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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풍경 - (28) 부르키나파소 간도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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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의 지식카페>주민이 기술 배워가며 함께 지은 학교… 교육·고용 동시에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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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케레는 3만 달러의 기금을 모아 고향에 제대로 된 학교를 지어 주었다. 큰 지붕이 공기를 순환시켜 주고 비에 젖지 않게 진흙 벽돌 벽을 보호해 준다. @Erik-Jan Ouwerkerk

 


■ 건축과 일상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풍경 - (28) 부르키나파소 간도 초등학교


수도·전기도 없던 마을 출신의 유명 건축가… 고향에 보답하고자 전통적 진흙 벽돌로 건축
여인들은 물항아리 7㎞ 나르고 아이들은 매일 돌 하나씩 들고 등교… 노하우 터득한 주민들 건설업 종사자로

 
건축물이 지어지면 그때부터 사회의 자산이 된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생활을 규정한다. 이 ‘아주 오랫동안’이 건축물에 주어진 미래다. 따라서 건축물을 짓는 것은 미래를 짓는 것이다. 학교를 짓는 것은 교육의 미래를 짓는 것이고, 청사를 짓는 것은 행정의 미래를 짓는 것이다. 이것은 건축을 멋지게 포장하는 말이 아니다. 또 현실을 떠난 추상적인 이론도 결코 아니다. 몹시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고향을 떠나 다행히도 좋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한 건축가가 공동체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학교 건축물로 자기 고향의 미래를 이렇게 지어갔다.

서아프리카의 나라 부르키나파소는 아프리카에서도 생활 수준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다. 문맹률이 75%며 아이들의 절반 정도만 학교에 다닌다. 간도 마을은 수도 와가두구에서 남동쪽으로 200㎞나 떨어진 곳에 있다. 인구는 3000명이며, 수도나 전기가 없이 깡통이나 짚으로 만든 지붕을 얹은 진흙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 마을을 바꾸고 이웃 마을에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초등학교 하나가 생겼다. 그래 봐야 커다란 지붕 아래 실내 공간을 사이에 두고 교실 3개가 떨어져 있는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초등학교는 어렸을 때 자기가 받은 것보다는 나은 교육의 기회를 고향의 아이들에게 주고자 한 건축가의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는 유명한 건축가 디베도 프란시스 케레였다. 촌장이었던 아버지는 장남인 케레가 글을 배워서 자기에게 온 편지를 읽어주기를 바라며 13㎞나 떨어진 도시의 초등학교에 보냈다. 자기 마을에는 초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학교에 간 아이는 케레였다.

너무 멀어 걸어서 학교를 다녀오면 녹초가 됐지만, 그는 그때 다닌 초등학교를 이렇게 묘사했다. “교실이라 부르는 방에는 160명이나 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열을 가두는 지붕 때문에 40도까지 올라갔지요. 이 방은 빵 굽는 방이지 누군가를 가르치는 방이 아니었어요.”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목수로 일하다가 20세에 장학생으로 독일의 목공기술학교로 유학했고 25세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이윽고 그는 30세에 베를린공대에 입학해서 건축을 공부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 마을에서 해외 유학을 간 첫 번째 학생이 됐다.

그는 건축을 공부하면서 자기가 간 길을 다음 세대가 따라갈 수 있게 기회를 주어 어떻게든 자기를 받쳐준 가족과 공동체에 보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프리카 전통 마을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 전체의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나와 다른 사회에서 생활하게 되면, 그 사람이 없어졌으니 그 대신 누군가가 뭔가를 공동체에 더 보충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학교를 만들어 베를린에 가서 배운 것을 공동체에 전하고자 했습니다.”

건축학과 대학생이었던 케레는 고향의 아이들을 위한 초등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학업을 마치기 전인데도 동료 학생들과 함께 ‘간도를 위한 학교 벽돌’이라는 협회를 독일에 만들어 3만 달러의 기금을 모았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이 마을로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학교를 짓고자 사람들과 논의했다.

케레는 현지의 장인과 주민이 협력해 만들 수 있는 학교를 설계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케레가 가져온 도면을 보고 실망했다. 모두 유럽식의 콘크리트나 철골구조로 된 초등학교를 마을에 지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유명한 베를린공대에서 배웠다는 사람이 고작 우기에 빗물에 무너져 버릴 진흙 벽돌로, 그것도 마을의 모든 사람이 함께 만들어 쌓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작고 어두운 진흙집에서 살던 마을 사람들에게 진흙 벽돌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쓰는 뒤떨어진 재료였다. 이 나라에 지어진 학교는 모두 비용이 많이 드는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마치 사바나 밖의 사막 주변처럼 삭막했고, 기후에 맞지 않아 방 안이 무덥고 많은 전기를 소모했다.

열심히 설득한 보람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학교를 짓는 전 과정에 참여해 주었다. 공사하는 방법을 배워가면서 이 집을 지어갔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도 모래 위에 그린 계획 도면의 내용을 잘 이해해 주었다. 철근을 절단하고 용접해서 트러스를 조립하고 그 위에 비로부터 진흙 벽돌 벽을 보호해 줄 커다란 강판 지붕을 올린 것은 현지 장인들이었다. 트러스는 밑에 있는 교실과 지붕 사이에서 공기를 순환시켜 건물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가장 흔한 재료인 진흙 벽돌을 쌓아 무더운 기후에 대응했다. 이 건물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잘 서 있다.

남자들은 당나귀 수레로 건설 현장으로 돌을 운반했고, 흙을 파고 체에 치고 시멘트와 물을 섞어 진흙 벽돌을 만들었다. 여자들은 건설에 필요한 물을 담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7㎞가 넘는 길을 운반해 주었다. 여자들은 땅이 단단해지도록 춤을 췄고, 내부 마감도 도맡아 주었다. 아이들은 아침 일찍이 등교할 때 1년 동안 매일 기초에 놓일 돌을 하나씩 날라 주었다. 어떤 때는 오전 7시 전에 와 있는 아이들도 있었고, 자기 몸집보다 더 무거운 돌을 들고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마을 사무소는 강도 높은 진흙 벽돌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고 제조 방법을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전통적으로 이 마을 사람들은 살림집을 짓거나 고칠 때 모두 함께했으므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나서 공동체의 일에 기여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3만 달러라는 한정된 예산으로 초등학교를 만드느라 많은 마을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것은 사실이나, 고향에 학교 건물 하나 짓는 것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학교 만들기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건설 기술을 습득하고, 다른 학교를 짓는 일에도 나설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진흙 벽돌이라는 로테크 덕분에 주민들은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고, 지속 가능한 기술도 늘어갔다. 유럽에서 가지고 온 태양광 패널 이외에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그래야 마을 사람들이 공법을 익히고, 집이 노후하더라도 스스로 보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속담대로 케레는 학교 만들기를 배우게 하기 위해 학교를 만들었다.

케레는 학교 건설에 관련된 모든 도면을 마을에 남기고, CAD 데이터를 웹에 올려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이웃의 두 마을도 이런 도움을 받아 자기들의 학교를 지을 수 있었다. 지역 당국은 이 프로젝트의 가치를 인정해 교사를 보내주고, 새로운 초등학교를 건설할 때 간도초의 건설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고용해 지도자로 삼았다. 이렇게 학교 건설에 종사한 사람들은 그 기술을 전용해 집을 보수하거나 다른 공공시설을 건설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이렇게 완성된 초등학교는 낮에는 시원하고 비와 바람에도 강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케레의 디자인을 이해하고 좋아했다. ‘벽은 아주 아름답고 기분 좋게 시원하며 지붕은 날듯이 떠 있는’ 아프리카의 이 아름다운 학교 건물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이 전개되는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얻어낸 결과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더 발전시키고 그 결과를 지켜낼 수 있다.”

간도초에서는 시원해진 공기가 건물 안팎을 순환하게 했다. 그러려면 지역에서 입수 가능한 재료를 숙련되지 못한 노동자가 가용할 수 있어야 했다. 이 건물로 다른 마을에 학교가 세워지게 됐고, 도서관도 세워졌으며 워크숍 등의 프로젝트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지속 가능한 건축이란 에너지 하나를 절약하는 건축이 아니다. 건축가는 벽·문·창문·지붕을 디자인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소중한 가치를 보여줄 수 있다. 지역의 잠재력을 살려 공동체의 모든 이에게 행복감과 자신감을 북돋워 주어 더 나은 미래를 보여주는 건축이 지속 가능한 건축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학교를 짓는 전 과정에 참여했다. @Erik-Jan Ouwerkerk


하이데거는 “거주할 수 있을 때에만 지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검은 숲’이라는 뜻의 슈바르츠발트의 농가를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집의 형태나 나무를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하이데거는 건축가가 아닌 농가에 사는 농부 자신이 이 농가는 살고자 스스로 지은 집이라는 것, 그래서 사는 것과 짓는 것이 같은 집을 이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이처럼 짓기와 거주하기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하이데거의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남이 지어준 집을 사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도초를 지은 케레와 마을 사람들을 보면 하이데거의 이 말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쉽다. 건물에 사람이 거주하게 되면 그것으로 건축이 정말 그들에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사람이 거주하려고 자기 집을 스스로, 그것도 자연에 적합하게 지을 수 있을 때 제대로 거주할 수 있다. 자신들의 집을 스스로 짓는 그 행위가 이렇게 중요하다.

간도초는 건축적 담론을 넘어 교육을 촉진하고 시민의 책임을 키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다. 120명으로 설계됐던 이 학교의 학생이 350명으로 늘어 150명이 대기하고 있기에 이르렀다. 이에 2007년에는 교사와 가족이 살 주택 6채를 지었고, 2008년에는 700명의 학생을 가르칠 수 있게 됐으며 여자아이들도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건물을 증축했다. 이 증축 건물에는 마을의 누구에게나 개방된 타원형의 도서관도 있다. 도서관 지붕은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토기를 반으로 잘라 천장에 얹어 빛도 주고 공기도 순환하게 만들었다.

간도와 이웃하는 마을에서 초등학교 학생이 많이 졸업하게 돼 1000명의 학생이 다니는 중학교도 짓게 됐다. 중학교를 지으니 공동체가 만나고 회합하는 장소도 얻게 된 셈이 됐다. 건물로 교육을 짓는 일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케레는 2012년에 간도 마을의 300명 회원에게 농업, 물 관리, 임업을 가르치고 곡물 창고도 제공하는 여성회관도 완성했다. 그리고 이어서 어린이들과 청장년층의 어른들을 위한 교육 시설도 짓고자 하고 있다. 건물이 늘어나니 이들의 미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건축물을 짓는 것은 미래를 짓는 것이다.

2004년 케레는 39세에 베를린공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등을 거쳐 뮌헨공대 교수로 있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인 간도초의 프로젝트로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건축물에 주는 ‘아가 칸 건축상(2004)’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건축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 케레는 이렇게 말한다. “교육이 없으면 개발은 하나의 꿈이다.”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 용어설명

하이데거와 건축 :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거의 평생을 출생지에서 멀지 않은 슈바르츠발트(검은 숲)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하이데거는 1951년 다름슈타트의 건축가들 회의에 초청돼 강연회 ‘짓기·거주하기·각하기(bauen·wonhnen·enken)’에서 ‘짓기(세우는 것·bauen)’에 해당하는 독일어의 옛말 ‘buan(존재하다)’으로 거슬러 올라가 짓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같은 어원임을 밝히면서, 사람이 집이나 어떤 도구를 ‘짓는 것’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 거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짓는 것은 곧 존재하는 것이다.
 

출처 - <김광현의 지식카페>주민이 기술 배워가며 함께 지은 학교… 교육·고용 동시에 쌓다 :: 문화일보 mun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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