인 홍보와 함께, 보전과 관리에 필요한 제도적 보완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안채 마당 모습. 정면에 화재로부터 말끔히 복원된 아래채 모습이 보인다(2008. 07.27.)

 

 

 

 일두고택의 건축적 특성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다중 영역 구성(多重 領域 構成)'이다. 고택은 크게 사랑채 영역, 안채 영역, 사당 영역, 그리고 부속 공간 영역으로 나뉘며, 각 영역은 담장과 문으로 명확히 구분되면서도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인 배치는 남북 방향의 축을 중심으로, 앞쪽(남쪽)에 외부와 접하는 공간들을 두고, 뒤쪽(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배치되는 구조이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공간 이념 중 내외(內外) 구분과 공사(公私) 분리의 원칙이 주거 건축에 직접 적용된 결과이다. 외부 방문객은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채까지만 접근할 수 있었으며, 안채는 깊숙이 자리하여 외부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고택 전체를 두르는 높고 긴 토석담(土石담)은 내부 공간을 외부와 구별하는 경계이자 건축적 장치이다. 이 담장은 자연석과 흙을 섞어 쌓은 것으로, 위쪽에 기와를 얹어 마감하였으며, 오랜 세월 속에서도 견고하게 유지되어 고택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일두 고택은 창건 이후 17동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12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 뒤편, 북측 끝에는 일두 선생을 모신 단청을 입힌 불천위 사당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있는 곡간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상당한 크기로서 예사롭지 않은 규모에 속한다. 그리고 사랑채 옆, 낮은 담장 너머는 외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별당형 안사랑채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그밖에 일두 고택의 부속시설로는 화장실이 사랑채와 안채에 하나씩 있다. 사랑채의 측간은 최근에 방문객이 늘어남에 따라 두 칸짜리 규모로 새로 복원되었고, 안채의 측간은 여자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라 안채 곳간 뒤쪽의 은밀한 곳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치고, 한 칸 크기로 아주 작게 만들어져 있다. 담장의 출입구가 화장실 문과 바로 마주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고, 지붕도 낮고 전체적으로 아주 간단한 1칸의 규모로서 실용적이고도 귀여운 느낌을 준다.

 



   안채 후원의 귀여운 화장실(2017. 04.01.)

 

     일각문 안쪽의 중간마당. 좌측에 작은사랑과 그 앞의 임시 화장실이 보인다(2017. 04.01.)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임시 화장실이 한 군데 더 있다. 그 임시 화장실은 사랑채 좌측, 중간마당의 작은대청에 붙어 있는데, 긴 여물통과 그 위를 살짝 가린 판자벽으로 간단하게 만들어져 있다. 문화해설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랑채 술손님들은 작은대청에 선 채로 담장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소변을 보는 남성들만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개방적인 사랑채 화장실의 모습은 경북 봉화에 있는,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생가로 추정되고 있는 <계서당>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생리현상은 양반의 체통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예외로, 양해가 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을 구분하는 담장과 출입구 (2007. 07.07.)

 

 

일두고택은 전국적인 사대부 주택의 보편적 원칙을 따르면서도, 경상도 지역 특유의 건축적 특질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경상도 지역 전통 주택은 한반도 남부의 온난한 기후에 적응하여 개방적인 대청마루를 크게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배치에서 다른 지역보다 영역 구분이 명확하고 엄격한 특징을 보인다. 또한 기단을 비교적 높게 쌓아 습기를 차단하고 위계를 표현하는 방식도 이 지역 주택 건축의 공통된 특성이다.

 

 

    사랑채 정면에 <문헌세가>라는 현판이 빛난다 (2017. 04.01.)

 

 

 

 경상도 지역의 조선 중기 사대부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일두 고택의 사랑채 정면에는 <문헌세가文獻世家>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동방오현의 한 분으로서 문헌공으로 추앙된 정여창 선생을 기리는 후손들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이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 다섯 분을 말한다.

 정여창 선생의 사후에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100년에 걸친 피를 부르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를 통하여 기존 유림은 그 세력을 잃었고, 은거하던 신진 사대부들이 태동하게 된다. 그 신흥 사대부들은 당시에 사림오현士林五賢으로 추앙받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선생을 공자의 사당인 성균관 문묘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모시자는 운동을 일으킨다.

 유학을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광이었기에 오현을 선정하는 문제로 후학들 사이에 또다시 격론이 있었지만 광해군 시절인 1610년, 다섯 분의 문묘종사가 결정되고 나라에서 시호를 내렸는데 이때 정여창 선생에게 내려진 시호가 문헌공文獻公이었다.

 

 

    일두 선생 불천위 사당 모습 (2007. 07.07.)

 

 

 

 선생은 사후에 성리학의 대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지만 생전에는 당쟁으로 인해서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살다가 돌아가셨다. 1498년, 조선시대 4대 사화의 첫 사화인 무오사화에 스승인 김종직 선생과 함께 억울하게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살이를 떠났는데, 7년의 유배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결국 그곳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선생의 유해는 사후에 고향으로 모셔와 남계서원 뒷산에 묻혔지만 또다시 갑자사화의 회오리에 휘말려 무덤을 파헤치는 부관참시라는 끔찍한 변을 당했다. 그리고 이때 선생이 남긴 글과 문집들을 부인이 모두 불태워 버려서 소중한 유산과 기록들이 모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일두 선생과 동계 선생을 모신 남계서원 전경 (2008.07.27.)

 

 

 

 이후,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등극한 중종 임금 때에야 명예가 회복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현재,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와 남계서원을 비롯한 9개의 서원에서 정여창 선생을 모시고 추모하고 있다.

 

  경상도지역, 조선 중기 사대부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간직한 일두 고택은 예전부터, 사극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서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1987년 KBS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토지>와 <다모>의 촬영장소로 쓰였고, 이후로도 숱한 사극의 단골 촬영장소가 되었는데, 최근 2018년에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여주인공 고애신의 고향집으로도 출연했다. 아마 현재 연예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 한옥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근래에 들어 탐방객들도 갈수록 많이 늘어나서, 고택 입구에는 <일두홍보관>이 새로 조성되어 탐방객들에게 홍보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안채 담장 너머로 만발한 능소화(2007. 07.07.)

  



 

 나는 2004년 여름에 고건축 답사차 일두 고택을 처음 방문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정여창 선생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었다. 조선 500년을 대표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최고의 성리학자셨지만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학문의 성쇠도 시대적 요구나 유행에 따라서 부침을 거듭하는 것이겠지만, 첨단 과학문명과 자본주의의 배금사상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의 21세기는, 고리타분하면서 돈 안 된다고 여겨지는 성리학에는 별로 관심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문명과 자본주의는 그 부작용으로 수많은 폐단과 문제점을 야기 시켰고, 그래서 그 해법으로서 제시된 것이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으로서, 마침내 자본주의의 요구에 의하여 '인문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게 된 것이다.

'만물의 이치와 인간의 성품을 연구'하는 인문학이 성리학이라고 요약해 볼 때, 시대를 앞서가는 철학임이 증명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태껏 실용성이 떨어지고 진부하게만 여겨졌던 학문인 성리학과 그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제 다시금 조명을 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랑채 대청에 걸린<백세청풍> 현판 (2007. 07.07.)

 

 

 

  실천 유학자이자, 대쪽 같은 선비로 유명한 남명 조식 선생은 정여창 선생을 이렇게 평가했었다 한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함양 출신의 유학의 최고봉으로서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에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고, 우리나라 현인들 가운데 오직 이 분만이 거의 흠이 없는 분일 것이다!”

 

세상의 칭송과 평가들은 잠시 접어 두더라도, 정여창 선생의 고졸한 인품은 당신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생전에 수옹睡翁과 일두一蠹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수옹睡翁은 ‘졸고 있는 늙은이’라는 뜻이고,

일두一蠹는  '책 속의 좀벌레 한 마리'라는 뜻이다. 벼슬과 명예를 탐하는 대신, 평생 책 속에 파묻혀 학문에 몸을 바치겠다는 자기 선언이자 겸손의 표현이다. 이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가 추구했던 삶의 방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을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좀벌레 한 마리로 자평할 수 있는 그런 큰 도량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그것도 동방오현으로 추앙받는 대유학자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무한히 넓은 우주 속에서는 점 하나보다도 작은 벌레 같은 미미한 존재이며, 더욱이 우리의 일생 또한 그리 길지 않은 찰나의 순간임을, 선조들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스스로 배우게 된다. 그래서 항상 겸허하게 처신하고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배려한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성숙되고 함께 더불어 살만한 좋은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두 선생은 연산군 10년, 1504년 4월, 향년 54세에 유배지, 함경도 종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는데 그 장례에 대한 감동스런 일화가 전해져 온다. 당시 연산군 치세로 정치적 탄압이 극심했으나, 그의 동료, 제자들과 함경도 유생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 수습에 나섰는데, 함경도  종성에서 경남 함양까지 약 700리(약 2,700km)에 달하는 여정은 산맥과 강을 넘나드는 험로였다

 제자들은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관에 안치해 남쪽으로 옮겼는데운구 도중 지방 관리들이 이를 눈감아주거나 지역 주민들이 음식을 제공하며 도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스승의 몸을 고향 땅에 묻지 않으면 충의가 아니다"라는 신념으로 버텼다고 한다

이 운구 일화는 위험한 사화 국면에서도 성리학 정신을 실천한 '의로운 용기'로 평가되었고, 요즘 메가히트를 치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정신과도 일맥 맞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 함양 일두 고택 배치도 ]

 

[ 작성 : (주)건축사사무소 아라가야 ]

 

 

 

 


         -  2019년 07월  :  1차 수정 및 보완

-  2026년 04월 16일 :  2차 수정 및 보완

 

 

 

 

 

 

 안채 뒷뜰 (2026. 0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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