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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전통건축-10400. 함안 성산산성 — 아라가야의 터 위에 신라가 쌓은 목간의 보고 (202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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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성산산성

 

1. 개요 — 사적 제67호, 조남산 정상의 돌성

 

함안의 서북쪽에 있는 성산에 둘레 약 1.4km에 걸쳐 돌로 쌓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조남산성(造南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569번지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67호로 지정되었다.

해발 139.4m의 조남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북쪽에는 평야가 위치하며 멀리 낙동강이 바라다 보인다. 서북쪽에는 아라가야 산성인 봉산산성과 함께 아라가야 고분인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이 내려다 보인다. 해발 139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남쪽으로 펼쳐진 함안 들판과 북쪽의 낙동강 수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고을 이름마저 '가야읍'인 이 땅에서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을 얻은 산이 품은 성곽, 그것이 성산산성이다.

 

 

 

 

 

 

 

 

 

 

 

2. 구조와 축성 — 신라 산성 공학의 정수

 

발굴조사 결과 동문터와 남문터를 포함하여 안쪽과 바깥쪽 벽을 모두 돌로 쌓은 너비 8~9m, 잔존 높이 2~5m의 협축식(夾築式) 성벽이 확인되었다. 협축식이란 성벽 안팎을 모두 돌로 쌓고 그 사이를 흙과 돌로 채우는 방식으로, 단단함과 내구성을 모두 확보할 수 있는 고급 축성 기법이다.

 

성산산성의 발굴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부엽공법(敷葉工法)'의 발견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성산산성에 대한 제13차 발굴조사에서 동쪽 계곡을 가로지른 석축 성곽 안쪽을 따라 폭 15.2m에 달하는 거대한 방어용 제방을 쌓은 흔적을 찾아냈다. 이 제방을 쌓은 기본 원리는 고대 동아시아의 축제 공법 중 하나인 부엽공법이다. 성벽 안쪽으로 15m쯤에 나뭇가지로 치밀하게 엮은 울타리를 동·서로 2개 만들어 그 속에 나뭇가지와 잎, 풀 등을 다져 메우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홍수 때 계곡으로 쏟아지는 물의 압력을 현대식 댐의 원리로 막아낸 6세기 신라의 토목 기술이 성산산성 땅속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3. 아라가야인가, 신라인가 — 겹쳐진 두 역사

성산산성의 역사는 단층이 아니다.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17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6세기 중반에 신라에 의해 축성된 함안 지역의 치소성으로 밝혀졌다. 『여지도서』와 『함주지』에서 성산에 가야국 구허(舊墟)가 위치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아라가야 시기에 아라가야와 관련된 유적이 입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함주지』 고적조에는 "가야국의 구허(舊墟)로 군의 북쪽 5리 성산 위에 있다. 주위는 4,383척이며 지금도 성의 기초가 완연하다"라고 하여, 이곳을 아라가야의 옛터로 기록하였다.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22년조에는 "고신라가 아라 파사산에 축성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라고 하여, 561년에 신라가 축성하였다고 적었다.

 

성산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아라가야가 신라에 점령되었을 때 신라군에 맞서 싸우던 장군이 전쟁에 진 것을 원통해 하며 울면서 성산으로 들어갔는데 그 뒤부터는 장군을 본 사람도 없고 장군의 행적이나 사후의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아라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560년 무렵, 그 슬픈 패배의 기억이 전설로 굳어 산성 이름과 함께 전해 내려온다. 아라가야의 옛터 위에 정복자 신라가 새 성을 쌓았을 가능성, 그 역사의 중층이 성산산성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4. 목간의 보고 — 한국 고대사를 다시 쓰다

성산산성이 고고학계와 역사학계 전체에서 최고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단연 목간(木簡) 때문이다. 함안 성산산성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1992~2015년까지 연차적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지금까지 국내 목간 출토량의 절반에 가까운 309점이 출토되었다.

길이 6.5~23.7cm, 너비 1.6~4.4cm의 나무쪽에 먹으로 쓴 목간에서는 신라시대의 지명이나 관등과 함께 피(稗)와 소금(鹽)과 같은 물건 이름도 보인다. 이 목간들은 가야 멸망전이 종료된 직후, 가야를 최종 병합한 신라에서 점령지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6세기 무렵 작성한 것이다.

 

목간의 내용은 단순한 물자 기록을 넘어선다. '임자년(壬子年)'이 적힌 목간은 산성의 축조기술과 출토유물을 고려할 때 532년 또는 592년으로 볼 수 있어 성산산성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문서목간은 지방 촌주가 법 집행의 잘못을 중앙(경주)에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어 큰 관심을 모았다.

주보돈 교수는 "성산산성 목간은 신라의 촌락 지배 강화와 함께 기존 외위 체계와 성립 과정, 이에 내재한 의미를 풀 실마리를 제공한다"며 "신라가 새롭게 편입한 지역과 주민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용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문자 기록이 극히 드문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성산산성 목간 309점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료다.

 

 

 

 

 

 

 

 

 

 

5. 오늘의 성산산성 — 역사 위를 걷는 황톳길

오늘날 성산산성은 함안 시민들의 산책 명소이자 역사 탐방지로 사랑받고 있다. 해발 139m의 나지막한 조남산을 따라 조성된 황톳길과 둘레길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안하게 걷기에 알맞다. 성벽 위에 서면 북쪽으로 함안 들판과 낙동강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서북쪽으로는 아라가야 왕들이 잠든 말이산 고분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1,500년 전 신라 병사들이 지키던 그 자리에서, 지금은 아이들이 뛰놀고 어른들이 역사를 되새기며 걷는다.

성산산성은 신라가 가야 지역을 복속한 후 어떠한 방식으로 지방 지배를 실시하였는지를 알려 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살아있는 역사 교실이다. 아라가야의 슬픈 전설이 깃든 땅, 신라의 정복 행정이 목간에 새겨진 땅, 그리고 오늘날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땅 — 함안 성산산성은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품고 조남산 정상에 조용히 서 있다.

 

 

 

 

 

 



 

 

 

 

성산산성 출토 아라홍련(阿羅紅蓮) — 700년의 잠에서 깨어난 고려의 꽃

 

씨앗 세 알, 땅속 4~5미터 — 기적의 발굴

 

2009년 5월, 함안 성산산성 발굴 현장. 연못 유적지를 조심스럽게 파헤치던 발굴단의 손끝에 작고 단단한 씨앗들이 걸렸다. 가야문화재연구소가 성산산성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옛 연못의 퇴적층으로 추정되는 지하 4~5미터의 토층을 발굴하던 중 10개의 연꽃 씨앗이 나왔다.

그 씨앗들의 나이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10개의 연꽃 씨앗 중에서 표본 2개를 골라 함안군이 대전과학단지 내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중헌 박사에게 의뢰한 결과, 1개는 지금으로부터 650년 전, 나머지 1개는 760년 전의 고려시대 것으로 확인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감정 결과 650~760년 전 고려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신기하게도 발굴 4일 후 씨앗 한 개가 발아하여 그로부터 1년 뒤 첫 꽃을 피웠다.

발굴 나흘 만에 발아. 700년의 잠에서 깨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나흘이었다. 고려의 연꽃이 조선을 건너뛰고, 일제강점기를 건너뛰고, 현대의 발굴팀 손에서 비로소 눈을 뜬 것이다.

아라홍련이라는 이름

함안 지역은 그 옛날 아라가야. 그래서 이 연꽃은 '아라홍련'이란 이름을 얻었다. 아라가야(阿羅伽倻), 즉 함안의 옛 이름 '아라(阿羅)'에 붉은 연꽃 '홍련(紅蓮)'을 합쳤다. 단순한 명명이 아니다. 가야의 땅, 신라가 쌓은 성, 고려의 씨앗, 현대의 부활 — 이 모든 시간의 층위가 '아라홍련'이라는 네 글자 안에 압축돼 있다.

함안군은 700여 년을 땅속에 묻혀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아라홍련을 상표로 등록·관리 해오고 있다. 종자 보존을 위해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내 종자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에 종자를 기탁한 바 있다. 영원히 사라질 뻔한 고려의 연꽃이 이제는 미래 세대를 위해 가장 안전한 저장소에 보관되는 것이다.

 

 

 

 

 

꽃의 형태 — 고려 탱화에서 걸어 나온 꽃

아라홍련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연꽃과 다르다. 아라홍련은 꽃잎의 하단이 백색, 중단은 선홍색, 끝은 홍색으로 현대의 연꽃에 비해 길이가 길고 색깔이 엷어 고려시대의 불교 탱화에서 볼 수 있는 연꽃의 형태와 색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건너뛰면서 지금의 다양한 연꽃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유 연꽃의 전통적인 특징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현대의 연꽃들이 수백 년간 자연교배와 품종 개량을 거치며 변해온 반면, 아라홍련은 고려 시대 연못 바닥 깊은 곳에서 그 변화를 비껴간 채 원형을 보존했다.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며, 고려 불화 속 부처님 대좌(臺座)를 장식하던 바로 그 연꽃의 모습이다.

700년을 버틴 비밀 — 천연 종자저장소

연꽃 씨앗이 700년을 살아있을 수 있었던 비밀은 성산산성의 지형과 환경에 있다. 높은 산에 있는 성산산성 내부의 온도와 습도가 '천연 종자저장소'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산성 내부의 연못 퇴적층은 혐기성(嫌氣性) 환경, 즉 산소가 거의 없는 상태였고, 이 조건이 씨앗의 대사 작용을 극도로 억제해 수백 년의 휴면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연꽃 씨앗의 껍질은 매우 단단하고 치밀해 수분과 산소의 침투를 완벽하게 차단한다. 혐기성 환경의 진흙 속에서 씨앗의 대사 작용이 극도로 억제된 채 휴면 상태가 지속된다. 아라가야의 역사를 간직한 성산산성이 의도치 않게 고려의 연꽃 씨앗을 700년간 완벽하게 보존한 셈이다.

함안연꽃테마파크 — 부활을 기념하는 10만㎡의 정원

함안군은 함안의 옛 이름을 따서 아라홍련이라 하고, 2010년부터 3년간에 걸쳐 가야읍에 10만 9800㎡에 달하는 유수지를 활용해 생태공원을 조성하였다. 축구장 15개를 합쳐 놓은 듯한 10만 9800㎡의 광활한 늪지에서 홍련과 백련이 매년 여름 장관을 이룬다.

매년 7월경 함안박물관에서 아라홍련이 개화한다. 7월 말이 절정기로, 이 시기 함안연꽃테마파크는 전국에서 연꽃을 보러 온 관광객들로 가득 찬다. 아라홍련이 함안을 벗어나 외부에서 소개된 것은 국립세종수목원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다. 고려의 씨앗은 이제 함안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에서 그 존재를 알리고 있다.

 

성산산성 목간이 1,500년 전 신라의 행정 문서를 담고 있다면, 아라홍련은 700년 전 고려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담고 있다. 발굴팀의 손끝에 걸린 작은 씨앗 세 알이, 과학의 힘과 함안의 정성으로 다시 꽃이 되었다. 성산산성은 그렇게 목간과 연꽃, 두 가지 기적을 세상에 돌려주었다.

 

 

 

 

함안 아라홍련 - 7 (2016. 07. 03.) - 당신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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