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청 남사마을(남사예담촌)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 단성나들목을 빠져나와
지리산 자락을 향해 5분 남짓 달리다 보면, 국도변에 문득 즐비한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낯선 방문객의 눈에도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이 단번에 드는 이 마을이
바로 '남사예담촌',
우리에게는 산청 남사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곳이다.
'예담(禮談)'이라는 이름에는 두 겹의 뜻이 담겨 있다.
표면적으로는 오래된 흙돌담 마을을 가리키지만,
그 안쪽으로는 담장 너머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소망이 조용히 흐른다.
남사마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이어진 산줄기와
그 사이를 흐르는 남사천이 어우러져 마치 태극 모양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서쪽의 니구산(尼丘山) 산줄기가 북쪽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당산(堂山)이 동쪽으로 뻗어,
그 사이에 마을이 자리한다.
니구산을 수룡의 머리, 당산을 암룡의 꼬리로 보아
한 쌍의 암수 용이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雙龍交遘)의 형세로 읽으며,
이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생산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남사천이 마을을 휘감아 도는 모양은 초승달형, 행주형 등에도 비유된다.
이처럼 뛰어난 지세가 인정받아 옛사람들은 이 마을을 천혜의 명당으로 여겼다.
용이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의 형상을 한 이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마을 지형을 반달 모양으로 생각하여 마을 중심부에는 그 무엇도 채우지 않고
우물을 파는 것도 금하여 왔다고 한다.
실제로 초승달 안쪽으로 파고든 부분은 집이나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고,
외지인이 음식점을 내려 이 터를 사들이려 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막아냈다고 한다.
달이 차면 기운다는 옛 이치를 실천으로 지켜온
공동체 정신이 돋보이는 일화다.








마을의 상징수인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남사예담촌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나란히 서는 전통마을로,
마을의 역사는 500년에 달한다.
원래 250여 채에 달하는 고택들이 있었지만 6·25 전쟁으로 여럿이 소실되어
40여 채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현재 성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지만,
밀양 박씨, 진양 하씨, 연일 정씨 등도 적지 않은 호수를 이루고 있다.
보통 한 성씨가 집성촌을 이룬 여느 고가 마을과 달리,
이곳은 여러 성씨가 대를 이어 살아온 독특한 내력이 있다.
각기 학문과 벼슬로 뛰어난 조상을 모신 여러 문중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온 것이 남사마을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마을 출신의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학문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공자가 태어난 니구산과 사수를 이곳 지명에 빗댈 만큼 예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했다.
선비 정신이 마을 구석구석에 뿌리내린 까닭이다.






1920년대 지어진 최씨고가




이사재


남사마을은 아름다운 경관만이 아니라 근현대의 역사도 품고 있다.
유림 대표 137인 중 대표자인 면우 곽종석 선생은
산청 태생으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내려 했으며,
이를 파리장서라 부른다.
마을에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살아생전 사용하던 서적과 유품들이 전시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담장 너머 선비의 기상이란 단지 학문의 기상만이 아니라,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붓을 들고 일어선 저항의 정신이기도 했다.
국보 제324호인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 이제에게 내린 공신 교서로,
조선 시대 최초 공신 교서의 형식을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큰 자료다.
원본은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을이 품은 역사의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유림 대표 137인 중 대표자인 면우 곽종석 선생 생가


유림독립기념관





이동서당


기산국악당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영모각

고택만큼이나 인상 깊은 것이
마을 곳곳에 서 있는 오래된 나무들이다.
사양정사 앞쪽에는 수령 620년의 감나무가 있는데,
이는 고려 말 원정공 하즙의 손자 하연이 어릴 때
어머니께 홍시를 드리기 위해 심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다.
토종 반시감으로 산청 곶감의 원종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감이 열리고 있다.
마을의 상징수인 수령 약 300년의 회화나무와 600년 된 감나무,
700년 된 매화나무 등 노거수들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사효재 앞 향나무는 제례 때 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나무들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효심과 믿음, 그리고 오랜 세월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살아 있는 문화재다.


사효제 향나무






남사마을의 얼굴은 단연 담장이다.
마을에는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된 총 3.3km의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이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과 1900년대 초에 지어진 40여 채의 전통 한옥들이
구불구불 흙담과 돌담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양반들이 살았던 큰 고택에는 흙과 돌로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올린 높은 토담이,
서민들이 살았던 가옥에는 나지막한 돌담이 남아 있어 담장 하나만 보아도
옛 신분 질서와 생활 문화를 읽을 수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은 이씨고가다.
18세기에 지어진 이씨고가는 안채, 사랑채, 외양간채, 곳간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공간을 넓게 사용하여
개방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으며,
조선 후기 남부 지방 상류층 저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고택 앞에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한 두 그루의 부부 회화나무가
아치를 이루며 서 있다.
최씨고가는 사대부 집을 모방하되,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는 화려함에 더 비중을 두었고
한옥 특유의 소박함보다는 거주하기 좋은 실용적인 구조로 지어졌다.
사랑채 양쪽에 중문을 두고 안채가 있는 마당은 외부와 분리되어 있어
유교적인 격식을 강조하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남사마을 한옥을 대표하는 고택이다.
정씨고가 앞쪽에 자리한 사양정사(泗陽精舍)도 빼놓을 수 없다.
사양정사는 1920년대 유학자 정제용의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로,
앞면 7칸의 팔작지붕을 갖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사양정사(泗陽精舍)

사양정사 앞 수령 620년의 감나무



매화는 예부터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로,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는 선비 정신을 상징하기에,
조선 유학자들은 매화를 각별히 사랑했다.
선비들은 마당이나 뒷산, 텃밭 가에 매화나무를 심어놓고 그윽한 향기를 즐겼다.
남사마을은 학문의 고장답게 이러한 전통이 특히 뿌리 깊게 남아 있어,
매화의 고목이 많기로도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학문의 뜻을 기리며 선비들이 심은 매화는 그 고고한 자태를 오랜 시간 기리며
오늘까지도 피어나고 있다.
남사마을 매화 이야기의 중심에는 단연 '원정매(元正梅)'가 있다.
원정매는 고려 말 원정공 하즙 선생이 심은 것으로,
그의 시호가 원정이었던 데서 이름이 비롯됐다.
원정공의 고택이 있는 남사예담촌 하씨고가 마당에 자리하고 있으며,
'산청 3매' 중 가장 오래된 수령 680여 년을 자랑한다.
원정매는 수령 680여 년에 이르지만,
이 고매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2007년 동사하였다.
그런데 몇 년 후 뿌리 쪽에서 곁가지 하나가 살아나 간신히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하더니,
해마다 쑥쑥 자라 현재는 풍성한 꽃을 피우는 나무가 되었다
죽어서도 다시 살아난 이 매화는 어쩌면 선비 정신 그 자체의 은유처럼 보인다.
쓰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기개,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생명력.
원정매 하나만으로도
남사마을은 충분히 매화 고장이라 불릴 만하지만,
마을 안에는 저마다 사연을 품은 매화나무들이 더 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시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박씨매,
유일한 백매화로 알려진 이씨매,
약 150년 된 최씨매, 가장 늦게 피는 정씨매가 마을 곳곳에서 봄을 알린다.
또한 독립운동가 곽종석을 기리는 면우매,
국악운동가 박헌봉을 기리는 기산매까지 더하면
마을 안에는 총 7그루의 의미 있는 매화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성씨마다 심고, 성씨마다 피어나는 이 매화들은
각기 다른 문중이 한데 어울려 살아온 남사마을의
역사와 닮아 있다.

원정매



하씨고가



이씨매



정씨매와 선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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